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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파악할 사항은 위만조선의 무덤,토기,중심지에 대한 논증이다.바다에 던졌다는걸로 보아 이 때 수도의 위치가 바다와 인접하였다고 추정된다.
또 왕이 두눌원으로 사냥나갔다고 적는데.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본기에 동천왕이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자신을 지켜준 이들에게
압록원,두눌하원을 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압록원은 압록강의 상류. 두눌하원은 자강도 독로강 유역으로 비정한다.
놀랍게도 이병도는 동천왕이 천도한 왕검성(평양)을 자강도 강계 지방으로 비정했다.
이형구 교수는 위만조선의 무역 형태에 대해서 한반도 북쪽에 지리적인 요충지에 자리잡아 그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중심지 무역을 전개하면서 막대한 흑자를 보았다고 보며 당시의 무역로는 명도전의 출토지로 보아
난평-요양-무순-위원, 강계-평양이 될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산둥 반도를 통하는 바닷길이 있었다고 추정하였다.
자강도 강계가 명도전의 교역 통로 중간에 해당되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의 자강도에 위만조선 중심지 왕검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곳이 바로 '험독'으로 불렸고
한무제 당시 한나라는 이곳을 '현도'라고 불렀다. 험독,현도는 발음이 비슷하여 같다고 볼 수 있다.
한나라는 1년에 걸친 전쟁 끝에 이간계까지 동원하여 겨우 왕검성을 함락시킨다. 자력이 아닌, 내부의 분열 덕분에
겨우 함락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왕검성에 군현을 설치하여 그 곳을 어떻게 하였다느니 뭐니하는 기록은 중국 기록들에서 자취를 감추게된다.
그리고 한무제는 위만조선 정벌에 나섰던 장군들을 참수하거나 직위 해제시킨다.
"좌장군을 불러들여 그가 오자 공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긋나게 한 죄로 (참수하여)
저잣거리에 조리돌렸다.
누선장군도 병사를 거느리고 열구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도 제멋대로
먼저 군사를 풀어 많은 병사들을 잃어버렸으므로 주살함이 마땅하나 벌금을 받고 서인으로 삼았다." -사기 조선열전
집안 오도령구문 적석묘는 당시 압록강 중류유역을 대표하는 적석묘 유적이다.
비파형동검문화의 후기단계에 해당하는 이러한 유적들은 곧바로 연나라의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위만조선 사회로 나아가는 토대를 이룩하게 된다.
압록강 중류로 대피한 진번의 적석묘 집단은 압록강 중류유역에 넓게 자리하면서 많은 집단으로 나뉘게 되고,
이러한 집단들은 그 세력의 강함과 약함에 따라 점점 더 큰 집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고구려 건국을 구성한 5부족을
“∼나(那)”라 칭하는데 이 “나집단”은 소집단이 뭉쳐서 이루어진 대집단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기원전 3∼2세기 경 압록강 중류유역은 이러한 집단들이 쟁투를 위하여 힘을 축적하는 현상이 발생하였고,
이러한 것은 고고학적인 현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 집단의 고고학적 양상을 보면 고고학적으로 '무기단적석묘' 단계로 확인되며
적석묘의 가장 이른 형식인 이 '무기단적석'묘는 압록강 중 , 상류와 청천강 상류지역에 분포하고있다,
그러므로 적석묘는 대체로 비파형동검문화와 세형동검문화 과도기의 청동단검묘에서 기원하여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본격적으로 축조되었다.
즉 이들은 이미 철기 사회로 진입하였고 전국시대,진,한을 거쳐 중국과 교류를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고
이들 문화의 시기는 위만조선 시기와 겹쳐지고 있다.
이 적석묘 집단들은 기원전 3세기 이래로 단계적으로 무덤의 형식을 변화시켜
가면서 발전해가고 있었다. 또한 여러 개의 “나집단”들이 쟁투하면서 군사적 역량이 매우 높아져 있었으며,
기원전 2세기 초에는 왕을 칭할 정도로까지 발전한다.
여기서 '기원전 2세기 초'라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바로 이 때는 기원전 195년 위만조선 성립 시기가 아니던가.....!
학계는 이들 집단이 기원전 2세기 중엽경에 '구려'라는 연맹체를 이루었다고 파악하고 이들은 '원고구려사회'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구려이니 졸본부여이니 원고구려이니하는 연맹체는 중국 사서 어디에서도 등장하지않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초기 고구려 신화에서만 등장하는 가상의 이름일 뿐이다.
이것은 위만조선 연맹체라고 보아야 맞다.
이 압록강 중류의 무기단적석묘 문화 단계에서 형성된 것이 바로 자강도 노남리에서 형성된 노남리형 토기로
학계는 이것을 원고구려사회의 최초 토기라고 보지만 이것은 위만조선의 토기라고 불려야 맞다.
노남리 토기는 전국 말기,한대 초기 철기문화와 회도의 영향 + 고조선의 미송리토기 문화가 합쳐져
형성된 토기다. 외래적인 요소와 고유의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노남리 토기의 형성 시점은 기원전 200년경으로 위만조선의 형성 시기와 일치한다.
노남리 유적에선 집자리와 야철지가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철기들은 철촉,철부, 띠고리, 송곳, 낚시바늘 등
한나라 시대 이래의 단조철기들 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청동기 문화를 벗어나 철기 사회로 진입하였음을 말해준다.
노남리형토기의 분포지역은 환인,집안 지역,압록강 중류,한반도 북부,태자하 상류 지역에 걸쳐있어
위만조선의 광범위한 영토를 알 수 있다.
고구려의 특징적인 묘제인 적석총의 등장 시점은 역시 노 남리형토기와 비슷한 시기이다.
"노남리토기는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유적의 윗층에서 출토된 토기들을 표식으로 한다.
노남리토기의 특 징을 우선 제작기술적인 면에서 보면 이전의 청동기시대이래의 토기들의 모래 섞인
태토와 달리 고운 점토로만 구성된 泥質이라 는 점과 아울러 표면을 磨硏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제작기술상의 특징은 전술한 것처럼 초기철기문화와 함께 들어 온 중국의 전국말-한대의
灰陶의 영향으로 보인다.
다음, 형태상의 특징은 종방향 또는 횡방향으로 붙은 橋狀把手이다. 이러한 형태의 손잡이는 거슬러 올라 가면
청동기시대의 공 귀리유형 및 미송리형토기에 그 연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형적인 측면에서 보면
노남리형토기의 특징은 외래적이기 보다는 고유의 지역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러한 지역 전통과 관련하여 磨硏 技法과 같은 제작기술도
이미 미송리형토기에 그것이 보이고 있어 노남리형토기의 형성 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은 미송리형토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니질의 태토는 분명히 전국말-한대의 회도와
관 련된 것으로 보이므로 결국 노남리형토기의 형성 이면에는 초기철기와 더불어 나타난 새로운 제작기술과
재래의 형태적인 요소가 함께 작용하고 있었던 것오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高句麗土器의 形成에 대하여 - 朴淳發(忠南大 考古學) http://mahan.wonkwang.ac.kr/source/k16.htm
"그렇다면 이러한 노남리형토기의 형성시점은 구체적으로 언제로 비정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북한 학계의 견해는 기원전 2세기 경으로 보는 것(정찬영1973 : 40-41)과 기원전 3세기로 보는 것(리창언1991)로
나뉘어 진다.
기원전 3세기로 보는 견해의 근거는 노남리형토기가 明刀錢과 공반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나
철기의 내용으로 보는 한 이러한 연대관은 너무 올려 보는 것으로 판단된다.
노남리유적은 청동기문화층인 아래층과 노남리형토기가 나오는 윗층으로 구분되는데 윗층문화에 속 하는
유구는
집자리와 야철지가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철기들은 철촉,철부, 띠고리, 송곳, 낚시바늘 등
漢代 이래의 단조철기들 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의 다수의 유적에서는 명도전은 흔히 半兩錢,
五銖錢 등과도
공반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명도 전만을 근거로 연대를 올리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해 최근 淸原縣 南口前 大南溝 石棺墓( 達 張正岩1989 : 144-145)등에서 출토된 토기가 주목된다.
여기의 토기는 노남 리형토기의 특징들인 니질태토, 마연 등의 기술적인 요소와 더불어 縱耳의 교상파수가 달린
有頸壺 등 형태적인 요소들이 모두 나타나고 있어 분명한 고구려토기들이다.
이 석관묘의 연대에 대해서 보고자들은 戰國末-漢初로 비정하고 있어 대략 기원전 200 년경으로 볼 수 있다.
이 연대관 역시 분명한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현재의 자료로 보는 한 노남리형토기의
정확한 성립시점을 特定하기는 어렵다.
필자는 이러한 검토내용을 염두에 두고 잠정적으로 기원전 200년경을 노남리형토기의 등장 始點 으로 보고자 한다."
-高句麗土器의 形成에 대하여 - 朴淳發(忠南大 考古學) http://mahan.wonkwang.ac.kr/source/k16.htm
"한편 노남리형토기의 분포지역을 보면 지금의 桓仁, 集安지역을 중심으로 압록강 건너
한반도의 북부 및 太子河의 상류지역에 걸쳐 있다.
이 지역은 앞서 살펴본 묘후산유형 및 공귀리유형 등의 청동기시대의 유적 분포권과도 대략 일치하고 있다."
-高句麗土器의 形成에 대하여 - 朴淳發(忠南大 考古學) http://mahan.wonkwang.ac.kr/source/k16.htm
"이는 또한 고구려의 특징적인 묘제인 積石塚의 등장 시점 역시 노 남리형토기와 비슷한 시기인 전국말-한초
무렵까지 소급되고 있는 최근의 조사결과(張雪岩1981)와 결부해 보면 더욱 그 가능성이 높아진다."
-高句麗土器의 形成에 대하여 - 朴淳發(忠南大 考古學) http://mahan.wonkwang.ac.kr/source/k16.htm
종래 평양 일대 낙랑 토기를 위만조선의 토기로 인식하였지만 그것은 준왕의 고조선이 위만에게 멸망한 후
전국계 연나라 문화의 일부가 평양에 들어와서 새롭게 형성된 낙랑 토기라 봐야하며 준왕의 고조선이 망하자
평양 일대에 낙랑인이라는 새로운 유형이 생겨 위만의 직접적인 지배를 거부했고 위만은 이들을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이들의 귀족들이 위만조선 사회 내에 들어와서 지도부에 들어올 수 있게 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증거는 후한서에 있다.
후한서를 보면 기원전 177년 당시 낙랑에 대해 나오지만 조선이라는 구체적
중심지가 있었다는 언급은 없고 단지 산동의 왕씨 가문이 낙랑의 산골로 도피해서 그 곳에서 여차저차
성장했다. 라고 나올 뿐이다. '조선으로 망명했다.'라는 말이 없는 걸로 봐서 당시 낙랑은 조선의
중심지는 아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오히려 평양 지역에는 '조선'이란 중심지 나라가 아닌 조선에 속한 낙랑이란 나라 혹은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종래의 국사학계의 위만조선사 연구는 근본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던 것이다.
글의 끝을 내리자면 위만조선의 형성은 압록강 하류,중류,상류,환인,집안에 분포한 고구려 5부족과
자강도 강계의 위만 집단이(후일 조나국이 됨.) 함께 연합하여 형성한 것이고 이들의 무덤은 무기단적석묘이며
토기는 노남리형 토기를 썼다.
자강도 강계의 위만조선 중심지 '왕검성'이 내분으로 인해 한나라에게 멸망했으나 이 지역에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되지
못하고 집안에 제2현도군(고구려현), 함흥에 제1현도군. 환인(졸본)의 서북에 상은태현. 이것만 설치된 이유는
자강도 강계에 조선 부흥 세력들과 고구려족이 연합하여 한나라에 대항하고 고구려족들이 곳곳에서 한나라를
공격하매 함흥에 설치된 제1현도군이 파괴되고 한나라는 후퇴하여 집안에 고구려현 토성을 세워 제2현도군으로 삼고
고구려족들을 방어하는 군사 기지로 삼지만 이것도 기원전 82년에 고구려족들에 의해 파괴되어 환인 동북 지역으로 후퇴하여
제3현도군을 설치한다.
결국 고구려족들에게 위만조선의 중심지를 뺏기는 수모를 당한 한나라. 그런 한무제의 분노는 위만조선 정벌에 나간
장군들을 숙청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이 사기 조선열전에 기록된 한무제의 열폭의 이유였던 것이다.
요약:
1. 집안,환인은 위만조선의 중심지 왕검성이 아니다.
2. 낙랑군도,진번군도,임둔군도 위만조선의 중심지 왕검성이 아니다.
3. 함흥도,함경남도도,함경북도도,황해도도 위만조선의 중심지 왕검성이 아니다.
4. 한나라는 자신들이 적은 한서지리지 현도군편,
사기 조선열전,한서 조선열전 어디에도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표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다.
위,진 남북조시대 이전에는 낙랑군이 왕검성이란 인식 자체도 없었고
왕검성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몰랐다. 응소만이 왕검성이 요동군 험독이라고 착각했다.
5. 응소의 왕검성=요동군 험독 주석은 기원전 7~기원전 4세기 고조선의 초기 수도 혹은 중심지를
의미하는 걸로 봐야 한다.
신찬의 왕검성=낙랑군 패수의 동쪽 설은 낙랑군=왕검성 설이라기보다는
낙랑군의 패수현의 패수(청천강)의 동쪽에 왕검성이 있다는 것으로
청천강의 동북쪽 자강도 유역이 유일한 위만조선 중심지 후보지다.
6. 후한서,삼국지 고구려전은 기원전 1세기~서기 3세기에 고구려(집안 국내성)의 남쪽(자강도)에
조선이 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는 자강도의 조선을 '조나국'이라 기록한다.
자강도의 중심지 강계는 일찍이 이병도가 말하길 서기 247년 고구려의 동천왕이 위나라를 피해 천도한
평양성이라고 했다. 삼국사기 중천왕본기를 분석해보면 중천왕 당시에 중천왕은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성에 살고있었다는걸 알 수 있다.
이 당시 평양성은 이병도 말대로 자강도 강계가 유력하다. 북한의 현 평양은 그 당시에
여전히 낙랑군의 중심지라서 천도 대상지가 아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본기는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성이 신인神人 왕검의 터.
혹은 왕험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강도 강계에 왕검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7. 신찬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이 왕험성(왕검성)이고 이곳이 '험독'이라고 했다.
'험독'은 현도와 발음이 유사하다. 현도군이 압록강 중류 즉 집안,자강도가 있는
그 일대에 설치된 것으로 보아 이 일대가 위만조선의 중심지임을 넉넉히 알 수 있다.
8. 위만조선의 고고학적 양상을 환인,집안,자강도 일대에서 확인해보면 이 일대에
기원전 4세기 적석묘 집단이 형성되고 기원전 3~2세기 연나라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고
진,한漢의 철기 문화도 들어오면서 철기 시대로 진입한다. 이들의 힘이 축적되게 되고
이들은 5부족으로 형성된다. 이 시기의 묘제는 무기단적석묘였다.
이들 집단은 기원전 2세기 초에는 왕을 칭할 정도로까지 발전했고 군사적 역량이 매우 높아졌다.
기원전 2세기 초(기원전 200년경) 자강도 노남리에서 노남리형 토기가 형성되어
환인,집안,압록강 중류,한반도 북부,태자하 상류로 확산된다.
노남리 토기는 전국 말기,한대 초기 철기문화와 회도의 영향 + 고조선의 미송리토기
문화가 합쳐져 형성된 토기다.
외래적인 요소와 고유의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일대가 바로 위만조선의 중심지였으며, 노남리 토기,무기단적석묘는 위만조선의 중심지 문화였다.
9. 위만조선의 형성은 압록강 하류,중류,상류,환인,집안에 분포한 고구려 5부족과
자강도 강계의 위만 집단이(후일 조나국이 됨.) 함께 연합하여 형성한 것이고 이들의 무덤은 무기단적석묘이며
토기는 노남리형 토기를 썼다.
자강도 강계의 위만조선 중심지 '왕검성'이 내분으로 인해 한나라에게 멸망했으나 이 지역에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되지
못하고 집안에 제2현도군(고구려현), 함흥에 제1현도군. 환인(졸본)의 서북에 상은태현. 이것만 설치된 이유는
자강도 강계에 조선 부흥 세력들과 고구려족이 연합하여 한나라에 대항하고 고구려족들이 곳곳에서 한나라를
공격하매 함흥에 설치된 제1현도군이 파괴되고 한나라는 후퇴하여 집안에 고구려현 토성을 세워 제2현도군으로 삼고
고구려족들을 방어하는 군사 기지로 삼지만 이것도 기원전 82년에 고구려족들에 의해 파괴되어 환인 동북 지역으로 후퇴하여
제3현도군을 설치한다.
결국 고구려족들에게 위만조선의 중심지를 뺏기는 수모를 당한 한나라. 그런 한무제의 분노는 위만조선 정벌에 나간
장군들을 숙청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이 사기 조선열전에 기록된 한무제의 열폭의 이유였던 것이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내가 언제 단군이 주몽이라 했소?
위만조선 수도 왕검성 위치가 고구려 환도성이라 이 말이지. 글을 줘도 제대로 못읽는구먼.
아이고. 좀 구분 좀 하세요. 내 글 제대로 읽어보고.
누가 언제 고조선 수도가 딱 한 곳이랬나.
요서 하가점 => 요서 위영자 => 요서 십이대영자 => 요동 정가와자 => 한반도 평양 => 길림 집안 환도성
으로 고조선 수도는 변천되어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