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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박물관 조국현 박사 “26년 동안 500여명 전문가 통해 검증했다”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한반도에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기독교 복음이 전파됐을까.
여러 이견이 있지만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이었던 사도 도마가 한반도까지 직접 선교여행을 왔었다는
주장이 있어 눈길을 끈다.
1988년 학계에 사도 도마가 한반도에 왔었다고 발표해 주목을 받은 도마박물관 조국현 박사는 “26년 동안 500여 명의 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쳐 이제는 사도 도마가 한반도에 온 것이 확실하게 입증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 (사진제공: 도마박물관) |
그의 설명에 따르면 도마는 예수가 부활한 후 터키 지방 에뎃사로 선교를 떠났다. 이후 인도 군다포러스 왕에게 가서 왕궁을 지어주고 인도 갠지스 강 유역을 지나 실크로드를 타고 땅 끝 나라인 한국에 들어왔고, 낙동강 하구인 김해에 도착했다.
이때 가야국을 기독교 국가로 세우고 철기문화를 일으킨 후 다시 배를 타고 인도에 건너왔다. 그는 도마가 가야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혼인을 중매했고, 다시 인도 서남부와 미조람 등에서 선교하다가 인도 첸나이 지방에서 순교했다고 소개했다.
조 박사가 1988년 발표 당시 제시한 증거물은 1987년 경상북도 영풍군 평은면 왕유동에서 발견돼 논란을 일으켰던 도마의 분처석상이다.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간 암각상에는 히브리어로 ‘도매’라고 새겨져 있었다. 일부 기독교학자들을 중심으로 이 암각이 ‘성(聖)도마상’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 암각이 기독교학자들을 놀라게 한 부분은 이뿐이 아니다. 암각의 모양을 살펴보면 손 부분은 흔히 볼 수 있는 불상의 수인과 달랐고, 1908년 중국 돈황에서 발견된 그리스도상(경교화상, 景敎畵像)의 형상과 비슷해 기독교적인 형태라는 학설에 더욱 힘이 실렸다. 더군다나 이 암각 하단 부분에는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라는 글과 명전행(名全行)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야소화왕’은 ‘예수’로, ‘인도자’는 ‘전도자’로 풀이됐다.
한반도에 기독교가 유입된 경로는 서행(西行)론과 동행(東行)론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독교 복음이 로마를 거쳐 북미, 아시아로 유입되는 서행(西行) 과정이 잘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울의 선교여행이다. 바울은 소아시아 연안지방을 지나 에베소, 빌립보, 고린도를 거쳐 로마로 복음을 전파했다. 이후 복음은 구라파에서 북미로, 북미에서 아시아로, 19세기 말 한국 땅으로 전파됐다고 보는 것이 주된 흐름이었다.
그러나 동행(東行)론도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곧바로 복음이 전파됐다는 학설이다. 사도행전에는 이렇게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을 가리켜 ‘그 흩어진 사람들(행 8:4)’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중에 바로 예수의 제자 도마가 있었다는 것. 도마가 선교여행으로 시리아와 인도를 거쳐 중국에 왔고 우리나라까지 발길이 닿았다는 주장이다. 도마의 한반도 복음 전파설은 통일신라 때 것으로 밝혀진 ‘경교 돌십자가’ ‘마리아상’, 김해 수로왕릉의 ‘쌍어문’ 등 기독교적 색채가 짙은 문화재가 발견됨에 따라 그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한기평 목사도 2014년에 광주노회 동광주 시찰회에서 함께 방문했었습니다.
2005년 1월 3일 한겨레 신문에 영주 분처상의 비밀이란 기사를 예전에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정수일 선생이 지은 한국 속의 세계(하) (창비2005)에서 역시 이러한 영주 분처상의 비밀이란 글을 보고 현장이 몹시 궁금하였다. 평소 답사를 자주 가는 편이나 영주에 갈 때마다 기회가 되지 않아 이번에 찾아 나섰으나 찾아가는 길이 그다지 쉽지는 않았다. 영주시 평은면 강동 3리 왕머리 바위라는 단서로 길을 찾았으나 주변을 몇 차례나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갔다. 강동 2리라는 사실도 뒤 늦게 알게 되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74호 영주 강동리 마애보살입상(2005년 1월10일 지정)으로 지정된 문화재이나 아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마을에 이르러서야 왕머리 불상(부처바위)이라고 물으니 대략 위치를 알려 주셔서 찾았다. 의외로 높은 산이 아닌 길가 야산 언덕위에 예사롭지 않은 바위에 있었다.
마애불이 있는 이 곳은 왕유동이라 불리는데 고려 제31대 공민왕이 중국으로부터 쳐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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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련 토마상일까?
이 암각상은 1987년 8월 발견되었는데 기독교 관련 토마상이라고 할 정도로 당시에는 흥분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바위 면에는 3점의 명문이 있는데 좌측의 한 면에 네모꼴로 네자의 도마라는 히브리어글자이고 다른 한 면은 마멸이 심하여 알아보기가 어렵고 化北全行처럼 보이나 全行 자는 확실히 보였다. 가슴 부분에 십자가 문양이 있다고 하나 마멸이 심하여 잘 보이지 않았다. 일부는 조각 기법이 전혀 잘 보이지 않는 독특한 양식이라고도 하나 대체적으로 고려시대 초기 마애불에서 나타나는 양식이 일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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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은 기독교 관련 상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마애불로보이며 불두(머리)는 없어졌으나 불두 뒷편 바위 면에는 광배의 조각선이 남아있고 발아래 부분에는 흐르긴 하지만 삼겹으로 보이는 연화문 대좌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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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직까지 알려진 상이 아니어서 현장에 안내문도 없으며 이 상에 대한 내용을 일반인들이 알 수 없어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주시에 있는 예수의 12제자 가운데 한사람인 도마(刀馬)상
영주시 평은면 왕유동(왕머리, 강동1리 ) 마애 인물상은 기독교 일각에서 예수의 12제자 가운데 한사람인 도마(刀馬)상으로 비정(比定)하고 있으며 그가 일찍이 복음 선교를 위해 인도에서 뱃길로 김해를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이곳까지 선교여행을 다녀간 흔적으로 보고 있다.
속칭 ‘왕머리’라고 하는 왕유동(王留洞: 왕이 머무른 마을이라는 뜻)은 고려 31대 공민왕이 중국으로부터 처들어 온 홍건적의 난리(1361년)를 피하기 위해 안동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머물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작은 시골 마을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는 족보가 있는 마을이기도 합니다.
밭 사이 포장된 길로 무심코 걸어가다가 본 바위... 어? 혹시...이건가? 이게 바로 도마 바위인가?
그렇습니다.
이것이 도마바위였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십시오. 지나가는 길에 흔히 있는 바위....
뭐가 보입니까? 아무 생각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바위...
그런데 뭔가... 자세히 올려다 보니....
이렇게 바위가 방치되어 있다는 것이 먼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무관심하게 방치되어 있을까?
풀 숲을 헤치고 가까이 보니 틀림없이 어디선가 사진으로
보았던 바로 그 바위였습니다.
여름이라서 무성히 자란 풀들을 헤치고
꺾어내고 밟아내고 치워내면서 올려다보니
바로
그 도마바위 또는 분처(分處)바위- 분처바위라는 이름의 근원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몸이 쪼개어졌다는 뜻인가요? 부처바위라는 이름은 많은데 이 바위는 도마바위가 아니면 분처바위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히브리어입니다.
히브리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한국의 바위에 새겨진 히브리어!!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바위가 최초로 발견된 것은 1987년 8월 어느 날 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2리 왕유동 분처바위에서 머리 부분이 떨어져나간 암각상을 발견했다고 되어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누구인지 최초의 발견자가 어떻게 이 바위의 히브리어를 짐작하게 되었는 지 추리소설도 아닌데 그 최초의 발견자가 대단히 궁금해졌습니다.
바로 아래 사진에서 위로 올려다보이는 네모나 보이는 글자가 히브리어입니다.
이것을 도마라고 읽어야되는 지 히브리어 알파벳의 모양이 사실 정확치는 않습니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 모양만 흉내만 내어서 팠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고대 히브리어가 아니라 현대 히브리어 알파벳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글쎄요, 그 판단은 좀 신중해야할 것 같습니다. 도마 시대에는 히브리어보다는 헬라어가 쓰여지는 시대였을텐데 히브리어로 써져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 히브리어는 이스라엘의 기본언어이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석상의 조각연대는 1-2세기가 아니라 9~10세기 경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신라 말이나 고려시대 초기를 의미합니다. 불교미술에서는 그 당시 석탑 조성능력이 대단히 발전했던 시기라고 합니다.
하단에 새겨진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와 ‘명전행(名全行)’이란 한자 명문이 있다고 하는데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누구였을까? 이곳에 예수님의 상을 조각해놓은 그 사람은?
‘야소화왕’耶蘇花王- '예수 꽃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동양문화권의 존칭어이며, ‘인도자’는 사도나 전도자로 풀이됩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야소’란 한역(漢譯) 지칭의 출현시기가 문제가 됩니다. 781년에 중국 시안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예수를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구세주)로 칭하고 있는데 ‘야소’라는 말은 중국 명대 중기에 서방 카톨릭이 중국에 유입되면서부터 비로소 쓰게 됩니다.
한국의 경우, ‘원효문집’에서 예수를 불교식으로 ‘법왕자(法王子)’라고 칭한 실례는 있으나, ‘야소’로 한역하거나 음사한 적은 없으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전무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한자 명문도 히브리어 글자처럼 상이 조성된 후에 보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그리고 ‘명전행’이란 명문에 관해서는 가까이에 있는 순흥면 읍내리 고분 서벽에 고구려인 ‘전행(全行)’이란 같은 이름의 석장이 등장하는 점을 들어 당대의 명장인 이 전행이 분처상도 제작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400년께 고구려 광개토왕이 영주와 순흥, 안동 등 소백산 내부 지역을 일시 통치하였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상황론적으론 그럴 법한 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행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어서 단정은 이르고 숙고가 요망됩니다.
누군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누군가 있었습니다!!
누군가 정을 들고 예수님의 손을 바위에 땀을 흘리며 새겨놓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 땀과 보이지 않는 얼굴은 사라졌어도 그러나 이렇게 그의 뜨거운 마음은 남아있었습니다.
영주 분처상(分處像)의 비밀
9세기 암각상에 예수제자 이름이… 18세기 머리 없어진채 발견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2리 왕유동(속칭 왕머리) 분처바위에 있는 분처상과
그 좌측에 암각된 '도마'라는 히브리어 글자.
상의 가슴 부위에 양각된 십자가 모양이 보임(필자 제공)
예수님이 승천한 뒤 12사도 중 한 사람인 토마가 동방 선교의 사명을 지니고 인도에 와서 고대 동방기독교의 첫 선교활동을 펼쳤다는 것은 거의 정설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 그가 지구의 동쪽 끝 한반도에 왔다간 흔적을 남겼다면,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놀라게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그럴 법한 일이 일어났다.
1987년 8월 어느날 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2리 왕유동 분처바위에서 머리 부분이 떨어져나간 암각상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기독교 관련상이라느니, 심지어 토마상이라느니 하여 충격적인 화제를 던졌다.
특히 기독교계에서는 이 뜻밖의 일을 대서특필하고 흥분에 설레었다. 성역화 논의까지 나오는 가운데, 지금도 찾는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 유적을 발견한 지 3년 뒤 필자는 현지의 한 중학교 교장의 안내를 받으면서 영주에서 안동으로 넘어가는 비포장 고갯길을 더듬어 올라갔다. 길가에서 오솔길을 헤집고 한참 들어가서야 상이 나타났다.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자리잡은 상은 나무숲 속에 묻혀있었다. 그로부터 4년 뒤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과 함께 다시 가서 좀더 자세한 현장조사와 상 표면에 나타난 명문을 탁본했다. 돌아와서는 탁본과 사진자료에 관한 전문가들의 조언을 듣고, 그를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견해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8년이 2002년 여름, 한 텔레비전 방송국 취재팀과 함께 다시 찾았다. 어느새 길은 깔끔하게 포장되고, 주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관계기관의 협조 속에 1박 2일간의 심층 취재를 마치면서 그해 가을께 문화 한마당에 곁들여 학술모임도 열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무산되고 말았다. 그 학술모임만 가졌어도 오늘의 이 글은 좀더 명석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토마’‘야소화왕’글자 새겨
분처바위에 있다고 하여 ‘분처상’(혹은 ‘토마의 분처상’, ‘토마상’)이라고 하는 이 암각상은 그 터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속칭 ‘왕머리’라고 하는 왕유동(王留洞: 왕이 머무른 마을이라는 뜻)은 고려 31대 공민왕이 중국으로부터 처들어온 홍건적의 난리(1361년)를 피하기 위해 안동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머물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손·발모양 기독교양식 뚜렷
상은 높이가 족히 5m나 되는 대형 암각상이다.
상면(像面)과 암면(岩面)에는 3점의 음각한 명문이 있다. 그 한 점은 상의 좌측 암면에 네모꼴로 새겨진 4자의 ‘도마’라는 히브리어 글자이고, 다른 두 점은 상면의 하단에 새겨진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와 ‘명전행(名全行)’이란 한자 명문이다.
이러한 명문과 더불어 특이한 조형기법과 문양이 확연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아무런 명문도 없는 불국사 출토 돌십자가나 경주 출토 성모 마리아 소상에 비하면 여러 모로 고증이 가능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이 낯선 상에 관한 학제간의 종합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무어라고 단정적인 결론은 내릴 수가 없다.
이 시점에서 논급할 수 있는 것은 보통 불상과는 다르며, 기독교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론과 몇 가지 문제점이다. 이것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와 상관 지을 수 있는 논의라서 더욱 주목된다.
분처상을 기독교와 연관 짓게 되는 근거는 우선, 조형기법에서 찾을 수 있다. 일견하여 눈에 띄는 것은 수세인데, 왼손가락 끝은 빗장뼈에 댄 채 손등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외반(外反:바깥쪽으로 돌림)하고 있어 불상의 수인(手印)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수세는 1908년 중국 둔황에서 발견된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 즉 경교(景敎)의 인물상(당나라 말 제작, 일부 학자는 그리스도상이라고 주장)에 나타나는 수세와 비슷하다.
수세뿐만 아니라, 상의 구도나 복장의 화려함도 두 상이 서로 유사하여 불상과는 구별된다. 발가락의 노출도 기독교(예수)상의 보편적 기법이다.
특기할 것은 필자의 초보적 관찰로는 상의 가슴 부위에 양각된 십자가 모양이 보인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문양에서도 그 근거가 엿보인다. 상의 옆구리와 하부에 음각된 문양 중에는 목단이나 장미 같은 꽃무늬가 보인다. 그리고 분처상의 고리형 목걸이 문양과 겉옷의 가로줄 문양은 둔황 경교화상의 목걸이나 겉옷 문양을 방불케 한다.
이와 함께 히브리어의 ‘토마’란 글자나, 한자의 ‘야소화왕인도자’란 명문은 비록 그 암각 시기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이 상이 기독교와 관련된 상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인근 주민들의 전언도 기독교상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이 상을 지켜봐 온 주민들은 종래 이 상 앞에서만큼은 물상숭배 같은 행위는 하지 않았다고 일치하게 증언한다. 사실 현장에서 그러한 흔적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불상이나 기타 상서롭지 않은 대상물만 있으면 예외없이 불공을 드리거나 기복하는 한국인들의 전래 관행에 비춰보면 짐짓 의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아마 물상숭배를 불허하는 기독교 같은 유일신교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짐작해 본다
노출된 상의 발가락과 그 밑의 여러가지 꽃문양
현대히브리어 사용등은 의문
이상의 몇 가지 근거로 미루어 분처상이야말로 기독교와 어떤 관련이 있는 암각상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 같다. 나아가 이 상을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를 시사하는 증거유물로 일단 추정해 봄직하다.
그러나 상의 실체를 밝히는 데서 간과할 수 없는 몇 가지 문제가 포착되고 있다.
그 중 한가지는 명문의 내용이다. 전문가들의 해석에 의하면, ‘토마’란 음각자는 현대 히브리어 문자라고 한다. 여기서의 ‘토마’는 예루살렘의 초기교회 시대인 1세기 중엽에 인도 서남부와 중국까지(중국까지 왔다는 설은 부정됨) 와서 전도활동을 했다는 예수의 12사도 중 한 사람인 토마일 것이다.
따라서 분처상을 토마상으로 본다면 히브리어, 그것도 현대 히브리어로 글자를 새겼다는 것은 시기성에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례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상의 조성 연대가 9~10세기 경으로 추정되며, 지금까지 발견된 토마 관련유물 중에는 히브리어로 명기된 유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1547년 남인도 서해안의 성 토마산에서 발굴된 석비에는 십자가와 함께 현지어인 펠레비어로만 비문이 씌어있다. 그리고 토마의 시대는 물론, 11세기에 이르러 동서 교회가 결별할 때까지만 해도 고대 히브리어가 상용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토마’라는 현대 히브리어 암각문은 상이 조성된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토마‘라는 글자보다 더 문제시되는 것은 이른바 ‘야소화왕인도자’란 명문이다.
‘야소화왕’은 예스 그리스도에 대한 존칭이며, ‘인도자’는 사도나 전도자로 풀이된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야소’란 한역(漢譯) 지칭의 출현시기가 문제다.
781년에 중국 시안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예수를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구세주)로 칭하고 있다. ‘야소’라는 말은 중국 명대 중기에 서방 카톨릭이 중국에 유입되면서부터 비로소 쓰게 된다.
한국의 경우, ‘원효문집’에서 예수를 불교식으로 ‘법왕자(法王子)’라고 칭한 실례는 있으나, ‘야소’로 한역하거나 음사한 적은 없으며, <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전무하다. 따라서 한자 명문도 히브리어 글자처럼 상이 조성된 후에 보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명전행’이란 명문에 관해서는 가까이에 있는 순흥면 읍내리 고분 서벽에 고구려인 ‘전행(全行)’이란 같은 이름의 석장이 등장하는 점을 들어 당대의 명장인 이 전행이 분처상도 제작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400년께 고구려 광개토왕이 영주와 순흥, 안동 등 소백산 내부 지역을 일시 통치하였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상황론적으론 그럴 법한 설이다. 그러나 전행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어서 단정은 이르고 숙고가 요망된다.
그밖에 ‘전행’을 ‘전차(향기나는 풀에 버금가다라는 뜻)’라는 석장 전행의 호로 해석하는 이도 있는데, 증거가 미흡하다
상의 왼쪽에 새겨진 '도마'라는 히브리어 글자
고대기독교 전파 중요실마리
한마디로, 분처상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와 관련이 있을 개연성은 짙지만, 아직 연구가 미흡해 무어라고 단정 짓기는 이르다. 이 글은 연구의 단서일 뿐이다. 분처상의 해명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인 두부가 떨어져나감으로써 실체를 밝히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몇몇 주민의 얘기로는 임란 때 왜군이 상의 목을 잘랐는데, 30~40년 전만해도 두부가 상 앞에서 딩굴고 있었으며, 지금은 그 곳 어딘가 묻혀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두부의 수습과 복원이 급선무다. 아울러 관련학계의 진지한 협동연구도 요망된다.
오늘도 분처상은 그 무언가를 증언하면서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있다. 무언 중의 유언, 그것이 바로 역사어다. 이 역사어를 알아듣지 못해 생긴 것이 이른바 ‘역사의 비밀’이다. 역사의 비밀은 역사의 심연 속에 일시 가려진 것일 뿐, 영원은 아니다. 그 심연을 파헤치다 보면, 어느날엔가는 그 비밀이 허무해지는 법이다. 분처상의 비밀도 그러할 것이다.
***********************************************************<정수일교수/한겨레 2005.1.3>
또한 1987년에 관악고 교사 유우식은 영주시 평온면 왕유리에서 발견한 특이한 형태의 석상을 사도 도마의 석상이라고 주장하였다.
1987년 유우식 교사(관악고등학교)가 발견한 왕유리 석상에 관해 최근 교계 일부에서 사도 도마를 기념하는 석상이라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가야지역의 출토된 유물에서 불교 유적이 없다는 점, 당시의 토기가 동로마제국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 석상의 한자체가 히브리어와 유사하다는 점, 허왕후가 이주한 지역으로 알려진 인도 아유타국이 사도 도마에 의해 복음화 됐을 가능성 등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1. 유우식씨의 주장
기독교 신도인 교사 유우식씨는 중원 고구려비를 연구하여 아래와 같이 발표했습니다.
"고구려 호태왕(광개토대왕)은 기독교 신자였으며, 기독교 신자였던 신라의 실성이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호태왕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 뒤 85년 1월 경북 순흥에서 벽화고분이 발견되었고, 유우식씨는 이 고분의 출입구 동쪽 벽화인 흰머리의 남자상이 백두옹이고 이 백두옹이 신라에 복음을 전한 사도 도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뒤 86년 2월 26일 경북 영풍군 평은에 이르러 분처바위를 찾았는데 부처상과 비슷하였으며, 그 뒤 87년 8월 29일 재차 답사하여 바위벽에서 탁본을 하여 "名全行"석자와 그 뒤 다시 가서 목단, 장미, 백두옹(할미꽃)의 문양을 탁본했으며, 백두옹이 순흥 고분의 흰머리의 상과 같은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단, 장미, 백두옹은 바로 설총의 화왕계에 나오는 말입니다.
계속하여 유우식씨는 탁본물에서 多勿 두글자와 耶蘇花王引導者 刀馬明이라는 열글자를 찾아 냈고 다시 탁본하던 중 분처상이라는 글자를 찾아냈으며, 그후 계속 像, 手, 目이라는 글자를 확인했습니다. 그리하여 분처상을 조각한 사람은 전행이며, 야소는 예수이고 화왕은 목단이며 인도자는 도마로서 분처상은 바로 도마의 상을 가르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후 그는 88년 1월 19일 다시 현장에 가서 히브리문자를 발견하였는데 눈, 손, 마, 도를 가르키는 글이었습니다. 이는 한자인 刀馬名手目과 일치합니다. 분처바위는 서기 419년보다 10여년이 앞선 호태왕 때 전행이라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유우식씨는 한국의 기독교가 2000년전 신라 파사왕 때인 서기 84년경이전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2리 왕유동에 분처바위라는 바위가 있는데, 높이가 5m에 이르는 인물상이 새겨져 있다. 머리 부분은 사라지고 없는데, 이 인물상은 9-10세기, 즉 신라 말이나 고려(918-1392) 초에 형성된 것으로, 경교의 영향에 의해 이루어진 인물상으로 보인다. 1987년 8월 어느 날 국사 교사인 유우식 씨가 이것을 발견하였다.
상 주위에 세 개의 음각한 글씨가 있다. 그 하나는 오른쪽의 ‘도마’라는 현대 히브리어 글자이고, 다른 두 개는 하단에 새겨진 ‘야소화왕인도자도마명(耶蘇花王引導者刀馬明)’과 ‘명전행(名全行)’이라는 한자이다. 이 인물상을 분처바위에 있다고 하여 ‘분처상’ 혹은 ‘도마상’이라고 부른다.
분처상을 기독교와 연관 짓게 되는 근거는 우선 조형기법에서 찾을 수 있다. 수세(手勢)를 보면, 왼손가락 끝은 빗장뼈에 댄 채 손등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쪽으로 돌리고 있어 불상의 수인(手印)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수세는 1908년 중국 돈황에서 발견된 네스토리우스파 즉 경교(景敎)의 인물상에 나타나는 수세와 비슷하다. 돈황의 인물상은 당나라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일부 학자는 그것을 그리스도상이라고 주장한다. 상의 구도나 복장의 화려함도 두 상이 서로 유사하여 불상과 구별된다. 발가락의 노출도 예수상의 보편적 기법이다. (우: 분처상의 수세)
문양에서도 그 근거가 엿보인다. 상의 옆구리와 하부의 문양 중에는 꽃무늬가 보인다. 그리고 고리형 목걸이 문양과 겉옷의 가로줄 문양은 돈황 경교화상의 목걸이나 겉옷 문양과 비슷하다. 현대 히브리어의 ‘도마’란 글자나, 한자의 ‘야소화왕인도자’란 명문이 새겨진 시기는 상이 조성된 시기보다 훨씬 후대일 것으로 보이지만, 이 상이 기독교와 관련된 상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