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교수의 주역(周易) 1 (1강 ~ 11강)
이번 시간에는 ‘주역(周易)‘에 대하여 공부하기로 합니다. 앞으로 연재상으로는 여러 회 강의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가 없습니다. 나도 무엇부터 강의해야 하나 매우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64괘의 괘사만 읽으려 하더라도 1년으로는 부족합니다. 몇 회의 강의로 주역을 읽으려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바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 속에서 발견한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다시 거론하기로 하겠습니다만 주역은 동양사상의 이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러분 중에 점을 쳐 본 사람은 많겠지만 주역 점을 쳐 본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주역을 읽어 본 사람은 없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주역은 점치는 책입니다. 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意氣) 방자(放恣)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사실은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약한 사람으로 느끼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밖에 없는 것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선량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니다.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일면입니다. 본질을 구성하는 일면입니다. 본론에서 빗나간 이야기였습니다만 주역이 점치는 책이고 점치는 마음을 우리는 비과학적이라고 비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정직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귀신을 만나거나 확인한 적은 없지만 귀신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에 문득 문득 귀신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밤늦게 연구실을 나와서 내가 마지막으로 나오는 참이었기 때문에 복도에 불을 끄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습니다. 연구실이 6층이기 때문에 당연히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지요. 순간적으로 생각했었지요. 당연히 내려가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여자귀신이 나를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가려는가 보다는 생각 을 순간적으로 하게 되지요.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지요. 명(命)은 사주팔자(四柱八字)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判斷)’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 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汝則從 龜從筮從 卿士從 庶民從 是之謂大同 의난(疑難.의심스럽거나 어려운 상황)이 있을 경우 임금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묻고, 그 다음 조정대신(朝廷大臣)에게 묻고 그 다음 서민(庶民)에게 묻는다 하였습니다.
임금 자신을 비롯하여 조정대신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지혜를 다한 다음에 최후로 점을 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대학제로 진행하는 대동제(大同祭)가 바로 여기서 연유하는 것이지요. 하나되자는 것이 대동제의 목적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 어내고 이 법칙으로부터 다시 구체적 사안을 판단하는 구조에 있습니다.
1. 주역의 의미 그리고 역(易)에는 하(夏)나라의 연산역(連山易. 神農氏시대의 역), 은(殷)나라의 귀장역(歸藏易. 黃帝시대의 역)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주역(周易)이라 합니다.
일(日)은 양(陽), 월(月)은 음(陰)을 의미하여 역은 음양(陰陽)이란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지(天地), 일월(日月), 강유(剛柔), 고저(高低), 명암(明暗), 대소(大小), 남녀(男女), 군신(君臣), 선악(善惡), 길흉(吉凶) 등 천지 만물과 그것의 변화를 음양과 음양의 작용으로 이해합니다. 轉化 ①바뀌어서 달리됨 ②변화(變化)의 상태(狀態). 일정(一定)한 상태(狀態)에 도달(到達)하는 과정(過程) 역이라는 이름에는 3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지요. 그 3가지의 함의(含意)를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역(易)은 간이(簡易)의 의미입니다. 즉 간단하고 쉽다는 의미입니다. 복잡한 현상을 간소화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무한한 변화의 와중에서 영위됩니다.
생주이멸(生住移滅) 모든 사물(事物)이 생기고, 머물고, 변화(變化)하고, 소멸(消滅)하는 네 가지의 모양(模樣) 避苦趣樂 고통은 피하고 즐거움을 취한다.
3) 역(易)은 불역(不易) 즉 불변의 의미입니다. 주역은 불변의 법칙이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변화의 내면을 일관하고 있는 법칙이라는 의미입니다. 불변의 진리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불역(不易)이란 의미는 두 번째의 의미인 변역(變易)과 첫 번째의 의미인 간역(簡易)의 결론에 해당하 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잡한 변화를 간단한 개념으로 법칙화한 것이란 의미입니다. 주역이 이와 같은 3가지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역이 사물의 변화에 대하 여 어떠한 관점에서 이를 법칙화하고 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크게 대별(大別)합니다. 공자 이전 2천5백년과 공자 이후 2천5백년이지요. 그러나 공자 이후의 시기는 주역의 견(經.텍스트)에 대한 해석(傳)의 시대입니다. 인식 틀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傳)은 이를테면 논문입니다.
책이란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역의 경(經)과 전(傳)에서 동양적 사고의 체(體)와 용(用)을 함께 읽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합니다. 삶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괘(卦)의 구성과, 점을 친 기록들인 괘사(卦辭) 효사(爻辭)에는 동양사상의 원형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 시대 5백50년 간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부국강병이라고 하는 유일한 국가 경영목표를 위하여 사활을 건 무제한의 신자유주의적 경쟁이 행해지던 시기였습니다. 탐구가 불역(不易)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시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이론에 대한 근본적 담론이 가장 왕성하게 개진되었던 시기였음은 전에 이야기했지요.
2. 주역의 구성
위에 보이는 그림이 주역의 구성을 개략적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자료: 태극(太極)과 음양(陰陽) 사상(四象)과 팔괘(八卦)에 대한 역학계몽의 해설 (08.12.07)
음양을 나타내는 부호를 효(爻)라고 합니다만 이는 물질성을 구성하는 요소 같은 개념입니다. 로 읽기도 하고 어떤 지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괘(卦)는 걸다는 뜻입니다. 걸어 놓고 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이 효와 괘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에 대하여 매우 난감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예를 들어봅시다.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사건이 중첩되거나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태(事態)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상사태 또는 전쟁상태라는 표현도 가능합니다. 효와 괘는 이를테면 사물과 사건에 해당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물론 규칙적이지는 않습니다. 사태와 같은 범주적 개념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역의 범주는 기본적으로 객관적 물질세계의 연관성으로부터 도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역(簡易)이기 때문에 물질세계의 복잡한 연관을 모두 담아낼 수는 물론 없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각 구성부분을 여러 범주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범주가 매우 중층적입니다. 결코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는 앞으로 예제를 통하여 설명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판단형식에 비하여 월등히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매우 단순한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는 개인을 분석함으로써 개인의 집합인 사회 전체를 분석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틀입니다. 단순한 집합으로 설명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극히 일차원적 사고방식입니다. 신분(身分)이나 혈연(血緣)이나 다른 집단을 단위로 하여 사회구성을 이해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개인과는 다른 범주로 사회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의외로 기계적이고 단선적인 논리로써 변화를 읽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4.주역의 경(經)과 전(傳) 이것은 8개의 소성괘(小成卦), 64개의 대성괘(大成卦) 그리고 64개의 괘사, 3백84개의 효사를 의미합니다. 앞의 주역의 구성이란 그림에서 보는 8괘를 소성괘(小成卦)라고 합니다만 이 소성괘를 2개 겹쳐서 만들어진 괘를 대성괘(大成卦)라고 합니다. 이 대성괘가 모두 64개가 있지요. 8 x 8 = 64지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수많은 변화 패턴을 64가지로 분류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니까 효사의 숫자가 64 X 6 = 3백84개나 됩니다. 각 대성괘에는 그 괘의 성격을 규정하는 이름이 명명되어 있고 괘 전체의 의미를 부연하는 괘사가 달려 있으며 괘를 구성하는 6개의 부분과 그 6개 부분이 서로 맺고 있는 시공간적 관련성을 효사가 설명하고 있는 그러한 구조입니다. 64개의 대성괘는 지금까지 보여온 어떠한 철학체계보다도 객관세계의 복잡한 연관성을 최대한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주역의 傳 경에 달린 10개 날개란 뜻으로 십익(十翼)이라 합니다. 공자의 저작이라고 전하나 공동창작으로 추측됩니다.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단(彖)은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경문은 그 의미가 어렵기 때문에 해설서를 먼저 읽어보면 주역의 의미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5. 효(爻)와 괘(卦)
8괘가 그것입니다. 어떤 개념을 천지인의 삼재(三才)로 구성하는 것 역시 그러한 사상의 일환입니다. 그래서 초효가 양효인 경우에는 그것을 초양(初陽)이라 읽지 않고 초구(初九)라 읽습니다. 양(陽)을 구(九)라 하고 음(陰)을 육(六)이라고 하는 까닭에 대하여 많은 논문이 있다고 합니다. 이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육(初六), 상구(上九)등으로 씁니다.
여러분들은 이름과 기능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역을 읽을 때 기본적인 단위, 즉 기본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선 이렇게 합니다. 엄지손가락은 3개의 손가락으로 칩니다. 이 엄지를 나머지 검지, 중지, 무명지 이 3개의 손가락과 연결하거나 뗌으로써 8괘를 표현합니다. 3효가 모두 연결된 모양 즉 양효(陽爻)라는 뜻입니다. 제일 위에 있는 효(爻)만 떨어졌다는 것이지요. 즉 음효(陰爻)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감중련(坎中連)이라 읽습니다. 감괘는 가운데가 연결되어 있다, 즉 가운데 효가 양효(陽爻)라는 뜻이지요. 대학의 교양국어 강의시간에 이 단어를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지요. 읽기는 이허중( ), 이괘는 가운데가 비었다, 즉 가운데가 음효(陰爻)라는 뜻입니다.
8괘를 구성하는 3개의 효 중에서 양효(陽爻)가 홀수이면 양괘(陽卦), 음효(陰爻)가 홀수이면 음괘(陰卦)가 됩니다. 셋 중에서 언제나 소수가 전체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소수가 전체 성격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남자 두 사람과 여자 한사람인 집합(集合)에서 결국 여자의 의견이 관철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까? 남자 2대 여자 1의 구성이니까 결합의 주도권은 당연히 여자가 행사하지요. 괘의 음양을 결정하는 방법이 매우 실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3) 8괘 두 개를 상하(上下)로 겹쳐 놓은 것을 대성괘(大成卦)라 합니다. 이에 비하여 8괘는 소성괘(小成卦)라 합니다. 위의 괘를 상(上)괘 또는 외(外)괘라 하고 아랫 괘를 하(下)괘 또는 내(內)괘라 합니다. 대성괘는 모두 64개가 있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지요. 8 X 8 = 64지요.
괘의 이름을 짓는 방법이나 뜻풀이가 참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팔괘의 모양으로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간(艮)은 산(山)이고 진(震)은 뇌(雷)입니다. 산 아래에 우뢰가 있는 형상입니다. 땅 속에 잠재력을 묻어두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기를 양(養)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진(晉)괘는 지평선에 해가 뜨는 형상으로 풀이하여 진(晉)으로 하고 그 뜻을 나아갈 진(進)으로 하였습니다.
주역을 이처럼 상경과 하경으로 나누기는 합니다만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편의상 상하(上下)로 나눈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0은 3이 홀수로 양이고, 34는 짝수로 음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눈 것으로 이해합니다.
아직 주역의 경문(經文)을 읽지 않았습니다만 먼저 주역을 읽는 방법에 있어서의 특이한 점을 몇가지 밝혀 두어야 합니다. 이른바 주역 고유의 독법(讀法)입니다.
우리는 이 독법으로부터 주역사상의 특징을 찾아내야 합니다. 점(占)이 맞는가 맞지 않는가 하는 것은 주역을 올바로 이해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1) 위(位) 주역의 독법에 관하여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위(位)입니다. 즉 ‘자리’입니다. 어떤 효(爻)의 길흉화복을 결정하는 것은 효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효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사상입니다. 자리가 있습니다. 이 여섯 개의 자리는 1, 3, 5는 양(陽爻)의 자리이고 2, 4, 6은 음효(陰爻)의 자리입니다. 음효가 음효의 자리인 2, 4, 6에 있는 경우도 물론 득위라 합니다. 양효가 음효의 자리 즉 2, 4, 6에 있는 경우는 실위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음효가 양효의 자리인 1, 3, 5에 있는 경우도 실위인 것은 물론입니다. 마찬가지로 음효는 어떤 자리에 있거나 음효일 뿐이라고 하는 고정된 관점은 없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금언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눈이 이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立場)에 달려 있다는 뜻이지요. 당파성(黨派性)과 계급적 이해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길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걱정되지요? 어떤 자리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자리인가를 아는 비결이 어떤 것이지 궁금하지요? 집터보다 집이 크면 그 터의 기(氣)가 눌립니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빌딩은 지기를 받지 못하는 건축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공간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터와 집의 관계도 그렇습니다만 집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궁금한 ‘자리’의 문제로 돌아가지요.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철학’을 강조합니다.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는 30을 어떻게 채울 수 있습니까?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일 그 자체도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잘못된 사람이 차지하고 앉아서 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큰 자리’나 ‘높은 자리’를 선호하는 세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70%의 자리’가 득위(得位)하는 비결입니다. 우리나라 대표팀 축구선수 중에 슛을 130%로 하는 선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경기를 보는 기회가 있으면 누구인가를 찾아보세요. 거명(擧名)하기가 좀 미안합니다. 그것이 70%의 슛입니다.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라는 논리가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주역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득위(得位)와 실위(失位)의 개념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역의 독법은 이처럼 매우 철저한 관계론적 패러다임입니다.
2) 중(中)과 정(正) 같습니다. 주역의 관계론적 성격을 드러내는데 강의의 초점을 둔다면 설명이 없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먼저 중(中)의 개념에 대하여 이야기합시다.
대성괘(大成卦)를 구성하고 있는 여섯 개의 효 중에서 제2효와 제5효를 ‘중(中)’이라 합니다. 제일 위에 있거나 제일 앞에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경쟁사회의 원리와는 사뭇 다릅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거지요. 중간은 무난한 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아마 “뒤로 돌아 갓”을 할 경우에도 별로 지장이 없습니다. 내내 똑 같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파를 많이 겪은 노인들은 모나지 않고 나서지 않고 그저 중간만 가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중간과 가운데를 선호하는 정서는 매우 오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중(中)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은 그물코처럼 앞뒤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 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선망의 적이 되고 있는 선두(先頭)는 스타의 자리입니다. 최고의 자리이지요. 그 자리는 모든 영광이 머리 위에 쏟아질 것 같이 생각되지만 사실은 매우 힘든 자리입니다. 그리고 선두가 전체 국면을 주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선두는 겨우 자기 한 몸의 간수에 여력이 있을 수 없는 고단(孤單)한 처지(處地)입니다. 기를 쓰고 달려가야 할 곳이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무척 편했던 기억도 없지 않습니다. 너무나 왜소한 공간이라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관계 맺기에 매우 창백한 처소(處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힘있는 자리로 칩니다. 그래서 음효가 음의 자리에 양효가 양의 자리에 있는 것을 정(正)이라고 하면서도 가운데 효가 즉 중(中)이 득위하였는가 득위하지 못하였는가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중정(中正)은 매우 높은 덕목으로 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중정(中正)’이란 현판이나 붓글씨를 많이 보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3) 응(應)과 비(比) 우선 응(應)이란 무엇인가부터 보지요. 위(位)란 것이 효와 그 자리의 관계에 관한 것인데 반하여 응(應)은 효와 효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여섯 개의 효 중에서 1효와 4효, 2효와 5효, 3효와 6효의 음양상응(陰陽相應)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위(位)의 개념이 개체단위의 관계론이라면 응(應)의 개념은 개체와 개체가 이루어내는 관계론입니다. 이를테면 개체간의 관계론이지요. 그래서 “실위(失位)도 구(咎.허물)요 불응(不應)도 구(咎)이다. 그러나 실위(失位)이더라도 응(應)이면 무구(無咎)이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의 도처에서 직면하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보면 응(應)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직장의 개념도 바뀌어서 최근에는 직장동료들이 좋은 곳을 좋은 직장으로 칩니다. 비유를 하다가 그만 소유와 접속의 문제에 언급하게 되었습니다만 나는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소유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접속의 시대가 열린다는 거창한 메시지입니다. 시간적으로 분할된 소유이며 동시에 공간적으로 분할된 소유와 다르지 않습니다. 소비단위를 더욱 작은 단위로 분할함으로써 소비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빌려주고 빌리는 관계가 지속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위(位)를 소유에 비유하고 응(應)을 접속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유가 완전히 종말을 고하는 단계, 즉 임대자의 소유권마저 종말을 고하고 모든 소유가 접속으로 전환된 상태로 발전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하자면 사적 소유가 존재하지 않고 국가적 소유나 협동적 소유만 존재하는 소위 사회주의적 체제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소유의 종말’이 전제하고 있다면, 그런 점에서 접속은 이를 테면 사회적 개념, 사회주의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과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은 후기산업사회의 변화된 소비패턴이며 보다 정교해진 마켓팅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는 것도 소유가 아닌 접속입니다. 독선생(獨先生)을 두지 않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나, 예술의 전당에서 음악감 상을 하는 것도 소유가 아닌 접속입니다. 소유로부터 접속으로 전환하리라는 리프킨의 주장은 매우 새삼스러운 이야기로 들리지요.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의 삶과 정서는 기본적으로 접속과 관계를 그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응(應)은 소유의 개념과는 구별될 수 있다는 뜻이지요.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호소 앞에서 더불어 살아가지 않을 수 있는 ‘자유(自由)’가 바로 이 소유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이 비(比)는 인접한 상하(上下) 2효의 상응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점에서 응(應)에 비하여 다소 그 관계의 범위가 협소합니다. 그러나 그 기본적 성격은 관계론임에 틀림없습니다. 주석서(註釋書)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관념적인 해석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오히려 주역 이해에 더 장애가 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효가 처하는 위치 즉 아래위에 있는 효와의 관계에 따라서 그 명칭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르는 이름마저 달라지는 것이지요. 당연히 그 성격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즉 음재양하(陰在陽下)인 경우를 승(承)이라 하고 순종(從順)의 의미입니다. 그 의미를 반상(反常) 즉 역(逆)으로 읽습니다. 개별적 의미는 매우 협소합니다. 그것이 갖는 의미와 역할은 그 개별적 존재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망 속에서 사후적으로 규정되고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주역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관계론(關係論)’입니다. 효와 그 효가 처한 자리(位)의 관계, 효와 효의 관계 즉 응(應), 비(比). 그리고 괘와 괘의 관계 등 ‘관계’가 판단과 해석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읽을 수 있습니다. 있으나 십익(十翼) 이후의 해설은 매우 철학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점(占)이라 하는 것 역시 그 본질에 있어서는 어떤 현상과 상황을 우리들의 일상적 관점과는 다른 논리로 재해 석하고 조명하는 인식체계입니다. 없는 것입니다.
주역은 사회경제적으로 농경적 토대에 근거하고 있는 유한공간(有限空間)사상이며 사계(四季)가 분명한 곳에 서 발전될 수 있는 사상이라고 합니다. 무수한 반복적 경험의 축적과 시간관념의 발달 위에서 성립할 수 있는 사상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목생활은 기본적으로 무한공간(無限空間)사상입니다. 일정한 토지에 정착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언제나 새로운 곳으로 이동해 갑니다. 농본적 문화가 과거의 경험을 매우 중시하는 이를테면 ‘노인보수문화’임에 비하여 유목적 문화는 어제의 경험 이나 노인들의 경험이 별로 의미가 없는 문화입니다. 상(商)문화와 여러 면에서 구별됩니다. 아마 상(商)과 주(周)의 차이에 대하여는 다음에 설명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죽간(竹簡)으로 되어 있는 주역의 가죽끈이 3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많이 읽은 것으로 유명하지요. 그 구성이 어떤지 그리고 괘사(卦辭)와 단전(彖傳)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검토해보는 것이 의미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1) 지천태(地天泰)-1 그 중에서 몇 가지만 보기로 하겠습니다. 주역의 구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몇 개의 괘는 그 핵심적인 의미만을 읽기로 하겠습니다. 천( )위에 지( )를 올려놓은 모양입니다. 다음과 같은 모양입니다.
이제 이 지천태 괘의 경(經)과 전(傳)을 모두 소개합니다. 먼저 괘사(卦辭)입니다. 이 괘사는 물론 경(經)입니다. 8괘, 64괘, 괘사(卦辭), 효사(爻辭) 이 4가지를 경(經)이라 한다고 하였지요. 기억하시지요? 卦辭 泰 小往大來 吉亨 괘사 : 태(泰)괘는 작은 것이 가고 큰 것이 온다. 길하고 형통하다. 이 괘를 판단한 단전(彖傳)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전은 물론 경(經)이 아닙니다. 전(傳)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彖)에 이르기를 태(泰)괘는 작은 것이 가고 큰 것이 오기 때문에 이것은 천지가 만나고 만물이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하(上下)가 만나고 그 뜻이 같다. 내괘(內卦)는 양(陽)이고 외괘(外卦)는 음(陰)이다. 안은 강건(剛健)하고 바깥은 유순(柔順)하다. 군자가 안에 있고 소인이 바깥에 있다. 군자의 도(道)는 장성(長成)하고 소인의 도(道)는 소멸(消滅)한다.
상전(象傳)은 다음과 같습니다. 象曰 天地交泰 后以 財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 以左右民 后(후) : 천상(天上)의 제(帝)에 대하여 지상의 통치자(제후를 포함) 財成(재성) : 재성(裁成). 재단하여 이룸. 輔相(보상) : 도우다. 左右(좌우) : 인도하다.
주(註)를 자세히 달았습니다. 각자가 한번 새겨보기 바랍니다. 왕자는 이 괘(卦)를 보고(后以) 천지의 도(道)에 천지(사람)의 마땅(正義)함을 보태어 대성하게 하고 인민을 (태평하게) 인도하여야 한다. 태괘(泰卦)는 주역 64괘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괘라 합니다. 하늘의 마음과 땅의 마음이 서로 화합하여 서로 교통(交通)하는 괘입니다.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모양은 물론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자연의 형상과는 역전된 모양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태화(泰和)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하늘의 기운은 위로 향하고 땅의 기운은 아래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만난다는 이치입니다. 서로 다가가는 마음입니다. 다음 예제인 천지비(天地否) 괘는 이와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지천태 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의미입니다.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라는 금언이 바로 이 태(泰)괘의 사상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개인의 경우에도 태화(泰和)의 근본입니다. 경복궁에 가본 사람은 기억할 것입니다. 교태전(交泰殿)이 있습니다. 중전(中殿)마마가 거처하는 곳입니다. 흔히 중전이 교태(嬌態)를 부려 임금과 침소에 드는 곳이라고 오해합니다만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은 바로 주역의 지천태(地天泰) 괘에서 이름을 딴 것입니다. 천지교태(天地交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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