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연대의 순서 없이 종문(宗門)을 빛낸 커다란 별들의 수행과 입도기연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본다. 이래서 먼저 손에 닿은 것이 ‘고봉 원묘선사’다.
고봉 스님은 스님이라면 누구나 아는《고봉선요(高峯禪要)》의 주인공이다. 생존 연대는 1238~1295. 이때는 우리나라 고려의 고종, 원종, 충렬왕의 재위시기다. 몽고병이 이 강토를 침략한 뒤에도 우리 민족은 굴하지 않고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책을 만들었고 그보다도 ‘고려장경판’을 완성한 시기에 해당한다.
당시 중국도 몹시 어려운 때다. 금, 남송이 원으로 대립하다가 금이 먼저 망하고 남송이 망한 것이 1279년이다.
이런 때에 고봉스님이 나셨다. 그리고 전 생명을 걸고 수도하여 대오하였고 그리고는 평생을 전법 교화에 바쳤다. 고봉스님이 교화한 곳이 천목산(天目山) 사관(死關)이다. 이곳에 16년을 머무시면서 학도를 제접하고 4중을 교화하였는데 그 수효는 기만 명이 넘었다고 기록된다.
스님의 수행과 입도기연에 대하여는 마침 고봉 스님 자신의 손으로 된 자전(自傳)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군말없이 이것을 옮기는 것으로 우선 책임을 모면하기로 한다.
입도기연
-고봉원묘선사 자전
나는 열다섯 살에 출가하여 열여섯에 중이 되었고, 열여덟에 불경을 배워 스무 살이 되어 처음 선방에 들어가 참선하기 시작했다.
나는 3년 동안에 죽음을 한정하고 참선을 마칠 작정으로 서원을 세웠다. 그리고 ‘단교화상(斷橋和尙)’에게 가서 법문(法門)을 청했더니 스님께서 나에게 생사화두(生死話頭)를 일러 주시면서,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데로 가는가?”
이것을 간절히 의심해 참구하라 하시기에 이 화두를 가지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이 언제나 두 갈래로 갈라져 공부가 한결같이 되지 않아 탈이었다. 매일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처럼 서성거리며 고민 속에 1년 남짓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태주정형(台州淨兄)이라는 분을 따라 북간탑두(北磵塔頭)에 가서 설암화상을 뵈옵고 법을 물을 기회가 마련되었다.
스님께서는 처음 좀 야단치셨지만, 곧 나의 공부에 병통을 잘 고쳐주시고 조주 ‘무자화두’를 공부하라고 일러 주셨다. 그리고 매일 점검을 받으라고 하시면서, “길 가는 사람처럼 날마다 그 공정을 알아야 한다. 오늘도 그만 내일도 그만 해서는 안 된다. 물에 담갔다가 건져낸 돌대가리 같은 놈은 패죽여도 무죄리라”고 하시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방장실에 올라가 인사드리기로 했다. 언제나 뵈올 적마다 “금일 공부는 여하(如何)오?” 하시고는 다시 “너,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누구냐?” 소리치시면서 냅다 주먹으로 한 대 갈겨주며 쫓아내는 것이었다. 날마다 이렇게 묻고 이렇게 때리시니 나는 쫓기고 쫓겨 더 갈 수 없는 궁지에 몰려 핍박당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렇게 하기를 근 3년 동안 나는 하루 두 때, 죽과 밥(아침, 점심) 먹는 시간을 제하고는 자리에 앉지 않고 아무리 피곤해도 기대지 않았었다. 그저 밤이나 낮이나 동으로 서로 사뭇 경행(徑行)하면서 무진 애를 쓰기도 했지만 그러나 항상 혼침과 산란, 이 두 가지에 끄달리고 휘말려서 그렇게도 공부가 안 되는 것이었다. 어찌나 화두가 잡히지 않는지 끝내 밥 한 술 먹는 사이도 수월하게 일념(一念)되는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화두를 들 적에는 있고 안 들면 금방 없고 가령 화두를 들고 의심을 지었다 하더라도 이것을 또한 잡아둘 수가 없고 어쩌다가 화두를 잡아두고 의심을 해간 듯했어도 이것은 그저 잠깐 사이 뿐이고 또다시 그만 혼침과 망상에 끄달려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느라고 허다한 세월을 허비했으며 허다한 고생을 다한 셈이지만 조금도 진취(進趣)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한 해에는 경산 지방에 가서 지내게 되었는데 하루는, 그러니까 그 날이 3월16일 밤이었다. 졸다가 꿈속에서 그전에 단교화상께서 설법하실 제 말씀하시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화두가 문득 생각났는데 어쩐 일인지 이로부터 의정(疑情)이 돈발(頓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장에 화두는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버렸으니 그대로 무심삼매(無心三昧)가 현전(現前)해서 동과 서를 잊었으며 밤과 낮도 잊었으며 밥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모두 잊어버린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대소변을 보거나 자리에 앉아 발우를 펴거나 그야말로 일동일정(一動一靜) 일어일묵(一語一黙)이 전부가 다만 ‘일귀하처(一歸何處)?’뿐으로 다시는 털끝만치도 딴 잡념이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치 못을 박고 아교를 붙인 것처럼 절대 부동이 되었으니 아무리 조인광중(稠人廣中) 많은 사람 속에 있다 해도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아침에서 저녁까지, 저녁에서 아침까지 그대로 징징(澄澄) 담담(湛湛) 탁탁(卓卓) 외외(巍巍)해서 순청절점(純淸絶點)하고 일념만년(一念萬年)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어느 결에 엿새째 되던 날이었다. 대중 스님네가 승당(僧堂)에서 나오시는 것을 보고 그 가운데 섞여서 삼탐각(三塔閣, 달마․지공․법연의 영각)에 올라갔다. 그리고 경을 외우면서 돌아가다가 문득 ‘법연(法演) 화상’의 진영을 쳐다보았는데 그 곁에 쓰인 글귀 끝줄에 “백년 삼만육천 날을 반복하는 놈, 원래 이 놈”이라 한 것을 보는 찰나에 전에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라는 화두를 확! 깨친 것이었다.
그만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나도 없고 너도 없어졌으니 거울이 거울을 비추는 듯, 깜박 한 번 죽었다가 소생한 듯, 마치 120근짜리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것이었다.
여러 가지 고인의 공안들을 가만히 증험해 보았더니 하나도 걸릴 것이 없는 듯 요요(了了)한 반야(般若)의 묘용(妙用)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었다. 이 날은 바로 신유년 3월22일 소림기일이었고, 바로 내 나이 24세가 되었으며, 만 3년의 기한이 차던 해였던 것이다.
여름철 해제를 하고 나서 그때 남명에 계신 설암 노화상에게 가서 예배 올리고 말씀드렸다. 여러 가지를 물어 시험하시고 하련해 보시었다. 여기에 나는 공안의 대답을 분명히 했고, 또 어떤 속임수에도 넘어가지 않았었다. 그러나 어쩐지 말할 적마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흐릿함이 느껴져서 일용 중에 자유롭지 못한 것이 마치 남의 빚을 갚다가 남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4년이 지난 뒤 을축년이 되던 해였다. 노화상을 따라 천녕으로 가는 도중이었는데, 노화상께서 물으시기를
“일간(日間) 호호시(浩浩時)에 작득주(作得主)하는가?”하시기에,
“작득주(作得主)합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또,
“수몽(睡夢) 중에도 작득주(作得主) 하는가?”하시기에 역시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잠 폭 들었을 때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없을 적에는 너의 주인공이 어데 있는가?”
하시는데, 그만 여기서 꽉 막혀 대답할 말을 잊었고 어떤 이론도 감히 펴놓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화상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오늘부터는 불(佛)을 배우려고도 말고 법(法)을 배우려고도 말며 옛것을 궁구하고 지금 것을 분별하려고도 말라. 그저 배고프면 밥먹고 곤하거든 잠자고 잠이 깨거든 정신을 가다듬어 너의 일각(一覺)하는 주인공이 필경 어느 곳에 안신입명(安身立命)하는가? 라고 생각해라.”
하시었다. 나는 이 말씀을 믿고 준수하려고 결심했지만 참으로 밝히기가 점점 어렵기만 했다. 그래서 내 스스로 맹세하기를, ‘일생을 내동댕이치고 바보 천치가 될지언정 이 도리를 명백케 하고야 말겠다.’ 했던 것이다.
그 후, 5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하루는 어떤 암자에서 쉬고 있던 중, 자다가 잠을 깨어 이 일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문득 같이 자던 친구가 목침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툭딱!”하는 소리를 낼 제, 활연히 의단(疑團)을 타파하고 만 것이다. 마치 그물 속에 갇혔다가 뛰어나옴과 같다고나 할까? 모든 역대 불조사(佛祖師)들의 가지가지 공안이나 고금의 모든 차별인연들을 돌아다보니 죽음에서 살아날 길이 트인 듯, 멀고 먼 길손이 고향에 돌아온 듯 원래로 옛적 그 사람이고 옛날 하던 짓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이로부터 안방정국(安邦定國)하며 천하태평하며 일념무위(一念無爲)하여 시방을 좌단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