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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탐
진궁들 끝자락 남산에 해가 두어 발쯤 걸려있을 무렵 아곡에 용모가 수려하고 해끔한 의복에 외모로 보아서 사대부가 자제로 보이는 젊은 사내와 입성이 허름하고 인상이 날카롭게 보이는 사람은 입술이 두툼하여 썰으면 한 근은 족 하고, 코는 주먹코에다 눈은 독사눈이며 광대뼈가 양 볼에 주먹만 한 돌덩어리를 붙여 놓은 것 같았고, 중키에다 어깨가 딱 벌어진 것이 몸체가 단단한 바윗덩이같이 찔러도 피한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체구인자와. 반면에 해끔한 입성을 한자는 고생을 안 하고 자란 티가 역력했다. 갸름한 몸매에 서글서글한 눈에는 웃음기가 어리고 오뚝한 콧날과 가냘픈 입모양은 얼핏 보기에는 선한 한량으로 보이나, 어딘지 모르게 잔망함이 묻어있어 가볍게 보인다.
함께 봇짐을 지고 가는 일행이 완쟁이골에서 내려와 이곳저곳을 살피는 모습은 얼핏 보면 봇짐장수로 보일수도 있고, 아니면 그들이 어느 호족을 앞세워 전답을 살피러 다니는 행객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시국이 전란이 일어나 향촌을 버리고 난을 피해 다들 피난을 하는 판국에 전답을 사려는 사람이 있기가 만무이고, 봇짐장사를 다니는 것은 더더욱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아곡리 전답은 거반 국전과 지방관전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전답투매가 어려운 곳이다. 더러 사대부들의 사전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란 때 전답투매를 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고, 시국이 시국인 만큼 될 리 없는 장사치가 등짐장사가 다니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서로 말이 없는데다 허름하게 보이는 자가 더 눈매가 날카로워 보이는 자가 손짓이며 행동거지가 젊은이를 아랫사람 부리듯 하는 모습이 역력 하였다. 그들은 창성 쪽으로 가 지세며 성곽 규모를 요모조모 살피기도 하고 집들의 가구 수를 헤아려 보기도 하는 모습이 그냥 지나치는 봇짐장사 행객들이 하는 행동 치고는 세심히 관찰 하는 게 아무래도 수상하기가 이를 대 없다. 그리고 창성을 보는 시선은 대수롭잖게 보는 눈치였다. 그 도 그럴 것이 따지고 보면 성이라 볼 수도 없는 형편없이 작고 볼품없는 규모의 작은 토성이었다. 저 까짓 성이라면 말발굽 몇 자국이면 허물어 질것 같은 하잘것없는 토성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관군이 성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살펴도 군졸이라고는 씨알맹이도 안보이며, 사람들이라고 보이는 것은 창고지기로 보이는 장졸 몇몇이라 겉으로 보기에도 규모는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들이 찾은 곳은 처인 부곡창성이었다. 주변마을 몇몇 가호가 무리를 이루어 옹기종기 모여 있어 겉보기에는 아주 평화로운 작은 전원마을이었다.
토성외곽은 함봉산 밑자락에 작은 초가토담 집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고 집들은 저녁밥을 지으려는지 옥척(屋脊)넘어 굴뚝에선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다 산중턱에 연무를 흰백으로 채색하였다가 산화되어 사라진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 천민들이며 대체적으로 창성에 부역을 하며 연명하는 부곡민들이다.
그들은 지금 시각이야 고단한 하루일들을 접고 안식을 취하려 할 수 있는 시각이 닥아 오지만 매일 반복되는 중한 노무에 잠시도 허리 펴 쉴 시간이 없다.
처인부곡 주민들 대부분은 창성(倉城)의 부역에 종사하는 인근 부곡민들이며, 농번기는 농역을 한다. 농한기인 지금은 부곡민들 대부분은 멱둥구미, 멱서리,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치는 일을 한다든지 땔감과 농번기에 사용할 농자재를 생산 하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다.
부곡민은 둔전(屯田) 공해전(公廨田)등 나라에서 직속지를 경작하는 장(莊)과 처(處)의 주민은 왕실이나 사원에 조세를 부담하는 장처전(莊處田)의 토지를 경작한다. 또한 자기소, 철제 공산품이나 도자기 수공품등의 공납품을 제조하여 국가에 바치는 곳이다. 이들은 세도가들의 사역까지 담당해야 하며 심지어 호족 노비짜리 종노릇까지 해야 된다. 호족들의 사전에 사역을 하는 것도 부곡민의 일이다. 더러는 군으로 징집하여 군역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농사일에 부역을 한다.
지방의 호족들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수주부 관할 호족들 역시 지역의 호장으로 향리직(鄕吏職)을 자자손손 세습하며 지방 세력으로 그 지위를 유지해갔다. 이들 호장(戶長)은 지위를 세습하여 지역 내에서 일정한 세력을 가지고 심지어 지방관을 대행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부곡민의 민생고는 이른바 혹독한 삼세(三裞)조세의 굴레를 짊어지고 가는 그 외에도 호족들이나 향리까지 특별공역 까지 감당해야 하는 이중고의 공역에 시달려야 하므로 내심 나라의 반하는 민란이 끊이질 않는 형편이다.
그나마 저들이 누리는 평화로운 안락은 이제 얼마 후면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풍지박살이 날것을 지금은 꿈에도 생각지 못 할 것이다.
창성토성은 높이는 삼십자는 족히 되어 보이고, 둘레는 오백보 가량 되어 보이는데 평지에 세워진 토성이었다. 차이탄이 보기에는 그냥 작은 사방으로 둘러 쌓인 둔덕에 불과할 뿐이다. 이정도 규모라면 전투를 치를 것도 없이 그냥 군사들을 대동하고 들이쳐 들어와 창고에 있는 양식을 우마차에 실어 내오면 되는 일로 보인다. 창성의 곡간의 규모는 겉보기와는 달리 장방형의 토성 안에 천여석의 알곡을 쌓아놓을 수 있는 곡창이 여러 채가 있고, 토성정문은 거반 한 뼘 가까이 되는 통나무를 연결하여 세운 대문이 육중하게 서있다. 토성 사방으로 망루가 세워져 사람이 경계를 서는 걸로 보아 창고 안에는 식량이 쌓여 있는 것이 틀림없다. 차이탄은 이현수를 시켜 정문에 경계를 서는 사내에게 이런저런 말을 시켜 미곡 일천석과 잡곡 천여석이 창고 안에 적치되어있는걸 확인했다.
“상중덕 자기소와 처인부곡 창성을 둘러보았으니 이제는 활궁소와 주철소를 찾아보자.”
“주철소라 구요..??”
“그렇다...!!”
“주철소를 찾으려면 창화 안무(淸州)로 가야하는데 지금 창화로 가려는 것입니까??”
“창화가 여기서 얼마나 되는가..??”
“창화를 가려면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쉴 참 없이 족히 하루하고도 한나절은 가야합지요.!!”
“그러한가..??”
이들 중 젊은 사내는 얼마 전 사호군장이 척후병에 딸려 보낸 이현수이고 또 한명은 몽골군사 정탐병 차이탄 이었다.
창화 제철소는 고려제일의 주철소이다. 아무리 이현수가 배알 없기로서니 적들에게 고려 제일의 주철소까지 데리고 갈 마음은 없다. 창화 주철소는 고려전국의 철산지중에 가장 으뜸으로 제련된 철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며, 검과 각종 병장기, 농기구를 생산하려면 창화 철을 사용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짜리 한곳이다. 또한 그곳으로 가려면 설성무극(음성 금왕)을 지나야 하는데, 그곳 또한 금채굴이 있어 이 두 곳 모두가 몽골인들 에게는 중요한 자원(資源)으로서 혈안이 되어 찾으려 할 곳이다. 이현수가 포천 세거지에서는 가친이 현감이라는 직분을 이용하여 비록 무뢰배들과 어울려 한량 짖은 하고 다녔으되 나라의 본분까지 잊을 리는 없으나 적에게 잡혀 워낙 목숨이 경각이라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기는 하여도 자신이 차이탄과 다니며 하는 짓이 적에게 세작노릇을 하는 것이라 겉으로 드러내진 못하여도 나라에 죄를 짓는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유야 어찌되든 이현수는 몽골군에 잡힌 포로이며, 이현수의 알량한 행실을 이용하여 전략적 목적을 요하는 군량이든가 공격용 무기를 확보하는 동시에 지형을 이현수를 앞세워 살피기 위함이었다. 이현수 제 딴에 눈에 안 나게 요모조모 살피고 유창한 언사로 몽골군에 도움을 빠져 보려함인데 용의주도한 몽골 세작은 잠깐의 틈을 주지 않는다. 이현수는 그런 매몰찬 몽골세작 차이탄에게 꼼짝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야속하기도 하였다. 틈을 보아 이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도 해 보았으나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늦은 중화참에 서리자기소 인근 주막집에서 돼지 뼈다귀 고운 장국 국밥을 엽전을 주고 사먹고 나서 차이탄은 후출 한 참에 허겁지겁 먹은 탓인지 아랫배를 싸잡아 쥐고 뒷간을 갔을 때 이현수는 슬쩍 자리를 떠 몸을 숨기려고 하였다가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차이탄의 품속에서 양몰이 채찍을 꺼내 이현수 다리목을 휘감아 제쳐 자빠트려 놓고, 발끝으로 명치를 호되게 차이는 바람에 몸을 웅크리고 숨을 토하느라 애를 먹었다. 한동안 숨이 목에 걸려 사색이 되었다가. 가까스로 숨을 토 하고 간신히 호흡을 찾았지만, 황천객이 되는 줄 알았다. 그는 또다시 이러면 즉시 목을 참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를 하였다. 이현수는 훼장삼척(喙長三尺)이 되어 버렸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으나 목숨 줄을 잡고 있는 차이탄의 위압에 눌려 아무런 저항도 못 한 채 끌려 다니는 형편이다. 그러니 차이탄 앞에서의 잔재주는 감히 엄두도 못 낼 판이다. 허나 따지고 보면 이곳은 미 점령지인 적지가 아닌가, 적지로 정탐병을 보낼 때는 무예가 능 한자를 뽑아 보낼 것이다. 차이탄 역시 행동이 빈틈이 없고 움직임이 날렵하니 세거지에서 천요만악(天妖萬惡)을 일삼던 허접 쓰레기 같은 이현수 정도야 차이탄은 양몰이 하듯 제 맘대로 몰고 다닐 것이다. 국밥을 차려 내어 주었던 주막집 아낙이 개숫물을 버리다 이들의 행각을 보고 깜짝 놀라 뜨악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차이탄은 일 없다는 듯 태연자약하게 자기소를 살피고, 서리 무너미 고개를 넘어 완장골을 지나 아곡리 창성에 왔었다.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는 인간사의 심사를 알 바 없이 어느덧 떨어져가는 해는 저 멀리 서쪽 산에 가을홍시 감빛처럼 빨갛게 불원이 되어 잔영만 산언저리에 떨어진 해를 잡고 아쉬운 듯 홍장만장(紅長萬丈)되어 세상사 소소함과 잔인한 전란에 참혹함, 수많은 인간들의 목숨이 명재경각(命在頃刻)이 달렸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홀연히 자연(自然)의 만상(萬像)은 온통 서쪽 하늘에 흩뿌린다. 흑암의 어둠이 골짜기를 타고 슬며시 덮어오자 더욱더 부산히 아곡뜰을 벗어나 진궁뜰로 접어들었다. 어둡기 전에 주철소를 살펴보고 오산 천안으로 가는 길을 확인한 뒤 귀영 하여야 한다. 아마 내일쯤 본대가 수주 쪽으로 진군할 터이라 광주를 향해 가야할 것이 아니라 새로 진을 친 수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새벽 여명으로 별빛이 흐려질 무렵에 광주 진중을 나서 쉴 짬 없이 내리 팔십리 길을 걸어 기흥을 지나 쑥고개를 넘어 서리자기소를 찾아간 것이 중화참이 훨씬 지나 미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다.
과히 듣던 대로 중상덕 자기소는 청자와 백자가 생산되는 고려최고의 상등 품질이었다. 유약 가운데 미량의 철분이 있어 환원염(還元焰)에 구워지는 과정에서 청록색의 유조(釉調)를 띠게 되는데, 대체로 환원이 불충분하거나, 또는 불순물이 함유되어 있으면 유색이 녹황색이나 회녹색이 된다. 때로는 산화 되어 황갈색을 띤 것도 청자라 부른다. 다만 구리성분의 산화에 의한 녹유(綠釉)는 청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청자는 산지와 시대에 따라 갖가지 구별이 있다. 중상덕 자기소는 주로 대접, 호리병, 청자주자. 문매병 등 일반 서인들은 엄두도 못 낼 뿐더러 주로 왕가나. 귀족. 호족들만이 쓸 수 있는 상등품들이 생산된다. 이들은 자기들의 일에 정신 팔려 누가 오고가는지 개의치 않는 표정들이다. 늘 자기소는 향족이나 귀족짜리 호족짜리 노비들이나 들고나고 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고려초 강진요(康津窯)와 부안요(扶安窯)에서 청자를 만들어 내었고, 급속도로 전국으로 성장하여 서리가마에서도 아름다운 색의 청자를 생산 백토(白土) 자토를 바탕으로 청자를 상감하여 청자유를 씌워 굽는 상강청자와 철회문양의 화청자를 주로 생산 하였다. 그러나 청자보다는 서리 토양의 점토가 맥분처럼 고와 백자기를 주로 생산하는 편이다. 도자기의 점토의 종류에 따라 도자기 구분이 결정되는데, 보편적으로 온도와 유약의 유무로 자기가 구분이 결정된다. 점토 내에 기포가 있어 다공성이며 물을 잘 흡수하는 토기 즉 옹기이며, 또한 회석이나 백운석을 회석하는 도기, 흡수성이 거의 없고 단단하면서 투광성이 있는 도자기이다. 서리백자는 점토가 우수하여 품질이 도자기로서는 가장으뜸 이었다. 또한 자기 굽는 가마 크기의 길이가 장정 걸음으로 백보 가까이고 높이가 어른키 한길 반은 되어 보이는 엄청난 규모의 가마였으며, 다른가마 역시 길이가 오십보 정도 되는 중가마가 중덕과 상덕에 각각 위치하고 있었고, 갓 빚어낸 초기실(初器室), 굽기 전에 틀을 잡아 자기형태를 잡아주는 마조쟁이실, 도자기문양이나 화청을 그려 넣는 화청실(畵靑室), 유약실등 실로 규모가 말로만 듣던 것보다 상당히 큰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종사하는 근로인만 해도 주변에 수없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옥들의 규모로 보아 가히 얼핏 보기에도 수백 가호가 있으니 저기에 기숙하는 인명의 수효가 짐작을 가늠할 수가 있다. 가마의 불은 며칠 전에 멎었는지 온기가 쇠잔하여 냉기가 감돌았다. 아마 여기에도 전란의 소식을 들은 자기소 도공들은 일부는 각자 향촌으로 떠나고 일부는 사택에 있는지 사람이 보이질 않아 자기소는 적막강산이다. 다만 납품을 하려는 도자기들을 풀 꾸러미에 꾸리는 이들만 서둘러 움직임이 부산하다. 차이탄도 자기소의 규모가 내심 놀랐는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못했다. 차이탄의 말로는 몽골에는 자기소가 없다고 하였다. 몽골에서는 이런 정도의 사기그릇은 진귀한 물건이라고 말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청자의 색은 은은하면서도 청아한 색감은 마치 맑은 이른 아침 터 오르는 햇살을 받아 한 점의 티 도 없는 청청한 하늘색이기도 하고 얕은 모래를 덮고 출렁이며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속에 파장된 푸른색이 보일 듯 말듯 숨어 있는 색감도 보이며, 엷은 모래사장에 낮게 덮인 쪽빛 바다와도 같은 색을 머금은 듯 하기도하다. 마치 물과 하늘을 포개어 엷은 청정한 푸른빛을 빚어 작은 도자기에 응축 시킨 것 같다. 사군자를 수놓아 청렴결백을 표상하여 탐관오리들에게 표본이 되라함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굳은 절개를 지향하여 충효의 도를 지키라는 준엄한 경고이기도 하다.
백자역시 깊이를 알 수 없는 순백색의 잔잔함을 작은 도자기 표면에 편안한 마음을 놓게 하기도 하고, 높은 하늘을 우러러 보지 말고 순백인 나를 보란 듯이 도도함과 은은함이 기품을 알몸으로 들어내어 보이기도하다. 온천지 백설이 뒤 덥혀 더럽고 추악한 인간들의 군상을 백색으로 뒤덮어 버리려는 의지인지 모르겠다. 무한함이 끝 간 데 없을 듯 깊이를 알 수 없는 공간에 한 마리 학이 노닐며 금방 보금자리를 찾아 날개를 접어 사뿐히 내려앉을 태세가 보이기도 하고, 저 높은 창공으로 도약 하려는 날개 짓도 보인다.
청룡의 기세가 우아한 자태를 휘감아 뒤 틀 으니 보는 이가 주눅이 들 정도이다. 힘차게 용틀임하며 천지를 포효 하듯 입을 쩍 벌리고, 날카로운 발톱은 세상을 움켜쥐려는지 한껏 날을 세워 위압감을 내보였다. 아마도 도공들의 자유로운 세상을 훨훨 날아가는 학이 부러웠고 강자에 대항 못하는 자신들의 나약함을 위엄에 상징인 용을 넣어 순백함과 위엄 그리고 자유로움을 녹녹히 묻어 표현 하였으리라. 한줌의 흙들이 뭉쳐서 빗고 유약을 발라 여러 차례 공정을 거쳐야 비로소 세상에 빛을 보니 만든 이의 노고가 새삼스레 경이하기만하다. 어쩌면 천민들의 심중을 도자기청백색과 자화로 세상에 보이려는 작은 마음일 수도 있겠다.
수없이 많은 자기들이 자기소 주변에 상품과 하품을 선별하여 납세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 품질 따라 자기의 형체 따라 가지런히 진열되어 제각각 임자를 기다리는 듯하다, 도공들이 보아 상품 가치가 없는 것들은 도자기들은 망치로 깨어 부셔 버렸다. 깨어 버려진 사금파리들은 거대한 산을 이루어 놓았다. 이현수도 내심 이정도 대규모 인가하고 놀라 하면서도 미개인 같은 몽골놈에게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가 어쩌다 이놈들에게 포로가 되어 한심한 꼴이 되었는지 자책감으로 한숨만 나올 뿐이다.
이제 얼마 후면 이들이 쳐들어와 모조리 귀한 물건들을 약탈 할 것이고, 인명들이 혹은 무참히 살육 될 것이며, 아녀자들은 무자비하게 치욕을 당할 것이다. 자기소와 주철소, 유기소, 갖바치, 공산품기술자들은 포로가 되어 구만리 낮선 이국땅으로 끌려 갈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라 생각하니 한구석은 적도들에게 길라잡이를 하는 자신이 좋을 리만 없으나 이자의 손아귀에 벗어날 수 없으니 하릴없는 일이라 자책하고 말았다.
어둠이 살포시 가라앉은 산자락에 하루해에 배를 못 채웠는지 산 꿩 들이 들녘에 내려와 먹이를 찾아 먹다가 인기척에 놀라 자웅성을 질러대며 다투어 산허리로 날라 간다. 차이탄이가 순식간에 표창을 던지자 날라 가던 미익(尾翼)이 수려한 장끼 한마리가 공중제비 하면서 잔풀이 가지런히 다듬어진 묘봉위에 털썩 떨어졌다. 그래도 달아나 보려는지 안간힘을 써 바둥거렸으나 표창은 이미 장끼의 숨통을 잘라놓은 모양인지라 이내 목에 걸린 숨을 마지막으로 삼키면서 고개를 떨구엇다. 이현수가 산비탈로 쫒아 올라가 꿩의 목줄을 움켜쥐고 벙글거리며 뛰어 내려왔다. 차이탄의 무예가 만만하게 볼 위인이 아니란 걸 짐작은 하였지만, 그 짧은 찰라 적인 몸동작으로 품에서 비수를 꺼내 대수롭잖게 날려 날아가는 궝을 단박에 잡는 솜씨는 그저 놀랍고 신기할 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얻어걸린 횡재로 오랜만에 꿩고기를 먹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려 벙긋거림을 감추지 못하였다. 차이탄은 그 자리에서 예리한 비수로 꿩의 깃털을 벗겨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버리고 살점을 회를 쳐 날것으로 먹는다. 몽골인 들의 식성이 날고기를 먹는 습관이 있어서인지 게걸스레 잘도 먹는다. 하지만 이현수로서는 명색이 사대부 자제로서 날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몽골 진영에서 말을 잡아먹어도 이들은 거반 날고기를 먹다보니 이현수는 견디기가 힘들어 졌었다. 그는 비위가 상해 한 절음 주는 걸 사양하니 더는 권하지 않고 매몰차게 꿩 한 마리를 다 먹는걸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오랜만에 모닥불을 놓아 꿩고기구이를 맛 좀 보려나 했더니 군침만 삼키고 허방다리만 놓고 말았다.
이현수와 차이탄 일행은 진위천을 따라 이십 여리를 행보하여 남산말로 온 것은 이미 날은 꼴딱 저물어 마을이 어둠에 묻혀 지척을 알아볼 수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상현달은 간간히 구름사이로 내달리다 어둠을 살짝 살짝 비춰주는 월광만으로 주변을 분간할 수가 있었다. 하룻밤을 어딘가에서 유숙을 해야 하는데, 차이탄은 이현수가 걸려 깊은 잠을 자기는 애시 당초 틀렸다는 생각이다.
명일에는 각궁마을 활궁소와 백성(안성)유기소를 찾아보고, 충청도를 향하는 길을 찾아 본 연후에 귀영을 해야 하므로 천상오늘 하룻밤 유숙 할 곳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거처를 잡기가 그리 녹녹치가 않았다. 한참을 각궁마을 여러 집을 찾아 남산자락의 허름한 귀틀집을 찾아 들었다. 병색이 완연한 늙은 노파 홀로 사는 집이었다. 이현수가 하룻밤 유숙을 엽전 몇 닢을 주고 청하였다. 하지만 낮선 객이라 그런지 노파는 자신이 병자라는 이유와 한 칸 밖에 없는 거처라고 한사코 거절하였다. 이 밤중에 다른 집을 찾기도 그러하여 광으로 쓰는 외양간이라도 청하자 마지못해 응하긴 했으나 노파는 편치 않은 듯하였다. 전란이 휩쓸고 오자 인심은 말도 못하게 흉흉해진 모양이다. 이현수는 마지막으로 벗어날 기회를 잡고 오늘밤 달아날 궁리를 하며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허무하게 깨지고 말았다. 이자가 그리 호락한 인물이 아닌지라 이현수의 잔꾀를 미리 알고, 팔을 뒤로 묶어 결박 짓고, 이어발목까지 묶어 놓으니 밤새 고통 속에 자는 둥 마는 둥 뜬눈으로 밤을 세고 나니 온 삭신이 찌뿌드드한 것이 곤장이라도 맞은 것처럼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이들은 아침 일찍 길을 나서 각궁마을 활기소를 찾았다. 활은 일 년 중 음력시월부터 이듬해 삼월까지 수공으로 만드는데, 그 이유는 접착제로 쓰이는 민어부레풀 때문이다. 민어부레풀은 날이 더워지면 접착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쉽게 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현수 일행이 찾아본 활기소는 지금 한창 활 제작에 여념이 없을 때이다. 각궁마을은 이름그대로 활을 제작하는 마을이다. 이십여 호가 넘는 각궁마을은 마을 전체가 활제작소로 보였다. 가가호호 모두가 활 부위 한 두 가지 전담을 하여 분업화되어 공동 작업을 하는 형태인데 그 규모가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각궁(角弓)은 맥궁이라고 하기도 하며, 전시와 수렵용, 연락(宴樂)과 習射用의 두 가지가 있다.
각궁이라고 하면 장궁을 뜻한다. 각궁의 소재는 일곱 가지(물소뿔, 산뽕나무, 쇠심줄, 민어부레풀, 참나무, 대나무, 화피, 자작나무 껍질)이다. 자연 속에서 찾아낸 일곱 가지 소재를 합성해서 만든 만곡궁(彎曲弓)이다. 각궁은 장이 짧고 가벼우면서도 저항력이 아주 강하다 각궁은 쏘는 사람의 힘에 따라 강궁(强) 실궁(實) 실중력(實中力) 중력(中力) 연상(軟上) 연중(軟中) 연하(軟下)로 일곱 단계로 구별 제작되어 왔다. 누구든지 자기의 몸에 맞는 화살을 선택하여 쓸 수 있도록 제작되어있다 이른바 맞춤식보다 대중성을 고려해 제작하였다고 보면 적절하다. 각궁 외에 여러 가지 활이 제작 되었는데, 차이탄이 보기에 몽골군에서 사용하는 합성궁도 여기서 제작 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을 하였다. 합성궁은 활 중에서 가장 발달된 구조를 가진 강력한 것이며, 궁체의 길이가 짧아도 긴 단순궁에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기마민족의 무기로서 쓰였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활 잘 쏘는 이’를 가리키는데, 기마민족인 고구려는 활을 잘 다루는 민족이었다. 중국인은 한민족을 동이족이라 했는데, 이는 ‘동쪽의 활을 잘 쏘는 민족(夷-大弓)임을 나타낸다. 부족국가에서 무기로서 사용한 활은 숙신(肅愼)의 호시석노(矢石弩),예(濊)의 단궁(檀弓), 고구려의 맥궁(貊弓)이 있는데 이는 서로 다르다. 호시란 광대싸리로 만든 화살로서 길이가 한자 여덜치이며, 살촉은 백두산에서 산출되는 흑요석(黑曜石)으로 만들었다.
고구려의 맥궁은 각궁(角弓)이었으며 222년(고구려 산상왕26)이전부터 사용하였다. 신라에서는 558년(진흥왕19)에 내마(奈麻) 신득(身得)이란 사람이 포궁(砲弓)을 제작하였으며 백제에서는 이 기술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켰다. 그런데 수백년 후 몽골인 유목민 테무진은 가공할만한 포궁을 적의 머리를 베어 수급을 포환으로 쓰고 있다. 성안으로 사람의 머리가 날아 들어오니 군사들은 공포에 질려 너나 할 것 없다
차이탄이 본 고려는 상상이상으로 기술력이 장대 하였고,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될 일이라 마음을 다잡고 안성으로 향했다. 白城(안성)또한 차이탄이 또한번 놀라 머리를 흔들었을 정도였다. 白城(안성)이 어딘가, 白城은 유기로 유명한 곳이 아닌가, 방짜유기산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은 개성과 白城(안성)이었다.
놋쇠로 만든 그릇을 유기라고 한다. 놋쇠는 구리에다 주석을 섞은 합금이며 청동기시대의 청동도 놋쇠의 일종이다. 따라서 유기의 역사는 멀리 청동기시대로 올라가며, 삼국시대에도 신라에 철유전(鐵鍮典)이라는 유기전담기관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유기 제작기술이 매우 발달하여 얇고 정교한 유기를 제작함으로써 금속공예의 수준을 한껏 높였으며, 놋쇠가 평민층까지 확산되어 각종 생활용기 및 농악기나 불교용구(佛具)가 놋쇠로 제작되었다. 白城(안성)에서는 식기류와 반상기 및 제향에 필요한 제기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활용구를 많이 만들었는데, 백성의 유기는 제작기교가 매우 발달되어 기형이 아름답고 정교하다. 몽골군은 이곳 백성 방짜 유기소 까지 살피는 걸로 보아 틀림없이 백성유기소도 무사하지 못하리라.백성유기소와 팽성 천안을 돌아오려면 오늘 해안에 진중으로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늘쯤 권황제 살리타이는 수주로 진군하여 구성현에 당도할 것이라는 차이탄의 예상이었다. 차이탄은 일단 창화주철소는 다음으로 미루고 입장 팽성 운암들을 돌아 귀영하리라 걸음을 재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