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면의 지명유래
◎ 가구리(佳邱里)
가구리는 와룡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1.5km쯤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와룡산이 대치하고 서쪽으로 진봉산(振鳳山)의 봉우리와
계곡이 첩첩이 쌓여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구한말 안동시 동선면의 지역으로서 가구들, 가구, 가구촌이라 하였는데 왜정초인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가구동, 하가구동, 가장동의 각 일부와 북선면의 태동 일부를 병합하여 가구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가구리는 와룡면에서 가장 큰 동리로 가구 1리와 2리의 법정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230호이다. 가구 1리는 최근에 조성된
문화마을을 비롯하여 무의, 율리, 감원정 등의 마을로 세분하며, 가구 2리는 가메기, 살앞, 어은골, 미드골 등의
작은 마을을 포함한다.
옛날부터 가구 마을은 관원과 사족들이 많아 영가지(永嘉誌)에는 '多有衣冠士族之家'라 기록하고 있다.
가두들, 가구, 가구촌이 된 것은 500여년 전 안선손(安善孫), 안계손(安季孫) 형제가 밤실[栗里]을 개척한 뒤 후손인 동고(東皐) 안제(安霽) 공이
마을 동쪽에 조산(造山)이 있어 그 산이 매우 아름답다라고 하여 아름다울 '가(佳)'자와 언덕 '구(邱)'자를 붙여 가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문화마을
와룡면사무소 앞에 새로 조성한 마을로 199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98년에 기반조성을 마쳤다.
▶ 무이(武夷)·무의·말유촌(末由村)
가구리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영가지에는 속명으로 말유촌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마을의 경치가 아름다워
중국의 복건성에 있는 무이산(武夷山)에서 이름을 따서 무이 또는 무의라고 한다. 현재 와룡면사무소와 지서,
우체국등의 관공서가 있다.
▶ 율리(栗里)·밤실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순흥인(順興人) 안선손(安善孫, 1442∼1491), 안계손(安季孫, 1458∼?) 형제 선비가 입향하여
개척한 마을로 경내에는 안동지방의 광산김씨(光山金氏) 3파 가운데 하나인 유일재공파(惟一齋公派)의 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은 그 형국이 밤송이가 벌어지는 모습으로 예로부터 마을에 밤나무가 많아 이름을 율리 혹은 밤실이라 하였다.
남향을 한 마을로 뒤에는 야산에 쌓여 있으며 마을 앞에는 가구천이 흐른다.
◇ 광산김씨유일재종택(光山金氏維一齋宗宅):이 집은 口자형의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 다.
이 파(派)의 선대는 퇴촌(退村) 김열(金閱) 공을 파조로 하고 있는데 공의 23세손인 담암 (潭庵) 김용석(金用石, 1453∼?) 공이
안동의 풍천면 구담리로 낙향하였고 이후 손자인 유일 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 1520∼1588) 선생 대에 이르러 와룡 가야로 이거하였다.
그후 유 일재 공의 9대손 도상(道常) 공이 다시 이곳으로 옮기면서 이 집을 구입하였다고 전한다.
◇ 가구천(佳邱川):지내리 모사골에서 시작하여 합강에서 무이천과 합류하여 서지리의 절골 앞
에서 가수천과 합류하여
안동댐 보조댐의 진모래에 이르러 낙동강과 만난다.
◇ 무이천(武夷川):태2리의 오리원에서 시작하여 합강에서 가구천과 합류하여 절골 앞에서 가수천과 합류된다.
◇ 잣골:밤실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며 이 골짜기 안에 작은 골짜기인 빈소곡이 있다.
◇ 짓골:밤실 남쪽에 있는 독가촌으로 남쪽으로 산이 둘러져 있으며 와룡면 중가구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 빈소곡(殯所谷):옛날에 변(卞)씨가 이 골짜기에 선친의 묘를 써놓고 3년간 묘 앞에 움막을 짓고 세수와 머리도 빗지 않고
효를 다했다고 하여 빈소곡이라고 한다.
◇ 우신대(友信臺):가구리의 동구거리 논가에 있다. 넓적하고 편편하게 생긴 바위의 입면에 크기 27cm의 해서체로 '友信臺' 라 새겼으며,
그 옆에 작은 글씨로 '己卯三月'이라 음각하였다.
이곳은 안찬중(安燦重), 이혁연(李赫淵), 이각연(李珏淵), 김달현(金達鉉), 이후곤(李厚坤), 이원곤(李原坤), 안승국(安承國),
이수원(李洙遠), 이승걸(李承杰), 김영갑(金永甲), 권상열(權相烈) 등의 지사가 우신계(友信契)를 조직하여 관포지교의 의를 맺었던 장소이다.
기묘년(1939) 삼월회와 회와(晦窩) 이혁연(李赫淵)이 글씨를 새겼다고 한다. '우신(友信)'이라는 말은 논어의 교우이신(交友以信)이란
문구에서 취한 듯 하다.
◇ 선돌배기:가구 마을 동구거리 부근 선돌이 있는 곳을 이르는 지명이다. 가구 마을의 형국이 선주형(船舟形)이므로
배가 행진하는 앞머리인 동구에 배의 돛대와 같이 선돌을 세우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안동에서 와룡면사무소 쪽으로 가다가 합강마을 앞에서 우회전하여 개울길로 약 500m 쯤 진입하면 개울 건너 동구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있고,
그 상류 100m지점 밭둑에 선돌이 있다.
이 선돌은 안동지역에 남아있는 선돌 가운데 가장 크며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모양은 남근형으로 생겼으며 크기는 높이 285cm, 폭 60cm, 두께 50cm이다. 이 선돌과 관련
된 마을의 풍수전설이 전한다.
가구들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그 형국이 선주형이라 한다. 그래서 배가 앞으로 나가는 곳에 배의 돛대와 같이 큰돌을 세워
배가 앞으로 잘 순항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마을에서는 큰 우물을 파면 배의 바닥에 구멍을 뚫는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를 삼가 했다는 말이 전한다.
또, 이 선돌은 서남쪽으로 오는 잡귀를 막아서 재앙을 면하기 위한 비보(裨補)의 목적으로 세웠다는 설도 있다.
또 일설에는 한 기운 많은 장수가 이 남근형 선돌이 욕심이 나서 지고 가다가 그만 무거워서 놓고 갔다고 한다.
처음에는 눕혀 있는 것을 세웠다고 하며, 지금부터 50년 전 까지도 돌파리 할매는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빌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 석문(石門):가구 수구에 있으며 사영재(師影齋) 안중현(安重鉉, 1639∼1685)은 이로 인하여
석문주인(石門主人)이라 자호 하였다고 한다.
◇ 범방우골:가구리 회관 건너 남쪽 산밑에 있었던 마을로 옛날에 호랑이가 나와 앉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검암:가구 남쪽에 있으며 안석홍은 이로 인하여 그의 호로 삼았다.
◇ 대박골, 죽전동(竹田洞):옛날 대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감원정(鑑源亭)·가만정
전주이씨 5호를 비롯하여 모두 6가구가 살아가는 동네이다. 이 마을에는 옛날에 감원정(鑑源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마을이름은 여기서 유래되어 감원정 혹은 음이 변하여 가만정이라고도 부른다.
감원정은 조선 중기 때 사간(司諫)을 지낸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 1539∼1617) 공이 창간했던 정자로 공은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마을 어귀 천석(泉石)에 정사(精舍)를 얽고 물을 끌어 못을 만들어 '감원정'이라 하고 여기서 소요하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 사간대(司諫臺):가구 감원정 남쪽에 있는데 권춘란 공이 사간으로 있을 때 이름하였다한다.
▶ 가메기·감악(甘岳)·감악곡(甘岳谷)
마을의 입구가 아궁이처럼 좁고 안쪽은 가마솥처럼 넓게 생겼으므로 감악 혹은 감악곡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음이 변하여 가메기라고 부르며 충주지씨(忠州池氏)의 집성촌으로 마을호수는 10여호가 살아간다.
◇ 조산(造山):밤실 동쪽 가메기 남쪽에 있는 산으로 마을을 위하여 인공적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지금도 그 흔적이 약간 남아 있다.
동고(東皐) 안제(安霽, 1538∼1602) 공은 이 조산으로호를 삼았다한다.
▶ 살앞·송정리(松亭里)
가구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안동-요촌간의 지방도가 마을 앞을 지나간다. 송정리 정미소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예전에는
사래가 긴(밭이랑이 긴) 밭이 있어 마을 이름은 '사래 긴'의 음이 변하여 살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또, 조선 단종 때 충신인
우송정(友松亭) 지정(池淨) 선생의 정자가 있어 송정리라고도 불렀다.
◇ 절골:1897년 월선보살(月仙菩薩)이 창건한 삼정산(三井山) 유하사(遊夏寺)가 있어 절골이라
한다.
◇ 개천(開川):아주 옛날에는 솔경자라고도 하였는데 개울이 확 열려 있다고 개천이라고 한다.
◇ 골못:살앞 서쪽에 있는 마을로 북서쪽이 산으로 막히고 남동쪽으로 향해있다.
◇ 뒷골:어은곡 뒤쪽에 있는 골짜기로 유하사가 있다.
◇ 미륵골:살앞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미륵이 있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새마:살앞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와룡면 지내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약 40여 년 전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 점 골:살앞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서쪽으로 산이 가로 막혀 오목하여 바람이 없는 마을이다.
◇ 정자못:골못 서쪽에 있는 마을로 우송정이 있어 그렇게 부른다.
▶ 어은골(漁隱谷)·업골·엉골
가메기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지내리로 살앞으로 가기 전 와룡면 산리야리 가는 길로 400m쯤 들어가면 좌측에 있다.
어은골은 업골, 엉골 등으로 부르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을 돕기 위해 명나라 군사를 인솔하고 와서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뒤에 있는 산맥을 보고 앞으로 훌륭한 장수가 태어날 곳이라고 하여 차고 있던 칼로 두령혈(頭嶺穴)을 찔렀다고 하며,
이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슬피 울었다고 하는 전설이 구전된다.
◇ 후곡(後谷), 뒷골:어은곡 뒷목에 있는 골짜기로 입구에 대한불교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의 말사인 유하사(遊夏寺)가 자리잡고 있다.
◇ 느티나무:송은 지치련이 수식한 것으로 수령 200년, 수고 12m, 둘레 3.55m이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 안문리, 전골:마을을 둘러싼 산의 형국이 마치 기러기가 알을 품은 형국이라고 하여 그렇게 부르고, 옛날 최씨네가 유기를 만들었다고
전골이라고도 한다.
▶ 미드골·미도곡(美道谷)·미득골
살앞 남쪽에 있는 마을로 각성 12집이 살아간다. 미드골, 미도곡, 미득골 등으로 부르며 마을 뒷산에 많은 고분군이 산재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