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몇 일 전에는 아르헨티나에서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저를 아는 사람이 없을텐데... 발신인은 이성원권사님이라고 적혀 있었다. 모르는 분이다. 이렇게 서두는 시작한다. “권순태목사님 주님 안에서 평안하신지요? 저는 아르헨티나에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있는 이성원권사입니다. 다름이 아니옵고 제 여식이... 한번도 뵙지 못한 목사님께 선뜻 편지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라 생각도 됩니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곳 교회 목사님께 이렇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읍니다...” 아니 어떻게 내가 이곳 독일 라이프찌히 아이젠반 17번지에 사는 것을 알고 편지를 보내었을까? 궁금하다. 아르헨티나에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메시나 마라도나 밖에는 없는데... 하지만 역추적해서 올라가면 어떻게 이렇게 나를 알고 편지를 했는지 밝혀지게 될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그분은 분명 자신 주변에 있는 지인을 통해서 저를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문의 문고리를 잡는 것이다. 문고리를 잡아 당겨 문을 열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하나의 새로운 사람과 접촉한다는 것은 또 다른 세계의 문을 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을 열면 또 다른 세계로 펼쳐질 많은 문들이 있을 것이다. 저에게 편지를 보내신 그 권사님도 그러했을 것이다. 자신 주변에 있는 문을 열었을 것이다. 아마 그곳 목사님께 부탁했을 것이고 목사님도 만일 아는 사람이 없었으면 옆에 있는 동역자나 혹은 다른 곳에 있는 친구목사이게 물어보았을지도 모른다. 그 권사님은 저에게까지 도달하기 위해 빠르면 문을 하나, 좀 더 필요하면 문을 한 두개 정도 더 열었을 것이다. 나중에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묻게 된다면 그분은 “알음알음”해서 연락을 했다고 할 것이다. 이제 그분은 저라는 문고리를 잡았고 저라는 문을 열기에 또 다른 세계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딸이 이곳 음악축제와 오스트리아 브람스콩쿨, 그리고 기타 음악활동을 위해서 도움이 필요한 분이었다. 그분은 이제 저를 열게 됨으로 다른 사람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떠한 문을 여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게 된다. 어떠한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 즐거울 수도 있고 피곤할 수도 있다.
II. 오늘 우리는 두 개의 본문을 본다. 하나는 요나에 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늘 두 스토리를 묶고 있는 공통 분모는 “광풍”이다. 광풍은 두 사람이 탄 배에 다 있게 되었지만, 광풍의 의미는 서로 완전히 달랐다. 요나의 문고리를 잡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없어도 될 광풍의 고난을 받게 되었고 바울의 문고리를 잡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광풍의 위협에서 구원을 얻게 되었다.
1) 요나를 보라.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욘1:2). 이 말씀을 들은 요나는 즉각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니느웨 반대편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배를 타게 된다.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가는 것 같았다. 욥바 항에 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다. 2800년 전인 당시는 요즘처럼 공항에 가면 바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때도 아니었다.
얼마나 일이 잘 풀려진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다시스로 향하던 요나의 배는 하나님이 바다 위에 내리신 대풍으로 인해 거의 깨어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한편 요나는 배 밑바닥에 들어가 잠에 빠져 있었다. 사실, 요나는 대풍이 불면 좀 깨달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 선장이 말한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욘1:6). 그는 자서는 안 되고 일의 사태를 깨달아야 했다. 잠이 오는가! 결국 그 배에 승선한 모든 사람들은 제비를 뽑아 이 대풍의 저주가 누구로 인해 온 것인가를 가리게 되었다. 요나가 그 제비를 뽑게 되었다. 제비를 뽑자고 했을 때 이미 그는 자수했어야 했다. 제비를 뽑고 요나는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9절을 보라.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말은 잘한다. 경외하면 들었어야 할 것 아닌가! 이 대풍이 무엇인지 알았어야 할 것 아닌가!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11). 말만하는 요나에게 바다는 계속해서 요나 나오라고 한다. 이에 사람들이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고 한다. 요나는 답을 알고 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12). 나를 들어 던질 필요가 뭐 있는가? 그냥 빠지면 되지 말이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해보려고 하지만,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지고 만다.
그 배에 탄 사람들을 본다. 참 좋은 사람들이다. 그래도 요나를 살려보려고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다. 요나로 인해 그런 문제가 있는 데도 말이다. 요나로 인해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죽음의 어려움을 겪은 것이다. “한배를 탔다”라는 표현을 쓴다.
We are in the same boat!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요나 같은 사람만나지 말기를 기도하라. 그런 사람과 엮어지면 인생이 괴롭다. 없던 광풍이 생긴 것이다. 다들 다시스로 편안히 갈 수 있었는데 요나로 인해 그 “개고생”을 하게 된 것이다.
2) 우리는 사도행전 27장에서 또 다른 사람 하나를 만난다. 바울이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가다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된다. 바울은 자신을 압송해가는 백부장에게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행27:10)고 충고하지만 백부장은 선주와 선장의 말을 더 듣고 있다. 바울의 충고를 듣지 않고 떠났던 그 배는 항해 도중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을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그 광풍으로 인해 최선을 다한다. 그들은 짐을 바다에 풀어버린다. 사실 그 물건들을 실어가려고 선장과 선주가 무리하게 항해를 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다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 광풍과 싸우는 몇 일 후에는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버리기까지 했다. 살기 위해서 배를 움직이는데 필요한 것까지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든 인간적인 노력에도 풍랑은 그칠 줄을 모르고 구원의 여망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에 바울이 등장하게 된다.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니라”(행27:22). 바울은 이 시점에서 등장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은 해볼 것 다해보고 나서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이다. 이전에 바울이 얼마나 이야기를 했는가? 그의 충고는 죄수의 충고였고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바울을 듣는 것이다. 바울의 위로와 격려에는 근거가 있었다. 하나님의 특별 말씀이 있었던 것이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행27:24).
바울과 한 배에 타고 있었던 276명의 사람들은 원래 죽을 운명에 있었다. 그러나 바울 때문에 살게 된 것이다. 바울은 죽을래야 죽을 수 없었다.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해야 했고 서신서들을 기록해야 했기에 유라굴로 광풍에서 죽을 수가 없었다.
예) 한번은 한국에 가다가 아는 어느 한 자매를 비행기에서 만났다. 어떻게 이야기하다가 그가 이렇게 말한다. “목사님이 탔으니 비행기가 안 떨어지겠네요!” 그 말 안에는 신앙 의식이 있다. 하나님께서 택한 종에게 할 일을 주셨는데 어찌 지금 죽이시겠는가라고 말이다.
바울과 함께 승선한 사람들은 별로 존경할 사람들이 아니다. 바울을 죄수로 호송하는 백부장이요 로마병사들이다. 선주나 선장은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서 배를 무리하게 항해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바울로 인해서이다. We are in the same boat! 그 배안에 바울 같은 사람과 함께 하라. 이런 사람을 만나라. 내 인생의 항해에 좋은 사람 만나기를 위해 기도하라.
III. 우리의 인생은 바다를 항해함 같다. 그러기에 인생의 항해에는 풍랑이 있다. 순풍이 불어 잘 나가는 것 같고 다시스로 가는 배가 즉각적으로 있어 잘 풀려나가는 것 같아도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날 수도 있다. 그 풍랑은 좋은 사람에게도 내리고 나쁜 사람들에게도 내린다. 그것은 인격이 없는 것이기에 모든 이들에게 타격을 준다. 지진이나 태풍을 보라. 그들은 인격이 없기에 가리지 않는다. 가려가면서 타격을 주지 않는다. 바울과 함께 배를 탔던 사람, 요나와 함께 배를 탔던 사람, 이 모든 이들은 함께 인생의 풍랑을 만난 것이다. 이렇게 인정사정보지 않는 광풍이 대작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사람들을 잘 만나야 한다. 풍랑이라고 하는 위기적인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 사람이 중요하다. 광풍은 요나에서나 바울에게서나 다 등장했지만, 요나의 경우에는 광풍이 요나로 인해 생겨났고 바울의 경우에는 바울로 인해 광풍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어제 목사님들과 잔디구장에서 운동을 했다. 두 편으로 나누어서 했는데, 무척 힘들었다. 힘들었다는 말은 졌다는 말이다. 그러면 지게 된 패인이 무엇인가? 저들은 발이 잘 맞았다. 다 환자들 - 허리 아프고 무릎 아프고 - 이라고 자꾸 말씀을 하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안심을 해서 있는 개인기 없는 기술 다 써서 열심히 했고 저들은 공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힘드니까 패스 위주로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부지런히 뛰어다녔는데 결실은 없고 공을 쫓아가기에 바빴다. 축구를 잘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공은 놓쳐도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은 가만히 두면 가만히 있다. 그러나 사람은 자꾸 움직인다. 공을 차는 것은 사람이다. 공 놓치면 상관없어도 사람 놓치면 진다. 사람을 잡으면 이기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풍랑이 일 수 있다. 광풍이 불어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광풍을 이겨낼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복보다 인복이 있어야 한다. 한배를 타고 가야 할 사람들을 잘 만나야 한다. 그 사람들이 어떠한가에 따라 인생이 엮어진다. 좋은 사람 만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사람하나 잘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된다. 사람하나 잘못 만나면 삶이 꼬이게 된다. 요나를 잘못 만나 고생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바울을 만나서 생명을 얻는 사람들을 보았다.
예)교회의 건축을 해 왔고 이제 남은 필요들이 있다. 많으면 많고 작으면 작은 액수들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처럼 그렇게 은혜로 이루어질 것이다. 바울같은 사람 하나 만나면 한방에 끝낼 수 있다. 여러분 중에 사업이 대박나면 터진다. 자라나는 꿈나무가 축구선수가 되어 박지성처럼 돈을 많이 벌어봐라. 그냥 한방에 해결된다. 누가 어떻게 될른지 모른다. 이곳 자매가 어느 재벌하고 결혼할지 아는가?
IV. 만남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목적지는 멀기만 해 보인다. 미로를 찾는 것 같이 도달하기 어려워 보인다. 생명을 주는 사람의 문을 열라.
저는 인복이 있는 사람이다. 제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다. 좋은 부모 좋은 아내 좋은 자녀들이 있다. 좋은 동역자들이 있다. 인복이 있는 목회자를 둔 라이프찌히 교회 성도들도 복이 있는 것이다. 제게 인복이 있으니 여러분이 붙은 것이다. 인복이 많다는 것은 결국 여러분 칭찬이다.
좋은 만남이 있기를 축원한다. 학생들은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싱글들은 좋은 짝을 만나고, 성도들은 좋은 목회자를 만나고 목회자는 좋은 성도들을 만나기를 바란다. 이러한 만남이 일을 하는 것이다.
바울의 유라굴로광풍이냐 요나의 다시스행 광풍이냐? 똑같은 풍랑이 인다. 하지만, 한쪽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고 다른 한쪽은 당하지 않을 고난도 당하게 된 것이다. 하나는 죽을 뻔 한 것에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살 수 있는 것에서 죽을 뻔 한 것이다. 사람 잘 만나 구원에 이르기를 축원한다. 환경을 잘 달라고 말하기보다도 좋은 동역자와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비록 환경이 유라굴로 광풍처럼 우리를 삼키려 하나 우리로 인해 그것이 축복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