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자(2024년 7월 12일) 조선일보 카페 2030에 국제부 김지원 기자가 “불안의 대물림”이라는 칼럼을 썼다. 감성과 지성이 잘 조화된 명문이므로 나 혼자 읽기는 아깝고 여러분들도 한 번 읽어보기를 강력히 권한다.
그런데 이 칼럼을 읽고 후생(後生)이 가외(可畏)로다라고 한 마디 하고 치워두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기에 반 세기를 더 산 선배로서 잔소리를 좀 해 볼까 싶다.
먼저 김기자의 글의 일부를 발췌하여 전재하기로 하자.
“흔히 한국인의 DNA에는 불안이 내재되어 있다고들 한다. ---선배 세대들은 생때같은 자식을 굶길까 봐, 부모를 부양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런 불안이 한때는 국가 성장의 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그러나 먹고살 만해진 후에도 우리는 불안을 내버려뒀다.---몸집을 불린 불안이 만든 절대명제가 한국사회를 잠식했다. ‘남들에게 뒤처져서는 안 된다.’ ‘7세 고시’라는 단어만 봐도 그렇다.---어쩌면 기억조차 희미한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불안에게 삶의 컨트롤 타워를 넘겨주고 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저출생 현상)의 진짜 핵심은 ‘내 대에서 불안의 대물림을 끊겠다’는 것이다.---(정책을 만드는 이들이) 그 마음을 들여다볼 생각이 없다면, 앞으로 이 나라엔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불안의 숙주로 사는 것이 당연한 사회를 굳이 새로운 세대에게 물려줄 필요가 있을까.”
선사시대 이래 우리 인류는 항상 불안과 함께 살아왔다. 불안과 걱정을 가지지 않았다면 우리 인류는 벌써 오래 전에 맹수의 먹이가 되어 절멸해 버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뇌의 깊은 곳에 있는 변연계는 1억년 전의 초기 포유동물이었을 때부터 불안, 걱정과 욕망 등의 감정을 관장하면서 생존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불안과 걱정이 너무 커지면 우리는 우울증에 걸리게 되며 우울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러므로 불안과 걱정이 증폭됨을 막아야 하는데 이 역할을 하는 것이 뇌의 전전두 피질이다. 전전두 피질은 지성을 관장하는 기관이므로 결국 간단하게 말하자면 지성의 힘으로 불안과 걱정이란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이 되겠다. 결론이 너무 일찍 나와 버린 감이 있기는 한데 이하 몇 가지 검토해 보기로 하자.
첫째, 불안이 국가 성장의 동력이 되었나?
사람이 불안에 휩싸였다고 해서 성공으로 매진하진 않는다. 도리어 불안으로 인해 자포자기하여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불안의 자가증식을 막고 끊어 성공의 길로 접어들기에는 비상한 노력과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 세대는 열심히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모토를 가지고 불철주야 일을 해서 불안을 잊고 가난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의식주를 위협받는 데에서 오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노력해서 지금 같은 ‘먹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둘째, 우리는 먹고살 만해진 후에도 불안이 몸집을 불리도록 방치했나?
우리가 방치한 것은 불안이 아니라 욕망이며, 우리는 욕망이 탐욕으로 제멋대로 커지는 것을 방치한 책임이 있다.
지금 ‘7세 고시’라는 말은 부모의 탐욕이 빚어낸 형상이다. 요즘 부모들은 ‘남들에게 뒤처져서는 안 된다’를 삶의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모양인데 그와 같은 삶에 대한 태도는 부모의 탐욕을 드러낸다. 자신과 자기 자식이 어떤 분야나 조직에서 일인자가 되지 못하면, 또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은 탐욕적 사고로서 매우 위험하며 불안의 온상이 된다.
성공은 본인의 노력 외에도 외적 환경, 운(運) 등 여러 요인에 의해 좌우되므로 비록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도 본인이 노력했다면 분수를 지키며 스스로 만족하는 안분자족(安分自足)의 마음에는 불안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탐욕을 버리면 탐욕이 낳는 불안은 생기지 않는다는 당연한 말씀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우리 세대는 자식 세대에게 건전한 인생관과 삶의 목표를 가지고, 특히 가정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훈육하고 키우지 못한 책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셋째, ‘내 대에서 불안의 대물림을 끊겠다’는 태도는 합당한가?
심한 불안을 겪는 사람은 불안을 끊기 위해 자살하기도 한다. 불안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 아기를 낳지 않겠다는 말은 마땅히 태어나서 누려야 할 이 세상의 즐거움을 자식으로부터 박탈하는 비정하고 무책임한 태도이며, 본인 자살의 완화된 버전이다.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 중에 얼마나 많은 인총들이 전쟁, 질병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떠올려 본다면 먹고 살만한 우리 사회에서 뒤처질까 하는 불안으로 인해 자식을 갖고 키우는 행복을 포기한다는 어리석음에 연민이 간다.
넷째, 정책을 만드는 이들이 그 마음을 들여다 볼 생각을 해야 하는가?
젊은이들이 탐욕이 키운 불안에 시달리는 증세를 정부가 치료하기는 지난하다고 생각하지만 우선 생각나는 방도는 독서를 권장하고, 중교교 교육과정에 철학을 넣는 것 정도가 떠오를 뿐이다. 조선은 성리학이라는 사변철학 외곳으로 나아가 망조가 들었는데, 우리 한국은 너무 물질적인 면에 편향되고 있으므로 정신적인 면에 보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소견이다.
젊은이들의 불안이 무한경쟁 때문이니 경쟁이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생각은 너무나 유치한 망상이니 여기에서 굳이 논박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 국민들에게 필요한 모든 유형, 무형의 재화가 공짜로 하늘에서 내리고 땅에서 솟는다면 그 때에는 경쟁이 없는 사회가 유지될 수 있으리라. 현실은 그러지 못하고, 무한경쟁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교역으로 먹고 사는 우리가 어떻게 경쟁을 한 시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젊은이들은 탐욕을 버리도록 노력하기 바라며 불안을 약화시키는 방법, 심호흡을 자주 하기 바란다. (끝)
첫댓글 우리의 미래 세대를 위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소생이 이렇게 썼다고 해서 누가 눈 하나 깜짝하기나 하겠습니까? 더운 날 도로이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 서가에 있던 오래된 서적을 버렸습니다. 대학시절의 법률 서적, 대학원 시절의 경영학 서적 기타 젊은 날에 열심히 읽던 책들을 용도 폐기했습니다.
독일 사무소에 근무할 때에 서가에 있는 꽂혀있는 BGB Kommentar (독일민법전 주석서)를 보며, "내가 산업은행에서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이구나 "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세월은 흘러가고 사람도 바뀌고, 열심히 노력했던 기억도 사라집니다.
독일민법주석서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법학교수도 한국에 몇 되지 않을 겁니다. 영준공은 가지고 있는 실력의 10분의 1도 쓰지 못한 것 같아요 .아쉽습니다.
@munro 아닙니다. 보잘것 없는 능력 그리고 노력에 비해서 잘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