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1월 12일 화요일
[(홍)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성 요사팟 주교는 1580년 무렵 우크라이나의 동방 교회 가문에서 태어났다. 장사보다는 영혼 문제에 관심이 더 많았던 그는 뛰어난 상인이 되기를 바랐던 부모의 뜻을 저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수도원장까지 맡아 수도회 개혁을 주도하였다. 주교가 된 뒤에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가 1623년 이교도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1867년 비오 9세 교황께서 요사팟 주교를 시성하셨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토에게, 건전한 가르침에 부합하는 말을 하고 모든 면에서 선행의 본보기가 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쓸모없는 종으로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말하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며 경건하게 살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말씀입니다. 2,1-8.11-14
사랑하는 그대여,
1 그대는 건전한 가르침에 부합하는 말을 하십시오.
2 나이 많은 남자들은 절제할 줄 알고 기품이 있고 신중하며,
건실한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지녀야 합니다.
3 나이 많은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몸가짐에 기품이 있어야 하고,
남을 험담하지 않고, 술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선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그래야 그들이 젊은 여자들을 훈련시켜,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며,
5 신중하고 순결하며, 집안 살림을 잘하고 어질고 남편에게 순종하게 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모독을 받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6 젊은 남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신중히 행동하라고 권고하십시오.
7 그대 자신을 모든 면에서 선행의 본보기로 보여 주십시오.
가르칠 때에는 고결하고 품위 있게 하고
8 트집 잡을 데가 없는 건전한 말을 하여,
적대자가 우리를 걸고 나쁘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십시오.
11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12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13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
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7-10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에페 4,1-7.11-13)와 복음(요한 17,20-26)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토머스 힐 그린 신부는 계약적인 주종 관계와 사랑의 가족 관계를 비교합니다. 주종 관계는 책임과 의무를 분명하게 규정하지만, 사랑의 가족 관계는 그 이상이 필요합니다. 그는 환자와 간병하는 사람의 비유로 이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계약적인 주종 관계는 환자와 직업 간병인의 관계와 같습니다. 간병인이 성심성의껏 환자를 돌보아 준다고 하더라도 그 둘은 남남이며,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간병인은 환자를 돌보는 대가로 돈을 받기에 생각한 만큼 돈을 받지 못하면 그는 그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간병인은 자신에게 더 중요한 일이 생기면, 환자를 두고 떠날 수도 있습니다. 환자의 삶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간병인은 자기에게 더 급한 일이 있다면 임종을 지키지 않을 수 있고, 그에 따른 죄책감을 느낄 책임도 없습니다. 책임과 의무의 범위가 분명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환자를 돌보는 이가 사랑하는 아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아내는 출퇴근 없이 밤낮으로 그를 돌봅니다. 이 돌봄에 보수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만일 환자가 사흘밖에 살지 못한다면, 아내는 모든 일을 뒤로하고 그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엄청난 일이지만, 사랑하는 아내라면 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토머스 힐 그린,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63-71면 참조).
오늘 복음의 종은 자신이 해야 할 것의 그 이상을 하며 주종 관계를 뛰어넘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에는 주종 관계로 우리를 부르시지만, 마침내 사랑의 가족 관계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며 그저 몇 가지 계명과 의무를 지키는 것으로 충분한 계약 관계에 머무르지 말고,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가족이 되는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그분의 거룩함 앞에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공동체 생활 안에서, 매일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성숙하고 균형 잡힌 자아 의식은 어떤 것인지 자주 고민하게 됩니다. 너무 지나친 자기 비하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족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를 각별히 사랑하시니, 나도 나를 존중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모습도 정말이지 봐주기 힘든 꼴불견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데, 본인만 스스로를 아주 높이 평가하며 자화자찬한다면, 그 얼마나 웃기는 꼴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중요한 것이 균형잡힌 시선이요 한쪽으로 과도하게 지우치지 않는 조화로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제자 직분의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지침을 가르치십니다. 요점은 제자들 자신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리고 겸손의 덕을 지니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복음 17장 10절)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제자는 종이라는 것, 제자로서의 사도직 수행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그에 따른 보상이나 특별대우를 바라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떤 사람들, 참으로 봐주기 힘들고,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업적을 한껏 부풀려 과대 포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근본, 원초적 결핍, 태생적 나약함을 잊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특징이 마치 이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 불과 20년 30년 세월이 흘러 정신을 차려보면, 자신의 육체는 아무 볼품없이 모습으로 차갑고 황량한 들판에 누워있을 것입니다. 영혼은 저 세상 어딘가에서 초조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도 꼭 쥐고 있던 재물들은 사방천지로 흩어져버렸을 것입니다. 남겨놓은 글도, 명성도 순식간에 잊혀질 것입니다. 그리도 자부심을 느꼈던 소중한 저서들은 킬로그램당 얼마씩에 팔려 고물상 한켠에 쌓여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 세상에서 뭔가 대단한 인물, 엄청난 존재가 되고자 발버둥 치는 모습들이 얼마나 가소롭고 한심한 일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사실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허영심, 자만심, 하늘을 찌르는 교만함을 버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영적·육적으로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위쪽에서부터 오는 은혜요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뭔가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덕분이라는 것을 늘 고백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위대함 앞에 나는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 그분의 거룩함 앞에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분의 무한하심 앞에 나는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지, 나는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늘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제자직 수행을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자이기 때문입니다.
행복보다 겸손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인생의 목표를 행복으로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후회가 없습니다. 그 방향이 제가 사제가 되도록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까지 본인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니 난처합니다. 여기서 더 구체적인 방향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종에 밖에서 일하다가 집에 돌아오니 주인이 자신에게 식사 시중을 들라고 하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종에게 고마워해야 하겠냐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집에서 일하며 한 끼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입니다. 그러니 하인은 학대하지만 않는다면 주인에게 자신을 종으로 써 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서열을 정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2012년 5월 20일 방영된 동물농장에서 오토바이를 쫓는 개 뭉치가 방영되었습니다. 뭉치는 하루 종일 동네 슈퍼 앞에 앉아 있다가 오토바이만 지나가면 그 앞을 가로막고 마구 짖어댑니다. 그런데 사실 뭉치가 쫓는 오토바이는 단 한 대뿐이었습니다. 다른 오토바이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 오토바이는 슈퍼 앞쪽에 있는 한 마트의 배달용 오토바이였습니다. 처음엔 경쟁 마트의 오토바이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슈퍼 앞에서 매일 지키고 있었지만, 그의 집은 따로 있었습니다.
실제 그의 공격 상대는 오토바이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마트에서 기르고 있는 누렁이 때문이었습니다. 1년 전에 누렁이에게 서너 번 물린 적이 있어서 누렁이가 무서워서 그 마트까지는 가지 못하고 그 마트의 오토바이에 괜한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복수를 계획한 것이 어언 1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뭉치는 기회를 노렸다가 오토바이와 동행하는 누렁이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누렁이도 화가 나 뭉치를 덮쳤고 순식간에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뭉치는 누렁이의 힘에 못 당하면서도 끝까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떼어놓아서 간신히 뭉치가 큰 상처를 받지 않았지만, 여전히 뭉치는 끝까지 싸울 기세였습니다.
결국 전문가들이 왔습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뭉치가 자신의 서열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뭉치와 누렁이가 자유롭게 싸울 공간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이제 누렁이와 뭉치는 입과 발에 보호대 등을 착용하고 철창으로 만든 좁은 공간에서 싸움을 벌이도록 놓아두었습니다. 결국 승자는 누렁이가 됐고, 뭉치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뭉치가 다시는 집을 나가 슈퍼로 가지 않고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하게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아버지는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전쟁에서 패하고 죽고 맙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반항하게 된 것은 그의 동생 타마르 때문입니다. 타마르의 이복 오빠 암논이 타마르를 탐하고 버린 것입니다. 이에 분노해 압살론은 타마르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다윗는 압살론을 유배 보냅니다. 다윗에게는 모두가 자녀였지만, 압살론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압살론은 다윗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압살론이 죽었을 때 다윗은 한없이 슬퍼하였습니다. 압살롬이나 타마르나 암논은 다 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자녀들끼리 죽고 죽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압살론은 다윗의 자비를 이해했어야 합니다. 그 자비 앞에서 겸손해질 수 없자 이 모든 사단이 벌어진 것입니다.
소금인형은 자신을 알기 위해 많은 곳을 여행했습니다. 소금 광산을 지나 소금 사막을 넘어 소금 염전에 다다랐습니다. 염전 앞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소금인형은 멈칫하며 바다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니?” 바다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들어와서 보렴.” 그래서 소금인형은 바닷속으로 첨벙첨벙 들어갔습니다. 들어갈수록 자신이 녹아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점이 녹기 전에 소금인형은 경탄하며 외쳤습니다.
“아.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겠군!” 소금인형은 바다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바다가 아니면 소금인형이 누구인지 알려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금인형은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바다가 아니었으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겸손해집니다. 그러나 압살론은 그럴 줄 몰랐습니다. 그의 목적이 겸손이 아니고 자신이 믿는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성 블라디미르는 아버지의 폭정대로 형제를 죽이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폭정은 물론이요,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며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페룬(Perun)이라는 최고 신을 포함하여 여러 신을 숭배했는데, 그 신에게 특히 헌신했습니다.
몸이 아프니 겸손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종교를 접해보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다 성 소피아 성당의 위엄을 본 신하들의 말에 그는 가톨릭교회에 귀의하기로 결심합니다.
서기 988년에 블라디미르는 크림 반도의 그리스 도시인 케르소네수스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가 침례를 받기 전에 눈병이 있었다고 하며, 전설에 따르면 그가 침례를 받고 물에서 나올 때 눈병이 기적적으로 치료되었다고 합니다. 이 경험은 블라디미르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리스도교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결국 성인이 되었습니다.
압살론은 겸손에서 출발했지만, 아버지 앞에서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나 블라드미르는 교만함으로 시작하였지만, 하느님의 자비 앞에서 겸손해졌습니다. 각자 행복해지자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겸손해지는 길을 택했던 블라디미르를 본받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2012년 5월 20일 방영된 동물농장이란 프로그램에서는 오토바이를 쫓는 개 뭉치가 방영되었습니다. 뭉치는 1년 동안 자신을 물었던 이웃집 개에 대해 복수를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다 둘이 한 우리 안에 싸우도록 붙여놓았을 때 뭉치는 싸움에서 밀린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집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행복하게 삽니다. 불행의 시작과 끝은 교만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완전한 행복과 천국의 길은 겸손임을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전례는 물 흐르듯이 진행되는 것이 좋다고 배웠습니다. 복사, 독서자가, 해설자가, 사제가 조금 틀릴 수 있지만, 그것을 지적하거나 고치려고 하면 전체적인 분위기가 흐트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가 더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평일 미사 독서는 홀수 해와 짝수 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가끔 독서자가 혼동할 때가 있습니다. 복음은 홀수 해와 짝수 해가 같지만, 독서는 다릅니다. 복음이 상황이라면 독서는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때가 많습니다. 독서자가 짝수 해를 읽어야 하는데, 홀수 해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독서자도 인식하지 못하였고, 미사에 참례하신 분들도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도 전례는 물이 흘러가듯이 진행되는 것이 좋기에 자연스럽게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강론은 결론을 조금 다르게 했습니다. 진실은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진실은 이해와 용서라는 밭에서 꽃이 피기 마련입니다.
중국의 열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왕이 연회를 열고 많은 신하와 함께 즐겁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연회 중에 왕의 애첩이 한 신하의 희롱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왕에게 직접 알릴 수 없었던 애첩은 신하의 갓끈을 몰래 끊어 왕에게 그 증거를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애첩은 끊어진 갓끈을 왕에게 가져가며 신하의 무례함을 암시했습니다. 왕은 이 상황을 지혜롭게 처리하기 위해 연회장에 불을 끄게 하고, 신하들의 갓끈을 모두 끊어 버렸습니다. 이를 통해 누가 범인인지 특정하지 않고, 동시에 사건을 무마하며 연회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 고사는 왕의 냉정한 판단력과 지혜로운 처세를 보여주며,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 모두의 체면을 살리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솔로몬왕도 지혜롭게 판결했습니다. 아이의 생모와 아이의 계모가 서로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솔로몬왕은 그럼 아이를 갈라서 둘로 나누라고 했습니다. 아이의 계모는 그렇게 하자고 했지만, 아이의 생모는 아이를 계모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왕은 아이를 주겠다고 했던 여인에게 아이를 주도록 했습니다. 아이의 죽음보다는 아이를 살리는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지혜로운 판단으로 죽어야 할 여인을 살려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부정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이 여인이 부정한 행위를 하다 잡혔습니다. 우리의 율법에 따르면 그런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이게 되었습니다. 어찌할까요?” 예수님께서 죽이라고 하면 예수님도 율법주의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살리라고 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자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그러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이야기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에서도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바오로 사도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자세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대 자신을 모든 면에서 선행의 본보기로 보여 주십시오. 가르칠 때는 고결하고 품위 있게 하고 트집 잡을 데가 없는 건전한 말을 하여, 적대자가 우리를 걸고 나쁘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여름날에 성당에 와서 창문을 닫고, 하수구에 쌓인 오물을 꺼내는 형제님을 보았습니다. 아침 일찍 와서 큰 솥에서 육수를 끓이고, 친교실 청소를 하는 자매님도 보았습니다. 미사가 끝나면 성당에 남아있는 주보를 정리하고, 화장실 청소를 즐겁게 하는 수녀님도 보았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말없이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인 저는 그분들의 신발 끝을 풀어드리기에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오늘의 성인
성 요사팟 쿤체빅(Josaphat Kuncevyc)
신분 : 대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폴로츠크(Polotsk)
활동연도 : 1580?-1623년
같은이름 : 요사파트
성 요사팟 쿤체빅은 1580년경 당시 폴란드 관구였던 현 우크라이나의 볼린(Volyn) 관구에 속한 볼로디미르(Volodymyr)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요한(Joannes)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리투아니아의 동방 교회에 분열이 일어나던 때로 폴란드의 지배를 받던 리투아니아의 동방 교회와 가톨릭 교회가 대립한 상황이었다.
귀족 가문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상업에 종사했고, 그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심어 주고자 노력했다. 볼로디미르에서 학교를 마친 그는 부모의 가업을 잇고자 상업을 배우기 위해 빌나(Vilna,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Vilnius)의 포포빅(Popovyc)이라는 사람의 도제로 보내졌다. 그러나 수도생활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주인의 딸과 결혼하면 사업을 물려주겠다는 제의를 거부하고, 1604년 빌나에 있는 바실리오회의 삼위일체 수도원에 입회하여 요사팟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요사팟 쿤체빅은 1609년에 비잔틴 전례에 따라 사제로 서품되었고, 그 즉시 설교로 유명해진 한편 우크라이나 교회와 로마간의 일치를 위한 지도력을 발휘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함께 입회했던 친구 루트스키(Benjamin Rutsky)는 삼위일체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고, 그는 폴란드에 새 수도원을 세우라는 사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1617년 11월 12일 비테프스크(Vitebsk)의 주교로 임명된 요사팟 쿤체빅은 그 이듬해에 폴로츠크의 대주교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혼란하던 교구를 바로잡고 교회일치를 위해 더욱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와의 반목, 기혼 사제 문제, 느슨한 규칙, 폐허화된 성당 등을 고치기 위해 시노드를 소집하고 교회개혁에 박차를 가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리투아니아 안에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도 크게 성장하였다.
이즈음에 그와 뜻을 달리하던 일단의 분리파 주교들이 요사팟 쿤체빅은 실제로 라틴 전례의 사제이며, 로마 가톨릭은 리투아니아 민중에게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대립주교를 내세웠다. 그래서 극도의 혼란상에 빠졌지만 그는 온갖 위험을 극복하며 비테프스크로 사목방문을 가던 중 새로운 정교회를 주장하는 분리파에 의해 1623년 11월 12일 도끼와 총탄으로 죽임을 당해 드비나(Dvina) 강에 던져졌다.
교회일치를 위한 열정으로 인해 ‘일치의 사도’로 불리며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는 그의 사망 후에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그의 전구로 인해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1643년 5월 16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7년 6월 29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디다코 (Didacus)
활동년도 : 1400-1463년
신분 : 수사, 증거자
지역 : 세비야(Sevilla)
같은 이름 : 디다꼬, 디다꾸스, 디다쿠스, 디에고
에스파냐의 세비야 근교에서 태어난 성 디다쿠스(또는 디다코)는 한때 은수자로 고적한 삶을 살다가 작은 형제회의 평수사로 입회하였다. 그는 카나리아제도(Canary Islands)의 수도원으로 파견되어 문지기 수사로 일했는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뛰어난 사랑으로 큰일을 이룩하여 성덕이 탁월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1445년 배우지 못한 그가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된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한 번의 임기를 채우고 그만두었다. 그는 여생을 에스파냐의 각 수도원을 다니며 하찮은 일을 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그의 높은 성덕은 작은 형제회뿐만 아니라 온 교회를 비추었다. 그는 1463년 11월 12일 카스티야(Castilla)의 알칼라(Alcala)에서 세상을 떠났다. 디에고(Diego)로도 불리는 그는 1588년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