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절을 보겠습니다.
5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
6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이 본문은 보수적인 신학자와 진보적인 신학자 간에 극명하게 평가가 갈리는 글입니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신학자들에게 이 본문은 후대 기독론 교리의 근거가 되는 가장 오래된 문서로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설과 신성, 그리고 성육신의 근거까지 담아낸 사도 바울의 위대한 신앙고백록으로 평가받습니다. 게다가 십자가의 의미와 승천,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까지 사실상 기독론 교리의 기초가 되는 모든 것을 담아낸, 당대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기독교 최고의 신학자로 인정받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적인 찬양시라고 극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신학자들은 이 문서가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작자 미상의 노래였는데 사도 바울이 자기 서신에 담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을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온 신이나 신의 아들로 믿은 건 당시 세계에서 흔한 일이었기에, 이런 본문은 사실의 언어가 아니라 고백의 언어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신화일 뿐입니다. 이천 년 전 사람들은 그런 일이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진실로 믿었을 것입니다. 기독교신학이 정립되어가던 3~4세기에도, 그 이후 천 년 동안 이어진 중세시대에도, 신의 아들이 하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셨다고 진실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관적 진실과 객관적 사실은 다를 수 있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합리와 과학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종교학자들과 일부 신학자들이 신화와 역사를, 그리고 고백의 언어와 사실의 언어를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전통적인 기독론은 기독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신화의 세계에 거의 다 등장하는 단골 소재였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21세기가 된 지금도 여전히 그 논리가 통하는 이유는 이천 년 전의 그 예수신화가 기독교라는 건물의 대들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들보를 잘못 건들면 건물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지극히 보수적인 신학이 지배하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신학교에서 ‘열린 신학’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신화를 사실로 믿는 순진한 신학자들도 많아서 성서의 기록을 사실의 언어로 읽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교수들도 여전히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교 교수들은 어느 정도 열린 신학을 소개합니다. 여기서 제가 ‘어느 정도’ 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정확히 설명하지 않고 신학생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와 방식으로 애매하게 설명하는 교수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결코 어려운 이론이 아닌데, “이렇게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더라.” 라는 식으로 자기 말이 아니라 다른 신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는 것처럼, 그것도 비비 꼬아서 신학생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신학생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민거리만 잔뜩 던져놓는 신학교 교수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들이 정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조직이 싫어하는 말을 하기가 부담되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교회조직의 논리를 거스르는 수많은 신학자와 정직한 성직자, 그리고 수도사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파문하고 처형시켰음을 증언합니다.
오늘날에는 교회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사형시킬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하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일로 교회를 떠나게 된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명백히 말씀드립니다. 물리적으로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고 물리적으로 하늘로 돌아가신 예수는 신화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하늘의 뜻을 깨우치신 갈릴리의 현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리를 깨우친 것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셨습니다.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들이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를 유대 민족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와 함께 이루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무덤에 그냥 묻혀있기에는 그 위대한 삶과 가르침이 너무나 크고 감동적이었기에,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영웅들처럼 제자들과 수많은 민중들의 가슴을 불태우며 되살아났던 것입니다. 시체가 벌떡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과 삶의 자취가 사람들의 가슴에 되살아난 것입니다. 그런 부활신앙이 승천사화로 이어지고, 재림사화로도 이어지게 된 것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과, 자신의 애제자이자 동역자인 디모데를 보내겠다는 내용,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이 파송한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나서 죽을 뻔했지만 지금은 다 나아서 곧 보내겠다는 내용 등이 담겨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