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저우 여행 4 - 강남수향인 무두고진의 엄가화원에서 잘 꾸며진 정원을 구경하다.
2023년 10월 25일 기차로 쑤저우역 (苏州火车站 소주화차참) 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후 지하철을 타고 무두
(木渎 목독) MUDU 역에 내려 자전거차 쌈러 를 타고 10분을 달려서 무두고진 에 도착해 운하를 구경합니다.
明月寺(명월사) 라는 절을 지나 홍음산방 (虹饮山房) 고택에 乾隆6下 江南行程记事表 (건륭6하
강남행정기사표) 라는 안내판에서 강남을 6차례나 순행했다는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 를
생각하고는.... 운하를 운행하는 사공이 노를 젓는 나룻배 를 1인당 20위안 합게 40위안에 탑니다.
그러고는 엄가화원 (严家花园) 에 1인당 20위안에 문표를 사서 들어가서는 저택을 구경하는데 조금
전에 본 홍음산방 (虹饮山房) 처럼 여기도 저택은 오밀조밀하고 더욱 정원 은 잘 꾸며진 듯 합니다.
이 정원에는 크고 작은 연못이 대여섯 곳 이나 있어 놀랍는데 연못에는 정자 가 서 있으니.... 우리나라
정자와는 달리 지붕이 네 모서리 끝이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간 것이 참으로 이국적으로 보입니다?
중국의 여러 정원에서 늘 보이는 태호석 도 많고 게다가 벽에 공작 그림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건물을 돌아 나가다 보니 영화 포스터가 10개 넘게 보이니 그럼 이 화원에서 모두 영화를 찍은 것일까요?
옛날에 신부가 탔던 빨강색 가마가 있는 곳을 지나 건물 모서리를 돌아가니 마침 신랑 신부 일행이 보이는
데.... 신부가 웨딩 쵤영 을 하는건지 아님 결혼식을 하고 여기로 신혼 여행 을 온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강희제는 3차에 걸쳐 남순 을 실시하고 건륭제는 여섯 차례나 강남을 시찰하며 매번 무두(목독) 를
다녀갔으며, 민국 시기 무두는 목독구공소(木渎区公所) 의 소재지가 되었는데..... 사방이
산과 사찰로 둘러싸이고 태호(太湖) 에 인접하며 사가원림(私家园林), 명인고거(名人故居)
등의 인문고적이 많아 묵독경구는 태호풍경구 13경중 으뜸이자 유일의 원림고진(园林古镇) 이랍니다.
목독에는 명청시기 사가원림 (私家园林) 30여개 가 있었으며 현재 건륭제의 스승이자 중국
최장수 시인 심덕잠(沈德潜) 의 고거 엄가화원(严家花园), 서사원(徐士元) 의 고택
홍음산 (虹饮山), 청말 목독의 부호 채소어 구택(蔡少渔旧宅) 고송원(古松园), 양무운동
지도자 풍계분(冯桂芬) 의 고거 방안부제(榜眼府第), 영암산관(灵岩山馆) 등 10여개가 있습니다.
무두구전(목독고진) 의 역사는 쑤저우의 고성 만큼 오래된 곳으로, 청나라 때의 엄가화원의 400년의
역사를 가진 나무로된 홀인 상셴탕(상현당) 은 이곳의 '고급스러움과 당당함 그리고 품격'
을 보여주는 곳으로 훙인산팡(홍음산방) 안에는 큰 무대가 있는데..... 황제 건륭제가
강남에 올 때마다 연극을 즐겨 본 장소 이며, 저택 안에는 20개의 황제의 어명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홍인산방의 비밀의 정원은 '자수황후' 션타오(심수) 가 과거에 살던 집입니다. 청나라 구송위안
(고송원) 에는, 층마다 꽃 조각이 아름답게 놓여 있으며, 후원에는 500여 살의
뤄한송(나한송) 이 있으며 그리고 후원 서편으로 야오지엔핑(요건평) 자수 예술관도 있습니다.
여기 엄가화원 (严家花园) 은 건륭제의 스승 이자 중국 최장수 시인 심덕잠
(沈德潜) 의 고거 인데..... 시인과 황제 건륭제에 관한 일화가 전해 옵니다.
건륭제의 글씨와 그림 은 수준급이라 여러 작품이 남아 있으니 건륭제의 글씨는 송나라 시대의
왕희지, 미불, 명나라의 동기창체(體) 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명필 이라고 불릴만 한데.....
문제는 본인의 글씨에 너무 자부심 이 많아서, 자신이 수집한 여러 명화에다가 자신이 직접 감상평
이나 시 를 남겼는데..... 건륭제의 시재는 필체에 미치지 못한지라 그게 흠이 되었습니다.
내탕금 뿐만 아니라 심복 허션이 부정축재로 모은 비자금을 써서 저명한 고서화 들을 많이 수집했는데,
원나라 화가 방종희의 "고고정도(高高亭圖)" 는 건륭제가 망쳐놓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운치있는 절벽을 그린 작품에 눈에 확 띄는 최상단 중앙부에다가 떡하니 자기 인장을 찍어 놨습니다.
조맹부의 걸작 "작화추색도 (鵲華秋色圖)" 에도 건륭제 흔적이 많은데 도장을 찍고 시를 적는 등 그림을 훼손
하는 편이었고, 북송 휘종이 그린 "계산추색도" 라는 걸작을 수집하고는, 상술한 "고고정도" 에 찍힌 것과
동일한 큼지막한 인장을 찍어놓고, 여러 자잘한 인감을 찍은 뒤 좌측 상단부에 자신의 시까지 적어놓았습니다.
건륭제의 글씨나 그림은 우수하다는 평이지만 시재는 평범한 편인데 하지만 시를 좋아해 평생 4만편 이 넘는
시를 썼지만, "조조의 시는 몇십 편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오늘날 입에 오르내리는 명문 인데,
건륭제의 시는 많이 남아 있지만 그저 도서관 구석에나 꽂혀 있을 뿐이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합니다.
어느해 겨울, 건륭제는 총애하던 시인 심덕잠 등 신하들과 함께 항주 서호 로 갔는데
마침 눈이 내렸으니 눈꽃이 바람이 휘날려 춤을 추는 것 같은지라 이를
보자 시흥이 일은 "대시인(?)" 건륭제는 도저히 참지를 못하고 싯구를 읊었습니다.
"일편일편우일편 (一片一片又一片, 한송이 한송이 또 한송이)"
사람들은 싯구를 듣고는 모두 '좋다' 고 소리쳤고 역시 황상의 솜씨는 비범 하다며 한마디
를 하는데.... 천하가 깜짝 놀랄 정도라고 아부를 하자 기분이 좋아진 건륭제는
계속하여 읊었으니.... "삼편사편오륙편 (三片四片五六片, 세송이 네송이 대여섯송이)"
이제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으니 이것이 '시' 라면, 어린아이라도 하루에 몇편씩
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아무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지라 계속
하여 호평하는 소리 가 들려왔으니 건륭제는 기운이 나서 뒷구절을 또 읊었다고 합니다
"칠편팔편구십편 (七片八片九十片, 일곱송이 여덟송이 아홉열송이)".
이 싯구까지 나오자 모두 멍해졌다. 설마 이 어르신이 숫자를 세는 것 은 아니겠지. 설마 뒤이어지는
마지막 구절이 "백편천편만만편 (百片千片萬萬片, 백송이 천송이 만만송이)" 는 아니겠지?
이것도 시라고 할 수 있을까? 건륭제 역시 여기까지 읊은 후에 더 이상 싯구를 잇지 못했으니...
이런 난감한 순간에 여기 엄가화원의 주인인 심덕잠 이 일어나 무릎을 꿇으면서 말했다.
"황상의 시는 너무나 좋습니다. 바라옵건데 신이 개꼬리로 담비를 잇도록 (狗尾續貂) 해 주십시오."
마침 난감한 처지였던 건륭제로서야 윤허할 수밖에, 그리하여 심덕잠이 마지막 구절을 완성시킨다.
"비입매화도불견 ( 飛入梅花都不見, 매화꽃으로 날아 들어가니 모두 보이지 않네 )"
이 마지막 구절로 인하여 전체 시의 품격이 살아났다. 그리하여, 건륭제는 크게
칭찬하면서 그에게 담비 가죽옷 을 하사했다. 그리고 이 시는 건륭제의
소유 로 되었다는데.... 이 시는 청패류초 (淸稗類鈔) 순행(巡幸) 에 나오는 일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