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연구에 있어서 가장 치열하고 많은 가설들이 쏟아져 나오는 논쟁들 중에 하나는 아마도 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인가와 요한 공동체의 정 체와 특성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또한, 각각의 주장에 따라 요한복음의 편 집 과정, 구성 방법, 그리고 구절들에 대한 해석 등이 달라지게 된다. 특별 히 요한복음의 저자와 요한 공동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본문으로 여겨지는 부분은 두 번에 걸친 결론들(요 20:30-31과 21:24-25) 중에서 두 번 째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결론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밝히는 반면, 두 번째 결론은 요한복음 저자의 증언의 진정성을 확증하는 데 있다.필자는 본 논문에서 두 번째 결론에 나타난 인칭의 변화를 연구하고, 이를 통해 요한복음의 저자와 요한 공동체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 고자 한다. 하지만 지면의 한계와 본 논문에서 역점을 두는 부분에 좀 더 충 실하기 위해, 저자와 요한 공동체에 대한 다양한 가설들과 이에 대한 반론 들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21:24-25의 인칭 변화가 이루어지는 이유와 의도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요한복음의 저자를 규정하며, 개역개정에서 οἶμαι의 번역의 문제점과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 하고자 한다.
요한복음의 두 번째 결론이자 본문 전체의 마지막 구절들인 21:24-25는 증언자(그리고 기록자)와 관련하여 세 번에 걸친 인칭 변화가 발생한다. 첫 번째 증언자는 3인칭 단수로 나온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사건들을 증언하고 기록한 제자가 바로 “이 사람”(οὗτός)이라고 제시하고, 3인칭 단수로 “그의”(αὐτοῦ) 증언에 대해 언급한다(24절). 두 번째 증언자는 1인칭 복수로 나온다(24절). “이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는 사실을 “우리는 ... 아노라”(οἴδαμεν)라고 확증한다. 마지막 세 번째 증언자는 1인칭 단수로 나온다(25절). 예수께서 행하신 다른 많은 일들이 있음을 강조하며 ‘나는 ... 생각한다’(οἶμαι)로 마친다.
여기서 개역개정은 번역에 있어서 두 가지 문제점을 보인다.
첫째, οἶμαι는 ‘생각하다’를 의미하며, 개역개정이 번역한 “아노라”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둘째, οἶμαι는 1인칭 단수인 주어‘나’를 포함하고 있는데, 개역개정은 주어를 생략한 채 단순히“아노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이 번역이 가지는 큰 문제점은 독자들이 주어가 생략된 25절을 읽을 때, 앞선 24절의 “우리는 ... 아노라”와 연결하여 읽을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25절의 “아노라”의 주어는 24절의“아노라”의 주어인 “우리는”으로 필연적으로 읽히게 된다는 것이다.심지어 비교적 그리스어를 충실하게 번역한 새번역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이 발견된다. 새번역은 οἶμαι를 “생각한다”로 바르게 번역하지만,개역개정과 마찬가지로 주어를 생략하고 있다. 그 밖의 한글 성경 번역본들 중에서 공동번역(개정판도 동일)도 주어가 생략된 채“생각된다”로 번역하고 있고, 의역된 번역을 보여 주는 쉬운성경이나우리말성경에서는 οἶμαι의 의미 자체를 생략한 채 번역한다. 아마도 매끄러운 번역을 위해 οἶμαι의 주어를 생략하거나 아예 의미 자체를 없앤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비록 번역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원어를 충실하게 번역하는 것이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 필요하다. 거의 모든 영어 성경 번역본들(필자가 살펴본 영어 번역본들은 모두)은 οἶμαι의 주어를 생략하지 않은 채 올바로 번역한다. NRS, NIV, NKJ, ESV, NAS 등은 모두 οἶμαι를 “I suppose”(나는 생각한다)로 번역한다.
필자는 개역개정의 “아노라”를 ‘나는 생각하노라’로 번역할 것을 제안한다.그리고 특별히 본 논문에서 οἶμαι의 1인칭 단수 주어인 ‘나’가 번역되어야 함의 중요성을 다루고자 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결론의 마지막 구절인21:25에서 1인칭 단수 ‘나’는 요한복음의 저자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필자가 주장하는 논지의 핵심 근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2. 3인칭 단수“그”(“이 사람”,“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21:24)
요한복음의 저자에 대한 논의는 요한복음 학계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되 어왔고, 수많은 견해가 제시되었다. 먼저, 내적 증거로 볼 때 요한복음 본문 자체는 21:24에서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ὁ μαθητὴς ὁ μαρτυρῶν περὶ τούτων καὶ ὁ γράψας ταῦτα)가 “이 사람”(οὗτός)이라고 하면서 요한복음 저자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즉, “이 사람”은 제자로서 요 한복음에 나오는 모든 사건들을 목격한 증언자이고, 동시에 그것을 글로 쓴 기록자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누구인가? 요한복음 21:24는 그가 제 자라는 사실과 예수의 사역에 대해 목격하여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 의 직접적 제자(아마도 열두 제자 중의 한 명)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 사 람”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정보는 근접 문맥에서 발견된다. 21:21에서 베 드로가 예수께 “‘이 사람’(οὗτος)은 어떻게 되겠사옵니까”라고 하면서 “이 사람”의 운명을 물었을 때, 21:24에 나온 “이 사람”과 동일한 단어인 οὗτος를 사용한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의 대답을 해설하고 있는 21:23에서는 “이 사람”을 “그 제자”(ὁ μαθητής)라고 말하고 있는데, 21:24에 나온“제자”와 동일한 단어인 ὁ μαθητής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 제자는 21:20에 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τὸν μαθητὴν ὃν ἠγάπα ὁ Ἰησοῦς)로 표현 되고 있으며, 요한복음 후반부(‘영광의 책’이라고 불리는 13-20장)에서 이 와 유사한 표현들로 나타난다(13:23-26; 18:15-16; 19:25-27; 20:2-10; 21:7, 20-23, 24).1) 결론적으로 요한복음은 증언자요, 기록자인 저자를 본문의 내 러티브 안에서 3인칭 단수인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본문 스스로가 가리키는 증언자요 기록자로서의 저자, 즉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누구인가? 브라운(Raymond E.Brown)은 그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 가운데 네 가지 주장을 소개한다:2) 실 제 인물이 아닌 비유적으로 제시된 상징적 인물3), 나사로4), 마가 요한5), 그 리고 사도 요한. 비록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거부하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는 요한복음의 저자를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한 명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 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에 대한 외적 증거와 내적 증거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6) 외적 증거에 있어서 초대 교회 교부들의 증언들은 강력하다. 주후 2세기 후반에 이레니우스(Irenaeus)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이 복음 서를 기록했다고 말한다.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에 따르면 사도 요한 이 자신의 글에 대해 서머나의 폴리캅(Polycarp)에게 직접 말했고, 폴리캅 은 이 사실을 이레니우스에게 전해 주었다는 점에서 이레니우스의 증언은 가치 있고 신뢰성을 가진다.7) 내적 증거와 관련해서도 예수의 열두 제자들 중에 한 명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이며 저 자라는 사실을 요한복음의 본문 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공관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핵심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의 이름이 등장하 지 않는다. 하지만 요한복음 21장에 이르러 “세베대의 아들들”이란 언급이 나오며(21:2), 이것은 야고보와 요한이 디베료 바다에서 고기 잡는 7명 중 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리고 좀 더 범위를 좁혀 “예수께 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아마도 세베대의 아들들 중 한 명인 사도 요한일 것으로 추정된다.8)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 자”를 베드로와 함께 다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공관복음에서 베드 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측근 인물들로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다녔고(예. 막 5:37; 9:2; 14:33), 특히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둘이서 함 께 사역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행 3:1-4:23; 8:15-25).9) 또한 세 베대의 아들들 중 한 명인 야고보가 저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헤롯 아 그립바 통치 시기(주후 41-44)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기록했 을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10)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요한복음의 증언자이며 기록자인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예수의 최측근으 로서 베드로와 함께 동행했고, 세베대의 아들들 중의 한 명이었고, 따라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사도 요한으로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이 저 자라는 외적 증거와 내적 증거에 대해 상당 부분 반박될 수 있고, 또한 그에 따른 재반박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의 방식은 본 논문이 연구하 고자 하는 방향과 취지와 다르다. 본 논문의 목적은 요한복음 21:24-25에서 나타난 저자에 대한 표현과 인칭 변화를 살펴보면서 이러한 표현과 변화가 발생하게 되는 이유와 의도를 파악하는 데 있다.
비슬리-머리(G. R. Beasley-Murray)에 따르면, 요한복음에 나오는 사건들 을 기록하고 증언한 자(21:24)를 익명으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쓴 이유는 그가 잘 알려지지 않은 요한 공동체 안의 지도자들 중 한 명 으로서, 일반적으로 지도자들은 그렇게 불렸기 때문이다.11) 군터(J. J. Gunther)는 그가 당대에 명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동시대의 독자들에게 제 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12) 이러한 견해들은 “예수 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사도 요한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 만 익명으로 사용한 이유에 대해 굳이 이러한 가설들을 만들어 설명하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 다른 복음서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도 저 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익명으로 기록되었다. 마가복음 14:51에 나오 는 “청년”을 마가복음의 저자 요한 마가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비록 필자 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지만), 이 또한 저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 지 않으려고 하는 의도 때문으로 이해된다.13) 여하튼, 요한복음 저자 또한 공관복음 저자들처럼 직접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여 기록하지 않는 다. 키너(Craig S. Keener)에 따르면,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 아’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단지 ‘어머니’로만 언급되듯이, “예수께서 사랑 하시는 그 제자”도 구체적인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익명으로 제시된다.14)그리고 아마도 요한복음의 독자들은 예수의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또한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15) 따라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공관복음의 저자들처럼 자신 의 이름을 굳이 기록하지 않았고, 또한 당시의 독자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구체적인 이름 대신 “예수께서 사랑하 시는 그 제자”로 스스로를 표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자신에게 “사랑하시는”(ἀγαπάω 또는 φιλέω)이란 수식어를 붙인 것인가? 다양한 가설들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아마도 저자 자신의 증언의 신뢰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 다.16) 그는 식사 자리에서 예수의 “품”(κόλπος) 안에 있을 정도로 사랑받는 자였고, 심지어 베드로조차 그를 통해 예수에게 묻는다(13:23; 21:20). 그는 예수와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전달하는 자였다.17)예수께서 하나님의 “품”(κόλπος) 안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듯이(1:18), 그 또 한 예수의 “품” 안에 있으면서 예수를 나타낸다(13:23).18) 따라서 예수가 하 나님의 계시의 완전한 전달자인 것처럼, 그 또한 예수의 말씀과 사역을 온 전히 전달하는 참된 증언자인 것이다.19) 그리고 그의 신뢰성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에게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를 맡아 달라고 하면서,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신 장면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19:27). “사랑하시 는”이라는 표현은 목회적 차원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와티(William W. Watty)는, 이 표현을 쓴 것은 당시 초대 교회 안에서 명성도 없고 인정받지 못했던 저자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요한 공동체를 통합하 기 위한 목회적 의도라고 주장한다.20) 비록 이 주장은 사도 요한의 저작설 을 전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명으로 “사랑하시는”이 라고 표현한 것은 목회적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와티는 요한복음에서 익명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 자”인 것처럼, 명성과 지위에 상관없이 예수를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 로부터 사랑받는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21) 익명성은 요한복음을 읽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요한복음의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 자”와 연대성을 가지게 하고,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의 사랑 안 에 하나로 연합된다.22) 이러한 표현의 익명성으로 말미암아 그는 제자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의 모범이 되게 한다(참고, 13:35; 15:8-10).23) 또한, 독자들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와 동질감 을 느끼게 되고, 예수를 따르는 모든 자들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된다(17:23, 26).24) 결국 익명성의 이 표현은 요한복음의 저자의 증언을 연 대적 차원으로 발전시키고,25) 그 결과 그의 증언은 공동체(“우리”, 20:24)의 증언이 되게 한다.
필자는 요한복음 저자를 사도 요한으로 주장하면서,
저자가 자신을 익명 으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표현한 이유에 대해 두 가지로 제 시하였다.
첫째는 저자의 증언의 신뢰성을 보여 주기 위한 목적이고,
둘째는 목회적이고 연대적 차원에서 공동체적 증언으로 나타내기 위한 의도이다.
이러한 목적과 의도는 후속적으로 이어지는 인칭 변화에서 좀 더 구체 적으로 드러난다. 1인칭 복수인 ‘우리’(21:24)라는 표현은 목회적이고 연대 적 차원에서 공동체적인 특성을 나타내고, 1인칭 단수인 ‘나’(21:25)라는 표 현은 사도로서의 최종적 확증을 내포하는 진정성을 보여 준다.
1) 브라운(Raymond E. Brown)은 요한복음의 저자와 관련해서 내적 증거로 보이는 표현들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첫째, 예수를 따르게 된 세례 요한의 두 제자들 중에서 이름이 언 급되지 않은 한 제자(요 1:37-42); 둘째, “또 다른 제자” 혹은 “그 다른 제자”로 표현된 제자(18:15-16; 20:2-10); 셋째, “사랑하시는”의 수식어가 붙은 제자(13:23-26; 19:25-27; 20:2-10; 21:7; 21:20-23, 24). 이 세 부류 중 첫 번째 유형의 무명의 제자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저 자로서의 제자로 동일시할 만한 증거로 볼 수 없다. 하지만 두 번째 유형은 문맥상 세 번째 유형의 제자와 동일 인물로 볼 수 있고, 따라서 두 번째와 세 번째 구절들에 나오는 제자는 요한복음의 내적 증거로서의 저자로 이해할 수 있다. 레이몬드 E. 브라운, 앵커바이블: 요한 복음 I, 최흥진 역 (서울: CLC, 2013), 133-134.
2) Ibid., 134-141. 또한 요한복음 저자에 대한 James H. Charlesworth, The Beloved Disciple: Whose Witness Validates the Gospel of John? (Valley Forge: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5)의 자세한 논의를 참조하라.
3) 예를 들면, 크라게루드(A. Kragerud)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를 요한 학파(the Johannine School)의 사상을 상징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인물로 본다. A. Kragerud, Der Lieblingsjünger im Johannesevangelium (Oslo: Osloer Universitätsverlag, 1959). 하지만 요한 복음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의 행동을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가 상의 인물로 보기 어렵다. 레이몬드 E. 브라운,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I, 134.
4) 남자들 중 오직 나사로만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요 11:3)라고 언급하고 있고, 이러한 표현에 근거해서 나사로를 저자로 간주한다. Floyd V. Filson, “Who was the Beloved Disciples?”, JBL 68 (1949), 83-88; J. N. Sanders, “Those Whom Jesus Loved (Jn xi.5)”, NTS(1954-1955), 29-41; Vernard Eller, The Beloved Disciple: His Name, His Story, His Thought(Grand Rapids: Eerdmans, 1987). 하지만 이 주장은 요한복음 11-12장에서 나사로라고 이름 을 밝힌 후, 13-21장부터는 왜 익명으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로 기록하는지를 설 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레이몬드 E. 브라운,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I, 136. 나사로 가설 에 대한 주장과 반론에 대해 김득중, 요한의 신학(서울: 컨콜디아사, 1994), 186-188을 참 조하라.
5) 마가 요한으로 추정되는 근거는, 그가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그의 집이 초대 교회의 중심 지로 사용되었고(행 12:12), 제사장 계층의 친척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레위인 바나바 의 생질임, 골 4:10; 행 4:36),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전승에 상호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통 해 설명할 수 있고(마가와 누가는 바울을 통해 서로 알게 되었을 것임, 몬 1:24), 베드로와의 교제(행 12:12; 벧전 5:13)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마가는 외적 증거 등에서 두 번째 복음서 저자로 알려져 있고, 무엇보다도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열두 제 자 중에 한 명으로 제시하는데, 마가는 그들 중에 속하지 않는다. 레이몬드 E.브라운, 앵커 바이블: 요한복음 I, 139.
6) D. A. 카슨, 요한복음, 박문재 역, PNTC (서울: 솔로몬, 2017), 121-144. 카슨(D. A. Carson)은 전통적 견해를 주장하는 현대 학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Ibid., 122): B. F. Westcot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The Greek Text with Introduction and Notes, 2 vols. (London: John Murray, 1908), 1:ix-lxvii; L. Morris, Studies in the Fourth Gospel (Exeter; Paternoster, 1969), 139-192; F. F. Bruce, The Gospel of John: Introduction, Exposition and Notes (Basingstoke: Pickering and Inglis, 1983), 1-6; J. Ramsey Michaels, John (New York: Harper and Row, 1983), xv-xxiv. 키너(Craig S. Keener) 또한 요한복음의 저자를 사도 요한으 로 보고 있지만, 자신의 견해를 바꿀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한다. 크레이그 S. 키너, 키너 요 한복음 I, 이용역 역 (서울: CLC, 2018), 272. 브라운은 앵커바이블 주석서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를 예수의 열두 제자들 중에 한 명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으로 주장했는데(레이몬드 E.브라운,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I, 138-141), 후에 그의 견해를 수정하여 사도 요한 저작설 을 부인한다. 레이몬드 E. 브라운, 요한 교회의 신앙과 역사, 최흥진 역 (서울: 한국장로교 출판사, 2010), 35
7) 레이몬드 E. 브라운,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I, 124-125; D. A. 카슨, 요한복음, 121. 8) 에드워드 W. 클링크 3세, 강해로 푸는 요한복음, 정옥배 역, ZECNT (서울: 디모데, 2019),51.
9) D. A. 카슨, 요한복음, 128.
10) Ibid., 127.
11) G. R.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BC (서울: 솔로몬, 2001), 90.
12) J. J. Gunther, “The Relation of the Beloved Disciple to the Twelve”, TZ 37 (1981), 129-148.
13) 참고, James A. Brooks, Mark (NAC; Nashville: Broadman, 1991), 238. 사실 이러한 주장은19세기의 학자들에게서 추론된 가설이다. 이 청년이 누구인지에 대한 열 가지 견해를 나열 한 로버트 스타인, 마가복음, 배용덕 역, BECNT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4), 938-939를 참조하라. 필자는 이 청년을 막 16:5의 예수의 빈 무덤에 있던 청년과 연결시켜 제자도적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김선욱, “겟세마네 동산과 예수의 무덤에 나타난 미스터리한 청년 이야기(막 14:51-52과 16:5): 청년의 정체, 문학적 기능, 그리고 신학적 의의”, 신약연구13 (2014), 580-609. 또한 A. Edward Gardner, “Imperfect and Faithful followers: The Young Man at Gethsemane and the Young Man at the Tomb in the Gospel of Mark”, Encounter 71 (2010), 34을 참조하라. 나인햄(D. Nineham)은 막 14:51-52에 나온 청년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시도들은 별로 유익이 없다고 말한다. D. Nineham, The Gospel of Mark (London: Adam & Charles Black, 1963), 396.
14) 크레이그 S. 키너, 키너 요한복음 I, 282.
15) Ibid.
16) Maurice F. Wiles, The Spiritual Gospel: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in the Early Church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0), 9.
1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와 그가 행하신 일들에 대해 깊 이 있고 즉각적인 이해를 보여 준다. Marianne Meye Thompson, John: A Commentary, NT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15), 445.
18) 참고, 김득중, 요한의 신학, 191. 예수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사랑을 받고 있듯이, 그 또한 예수의 품 안에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의 표현은 관계 성의 측면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Arthur H. Maynard, “The Role of Peter in the Fourth Gospel”, NTS 30 (1984), 536.
19) 저자의 신뢰성에 대해 심지어 “영감받은 예수 전승(Jesus tradition)의 선생으로서, 사랑하 는 제자는 또한 보혜사 성령과 평행을 이룬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크레이그 S. 키너,키너 요한복음 I, 282에서 인용. R. Alan Culpepper, The Johannine School: An Evaluation of the Johannine-School Hypothesis Based on an Investigation of the Nature of Ancient Schools, SBLDS 26 (Missoula: Scholars Press, 1975), 267; Rodney A. Whitacre, Johannine Polemic: The Role of Tradition and Theology, SBLDS 67 (Chico: Scholars Press, 1982), 18.
20) William W. Watty, “The Significance of Anonymity in the Fourth Gospel”, Expository Times90 (1978-1979), 209-212.
21) Ibid., 212.
22) Ibid. 23) 크레이그 S. 키너, 키너 요한복음 I, 280.
24) Ibid.
3. 1인칭 복수 “우리”(21:24)
요한복음 21:24는 3인칭 지시대명사 οὗτός(개역개정, “이 사람”)를 사 용하여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들을 증언하고 기록한 자가 바로 “이 사람”이 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어서 곧바로 1인칭 복수 “우리”로 확장하 여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여기서 논란이 되는 것은 “우 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이다.
“우리”의 정체에 대한 이해는 크게 두 가 지 견해로 나뉜다:
(1) 저자와 관련되어 있으며 실재하는 복수의 사람들,
(2)수사학적 표현으로서의 “우리”.
첫 번째 견해와 관련해서 다양한 가설들이 제시되어 왔다. 무라토리 정경(Muratorian Canon, 11.10-15)에 따르면,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된 이유는 그의 제자들과 감독들의 요구 때문이라는 것이다.26) 이 기록 에 비추어 볼 때, 사도 요한을 중심으로 한 “사도적 교회”(apostolic church)가 존재했고, 이 교회 공동체가 사도 요한의 “사도적 증언”(apostolic witness)을 확증해 준다고 할 수 있다.27)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실재하는 복 수의 사람들을 요한의 공동체(혹은 교회)로 이해하고, 요한 공동체의 성격 을 파악하려고 시도한다.28)
보링(M. Eugene Boring)에 따르면, 주후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에 바울계 교회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 비주류 기독교 그룹 들이 소아시아에서 공동체들을 세웠고, 그 중에 하나가 요한 공동체로서 하나의 종파로 존재하다가 2세기 후반에 기독교 주류에 의해 받아들여졌 다.29) 그리고 요한 공동체에 의해 받아들여진 요한복음은 오늘날 요한 학 파라고 불리는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여러 단계의 편집을 거쳐 최종적으 로 집필되었다.30) 브라운은 요한복음에서 “사도”라는 언급이 나오지 않고(또한, 공관복음에서 모두 나오는 열두 사도들을 세우는 장면과 그들의 이 름의 열거하는 내용도 없음), 기독교 예식의 핵심이 되는 성만찬 장면이 생 략된 점 등은 요한 공동체가 주류 기독교와는 다른 비주류의 종파주의 특 성을 보인다고 주장한다.31) 그리고 요한 공동체의 발전 단계와 더불어 요 한복음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고 이에 따라 요한복음을 단계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32) 그러나 브라운은 자신의 가설 중 60%만 받아들여져도 만 족한다고 고백한다.33)
현대 학계에서 요한 공동체를 설정하고 요한복음을 이해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제시되어왔지만, 이에 대한 반박 또한 강하게 제기되어 왔다. 클링크(Edward W. Klink III)는 요한 공동체를 상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요한 복음을 해석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야기시킨다고 주장한다.34) 그는 요한복음을 읽는(또는 듣는) 독자(또는 청중)는 관계적으 로 규정해야지 지역적으로 추정해서는 안 되고, “거울 읽기”(mirror reading)를 통해 복음서를 재구성할 수 없으며, 복음서가 특정 독자를 위해 기록되 거나 읽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35) 또한 보캄(Richard Bauckham)을 중심으로, 복음서들의 기록 대상이 지역적 기반의 특정 공동 체라기보다는 좀 더 넓은 측면에서 보편적 독자라고 보는 견해가 주장되어 왔다.36) 이러한 견해들에 비추어 볼 때, 요한복음의 독자는 특정화된 공동 체라기보다는 저자가 가진 신앙을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는 폭넓은 대상으 로 보는 것 또한 타당하다.37)
본 논문은 요한 공동체와 요한 학파의 특성과 신학에 대한 다양한 견해 들과 논지들을 소개하고 반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논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여하튼, “우리”라는 표현 때문에 반드시 요한 공동체(또는 학파)를 전제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우리”라고 언급된 21:24에 바로 이어서 25절에서는 “나”라는 1인칭 단수 표현으로 요한복음 저작에 대해 다시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24절 의 “우리”를 실재하는 복수라고 한다면, 25절의 “나”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브라운은 25절의 1인칭 단수 “나”는 한 명의 개인이 아니라 단지 웅변적(oratorical) 표현이라고 말한다.38) 즉 24절의 “우리”는 실재하는 복수 이고, 25절의 “나”는 수사학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런 식의 주장이라면, 그와 역이 되는 주장 또한 가능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24절 의 “우리”는 수사학적 표현이고, 25절의 “나”는 실재하는 단수 저자로 이해 할 수 있지 않은가? 본 논문에서 필자는 요한복음의 저자를 한 명의 개인으 로 보고, 24절의 “우리”와 25절의 “나”의 인칭 변화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 다. 즉, 24절의 “우리”는 수사학적 표현, 25절의 “나”는 실재하는 개인으로 이해하며 논의를 전개해나갈 것이다.
두 번째 견해는 “우리”를 수사학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카슨(D. A. Carson)의 구분에 따라 또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 “잘 알려져 있듯이” 등의 “비한정적 표현”(indefinite expression),
(2) 요한 자신 을 가리키는 “편집적 ‘우리’”(editorial ‘we’).39)
첫 번째 주장은 “우리”라는 비한정적 표현을 통해 증언의 참됨을 알리려고 한다는 것으로, 카슨이 말 하듯이 증언의 정당성을 이런 식으로 제시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40)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가 알듯이” 등의 비한정적 인 관용적 표현으로, 요한복음 기록자의 증언의 진정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최종적 결론으로서의 증언의 확실성을 보증하려는 문맥에 있어서 받아들 이기 어렵다.
두 번째 주장인 “편집적 ‘우리’”와 관련해서, 필자는 연대적 특성과 저자 의 권위를 강조한 “우리”로 이해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즉, 요한복음의 저 자는 자신의 증언이 참됨을 말하기 위해 편집적 차원에서 연대적이고 권위 있는 표현인 ‘우리’를 사용한다. 사실 요한복음에서 “우리”라는 표현은 곳 곳에 등장한다. “우리”는 요한복음의 저자로서(예. 1:18; 21:24),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장면에서(예. 3:11), 그리고 개별 등장인물들의 말(예. 3:2; 20:2)등에서 나온다.41) 또한, 요한복음의 저자가 요한 서신들을 기록했다면(필 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저자는 요한복음뿐 아니라 요한 서신들에서도 “우 리”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요일 1:2, 3, 4, 5, 6; 요삼 1:12)42). 여기서 “우 리”는 사도적 권위(예. 요일 1:3), 독자들(예. 1:7), 대적자들(예. 1:6), 기록자 자신(예. 요일 1:4)과 결부된다.43)
먼저 “우리”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요한복음 1:14는 마지막으로 사 용된 21:24와 인클루지오를 이룬다.44) 1:14에 나오는 “우리”의 정체와 관련 하여 다섯 가지 견해가 제시된다:
“(1) 보편적 ‘우리’: 일반적 세상,
(2) 교회 적 ‘우리’: 보편적 교회,
(3) 사도적 ‘우리’: 사도적 권위를 가진 증언,
(4) 역 사적 ‘우리’: 물리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
(5) 종파적 ‘우리’:요한 공동체”.45)
여기서 “우리”는 문맥상 네 번째 견해로 이해하는 것이 타 당하지만, 동시에 다른 견해들도 포함될 수 있다.46) 이 구절은 성육신을 증언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로 육신의 예수를 직접적으로 눈으 로 본 기록자와 그를 포함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47) 또한, 보캄에 따르 면, 고대 그리스어에서 저자가 자신의 증언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1인칭 복수인 “우리”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구절에서도 그러한 측면에서 이해 될 수 있다.48) 그리고 “우리”는 요한복음의 처음과 끝부분, 즉 1:14와 21:24에 위치하면서 책 전체를 인클루지오하고 있는데, 이를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요한복음에 기록된 내용들이 참되다는 사실을 “권위 있는 증언”으로 제시한다.49) 따라서 1:14의 “우리”는 저자를 포함해서 예수를 목격한 그리 스도인들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저자의 증언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해 의 도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1:14의 “우리”라는 표현이 저자와 예수 를 본 실재 목격자들이라는 물리적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목회적 측면에 서의 연대성을 함께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저자는 “우 리”를 통해 자신과 함께 믿음을 공유한 자들이 증언자가 될 수 있고, 사도 적 권위를 가진 자신을 포함한 신앙 공동체의 증언이야말로 참되다는 것을 권위 있게 말하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이 신앙 공동체를, 지역적 기반을 둔 특정한 요한 공동체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자신의 증언을 받아 들이는 그리스도인과의 연대적 차원에서 “우리”를 사용하고 이 표현을 통 해 목회적 차원에서 동일한 신앙의 공유라는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암시한 다. 이러한 특성은 21:24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비록 저자와 관련된 “우리”의 구절은 아니지만, 3:11의 “우리” 사용 또한 증언자의 권위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구절에서 “진 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σοι, 개역개정에서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지만, 이 어구는 “이르노니”의 주어인 1인칭 단수 “내가”로 시 작하고, 대상은 2인칭 단수인 “네게”이다)라는 전형어구를 제외하고, 말하 는 주체와 듣는 대상이 모두 복수로 나온다. 즉, 예수는 자신에 대해서는“우리”로, 니고데모를 향해서는 “너희”로 표현한다. 그리고 3:12부터 다시 말하는 주체와 듣는 대상이 모두 단수로 나타난다. 3:11에서 “우리”라는 복 수로 제시한 이유에 대해 크게 네 가지 견해가 있다.50) 첫째,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증언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우리”라고 표현한다.51) 둘째, “우리”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예수 공동체, 요한 공동체, 또는 교회)를, “너희”는 회당 또는 유대교를 가리킨다.52) 셋째, “우리”는 아들인 예수가 아버 지와 함께 증언했다는 차원에서 복수가 되고, 너희는 니고데모와 그가 속 한 산헤드린을 말한다.53) 넷째, 예수께서 “우리”라고 말한 이유는 3:2의 니 고데모가 “우리”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 대응하여 반박하기 위해 의도적 으로 사용한 것이다.54)
첫 번째 견해는 “우리”에 제자들을 포함시키는 것으로, 이는 3:12에서 예 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늘의 일들”을 제자들이 알고 함께 증언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 시점에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온전히 알고 증언자로 참여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55)
두 번째 견해는 요한복음 저자가 시대착오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고 본 다. 즉, “우리”란 표현은 예수께서 실제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후대 교회(또는 공동체)의 신앙 고백적 진술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카슨에 따르면,저자는 제자들이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하셨던 일들에 대한 이해와 그 이후에 비로소 깨닫게 된 것들을 세심하게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 가 자신의 시대를 반영하여 “우리”를 부주의하게 기록했다고 보는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예를 들면, 2:22; 12:16).56)
필자는 세 번째와 네 번째 견해를 함께 받아들인다. 세 번째 견해에서 예 수께서 “우리”라고 표현한 이유는 예수의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고(참고. 5:20)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이기 때문에(10:30) 예수의 증언이 권 위 있고 참됨을 보여 주기 위해 “우리”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특별히 3:11은 “증언”이란 측면에서 언급되고 있다. 예수의 증언이 참된 이유는 아버지 인 하나님께서 아들인 예수를 위해 친히 증언하시기 때문이고(5:31-32, 36-37; 8:13-14, 17-18),
결국 예수의 증언은 하나님의 증언을 포함한 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57) 또한, 네 번째 견해도 타당한데, 3:2에서 니고데모가“우리”라고 하면서 대화를 시작한 것과 대응하여 예수께서 “우리”라고 말 씀하시면서 마지막 답변을 하신다. 예수께서 “우리”라고 표현한 이유에 대 해 브라운은 “니고데모의 교만한 태도에 대한 패러디”라고 말하고,58) 카슨 은 니고데모의 말을 예수께서 “냉소적으로 흉내”내는 것이라고 주장한 다.59) 필자는 니고데모가 말한 “우리”는 그와 그가 속한 유대 당국을 가리 킨다고 본다.60) 또한, 예수께서 말한 “우리”는 니고데모의 “우리”와 대응하 여 사용하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의 “우리”가 니고데모의 교만한 태 도를 냉소적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록 니 고데모가 믿음이 아닌 이성과 호기심으로 예수께 찾아왔다고 하더라도, 그 는 예수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다. 예수의 “우리”는 니고데모의 “우리”와 다르다. 전자는 하늘에 속해 있고, 후자는 땅에 속해 있다(참고. 3:12, 31).클링크의 말처럼, 니고데모의 “우리”는 일차적으로 그와 그가 속한 유대 당 국을 의미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세상”을 함의한다(1:10-11).61)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의 “우리”는 그와 그가 함께 하는 하나님을 가리키며, “세상”과 대조된다. 따라서 예수의 “우리” 표현은 예수 의 증언의 권위를 강화시킨다.62) 결국 3:11의 “우리” 표현은 1:14와 21:25와 마찬가지로 “권위 있는 증언”으로서의 기능을 한다.63)
필자는 21:25의 “우리”라는 표현의 문학적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 1:14와3:11의 사용 용례와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저자는 요한복음 후반부(영광의 책)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하고, 21:24에서는 3인칭 단수를 사용하여 ‘이 일들을 증언하고 기록한 제자’로 제시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표현하지 않고, 대신 1인 칭 복수인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렇게 “우리”라고 말한 이유는 아 마도 증언의 확실성을 연대적 차원으로 확장시키고, 동시에 증언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1:14와 3:11의 용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 리”는 연대적 차원에서 증언의 권위를 부여하는 기능을 한다. 비록 1:14와3:11의 “우리”가 실재하는 복수를 가리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21:24의 실재 개인으로서의 수사학적 표현인 “우리”와는 다르지만, 증언의 연대적 차원과 권위라는 측면에서 동일한 문학적 기능을 한다. 결론적으로 21:24에서 인칭 변화의 흐름은 저자를 예수의 사역 전체를 지켜보며 함께 동참한 신 뢰할 만한 객관적 인물로 보여 주기 위해 3인칭 단수로 제시한 후, 이어서1인칭 복수로 연대적 차원에서 그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권위 있게 말하고 있다. 이제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인 21:25에서 저자는 실제로 1인칭 단수 인 “나”를 사용하여 자신이 이 책의 저자라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밝힌다.
25) Ibid., 281.
26) 참고, D. A. 카슨, 요한복음, 1274. 요한복음의 저자를 증언하는 고대 전승들에 대해서 학 자들마다 해석이 다르다. 카슨은 대다수의 전승들에서 언급된 요한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의 한 명인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을 가리킨다고 본다(Ibid., 46-52). 반면에 보링(M. Eugene Boring)은 고대 전승들에서 요한 전집(요한복음, 요한서신들, 요한계시록)이 예수 의 열두 제자 중의 한 명인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고, 대신 아시아 교회들의 존경받는 지도자인 장로 요한이 이 전집 가운데 한 권 또는 그 이상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참고. Eusebius, Hist. eccle. 3.39.4). 유진 보링, 신약개론:역사, 문학, 신학, 류호성 외 역 (서울: CLC, 2017), 1157.
27) C. K. Barret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An Introduction with Commentary and Notes on the Greek Text (London: SPCK, 1978), 588.
28) 요한 공동체에 대한 다양한 가설들을 연구사적으로 소개한 Wally V. Cirafesi, “The Johannine Community Hypothesis (1968-Present): Past and Present Approaches and a New Way Forward”, CBR 12 (2014), 173-193을 참조하라.
29) 유진 보링, 신약개론: 역사, 문학, 신학, 1154.
30) Ibid., 1162-1163.
31) 레이몬드 E. 브라운, 요한 교회의 신앙과 역사, 21.
32) Ibid., 15.
33) Ibid., 5.
34) 에드워드 W. 클링크 3세, 강해로 푸는 요한복음, 70.
35) Ibid.
36) 참고, Richard Bauckham, ed., The Gospels for All Christians: Rethinking the Gospel Audiences (Grand Rapids: Eerdmans, 1998).
37) 에드워드 W. 클링크 3세, 강해로 푸는 요한복음, 997.
38) 레이몬드 E. 브라운,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II, 최흥진 역 (서울: CLC, 2013), 2034.
39) 카슨은 “우리”에 대해 세 가지 견해로 나누어 제시한다: (1) 실재하는 복수의 사람들, (2) “비한정적 표현”(indefinite expression), “편집적 ‘우리’”(editorial ‘we’). D. A. 카슨, 요한복 음, 1274-1276.
40) Ibid., 1275.
41) Ibid., 1275-1276.
42) Ibid., 1276.
43) Ibid.
44) 에드워드 W. 클링크 3세, 강해로 푸는 요한복음, 118-119; Richard Bauckham, Jesus and the Eyewitness: The Gospels as Eyewitness Testimony (Grand Rapids: Eerdmans, 2006), 370-383.
45) 에드워드 W. 클링크 3세, 강해로 푸는 요한복음, 70.
46) Ibid., 118.
47) D. A. 카슨, 요한복음, 222.
48) Richard Bauckham, Jesus and the Eyewitness: The Gospels as Eyewitness Testimony, 370-383. 49) Ibid.;에드워드W.클링크3세,강해로푸는요한복음,118-119. 50) 참고. 레이몬드 E. 브라운,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I, 420. 51) 예를 들면, Marianne Meye Thompson, John: A Commentary, 83
52) 예를 들면, G. R.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192. 몰로니(Francis J. Moloney)는 “우리”-“너 희” 표현에서 예수 공동체(Jesus-community)가 이스라엘에게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Francis J. Moloney, The Gospel of John, SP 4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8), 94.스와틀리(Willard M. Swartley)는 예수가 “믿는 자들의 공동체”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우리”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윌라드 스와틀리, 요한복음, 이영훈 역,모든 이를 위한 신자들의 교회 성서주석 (서울: 대장간, 2016), 123. 또한 Gerald L. Borchert,John 1–11, NAC, vol. 25A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178; 이상훈, 요한복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131-132를 참조하라.
53) 예를 들면, 콜린 G. 크루즈, 요한복음 , 배용덕 역, TNTC 4 (서울: CLC, 2013), 162; 크레 이그 S. 키너, 키너 요한복음 II, 이용역 역 (서울: CLC, 2018), 1590.
54) 예를 들면, 레이몬드 E. 브라운,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I, 420; D. A. 카슨, 요한복음, 354-355.
55) D. A. 카슨, 요한복음, 354.
56) Ibid., 354-355.
57) 참고. 크레이그 S. 키너, 키너 요한복음 II, 1590.
58) 레이몬드 E. 브라운,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I, 420. 59) D. A. 카슨, 요한복음, 354. 60) 에드워드 W. 클링크 3세, 강해로 푸는 요한복음, 218. 61) Ibid. 62) Richard Bauckham, Jesus and the Eyewitness: The Gospels as Eyewitness Testimony, 372. 63) 에드워드 W. 클링크 3세, 강해로 푸는 요한복음, 218.
4. 1인칭 단수“나”(21:25)
요한복음의 최종 결론부인 21:24-25에서 저자와 관련하여 마지막 세 번 째 인칭 변화가 나타난다. 저자는 21:25에서 과장법을 사용하여 예수의 사 역의 방대함을 말하면서, 최종적으로 “나”라는 1인칭 단수로 자신을 밝힌 다. 저자는 만일 여기에 기록된 사건들 외에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모두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것을 보관하기에도 부족할 것이라는 “과장된 찬양”으로 끝을 맺는데, 이러한 과장법은 그리스-로마와 유대 문헌들에서 통용되던 문학적 관례이다.64) 과장된 서술 방식은 저자가 예수의 사역들 중 에 적은 일부를 선택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동시에 기록되지 않은 예수의 방대한 사역들은 더 많이 칭송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65)
하지만 21:25는 고대 사본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다.66) 가장 권위 있는 사본 중의 하나인 시내산 사본(Codex Sinaiticus)에 이 구절이 원래부터 있 었는지, 아니면 후대에 첨가된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이 사본의 발견자인 티쉔도르프(Constantin von Tischendorf)는 처음 기록(א*)에는 25절이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67) 그의 주장은 옳다고 판명되었지만 좀 더 설명이 요구된다. 이 구절에 대한 논란은 1934년에 대영박물관에서 실시된 자외선 실험에 의해 명확하게 판명되었다. 처음 필사자는 요한복음을21:24로 끝내고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하지만 나중에 이 필사자는 자신이 쓴 서명을 지우고 21:25를 덧붙인 후에 최종적으로 자필 서명을 다시 했 다.68) 티쉔도르프의 주장대로 21:25은 시내산 사본의 처음 기록에는 없었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필사자가 다시 덧붙여 썼다는 점에서21:25는 후대 필사자의 첨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21:25는 후대 첨가 가 아닌 원래의 사본에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69)
이제 왜 저자가 요한복음 전체의 마지막 구절인 21:25에서 1인칭 단수“나”를 사용하여 예수의 사역의 방대함을 통해 그의 위대함을 주장하는지 를 살펴보고자 한다. 마이클스(J. Ramsey Michaels)는 21:24가 복음서 저자(3인칭 단수,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 “이 사람”, “그 의”[즉,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와 내레이터의 음성(1인칭 복수, “우리” ― 마이클스는 서사적 차원에서 “우리”가 요한복음의 내러티브를 이끌어 가는 내레이터라고 지적한다.)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보여 주는 하나의 예라고 말한다.70) 즉, 저자는 자신을 예수의 사역을 실제 로 함께하고 지켜본 객관적인 인물로 3인칭 단수로 제시하다가, 자신의 증 언의 권위를 강화시키고 연대적 차원에서 믿음의 참여를 독려하는 1인칭 복수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칭의 변화는 21:25에서 다시금 1인칭 단 수인 “나”로 나타난다. 요한1서에서 “나”는 “우리”와 번갈아 사용된다는 점 에 비추어 볼 때, 요한복음 21:24의 “우리”에서 이어지는 21:25의 “나”로의 인칭 변화 또한 저자의 문체적 특징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71)
쾨스텐베르거(Andreas J. Köstenberger)는 이러한 인칭 변화가 요한복음 최종판의 편집자요 승인자로서 요한 공동체를 상정하는 가설에 대한 결정 적인 반대 증거로 제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72) 만일 요한복음이 21:25의οἶμαι, 즉 ‘내가 생각한다’란 동사 없이 21:24의 “우리”로 끝났다면, 요한복 음의 최종 편집과 승인의 역할을 요한 공동체가 했다는 것은 상당히 설득 력 있는 주장이 될 것이다.73) 하지만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인 21:25는“우리”가 아닌 “나”로 끝난다. 만일 요한 공동체가 요한복음의 결론부인 21:24-25를 첨가했다면, 당연히 21:25는 “우리”로 마쳤어야지 “나”로 끝날 수는 없는 것이다.74) 따라서 21:25의 최종적 증언자로서의 “나”는 실재하는 개인으로서의 “나”이고, 앞선 구절에서의 21:24의 “우리”는 “나”에 대한 수 사학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 하나 살펴볼 것은 요한복음의 객관적 저자와 요한복음의 내러티브를 이끌고 가는 내레이터에 대한 표현의 차이이다. 요한복음의 본문은 저자를3인칭 단수로 사용하여 “그”(“이 일을 증언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 “이 사람”)이라고 객관적으로 지칭한다(21:24). 하지만 요한복음의 내레이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1인칭인 복수 “우리”로 내러티브를 이끌어 간다(예. 1:14, 16; 21:24).75) 만일 요한복음의 본문이 가리키는 저자가 요한복음의 내러티 브를 이끌어가는 내레이터와 동일인이라면, “그”와 “우리” 또한 동일하게 요한복음의 실제 저자를 가리킬 것이다. 하지만 이 두 표현은 인칭뿐만 아 니라 수까지도 다르다. 전자는 단수이고 후자는 복수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복수 “우리”는 단수 “나”에 대한 권위를 강화시키는 표현으 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21:24의 “우리”는 21:25에서 저자가 자신을 실제 로 밝히는 “나”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고, 결국 21:24의 요한복음의 저자인3인칭 단수 “그”는 21:25의 1인칭 단수 “나”가 된다.76)
“나”가 “그”와 동일인일 수 있는 이유는 21:24의 “증언하고”의 그리스어 동사 시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사람”, 즉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 자”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일들을 증언하는데, “증언하고”의 그리스 어 μαρτυρῶν은 현재 시상으로서 계속적인 진행의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현재 시상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살아 있으며, 지속적으로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하지만 비슬리-머리는 이와는 다르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이미 죽었고, 요한복음의 최종 저자는 요한 공동체가 실망하지 않도록 “증언하고”를 현재형으로 사용함 으로써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자신의 증언 속에서 계속 살아서 요한 공동체 가운데 증인 역할을 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77) 그러나 이 견해는 요한 공동체의 역사적 재구성에 근거한 하나의 가정일 뿐 본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주해한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키너는 μαρτυρῶν의 현 재 시상이야말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올바르게 지적한다.78) 따라서 21:25의 ‘내가 생각한다’(개역개정은 단지“아노라”로 번역)의 그리스어 동사 οἶμαι가 1인칭 단수 현재형으로 기록되 었다는 점은 이 구절의 “나”가 21:24의 예수의 일을 현재 증언하고(μαρτυρῶν)있는 “그”와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현재 증언하고 있는 “그”가 현재 생각하고 있는 바로 “나”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저자 는 자신을 예수 사역의 목격자요 기록자로서 객관적 인물인 3인칭 단수로 서술하다가, 마지막 진술에서 “나”로 자기 스스로를 밝힌다.
그렇다면 저자는 요한복음의 최종 진술에서 왜 자신을 “나”로 밝히는가?대다수의 주석서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자세하게 논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요한복음의 편집층을 인정하는 부류는 “나”를 요한복음의 최종 편집자로 간주하고, 그가 요한 공동체가 승인한 요한복음에 자신의 생각을 첨부한 것이라고 이해한다.79) 또는 바울에게 대필자가 있었던 것처럼(예. 롬16:22), 요한복음도 저자의 말을 받아 적은 대필 기록자가 있었을 것이고,그가 자신을 “나”라고 밝히고 있다고 본다.80)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필자는 “나”를 요한복음의 저자로 본다. 필자와 동일한 견해를 가진 카슨은“나”를 쓴 이유에 대해, 저자가 내러티브 장면을 서술하는 동안 자신을 “예 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로 묘사하다가, 마지막에 되어서야 자유롭게 되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81) 필자 또한 요한복음의 저자가 내러티브 장면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자신을 3인칭 단수로 사용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1인칭 단수로 자신을 드러냈다고 본다.하지만 저자가 글을 마칠 때 단순히 자유로운 마음이 되어 인칭을 바꾸어 썼다는 주장은 다소 빈약해 보인다. 그보다 더 깊은 의도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쾨스텐베르거는 고대 문헌에서 οἶμαι의 사용 용례를 통해 요한복음에서“나”를 쓴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82) 이 단어는 시칠리아의 디오도루스(Diodorus of Sicily), 할리카르나수스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Halicarnassus), 요세푸스(Josephus), 플루타르크(Plutarch) 등의 역사가들의 글에서 발견된다.83) 쾨스텐베르거는 이들의 οἶμαι의 사용에 있어서 두 가지 점을 발견한다.84) 첫째, 저자는 이 단어를 종종 한 단락의 처음과 끝 부분에 위치시키면서 청중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겸손(authorial modesty)하게 전달 하는 데 사용한다. 둘째, 이 단어는 저자 자신이 쓴 글 전체에 대한 저자의 관점(authorial perspective)을 밝히는 데 사용되었고, 편집한 글들에 대해서 는 적용되지 않는다. 특별히 두 번째와 관련하여 쾨스텐베르거는 요한복음 의 οἶμαι의 용례도 요한복음 전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밝히는데 사용된 것이지, 자신이 기록하지도 않은 편집된 글을 가리키는 데 쓴 것은 아니라 고 주장한다.85) 이것은 요한복음이 몇몇 저자들의 글이나 전승 자료들로부 터 편집된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저자에 의해 요한복음 전체가 기록되었다 는 사실을 보여 준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복음서 마지막 부분에 자 신이 쓴 요한복음 전체의 글에 대하여 겸손함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밝 히는 데 οἶμαι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카슨과 쾨스텐베르거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요한복음의 저자 가 자신의 글을 마무리하면서 οἶμαι를 사용하여 자유로운 마음으로 겸손하 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필자는 동사 οἶμαι에서 1인 칭 단수 “나”로 표현한 것은 사도적 권위와 그에 따른 자신의 글의 진정성 을 보여주려고 하는 의도가 함의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에서 자신의 복음의 진정성을 밝히기 위해 “내가 전한 복음”(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ὸ εὐαγγελισθὲν ὑπ ̓ ἐμου)을 강조하며, 자신의 복음이 사람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ὑπ ̓ ἐμου)를 강조한다(갈 1:11-12). 또한, 이 강조는 자신의 사도 된 경위를 말하는 과 정에서 나온다(1:11-24). 즉 바울은 자신이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 은 사도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자이기 때문 에 “내가 전한 복음”은 진정성이 있다고 말한다. 복음의 진정성은 사도적 권위에 기초한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서신들 마지막 부분에서 ‘나의 손 으로’(τῇ ἐμῇ χειρί. 개역개정에서는 “친필”[고전 16:21; 골 4:18; 살후3:17], “내 손으로”[갈 6:11] 등으로 번역)를 첨가하면서, 직접적으로 서신의 저자가 바울 자신, 즉 ‘나’라는 사실을 피력하고, 더불어 암시적으로 사도적 권위로 교훈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86)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 또 한 아마도 최종적으로 “나”를 밝히면서, 암시적으로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복음서의 진정성을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로 1인칭 단 수 οἶμαι를 사용했을 것이다.
64) Ibid., 997. 이러한 과장법을 사용한 예들에 대해서, 크레이그 S. 키너, 키너 요한복음 III,이용역 역 (서울: CLC, 2018), 3185-3187을 참조하라. 유대인들의 글 중에서도 전 12:9-12의“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라는 표현이나, 랍비 요한나 벤 자카이(주후 80년경)의“온 하늘이 종이이고 모든 나무가 펜이며 바다 전체가 먹물이라 해도, 내가 스승들에게서 습득한 지혜를 기록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Soperim 16.8)라는 고백은 과장법의 사용 용 례들을 보여 준다.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 요한복음, 신지철, 전광규 역, BECNT (서 울: 부흥과개혁사, 2017), 759.
65) 크레이그 S. 키너, 키너 요한복음 III, 3187.
66)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J. Neville Birdsall, “The Source of Catena Comments on John 21:25”, NovT 36 (1994), 271-274를 참조하라.
67) 이어지는 내용은 브라운의 설명을 참조하였다. 레이몬드 E. 브라운,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II, 2033.
68) Ibid
69) 독일성서공회에서 나온 Novum Testamentum Graece (28th. Nestle-Aland)에서도 본문에 이 구절을 쓰고, 비평 장치에서는 생략된 사본으로 א*을 제시한다.
70) 또 다른 예는 5:32와 19:35 등에서 찾을 수 있다. J. Ramsey Michaels, The Gospel of John, NICNT (Grand Rapids: Eerdmans, 2010), 1055.
71) D. A. 카슨, 요한복음, 1280.
72) 쾨스텐베르거, 요한복음, 758.
73) Ibid.
74) Leon Morris, The Gospel of John, rev. ed., NICNT (Grand Rapdis: Eerdmans, 1995), 775.
75) J. Ramsey Michaels, The Gospel of John, 1057.
76) 요 21:24의 “우리”에서 “나”로의 인칭 변화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Andreas J. Köstenberger, “‘I suppose’(Οἴμαι): The Conclusion of John’s Gospel in Its Literary and Historical Context”, P. J. Williams, et al., eds., The New Testament in Its First Century Setting: Essays on Context and Background in Honour of B. W. Winter on His 65th Birthday (Grand Rapids: Eerdmans, 2004), 72-88.
77) G. R.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88.
78) 키너는 와일즈(Maurice F. Wiles)의 말을 인용하여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21:24는“요한 자신의 권위의 인장”으로 이해되었다고 말한다. 크레이그 S. 키너, 키너 요한복음III, 3183; Maurice F. Wiles, The Spiritual Gospel: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in the Early Church, 9.
79) 참고. R. 앨런 컬페퍼, 요한복음 요한서신, 박경미 역, 신약학입문시리즈 4 (서울: 대한기 독교서회, 2018), 339; 윌라드 스와틀리, 요한복음, 546.
80) Rodney A. Whitacre, John, IVPNTC (Westmont: IVP, 1999), 500.
81) D. A. 카슨, 요한복음, 1280.
82) Andreas J. Köstenberger, “‘I suppose’(Οἴμαι): The Conclusion of John’s Gospel in Its Literary and Historical Context”, 82-86.
83) Ibid., 82.
84) Ibid., 86-87.
85) Ibid., 87.
86) 바울이 ‘나의 손으로’(친필) 쓴다는 언급은 필사자가 아닌 자기 자신이 직접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의 이면에는 이 서신이 자신의 글임을 밝히며, 동시에 글에 대한 책임감을 보여 준다. Roy E. Ciampa and Brian S. Rosner, The First Letter to the Corinthians. The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PNTC (Grand Rapids: Eerdmans, 2010), 864. 결국 책임감은 권위를 함의하고, 그 권위는 사도적 권위임을 가리킨다
5.οἶμαι의 번역 재고
필자는 한글 성경에서 οἶμαι의 번역에 대한 문제점과 대안을 두 가지 점 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요한복음 21:25에서 οἶμαι를 번역할 때 반드시1인칭 단수 대명사인 주어 ‘나’가 첨가되어야 한다. 개역개정과 새번역모두 1인칭 단수 대명사 ‘나’가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략은 이 구 절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져온다. 만일 독자가 개역개정을 볼 때 21:25에서 ‘나는’이라는 인칭대명사가 생략된 채 “아노라”를 읽는다면, “아노라”의 주어는 필연적으로 앞 구절 21:24의 “아노라”의 주어인 “우리는”으로 이 해할 수밖에 없다. 새번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독자가 21:25에서 주어가 생략된 채 “생각한다”로만 읽는다면, 이 동사의 주어는 21:24의 “아노라”의 주어인 “우리는”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독자는 21:25의 “아노라”또는 “생각한다”의 주어가 1인칭 단수 ‘나’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 을 것이다.
개역개정은 한국 교회가 지금껏 읽어왔던 전통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 은 채 번역을 다분히 보수적으로 유지하며 개선한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리스어를 비교적 철저하게 직역하여 번역한 새번역에서조차도 주어를 생략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필자는 개역개정과 새번역모두에서 οἶμαι의 주어인 ‘나는’이 반드시 번역되어 첨가돼야 한다고 본다. 비록 21:24에서 “우리는”의 주어가 21:25에서 갑자기 “나는”으로 바뀌는 상황은 성경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번역이 필연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번역보다 훨씬 낫다. 필자가 지금껏 읽은 모든 영어 번역 성경 중에서 οἶμαι의 주어인 ‘나는’을 생략한 번역본을 발견한 적이 없다. 필자는 앞에서 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인지와 관련하여 “우리”와 ‘나’의 인칭 대명사의 변화를 통해서 논증하였다. 물론 필자의 견해, 즉21:25의 ‘나’에 중점을 두고 요한복음의 저자가 한 개인이라는 주장이 전적 으로 옳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역으로, 21:24의 ‘우리’에 중점을 두고 요한 공동체가 최종 편집과 승인의 역할을 했다는 주장 또한 완전히 옳다고 말 할 수 없다. 하지만 만일 독자가 21:25의 οἶμαι의 주어 ‘나’가 생략된 한글 성 경을 가지고 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한다면, 필자가 주장하는 논증은 아예 처음부터 시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21:24, 25에서 연 속적으로 변하는 인칭과 수로 말미암아 독자가 이 구절들을 이해하는 데 혼란이 있더라도, 21:25의 주어인 ‘나’가 생략됨으로써 발생되는 필연적 오 해는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이다.
둘째, οἶμαι의 올바른 번역은 개역개정이 번역한 “아노라”가 아니라새번역이 번역한 “생각하다”가 되어야 한다.
개역개정에서 21:24의“아노라”로 번역된 οἴδαμεν(사전적 형태[lexical form]: οἶδα) 주로 ‘알 다’(know), ‘이해하다’(understand), 또는 ‘인식하다’(recognize) 등의 뜻을 가 진다.87) 하지만 21:25의 “아노라”로 번역된 οἶμαι(사전적 형태: οἴομαι, 단축 형은οἶμαι)는 ‘(∼일 것으로) 생각(추정, 가정)하다’(think, suppose) 또는‘기대하다’(expect) 등을 의미한다.88) 신약성서에서 οἶμαι는 여기를 제외하 고 두 곳에서 더 나온다. 개역개정은 빌립보서 1:17의 οἰόμενοι(οἴομαι의 분사)를 “생각하여”로 번역하는데, ‘마음(생각)에 품다’(have in mind)의 의 미를 가지고 있다.89) 그리고 야고보서 1:7의 οἰέσθω(οἴομαι의 명령형)도 “생 각하다”로 번역하는데, ‘상상하다’(imagine), ‘기대하다’(expect) 등의 뜻을 가진다.90) 개역개정에서 요한복음 21:24, 25 모두에서 동일하게 번역된“아노라”는 실제로 그리스어로 서로 다른 두 단어, οἴδαμεν과 οἶμαι로서 이 두 단어는 의미와 성격상 엄연히 다르고 문맥상으로도 차이를 나타낸다.전자는 동의와 확신을 가지고 인식의 차원에서 ‘안다’이고, 후자는 가정적 측면에서 ‘생각한다’이다. 21:25는 과장법을 사용하여 예수의 사역을 찬양하는 것으로, 저자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일들 외에 다른 모든 일들 을 기록한다면 이 세상에 보관할 장소가 부족할 것이라고 (가정해 보는데)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21:25의 οἶμαι는 ‘생각하다’로 번역하는 것 이 바람직하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서 제안하자면,
필자는 οἶμαι를 번역함에 있어서 개역개정은 주어인 1인칭 단수 대명사를 첨가해야 하고, 또한 “아노라”가 아니라 ‘생각하노라’로 바꿔야 한다. 즉, 개역개정에서 21:25의 οἶμαι를 “아노라”가 아니라 ‘나는 생각하노라’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87) F. W. Danker, et al.,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3rd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693-694.
90) Ibid., 396; W. Bauer, et al.,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701.
6. 결론
필자는 본 논문에서 요한복음의 기록 저자가 한 명의 개인으로 사도 요한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요한복음이 요한 공동체에 의해 여러 단계를 거쳐 편집되었다는 주장과는 반대된다. 사실 필자의 주 장은 여러 면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하지만 필자와 반대되는 주장 또 한 상당 부분 가정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 두 주 장은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지속적인 학문적 연구를 통해 각자의 논리를 세워나갈 것이다. 필자가 본 논문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중점적인 내용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본문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의도도 있지만,그보다 21:25에서 개역개정과 새번역 모두 οἶμαι의 주어인 1인칭 단수 대명사 ‘나’가 생략된 채 번역되어 독자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 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나’가 첨가된 올바른 번역은 필자가 주장하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한 명의 개인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논 리적 근거가 된다.
요한복음 21:24-25는 요한복음의 두 번째이자 최종적 결론이며, 전체 글 에서 마지막에 위치한다. 이 두 구절은 특별히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들에 대한 증언자이고 기록자인 저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난해한 부분은 인칭 대명사에 대한 변화이다. 요한복음의 증언자요 기록자 인 저자를 3인칭 단수 대명사인 “그”(“이 사람”, “이 일을 증언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 즉,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로 제시했다가, 1인칭 복 수 대명사인 “우리”가 그의 증언이 참되다고 확증한 후에, 마지막으로 1인 칭 단수 대명사인 ‘나’가 예수께서 행하신 사역의 방대함을 말하면서 끝맺 는다. 여기서 특별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우리”와 ‘나’가 누구인가이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주장으로 양분된다. 즉, “우리”가 실재의 복수 사람들(요한 공동체[교회])이고 ‘나’가 수사학적 표현이 라는 견해와, 이와는 반대되는 “우리”가 수사학적 표현이고 ‘나’가 실재의 개인(저자)이라는 견해다. 필자는 두 번째 견해를 받아들이며, 요한복음의 저자를 한 명의 개인으로서 사도 요한이라고 본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증 거들 중에 중요한 한 가지는 만일 21:24에서 요한 공동체가 요한복음의 최 종 편집 승인자로 “우리”라고 말했다면, 21:25에서도 당연히 “우리”라고 말 하면서 마무리를 지었어야 했다.91) 하지만 21:25에서 최종적 증언자로 ‘나’로 끝났다는 사실은 요한복음 전체 글의 저자가 한 명의 개인이라는 사실 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세 번에 걸친 인칭 대명사의 변화는 각각의 상황과 의도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저자는 내러티브에서 자신을 객관적 인물로 묘사하기 원한다. 그 리고 스스로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로 묘사하면서, 예수와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한 자신의 증언이 참됨을 보여 준다. 또한, 마지막 결론인 21:24에서도 자신을 ‘그’라고 쓰면서 스스로를 3인칭 단수로 나타낸다. 하지만 같은 구절에서 인칭을 바꾸어 “우리”라고 표 현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저자가 요한복음의 내러티브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는 내레이터로서의 “우리”(1:14, 16; 21:24)로 “예수께서 사랑하시 는 그 제자”의 증언의 진정성을 전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우 리”는, 이 증언이 권위 있는 증언이면서 동시에 저자와 함께 믿음을 공유한 자들과의 연대적 증언이라는 이중적 특성을 가지고 믿음을 독려하는 역할 을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나’로 자신을 자유롭게 드러내면서 겸손함으 로 예수의 사역의 방대함과 위대함을 찬양한다. 더불어 저자가 ‘나’를 명확 히 밝힌 것은 자신의 글에 대한 사도적 권위를 통한 진정성을 보여 주기 위 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이러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었던 근거는 요한복음 21:25의 οἶμαι의 주어인 1인칭 단수 대명사 ‘나’에 대한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 이다. 하지만 개역개정과 새번역모두 ‘나’를 생략한 채 번역하고 있 다. 이러한 번역은 21:24의 “우리”를, 이어지는 21:25의 개역개정“아노 라”와 새번역“생각한다”의 주어로 오해하게 만든다. 비록 문맥상 매끄 럽지 못하거나 혼란스러운 번역이라고 할지라도 정확한 번역은 필연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번역보다 훨씬 낫다. 개역개정과 새번역에서 οἶμαι의 주어 ‘나’는 반드시 첨가되어야 한다. 그리고 οἶμαι는 개역개정의“아노라” 보다는 새번역의 “생각한다”가 더 정확한 번역이다. 이러한 점 을 모두 고려해 볼 때, 필자는 개역개정에서 οἶμαι를 “아노라” 대신 ‘나는 생각하노라’로 번역할 것을 제안한다.
91) Leon Morris, The Gospel of John, 775.
<참고문헌>(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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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울 교수/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음. 현재 에스라성경대학 원대학교 신약학 조교수
첫댓글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에 설이 다가옵니다...
설 명절을 앞두고 후원에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명절이나마...먹을것도 장만하고 공과금과 치료비 난방비 월세를
내도록 도와주세요,,,
후원은 카페지기에게 큰힘과 용기가 됩니다
이달에는 인슐린과 여러가지 치료약을 사야합니다...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먹을것 반찬거리도 사야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농협 233012-51-024388 예금주.황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