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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1
독립운동가 김시현에 대하여
2008-05-15
독립운동가 김시현(金始顯, 1883-1966) 선생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아호는 하구(何求)다.
아호가 재밌다. 그가 일제의 고문을 받으면서 비밀을 지키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한다. 검사가 “도대체 무엇을 구하려는가? 차라리 하구(何求)가 좋겠다”고 빈정대었다고 한다. 이후 본래 학우(鶴右)였던 호를 하구로 바꾸어 버렸다.
29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거쳐 법학과를 만학으로 다니다가 1917년 귀국하여 1919년 만세시위 때 경북 상주에서 상주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탈옥한 후 상하이로 망명했다. 일단 지린(吉林)으로 가서 의열단에 가담하면서 본격적으로 광복 활동을 펼쳤다. 자금과 단원 모집을 위해 국내외를 드나들며 거사를 벌이고 체포 투옥되는 일을 광복 때까지 반복했다. 당시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최대의 신임을 받았다 한다.
1920년 9월경 의열단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할 목적으로 국내에 폭탄반입 시도에 가담하다 대구에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간 투옥되었다. 출옥하자마자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여 안병찬의 소개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 거기서 평생의 동지요 연인이 된 신여성 권애라(權愛羅)를 만나 상하이로 돌아온 후 결혼했다.
당시 본부인은 고향에서 집을 지키다 1930년 사망했다. 14살 연하의 권애라는 개성 호수돈여학교를 다니면서 1919년 만세시위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6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망명하여 상하이 애국부인회 등에서 활동하다 1945년 신징(新京)감옥에서광복을 맞이하였다.1973년 작고하였으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1922년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저격사건에 가담, 1923년 3월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관 암살과 주요 관공서 파괴를 목적으로 당시 경찰간부이면서 의열단원이었던 황옥(黃鈺)과 공모하여 무기와 화약을 들여오려 한 소위 ‘황옥 사건’으로 체포되어 1930년에 출옥했다. 황옥은 당시 경부(警部)로서 의열단원이었다는 설과 의열단에 포섭되었다는 설이 있다. 1930년 조선독립동맹에 가담하여 난징 비밀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활동하다 1933년 베이징에서 체포되어 5년간 투옥되었다. 1943년 다시 체포되어 1년간 복역, 1944년 또다시 체포되어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하였다. 출옥하면서 고려동지회 회장으로 활동하여 1950년 2대 민의원(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19년을 감옥에서 보냈던 그는 1952년 백범 암살 배후로 이승만을 지목하여 저격을 시도했다. “이것은 분명 이승만의 짓이다. 함께 고생하며 독립운동을 한 처지에 정적이라고 죽이다니 그냥 놔두지 않겠다. 민족을 버리고 간 놈이 무슨 대통령이냐, 역적이지. 죽여 버리겠다. 한번도 진실로 애국자가 되어 본 일 없는 그이니 이번에 자기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비로소 한번 애국자 노릇 하라고 하지.” 1952년 6월 25일 유시태((柳時泰, 당시 62세)를 통해 부산에서 이승만을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승만 저격 계획이 실패하여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60년 4?19혁명으로 석방되었다. 이승만 저격 사건으로 아직까지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유시태(柳時泰, 1890-1965)는 이상준(李相俊), 유시창(柳時昌) 등으로 불리웠던 독립운동가였다. 그 또한. 경북 안동 출신이며, 의열단원으로서 1923년 ‘황옥 사건’이 터졌을 때 서울 내자동 부호에게 독립자금 5000원을 요구하다 검거된 적이 있다. 1952년 6월25일 김시현(金始顯)과 공모하여 당시 62살의 나이에 부산에서 이승만을 저격하려다 실패했다. 부산 공설운동장 6?25 기념식에서 식사를 하던 이승만에게 두 차례나 권총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하여 실패하였다. 백범 암살에 대한 최초의 응징이었다.
이후 백범 암살에 대한 역사적 응징은 암살범 안두희를 12년간 집요하게 추적했던 권중희와, 안두희를 직접 처단한 박기서에 의해 이루어졌다. 역사적 처벌은 그만큼 집요한 법이다. 신은 인간을 용서하지만 역사는 인간을 용서하지 않는 법. 형벌보다 무서운 것이 역사의 심판이다. 김시현과 유시태가 공동으로 속해 있었던 의열단에는 ‘7가살(七可殺)’이라는 맹세가 있다. 1919년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의열단을 창단할 때 처치해야 할 일곱 부류의 인간들을 규정했다. 총독부고관, 군 수뇌, 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 밀정, 반민족적 토호가 그 대상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승만을 그 대상으로 지목하여 암살을 시도했다. 의열단의 정신은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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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지식] 독립운동가 유시태에 대하여 2009-11-06 13:19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6월 25일. 임시수도 부산의 충무로 광장에서는 시민과 군장병, 주한 외교관 등 6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6·25 2주년 기념 및 북진촉구 시민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오전 10시 50분께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이 중간쯤에 이르렀을 무렵 단상 귀빈석에 앉아 있던 엷은 회색 양복 차림의 예순살쯤 돼 보이는 한 노인이 갑자기 연단을 향해 뛰어나갔다. 연단 3m 까지 접근한 이 노인은 대통령 등뒤에 독일제 엘필트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고 윤우경 치안국장 등 경호경찰들에 의해 노인은 무초 미국대사 바로 뒤에 쓰러져 현장에서 체포됐다. 범인의 신원은 곧 밝혀졌다. 유시태(62), 대구 출신으로 일제 때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7년 남짓 옥살이를 한 항일투사였다. 다음날인 26일 이범석 내무장관은 유씨의 배후조종 인물로 국회의원 김시현(70)씨를 체포했다고 발표, 세상을 더욱 놀라게 했다.
한국 최후의 레지스탕스
하구(何求) 김시현(金始顯). 일제 때 의열단원으로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 등 숱한 항일테러 사건에 연루돼 무려 18년 7개월의 옥고를 치렀던 혁혁한 항일 투사였다. 이미 고희를 넘긴 노투사는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형(당초 사형에서 감형)을 받고 또다시 길고 긴 옥살이에 들어갔으며 결국 4·19혁명 뒤 풀려날 때까지 생애 통산 27년 8개월을 철창 안에서 보낸 진기한 기록의 보유자가 됐다.
‘한국 최후의 레지스탕스’라고 불리면서도 국가원수 암살기도 사건 때문에 역사에 묻힌 김시현은 1883년 경북 안동군 풍산면 현애동에서 태어났다. 중교의숙 중학과정을 마친 김시현은 충주·예천 등지에서 장사를 하기도 했으나 29살 때 일본으로 가 메이지대 전문부 법학과를 만학으로 졸업하고 1917년 귀국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상주헌병대에 체포됐다 탈출한 그는 곧바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 그해 7월 백야 김좌진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 재무부장을 맡은 데 이어 11월 약산 김원봉, 백민 황상규 등과 함께 독립투쟁의 실천적 담당체인 의열단을 조직했다. 이때부터 김시현은 테러사건의 지휘·자금조달·총기구입·폭탄제조 등에 생애를 바쳤다.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1920), 오성륜·김익상의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저격사건(1922), 김지섭의 도쿄 이중교 폭파사건(1924) 등 의열단원들의 숱한 테러사건의 배후에는 언제나 김시현이 있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삶은 투옥-석방-투옥의 연속이었다.
김시현의 체포·투옥경력을 중요한 것만 간추려 보아도 1919년 상주헌병대 체포 및 탈주, 1920년 체포·대구형무소 등 10년 복역, 1933년 베이징에서 체포·일본 나가사키 형무소 5년복역, 1943년 체포·베이징 일본영사관 구치감·경성헌병대 1년 여 복역, 1944년 체포·경성헌병대에서 45년 8월 15일 출감 등 파란만장하기만 했다.
김시현은 자신뿐 아니라 일가족이 모두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21년 모스크바 약소민족대회에서 만난 부인 권애라(77년 작고)씨는 이화학당 보육과 출신으로 개성에서 3·1운동에 앞장섰다. 체포돼 유관순 등과 서대문 형무소의 같은 감방에서 옥고를 치른 투사였다. 권씨와 아들 봉년(67)씨는 1944년 4월 길림성 영신농업학교에서 체포돼 신경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8·15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
아내를 ‘권동지’라 불러
평생 부인을 ‘여보’ 대신 ‘권 동지’라고 부른 김시현이 부인과 함께 부부생활을 한 것은 4·19 뒤 5년에 불과했다. 아들 봉년씨는 “18살 때 베이징에서 아버지를 만났으나 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한달 간이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고 회고했다. 봉년씨는 해방 뒤에야 아버지·어머니의 혼인신고와 자신이 출생신고를 했다.
그의 원래 호는 고향의 학가산 오른편에서 태어났다 해서 학우(鶴右)였다. 그러나 김시현이 워낙 감옥에 들랑거리는 데 기가 질린 당시 총독 가이토가 “그 정도 했으면 됐지 도대체 ‘무엇을 구하러’(何求) 이 짓을 계속하느냐”며 “차라리 호를 ‘하구’로 고치라”(학우와 하구는 일본어 발음이 같다)고 한 것이 그 뒤 ‘하구’로 굳어졌다는 게 봉년씨의 설명이다.
(실제 대한제국 말기부터 해방 당시까지의 애국자 사적을 한문으로 기록한 <기려수필>(송상도 지음) 같은 책에는 김시현의 호가 ‘학우’로 돼 있다. 이 책은 자유당 정권 말기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료총서로 발간했으나 이 대통령의 저격을 기도한 김시현이 포함돼 있어 배포가 중지되기도 했다)
동양 첫 시한폭탄 제조
김시현이 항일투쟁에 얽힌 일화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이른바 ‘황옥 경부 사건’이라 불리는 폭탄밀반입 사건이다. 모스크바 약소민족대회에 참가했다. 상하이로 돌아온 김시현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기 위해 대규모 폭탄 제조작업에 착수, 독일인 박사까지 초빙해 지도를 받아가며 동양 최초로 시한폭탄을 만들었다.
폭탄 제조를 마친 김시현은 국내에 잠입, 당시 경기도경에 근무하던 자신의 추종자 황옥 경부(현재의 총경급)를 만나 폭탄 밀반입을 위한 계책을 세웠다. 이에 따라 황 경부는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의 폭탄출처를 수사한다는 구실로 개성경찰서장 하시모토까지 대동하고 텐진으로 가 수하물로 위장한 폭탄 (대형6개·소형 30개), 권총 13정, 유인물 1만여장을 국경 부근 안동현까지 옮겼다.
당시 일본인 서장은 폭탄인 줄을 까맣게 모르고 이 짐을 나르는데 한몫 거든 것이다. 그러나 난관은 압록강 국경수비대를 통과하는 것. 김시현은 꾀를 내 그 당시 문을 연 조선일보 안동현 지국 개설 축하연을 빙자해 안동현 부영사, 신의주 경찰서장과 기생들까지 불러 한바탕 잔치를 벌인 뒤“2차는 신의주에서 하자”고 꾀어 인력거에 폭탄을 싣고 유유히 압록강을 건넜다.
당시 삼엄한 경비를 펴던 국경수비대는 신의주 경찰서장 최두천을 보고 이들에게 깍듯이 거수경례까지 붙였다 한다. 이렇게 해서 서울까지 무사히 폭탄을 옮겼으나 마지막 순간에 밀정 김두형의 밀고로 모든 것이 발각되고, 김시현·황옥 등 11명은 모두 잡혀 실형을 선고받음으로써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려던 원대한 계획은 성사 직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30년 봄에 출감한 김시현은 옥살이로 허약해진 몸을 조리하라는 아내의 말에 “나의 섭생은 독립운동”이라고 일축한 뒤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뒤 ‘조선독립동맹’에 가담하는 한편 김원봉·윤세주·박효삼 등과 함께 남경 비밀군관학교를 설립, 학생 초모관으로 활약했다. 김시현의 독립운동에 자금을 댄 사람은 경주 갑부 최준인데 그 인연으로 봉년씨는 최준의 조카딸과 결혼했다. 봉년씨에 따르면 8·15뒤 최준이 김시현을 만난 자리에서 “하구, 나와 사돈을 맺지 않으면 30만석을 갚아야 하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최준이 당시 엄청난 자금을 지원해 준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2대· 5대 민의원 지내
8·15를 서울헌병대 감옥에서 맞은 김시현은 정치 일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채 해외 귀환동포 구원사업을 위한‘고려동지회’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민족자주연맹과 좌우합작위원회에 각각 중앙위원과 확대추가위원으로 가입하기도 했다.
그는 그 뒤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 고향 안동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 당선됐다.
그러나 김원봉 등 대부분의 의열단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김시현도 단지‘자사’였을 뿐 현실정치에 적응하지 못했고 어느 면에서는 부적응의‘표본적 인물'이었다. 해방 뒤 김시현을 가까이 모셨던 박진목(71)씨는 “김옹은 나쁜 놈 총 쏘아 죽이는 데 취미가 있었던 의열단의 거봉으로 어느 면에서는 김원봉보다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할 인물”이라고 말했다.
아들 봉년씨는 김시현이 김구 암살 당시 신문을 보며 “이것은 분명히 이승만의 짓이다. 함께 고생하며 독립운동을 한 처지에 정적이라고 죽이다니 그냥 놔두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김시현의 수행원으로 사건 당일 새벽에 현장답사까지 동행했던 권오상(63)씨는 김시현이 “민족을 버리고 간 놈이 무슨 대통령이냐, 역적이지. 죽여버리겠다”고 말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살인자가 왕 될 수 없다”
김시현은 주위 사람들에게 대통령을 죽여버리겠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으나 아무도 곧이듣지 않았다. 그러나 권씨에 따르면, 사건 사흘 전인 22일 새벽1시께 경찰이 찾아와 “내무차관께서 뵙자하십니다”며 김시현과 자신을 치안본부 특수정보과로 연행해 암살기도 음모를 추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시현은 “증거를 내놓아라”라며 딱 잡아떼 결국새벽 4시께 풀려났다.
이종률(전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88년 작고)씨가 김씨 생전에 회고담을 받아 정리한 전기 원고에는 당시 김시현이 품었던 생각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현재 아들 봉년씨가 보관하고 있는 이 원고를 보면 김씨는 이 대통령을 제거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추진 의원들과 힘을 합쳐 내각책임제를 관철하는 한편 이시영 부통령을 대통령으로 옹립, 명실상부한 민주애족·민족통일 지향적 정부를 수립하려는 뜻을 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원고에 나와 있는 김시현과 유시태의 대화 한 토막.
“맹자도 살인한 자는 왕이 될 수 없다고 했듯이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야. 그러나 그대로 두면 수많은 백성가 애국자가 죽게 되니 그대로 결행하세” “한번도 진실한 애국자가 되어 본 일이 없는 그이니 이번에 자기의 생명을 내어 놓음으로써 비로소 한번 애국자 노릇을 하라고 하지” 김시현은 평생의 동지인 유시태를 데리고 국회의원 신분을 내세워 유씨의 중절모 속에 권총을 감춘 채 식장으로 들어갔지만 총알이 불발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친일파 제거 집념 불태워
4·19혁명과 함께 형집행 정지로 풀려난 김시현은 그뒤에도 평생을 걸어온 테러리스트의 고집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박진목씨에 따르면 한번은 제5대 국회의원이었던 김씨가 찾아와 “1천만원만 마련해 주게. 온 친일파가 장면 정권 밑에 다 모였는데 내가 국회의원 신분을 이용해 국무회의하는 데 들어가 폭탄 하나 터뜨리면 친일파가 깨끗이 종말을 고할 것 아닌가”라며 친일파 제거의 끈질긴 집념을 보였다는 것이다. 결국 이 계획은 실행에까지 옮겨지지는 못했다.
해방 뒤 김규식 박사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송남현(75)옹은 김시현이 김규식과 호형호제하며 무척 친밀하게 지냈으며 한민당이 이승만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존폐 위기에 처해 있을 무렵 김시현이 인촌 김성수의 부탁을 받고 김규식을 당수로 옹립하려는 거중조정 역할을 맡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시현과 그 가족들은 독립운동 경력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 저격기도 사건 때문에 단 하나의 훈장도 받지 못했다. 아들 봉년씨는 지난 77년에 아버지·어머니를 독립 유공자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했으나 ‘정부 포상심사기준 미달’이라는 통보를 받았을 뿐이다.
김시현은 지난 66년 불광동 자택에서 쓸쓸히 죽었다. 그는 죽어가면서까지 아내를 동지라고 불렀다.
“권 동지, 미안하오. 내가 그래도 조국 독립을 위해 몸바쳐 투쟁했는데도 반쪽 독립 밖에 이룩하지 못했소. 남은 여생을 조국 통일 사업에 이바지해 주오.”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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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08.01.07
이봉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기록영화제작가
그 사람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이며 거목인 백범 김구보다 꼭 열 해 늦었습니다. 그리고 서른세 살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당수에 취임해 조국해방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9년 1월, 김규식 박사를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견해서 한국의 완전자주독립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날은 백범이 상하이에 도착하기 이틀 전입니다. 다시 그해 11월, 일본정부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호텔에서 한국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일본 조야를 발칵 뒤집고 마침내는 내각을 총사퇴시키는 계기를 만듭니다. 1929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본국으로 압송돼 3년 징역형을 받은 데 이어, 1942년 일본에서 귀국 도중 또 한 차례 일경에 체포돼 두 번째 투옥됩니다. 백범이 두 번 체포돼 해주감옥과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던 것처럼 말입니다. 1936년엔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그가 사장으로 재임 중이던 조선중앙일보가 강제 폐간되고, 자신도 사장직에서 물러납니다.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보도한 것은 그 뒤의 일입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그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합니다. 그리고 두 해 뒤,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에 맞아 예순두 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것은 그가 평생을 통해 당한 아홉 번째 테러였으며, 백범이 테러로 서거하기 이태 전 일입니다. 그의 호는 몽양, 이름은 여운형입니다.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1898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습니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백범 김구보다 스물두 해 늦게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미년 31만세운동이 있던 해인 1919년 늦가을, 스물두 살의 나이로 중국 길림성에서 다른 열두 명의 열혈동지와 함께 대일테러단체 의열단을 결성하고 그 단장이 됩니다.
백범이 상하이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기 꼭 열두 해 전의 일입니다.
그가 보낸 의열단원 김지섭은 일본왕을 제거하기 위해 도쿄에 있는 황궁 앞 이중교에 폭탄을 던졌다가 체포돼 옥사합니다. 한인애국단원인 이봉창 의사가 도쿄 사쿠라다문 앞에서 일본왕이 탄 마차에 수류탄을 던지기 여덟 해 전의 일입니다. 의열단 활동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이 사람은 중국 국민당이 세운 황포군관학교를 수료한 뒤 서른다섯 살에 난징(南京) 교외에서 혁명간부학교를 열고 교장에 취임합니다. 백범이 뤄양(洛陽)에 있는 중국 군관학교 안에다가 한인특별대를 설치하기 한 해 반 전에 말입니다. 또 이 사람은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이듬해 우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총대장에 취임한 뒤 우한전투에 참가합니다.
백범이 충칭(重慶)에서 광복군을 창설하기 두 해 전의 일입니다. 1939년에는 독립운동 관련 한인 정당들을 통합하는 데 김구와 함께 선봉에서 7당 통합회의를 이끕니다.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명실상부하게 망명세력 전체가 참여하는 통일정부로 개편될 때, 그는 군무부장(1942년 12월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에 이미 취임)으로, 백범은 주석으로 취임해서 망명정부가 해체될 때까지 함께 합니다. 이 무렵 그가 첫 부인과 사별하고 두 번째 혼례를 올릴 때 백범이 주례를 섰습니다. 그 정도로 그는 백범을 존경했고, 백범 또한 그를 아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도 백범을 뒤따라서 12월 2일에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사람의 나이는 그때 마흔여덟 살, 호는 약산 이름은 김원봉입니다.
약산이 고향 밀양에 살고 있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찾아가자 마을사람들은 금의환향한 독립운동가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지방 경찰서장도 찾아와 인사를 드렸고요. 사실 이분이 중국에서 독립운동가의 삶을 사는 동안 그의 부모형제들은 고국에서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일제로부터 받았을 핍박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과도 거의 단절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세상이 이제 완전히 바뀐 것이죠.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1947년 3월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 주도한 24시간 총파업 때 이분은 조국의 경찰에 체포됩니다. 그런데 체포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대표적인 친일경찰 노덕술입니다.
노덕술이 누굽니까? 해방 전 12년 동안 평안남도 보안과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제경찰의 간부가 돼서 독립운동가를 잡는 일을 한 것이죠. 의열단 활동이 한창일 때 같았으면 벌써 그는 어느 의열단 총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는 자였습니다. 노덕술은 해방 뒤엔 수도청 수사과장을 지냈고,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됐다가 이내 석방됐습니다. 그리고 1955년 육군범죄수사단 대장 직을 마지막 경력으로 남긴 채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한편 의열단 단장으로 많은 공적을 쌓고 광복군 부사령과 임시정부의 국방장관으로 돌아온 약산은 해방된 조국에 들어와 그의 손으로 가장 먼저 제거했어야 했을 부왜역적 친일경찰의 손에 체포돼 고문을 받고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그는 이때의 충격과 상심으로 1948년 4월 스스로 월북했고, 그해 9월 북한 정권의 국가검열상에 취임합니다.
그러나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공산독재 정권과는 상종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결국 1958년 11월 예순한 살 나이로 숙청됐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막힌 일이 더 있습니다. 일제 때는 숨을 죽이며 살았고, 해방 뒤 잠시 동안만 세상의 부러움과 주목을 받은 약산의 부모형제는 약산의 월북과 함께 빨갱이 집안으로 지목됐고, 그들은 일제 때보다 더욱 심한 고통을 받고 몰락합니다. 625 때는 네 형제가 모두 한국경찰에 떼죽음 당했고, 노부는 굶어죽었습니다.
한국독립유공자협회가 몇 해 전에 추산하기로는, 31만세운동에 참가한 국내외 동포가 1천만 명, 독립운동자(의병, 독립군, 광복군 포함)가 6백만 명, 순국선열자가 6십만 명쯤 되는데, 그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분이 9천 명쯤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에 소개한 두 독립운동가는 현재의 서훈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두 사람 다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독립운동자란 이유에서지요. 물론 약산의 경우는 이념이 어떻고 계기가 어찌되든 간에 자진 월북했고, 또 북한의 초기 내각에서 고위직을 맡았기 때문에 몽양과는 처지가 다를 줄 압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특별히 약산을 언급한 까닭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마지막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었던 그가 해방된 조국에 들어와 노덕술 같은 친일경찰한테 체포돼 고문까지 받았던 그 통탄할 사건만 아니었다면, 그는 월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우리 정부는 최근, 독립유공자 심사기준을 '완화'해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서훈을 검토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동안 서훈이 보류됐던 113명의 좌익 계열 독립운동자 중에서 상당수 인사가 새로 서훈을 받게 될 거랍니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입니다. 해방 뒤 정부수립 과정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역대 정부는 반공 논리만을 강조해 이념적으로 너무 편협한 공적 심사를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일제 때는 좌파도 독립운동 이념 중 하나였으므로 그 공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줄곧 있어왔던 만큼, 저도 이번 기회에는 그동안 잘못된 일들이 바로잡히기를 기대합니다. 천상에서 백범도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 정부가 그분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든 아니 하든, 그들의 겨레사랑과 나라사랑의 정신, 헌신, 업적은 영원히 변치도 사라지지도 않을 테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