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 운동의 파란이 끝나고, 천하를 뒤흔들던 영웅들의 이야기도 조금은 잦아들었을 무렵, 원보경(袁保慶)이라는 이름의 관리는 아들 문제로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습니다.
원보경을 골치아프게 하는 자식이란, 사실 그의 친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들은 형인 원보중(袁保中)의 친아들이었는데, 이 아이는 태어나서부터 워낙 식욕이 대단하여 원보중의 부인은 도저히 감당이 안되, 원보경의 아내가 대신 젖을 먹였던 것입니다. 원보경과 그 부인 우씨는 그때까지 사내아이를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부부는 이 꼬마를 자신들의 아이처럼 사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형 원보중은, 아이를 동생 부부에게 양자로 보냈습니다. 부부는 뛸뜻이 기뻐하면서 이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길렀습니다. 이후 원보경이 대도시인 산동 제남에 부지사로 가게 되자, 그는 아들에게 필요한 뛰어난 스승들을 구해 교육을 담당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원보경은 아들이 공부만 열심히 한다면, 비록 자신이 생활고에 시달리더라도 이를 감수하면서 좋은 스승들을 모셔올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제멋대로였습니다. 성격은 워낙 고집스러웠고, 공부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으며 구속 받는것도 싫어해서 늘상 밖으로 나돌기만 한 것입니다. 특히나 제남은 번화한 도시라, 아들은 건달들과 함께 유흥가를 전전했고 말을 타고 명승지를 돌아다니는것을 즐겨했습니다. 부모나 친아버지의 친형들이 아무리 충고해도 겉으로 듣는 척만 했고, 스승의 체벌도 금세 잊어버렸습니다.
딱히 타고난 영재라고 볼 수는 없는데, 노력도 하지 않으니 공부에는 별 진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들은 묘하게 무예만큼은 열심이었습니다. 특히 말타기를 대단히 즐겨서, 아무리 말에서 떨어져 온 몸이 피멍이 들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정도로 대범했습니다. 곧 그는 상당히 세련된 기마술을 익혔고, 제아무리 사나운 말도 그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금세 온순해지는 것입니다.
몇년이 지난 후, 아버지인 원보경은 갑자기 콜레라에 걸려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러자 철부지 아들의 당숙이 되는 원보령(袁保齡)은 그를 베이징으로 불러 행실을 단속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기생 골목을 어슬렁 거렸습니다.
이 아들이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둘째 누이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고작 19세의 나이에 약혼자가 병사하면서 독수공방 신세가 된 누이는, 그러나 시부모를 정성스럽게 돌볼 정도로 똑바라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학문에 밝은데다 항상 예의범절을 따랐기 때문에 집안 사람들 모두가 어려워 했고, 망나니 아들이 글을 잘 외우지 못하자 밥도 주지 않기도 했으며, 외지로 나간 뒤에도 종종 편지를 써 훈계를 하곤 했습니다.
망나니 아들은 그녀를 두려워했지만, 그러면서도 대단히 존경했습니다. 이후에도 집안의 대소사는 항상 누이와 함께 처리했으며, 집으로 보내는 편지 대부분은 그녀에게 보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망나니 아들은 누이를 "완벽한 사람" 으로 여겼지만, 그러나 그녀의 박복한 팔자는 안쓰러워 했습니다.
이 무렵 망나니 아들은 과거 시험에서 연달아 굴욕을 맞보던 참이었습니다. 두번이나 향시에 떨어지고 나서는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 그동안 쓴 글들을 모조리 태워 버리면서, "사내 대장부는 마땅히 전쟁터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야 한다." 고 소리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는 과거를 벼슬에 오르는 길은 그만두고, 돈을 가지고 어떻게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돈만 날리고 집으로 돌아야와 했습니다.
그렇게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을때, 면식이 있던 어른인 오장경(吳長慶)이라는 인물이 그를 불렀습니다. 당숙인 원보령은 그 무렵 권력의 중추에 자리잡은 이홍장의 측근으로 상당한 권세를 부리고 있었는데, 그는 조카가 과거를 통해서 벼슬하기를 바랬지만, 지금 마땅히 하는 일도 없는지라 오장경의 밑에서 일하는 것을 찬성했습니다. 오장경은 원보령과 의형제나 다름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당초에 오장경이 망나니 아들을 부른것은 문서 작성 관련 일을 맡기려는 의도였는데, 그는 이런 일엔 서툴었고, 대신 군사쪽 일에서는 능수능란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오장경은 군사쪽 일을 그에게 맡겼고, 망나니 아들은 뛸 뜻이 기뻐하며 불평 한마디 없이 착실하게 일하면서, 잘못된 일은 사정 없이 법대로 처리해씁니다. 이때문에 오장경의 친척들마저도 그를 두려워했고, 오장경은 망나니 아들을 대단히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설 연휴에 일부 병사들이 도박을 하다가 싸움이 붙었는데, 결국에는 몇십 명이 패싸움을 하며 총을 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군관들 대부분은 설을 쇠러 집에 가고 없었고, 망나니 아들은 만약 이를 제때로 수습하지 못한다면 사태가 점점 더 크게 번질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망나니 아들은 직접 병사들을 거느리고 현장으로 달려가, 오장경의 명령이라면서 싸움을 모두 그치게 했고, 그 자리에 사건의 진상을 밝혀 처음 사고를 일으킨 병사를 즉결 총살 시켰습니다.
그는 일이 모두 처리되고 나서야 오장경에게 보고했지만, 대단히 떳떳한 태도를 보이며 허락 없이 마음대로 일을 처리한 일은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습니다. 오장경은 되려 망나니 아들의 기지와 도량, 임기응변에 대단히 기뻐하면서 칭찬했습니다.
이렇게 망나니 아들 ─ 곧 원세개(袁世凱)는 천천히 힘과 경험을 기르며, 역사의 전면에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세개
원씨 집안의 야심만만한 젊은 청년이 미래에 대한 계획에 골몰하고 있을 무렵, 또 한명의 강렬한 개성은, 마찬가지로 미래의 일에 대하여, 조금은 따분한 감정으로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원세개가 산동의 등주(登州)에서 병사들과 부대끼며 그들을 다잡기 위해 소리치고 있었을때, 손(孫) 씨 가문의 이 아이 ─ 곧 현대 중국인의 아버지이자, 이 시점에선 기독교에 대한 호감으로 가족들을 곤혹스럽게 하던 문제아, 쑨원(孫文)은, 하와이의 따사로운 태양을 느끼면서 영어로 하는 수업을 듣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하와이에서 생활했던 것은 아닙니다. 쑨원이 태어나기도 전, 그의 아버지인 손달성은 일주일에 몇달러를 벌기 위해 마카오에서 닥치는대로 일을 했고, 약간의 돈이 생긴 후에는 고향인 광동성 취형에서 반 에이커 남짓한 땅을 마련하고 미친듯이 일을 했습니다. 집안 식구에는 8살 부터 서당에 다닌 쑨원 외에, 손달성의 동생들이 남긴 과부가 두 명 있었습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에 끼어들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지만, 한 명은 상하이 근처에서 익사했고 다른 한명인 캘리포니아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 무렵, 해외로의 이주는 몇몇 중국인들에게는 고국에서의 궁핍한 '생존'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었지만, 그만큼 극도로 위험한 일종의 모험이었습니다. 19세기 후반기 동안 약 12만명의 광동인들은 매년 동남아시아와 미국에서 일하기 위해 떠나곤 했는데, 외국인들은 이 중국인들을 쿨리(苦力)라고 불렀고, 인간노동력으로 매매되는 점으로는 흑인 노예와 비슷했습니다. 마카오는 이러한 '노예무역'의 중심지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입니다.
장래의 부귀에 현혹되거나, 젊은 혈기에 우격다짐으로 뛰어든 수많은 중국인들은, 소위 이 '돼지우리'에 갇혀서 배로 밀수출 되었고, (1854년의 경우) 무려 오백명이 넘는 사망자 끝에 가까스로 백여명 정도의 생존자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에는, 곧바로 루이지아나주, 쿠바의 사탕수수농장, 페루, 혹은 아프리카 노예무역을 대신하여 값싸게 계약된 노동이 요구되는 곳이라면, 어느곳에서나 노동을 위해 경매에 부쳐졌습니다. 이보다 악랄하고 비인간적인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고국에서 잘 지내기 위한, 이국에서의 '일시적인' 노동은, 종종 적대적이고 지극히 굴욕적인 환경에서 긴 세월의 고통스러운 노동으로 변질되었습니다. 25세에 타향에 떨어진 중국인이라면 최소한 10년간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미친듯이 일해야만이 결혼을 할 수 있을만큼 저축할 수 있었고, 고향에 집을 한 채 짓기 위해 또 10년간 개만도 못한 대우를 겪으며 노동해야 했으며, 고향에 약간의 토지나마 구입하여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가족과 함께 할만큼, 조금의 여유가 생기는 것은 또 10년이 지난 후에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활 속에서도, 몇몇 중국인들은 특유의 경제적 술수로 부를 진척시켰습니다. 손문의 형, 손미(孫眉)도 그런 특별한 사람 중에 한명이었습니다.
손미는 1871년, 잠깐 고향을 방문했다가 다시 하와이로 돌아가는 삼촌을 따라 머나먼 타향으로 떠났습니다. 1850년 대 이래 하와이는 설탕이 중요한 경작물이 되었고, 설탕을 재배하기 위해 중국인 노동자의 손을 필요로 했습니다. 손미는 특유의 재간과 삼촌의 도움을 받아 급속히 성장했으며, 곧 호놀룰루에서 한 상점의 사업주가 되는데 성공합니다.
태평천국 영웅들의 일대기를 듣던 소년, 쑨원은 13살 무렵에 어머니를 따라 잠시 형이 살고 있는 하와이를 방문하다가, 곧 형의 제안에 따라 현지에 남게 되었습니다. 손미는 동생이 자신을 도와 더 큰 상업적 성공을 이루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동생은 형의 기대와는 달리 주판과 회계장부에 대해서는 눈꼽만큼의 열정도 보여주지 못했고, 손미 본인이 사업으로 성공을 하고 있다곤 하더라도, 그래도 집안에 한 명의 학자 정도는 배출하고 싶은 전통적인 소망도 일어난 탓에 손미는 동생을 영국성공회 초등학교인 이올라니 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이올라니 학교의 교직원은 하와이인 한 사람을 뺴고는 모두 영국인이었습니다. 손미는 동생의 기숙사비와 수업료로 연간 100 내지 150 달러를 지불했지만, 그다지 아까워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학교에서 허용된 유일한 언어는 오직 영어였습니다. 쑨원을 포함해 7명이 있던 중국인 학생들은, 당초에는 영어를 한마디도 할지 몰랐지만, 궁지에 몰리게 되자 오히려 급속한 적응이 일어나 곧 능숙하게 회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쑨원의 경우를 말하자면, 졸업하게 된 1882년에는 되려 영문법에서 차석의 상을 받았던 것입니다.
동생이 학업에서 뛰어난 재간을 보여주자, 형인 손미도 신이 났습니다. 그러나 손미는 다른 부분은 걱정스러워했는데, 동생이 기독교에 꽤 흥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중국의 근대사에서 "기독교"와 "선교사" 는 그다지 긍정적인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대다수 중국인들은 이를 꺼려했으며, 해외의 화교 공동체 사회에서도 그들은 기독교에 대해 주로 저항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쑨원은 매일 기도를 했으며, 기독교리를 포함한 수업을 들었고, 일요예배 참석이 포함되어 있는 이올라니 학교의 교육을 들으면서 종교에 대한 열정을 길렀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형에 대해 순종적인 동생이었던 쑨원은, 이제는 농장주, 가축사육자, 상인으로서 대성공을 거두고 있던 형을 돕기 위해 잠시 같이 생활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에 따분함을 느껴버리고 형을 설득해 오아후고급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동생은 기어코 세례를 받으려고 하였고, 형은 더 이상 사랑스러운 동생이 외국의 "나쁜 물"에 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 1883년, 그를 고향인 취형으로 귀향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쑨원은 이때 이미 17세의 청년이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여전히 홍수전과 태평천국 영웅들에 대한 동경심을 보였지만, 조지 워싱턴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했습니다. 외국의 지식들을 마구 소리쳐대는 풋내기는, 배타심 깊은 마을의 전통적인 연장자들에게는 참으로 아니꼬운 광경이었습니다. 그들은 쑨원을 "젊은 양귀자(洋鬼子)" 라고 불러대었지만, 되려 쑨원은 그런 배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더욱더 그들을 자극시킬 만한 행동을 계속했습니다.
쑨원은 마을 사람들의 우상 숭배를 본인이 그만두게 하겠다면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목상을, 마치 과거 홍수전이 우상을 때려부수던 광경과 너무나 유사하게 박살내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시골사람들은 이 터무니 없는 애송이에 대해 극도로 격분하였고, 쑨원은 황급히 고향을 떠나야 했으며 그의 가족은 훼손된 목상을 위로하고 보수했습니다.
잠시 가족과 떨어진(그러나 아마도 아버지가 재정적인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이는) 쑨원은 이제 아랑 곧 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쑨원은 홍콩으로 향했습니다.
쑨원
이렇게 두 명의 풋내기가 좌충우돌하고 있을때, 이홍장은 북양대신(北洋大臣)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인으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이홍장에게 그렇게 거대한 명성을 만들어준 첫번째 사건은 물론 태평천국의 난입니다. 태평천국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보인 군사적 능력은 이홍장의 앞길을 열어주었는데, 그의 명성을 똑똑하게 새겨준것은 바로 염군(捻軍)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과거 홍수전과 그 동료들이 전중국에 거대한 충격을 안길 때, 이 틈을 타 염당(捻黨)의 무리는 쑤저우, 보저우, 서우저우, 멍셴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기세는 대단히 강력했고, 관군은 오히려 염군의 공격해 패배하여 달아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2차 아편전쟁 기간 중 함풍제가 베이징을 떠나 열하로 달아나자, 이 틈을 타 염당은 산둥성까지 침입해왔습니다. 관군은 이에 대항했지만 별 능력도 없었고, 무엇보다 실제적인 행패는 태평군, 혹은 염군이나 별 다를것도 없는 정도라 백성들은 실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홍수전이 사망하고 난징이 함락될 무렵에는, 남은 태평군 잔당 수만명이 염군에 합류하는 바람에 그 세력은 더욱더 강력해졌습니다.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무려 21명의 장수가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한 끝에, 마침내 폭탄은 증국번에게 왔습니다.
그러나 증국번은 이미 태평천국을 무너뜨린 후라, 굳이 또 싸움에 나서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상군의 사기도 많이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염군의 기세가 워낙 강력해서 거절하기도 힘들었고, 대신 상군이 아니라 회군만을 보내는 쪽으로 타협을 보았습니다. 증국번은 1866년 12월 쯤, 병을 핑계 삼아 사직하고 이홍장이 흠차대신이 되어 염군의 토벌을 책임지게 됩니다. 증국번은 본래 직무였던 양강총독(兩江總督)에 임명되어 보급을 책임지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홍장은 염군을 토벌할 대전략을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증국번은 아직 물러나기 전의 상소문에게 "적을 지형이 복잡한 곳으로 끌어들인 후, 관군은 그 지역을 포기하는 척하면서 염군이 진입하도록 유인해야 하며, 여러 성의 병력을 집중시켜 사면을 포위해야 한다." 는 제안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홍장은 이 전략을 쓰기로 했습니다.
5월, 염군의 장수였던 임주, 뇌문광이라는 인물 두 명은 대규모로 부대를 이끌고 산둥성 깊숙이 진입해 왔습니다. 이홍장은 측근 장수들에게 적들을 해변으로 몰아넣고, 포위망을 구축해 그들이 북으로는 베이징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남으로는 안휘성으로 들어갈 수 없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홍장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서 형세를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임주와 뇌문광의 부대는 모두 수백번이나 싸워본 경험이 있는 자들이라, 도적 무리라고는 하지마 어지간한 관군보다도 강했습니다. 병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포위망이 너무 조밀하면, 그 포위망이 아주 작아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적이 포위망을 돌파하기 쉽기 때문에 이홍장은 적을 확실하게 몰아넣기 위해 주의에 주의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현지의 산동 순무는 염군이 어서빨리 산둥성을 나가기만을 바랬기 때문에 이홍장의 작전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던 7월 경, 염군은 웨이허(渭河) 부근을 공격했습니다. 당시 그곳을 지키던 산둥성의 수비 장수가 염군이 강을 건너도록 내버려 두는 바람에, 자오저우(膠州)와 라이저우(萊州)에 구축한 방어선이 붕괴되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고, 이 실패에 대해 유언비어들이 나돌면서 조정에서도 이홍장을 문책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었습니다. 이홍장은 상소를 올렸습니다.
"현재 운하의 동남북 삼면에서 적들이 침략하고 있으나, 관군이 동남북으로 나뉘어 추격하면서 가로막고 있습니다. 해당 지역은 비록 유린당하겠지만, 피해 지역은 단지 몇 개의 부와 현에 국한될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현재 관군이 막고 있는 운하 서쪽을 열어주게 되면, 여러 개의 성이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잠시 동안 이홍장을 두고보기로 했습니다. 이홍장은 자오저우와 라이저우의 요충지를 중심으로 한 포위망을 견고하게 지키면서 적들과 계속해서 교전을 벌였습니다. 10월 13일, 이홍장의 부장들은 안추(安丘)와 웨이현의 경계에서 염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고, 10월 24일에는 임주를 사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10월 28일에도 사나운 염군을 많이 사살했습니다.
회군은 10월 29일에는 적군을 70여리 추격하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뇌문광은 패배에 상심해 물에 뛰어들었으나 죽지는 않았고, 다시 정신을 차려 1,000여명의 기마병을 규합해서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이홍장이 파견한 부대가 적을 앞에서 가로막았고, 후방에서 추격하는 군사들까지 합쳐져서 적을 격파하고 뇌문광을 사로잡아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산둥성으로 침입한 염군을 제압한 것도 잠시, 1868년 정월부터, 갑자기 구원재라는 인물이 이끄는 소위 서염군의 대부대가 산시에서 황하를 건너 북으로 진군하면서 점차 베이징에 가까워졌습니다. 조정은 소스라치게 놀라 어서 빨리 이들을 진압하라고 성화였고, 이홍장은 이 싸움에서도 활약했습니다.
이 서염군을 진압하는 전투는 이전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황하 이북은 모두 평원이라서, 적들의 활동을 제한할 만한 높은 산이나 큰 강이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구원재는 북방 평원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매우 많은 말을 약탈했었고, 기동력을 갖추어 갑자기 폭풍처럼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관군은 포위망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지형이 좋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한번 다른 염군이 포위망에 막혀 전멸한 일도 있고 해서 관군이 포위망을 갖출 낌새만 보이면 서염군은 곧바로 사력을 다해 뚫고 나갔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홍장의 회군은 남방인 중심이라, 북방 지역에서는 기후부터 해서 식사하는 모든 일 등이 힘겹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홍장은 역할 분담을 확실하게 하기로 했습니다. 회군의 병력으로 직예 성 및 산둥 성의 민단과 함께 황하와 운하를 따라 깊은 도랑을 파고 장벽과 높은 보루를 세워 멀리서부터 염군을 포위할 채비를 갖추는 한편, 부대를 파견해 염군과 교전을 벌이면서도 공격하는 부대를 계속해서 바꾸면서 휴식을 최대한 취하게 하고, 각지에 병력을 보충하고 배치해서 적을 몰아넣을 준비를 제대로 마쳤습니다.
5월 경, 염군은 싸움이 불리해지자 서북 방향으로 도피했습니다. 그러나 각 부대는 서북 방향으로 나뉘어 염군을 차단하고 공격하여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었고, 황하 수위가 높아지자 이홍장은 곧바로 이를 이용해 포위망을 좁혔습니다. 운하 바깥쪽을 따라 포위망을 구축하면서, 여유 병력을 계속 만들어 포위가 약한 부분을 바로바로 보충하고, 적을 서남 방향으로 몰아 더욱더 견고하게 포위망을 유지했습니다.
염군은 필사적으로 싸워 가오탕현(高唐县) 부근까지 도망을 쳤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쪽에도 이홍장이 긴 장벽을 무려 수백리에 거쳐 쌓아둔 상황이었습니다. 염군은 뒤늦에 이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함정에 빠진 후였고, 도망치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홍장은 여기서도 무리하지 않고, 병사들이 너무 지쳤다는 이유로 추가로 새로운 기병대를 보충하고 싸움에 나섰습니다.
6월 28일 쯤이 될 무렵, 염군 측의 전세는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 있었습니다. 관군은 그들을 황하와 운하 사이의 협소한 지역에 몰아넣고 마음껏 소탕했는데, 염군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때마침 동쪽에서 이홍장이 준비해놓은 부장이 500명 정도의 기마병을 이끌고 도주로를 막아세웠습니다. 염군은 완전히 괴멸했고, 구원재는 겨우 10여명의 기병만 이끌고 간신히 도주했다가, 이렇게까지 패망하자 실망하여 물에 몸을 던져버렸습니다.
마침내 서염군은 평정되었고, 8월, 이홍장은 수도로 들어와 황제를 알현했습니다. 이홍장의 천하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앞길을 탄탄하게 열어주는 서광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홍장
첫댓글 과연 세명 다 이름값을 하는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