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설교 2012.4.1. 종려주일
본문 : 마태복음 21:6-17 제목 : “호산나! 호산나!" 종려나무 시위
4월은 잔인한 달
미국의 시인 T.S. 엘리어트 (Eliot 1888-1965)는 "황무지"라는 제목의 긴 시의 첫머리에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4월은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 꽃 피우고 / 추억과 욕정이 뒤섞이고 /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 차라리 겨울이 따뜻했다…"라고 했습니다.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이며, 정부는 국민의 것이며 국민에 의한 것이고 국민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실천한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 미국 흑인 해방의 기수였던 링컨 대통령이 백인 암살자의 흉탄에 쓰러진 것이 4월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백인 암살자의 흉탄에 쓰러진지 100년 뒤, 또한 백인 암살자의 흉탄에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쓰려져 비명에 간 것도 4월이었습니다. 독일의 반 나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나치스 독일의 반인류적 죄악을 방관할 수 없다고, 버스 운전사가 정신착란으로 버스 운전대를 잡고 버스에 탄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때, 그 미친 히틀러를 그냥 둘 수 없다며,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하였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져간 본회퍼 목사의 순교 역시, 라일락꽃이 활짝 피어나는 잔인한 4월의 일이었습니다. 나라 미국과 독일의 4월만이 잔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4월이 왜 가장 잔인한 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일제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십계명에서 명령한대로 "우상을 섬기지도 말고 그 앞에 절하지 말라"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의 양심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 귀신들 앞에 머리 숙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1944년 4월 21일 우리 믿음의 조상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1960년 4.19, 우리의 4월은 잔인했습니다. 독재를 물리치겠다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빈손 들고 맨 주먹으로 총칼에 대항하여 일어난 어린 학생들, 185명의 젊은 영혼이 한국 민주주의의 제단에 속죄양으로 희생된 것이 바로 52년 전, 학교 교정에 흐드러지게 피어 오른 라일락 꽃 향기가 유독 강했던 잔인한 4월이었습니다.
나귀 타고 민중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동네 사람에게서 빌린 당나귀를 타십니다.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윤기 나는 붉은 말도 아니고, 장군들이나 황제가 타는 백마도 아닙니다. 냄새 나는 볼 품 없는 키 작고 빈약하기 짝이 없는 당나귀, 말안장도 없어서 제자들이 겉옷을 벗어 깔아 드립니다.
로마제국이 수도를 옮겼다. 이제는 역사의 추가 서방에서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천년 동안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사실 인류 문화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렀다. 서유럽의 부흥은 훨씬 후대의 일이었다. 누군가 나무로 된 문에다 정교한 부조를 새겼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고 제자들은 길에 옷을 깔고 또 나무 가지를 꺾는다. 죽음의 길이다. 사람들은 아이도 데리고 나와 주님을 영접한다. 구원은 십자가의 주님을 영접하고 환영하는 곳에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 도성으로 입성하십니다. 우리나라 서울로 말할 것 같으면, 남대문 정도겠지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번화하고 분주한 서울의 출입문입니다. 당시의 예루살렘 서울의 대문은 로마 군인들이 중무장하고 창검을 휘두르며 감시하고 검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귀 타고 입성하자,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유월절 기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 땅에서 풀려 난 날, 민족 해방절, 우리 8.15 광복절 같은 날, 온 나라 사람들과 외국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도성으로 모여 들어 해방절 축제를 올리는 기간이었습니다.
나귀 탄 예수님이 도성의 대문에 나타나자마자 군중이 모여 듭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 놓기도 하였다. 그리고 앞뒤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환성을 올렸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도 호산나! (마태복음 21:8,9)"
요한복음에는 군중들이 흔들어 댄 나뭇가지가 보통나뭇가지가 아니라 종려나무가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13)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향해서 부르짖기를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하고 외쳤습니다(마가 11:10). 요한복음은 더 불온합니다. "이스라엘의 왕, 찬미받으소서 (요한 12:13)." 누가복음에서는 "하늘에는 평화, 하나님께 영광! (누가 19:38)."
완전 아수라장입니다. 호산나, 호산나 소리에다, 만세 소리에다가, 다윗의 나라, 다윗의 나라, 독립 만세, 이스라엘 왕, 왕, 왕 하지를 않나, 평화 평화 영광 영광 하며 예수님 이름을 연호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상상이 갈만 합니다. 상상을 해 보세요. 우리 젊은 학생 청년들이, 아이들과 어른들이 남대문에서 서울 시청 앞에 까지 길을 메우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대면서 소리 지르고 구호를 부르는 광경, 그 소리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건 완전 데모입니다. 우리나라 옛날, 52년 전 4.19 학생 혁명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 이전 1919년 3.1 독립운동이 터졌을 때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경찰과 헌병들이 총칼을 겨누어 대는 무시무시한 삼엄한 경계 속에서, 혁명과 독립과 자유를 외치는 민중들의 부르짖음이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드디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민중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그래서 민중들은 이스라엘의 왕을 환영하였고, 호산나 만세를 부르짖으면서 평화, 평화를 연호했습니다. 민족 독립, 민중 혁명의 그날이 온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 예루살렘에 살던 시민들 까지도 "이게 누구야?"하고 물었을 때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예언자"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마태 21:11) 그런가 하면,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그렇게 미워했던 바리새 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소리 지릅니다. "선생님, 제자들이 저러는데 왜 꾸짖지 않으십니까?" 왜 제자들과 민중들을 선동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대단하십니다. "잘 들어라.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누가 19:19,20)." 참 재미있는 것은 요한복음에서는 같은 바리새 파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 이제는 다 틀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따라 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며 걱정하였다 (요한 12:19)."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민중들은 모두 예수님 편이 되고, 친 로마 파, 바리새 파 사람들로 부터 등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민심은 완전히 예수님에게로 돌아 간 것이었습니다. 민중봉기는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문을 삼업하게 경비하고 감시하는 로마 군인들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 정도의 민중이 모여들고 만세를 부르고 독립을 부르짖으면 총칼 든 경찰은 물론, 계엄군이 장갑차를 몰고 들어 와서 성문을 막고 데모하는 군중들과 예수님과 제자들을 일망타진, 잡아들이거나, 총을 쏴대고 해산 시킬 터인데, 예루살렘 점령군 로마제국의 군인들 이야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만큼 식민지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데모 군중이 너무 많아서 저지할 힘이 부족했던 것일까요? 우리 같으면, 데모 현장에서 예수님을 체포할 것 같은데, 로마 군인들은 그러지 않고 가만히 놔두었다가, 민중봉기 선동죄와 사회 문란과 혼란 죄로 십자가에 못 박을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것일까요?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예수님은 데모대와 함께 여세를 몰아 첫 번째로 하신 일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 들어 가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시청을 점령하든지, 국회로 달려가든지, 옛날처럼, 청와대로 몰려 갈 것 같은데, 예수님은 역시 종교인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성전으로 쳐들어 가셨습니다.
"성전" 하면, 거룩한 집, 엄숙한 집, 성결하고 깨끗한 집, 종교적인 예배를 집행하는 공간이어야 하고, 성전 뜰은 고요하고 거룩한 기운이 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전 뜰은 우리 시골 재래시장 보다 더 지저분하고 시끄러웠습니다. 성전에 제사 드린다고 몰고 온 소와 양과 염소 그리고 비둘기를 사고팔고 하느라 시끌 법적하고 냄새는 이만저만 고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건 파는 장사꾼들은 호객하노라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물건 사는 사람들은 로마 돈을 유대나라 돈으로 환전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이 광경에 격분하신 예수님은 소리칩니다.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리리라'고 했는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마태 21:13)."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장사꾼들을 모두 성전 밖으로 내쫓아 버립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교회는 그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들의 모임이다. 전통적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더 이상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 인간의 탐욕과 계획만이 성전을 가득 채웠을 때 주님은 분노와 사랑의 채찍을 높이 드셨다. 1500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다시 이 죄악이 되풀이 되었을 때, 주님은 루터를 통해 개혁을 선언하셨다. 교회는 계속 새로워져야 한다.
대단하십니다. 아무도 예수님에게 대들지 못했습니다. 그 권위에, 그 위엄에 꼼짝 못하고 모두들 복종했습니다. 오늘 같으면, 성전을 지키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예수님을 오히려 나무라고 내 쫓았을 겁니다. 교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돈 거래를 안 할 수 없고, 헌금 바구니를 지켜야 하고, 교회가 발전하려면, 재정이 든든해야 하고, 장사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이거 다 예수님을 위한 것인데 왜 이러십니까? "예수님, 좀 참으시고, 교회에서 나가 주십시오."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성전 밖으로 내 쫓고 말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없는 집, 돈과 권력은 있지만, 예수님 없는 성전, 예수님이 쫓겨난 교회를 지키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의 호령 하나로 깨끗해지고 조용해 졌습니다. 제사상에 오를 동물들과 장사꾼들이 모두 물러 간 자리에 민중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소경들과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을 예수님은 고쳐주십니다 (마태 21:14). 성전은 "기도하는 집"일 뿐 아니라,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는 공간입니다. 우리나라 교회 같으면 어디 장애인들이 마음 놓고 교회에 나와서 우리와 함께 예배드릴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거룩하게 예배하는 곳이다"라고 하면서 시끄럽고 귀찮은 장애인들의 출입을 막고 통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과는 너무 거리가 멉니다. 장애인들을 환영하는 예수님의 성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뿐 만 아니라 아직도 성전 뜰 안에 모여 들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하고 소리 지르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성전의 주인을 자처하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이 성전 뜰에서 하시는 일을 막지 못하고 어쩔 줄도 모르고 있는데 아이들까지 시끄럽게 하니까 부화가 터진 것입니다. 참다못해 예수님에게 달려듭니다. "이 아이들이 하는 말이 들립니까?"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은 왜 조용히 하라고 안하십니까? 그렇게 항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도 당당하십니다. "어, 들린다. '어린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읽어 본 일이 있느냐? (마태 21:16)" 아이들이 성전 안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어린이들을 귀찮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어린이와 같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마태 18:2-5)"고 아이들 편이 되신 예수님의 어지신 모습을 기억하게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며,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 뿐 아니라 병자들과 약한 자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민중들을 환영하고 서로 사랑하고 치유하는 집입니다. 더 나아가서 어린 아이들을 환영하는 집입니다. 교회 권력이 판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 이름으로 장사하고 돈 많은 사람들, 권력자들이 독차지 하는 집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중들과 함께 수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성전에 쳐들어가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정에서 노예생활을 청산하려면, 독립국가가 되기 위해서, 민중이 주인이 되고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선, 성전이 깨끗해 져야하겠다는 것을 예수님은 몸소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한 나라가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정치가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고위 공직자들의 부정 부패가 없어지고 깨끗한 정치가 들어서려면, 다른 어디보다, 우리 교회가 깨끗해지고, 정결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무슨 자리를 차지한다고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사이에 검은 돈이 오가고 온갖 비리에 연루되면서 우리는 감히 세상을 향해서 깨끗한 정치, 정의로운 사회를 부르짖을 수 없습니다.
종교 재판과 정치 재판
교우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리며 유대나라 민중들과 함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며 찬양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예루살렘에 민중들과 함께 입성했고, 성전을 점령했지만, 로마 식민지로 부터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은 정화하셨지만, 성전을 쟁취하고 제사장 자리에 올라앉지도 않으셨습니다. 내일, 월요일부터, 예수님의 고난의 날이 시작됩니다. 우선 성전 주인들, 종교인들, 친 로마 제사장들과 바리새 파, 율법학자들, 신학자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잡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내일 부터 한주일 동안, 다음 주일 부활절 까지, 한주일 동안,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신 일 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사건을 기록한 성경 말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만 읽으셔도 좋고,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가면서 읽으시면 더 좋습니다. 오늘 우리 서로 약속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 부활절 아침은 더욱 뜻 있는 아침이 될 것입니다.
생각할 수도 없었던 당황스런 일이 벌어졌다. 그러지 않아도 무언가 평소와는 다른 주님의 모습이 제자들의 한쪽 가슴을 무겁게 내리누르는데… 종이 주인에게, 또는 제자가 스승에게 해 드리는 발 씻기를 주님이 해주신단다. 건조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발은 가장 지저분한 부분이다. 베드로는 손을 내저었다 - 이렇게 더러운 발을 고귀하신 주님의 손이 씻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은 이미 베드로를 섬기고 있다. 옆에는 우리들 삶처럼 너덜너덜한 슬리퍼가 놓여있고… 뒤편의 제자들은 머리를 감싸 쥐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섬기는 삶에서 피어나는 새 질서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 날이 왔다는 것을 직감하시고 제자들에게 "최후의 만찬"을 베푸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도 성공하시고 성전도 정화하셨으니, 이제 드디어 거사하는 날이 됐는가 보다, 기대가 컸습니다. 한주일 동안, 그렇게 많은 비유와 가르침으로 예수님의 인간 사랑, 하나님 사랑, 섬기는 태도를 가르쳤는데,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한 복판에서 대야에 물을 담아 놓고,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정성스레 씻어 주셨습니다(요한 13:1-11). 섬김의 자세, 교회는 민중을 섬겨야 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돕는 것이 바로 나를 돕는 것이라고 (마태 25장) 그토록 가르쳤지만,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치철학이고 신학이고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사랑과 정의를 선포하던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무장 군인들과 대제사장의 부하들이 몰려왔다. 몽둥이와 횃불을 들고서, 그 맨 앞에는 주님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았을 유다가 섰다. 그는 스승에게 배신의 입맞춤을 한다. 순간 사랑과 신뢰와 존경의 표시가 배신의 표시로 추락하고 있다. 스승을 팔아먹는 유다와 제자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그냥 그렇게 속아 넘어가주는 예수님의 눈길이 활활 타오르는 횃불보다도 더욱 뜨겁다. 베드로는 대제사장 하인의 귀를 베고…. 이것은 이천년 전 역사지만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반복되는 현재의 사건이다. 예수는 유다의 눈길과 유다는 오늘 우리의 눈길과 직선으로 닿고 있다.
가롯 유다는 배신자가 됩니다. 가롯 유다의 정치와 종교는 예수님의 종교와 정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롯 유다의 정치는 폭력이고 무력 혁명 아니면, 로마 권력에 붙어먹는 매국노의 정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의 입맞춤으로 성전 깡패들에게 체포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앞에서 종교재판을 받습니다. 판결은 "신성 모독죄"였습니다. 그런 죄명이면 유대 종교의 법대로 돌로 쳐 죽이는 처형을 해야 하는데, 자기네들이 예수님을 죽인 죄를 책임 지지 않으려고 로마 당국에 고발합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의 정치 재판을 받으시고 로마 제국의 정치범들에게 과하는 십자가형을 받으십니다. 로마 제국이 예수님에게 뒤집어씌운 죄목은 "민중선동죄"였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할 때 민중들과 함께 데모한 죄입니다. 민중들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소리 지르게 한 것이 죄입니다. 로마 황제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또 무슨 유대 민족의 왕이냐, 이것은 반역죄이고 반란죄라는 것이었습니다.
성전 정화와 십자가 정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평화적인 정치 행위였습니다. 무력 혁명을 외치는 바라바의 정치, 열심당원들의 폭력혁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경비원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로마 군인들에게 무저항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치욕과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치는 평화와 생명의 정치였습니다.
2012년 올해 종려주일과 고난주일 그리고 부활주일은 4월 11일 국회의원 선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다음 수요일 정치혁명을 일으키기 위하여 투표소를 향합니다. 민주주의 혁명은 투표로 합니다. 새로운 세상,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되는 세상, 하나님 나라의 정치를 위하여, 평화롭고 자유로운 선거혁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하는 선거혁명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성전을 정화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고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외롭고 병든 이들을 환영하고 나누고 치유하는 예수님의 공동체로 변화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모시는 예수님의 밥상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저희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시옵소서. 저희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 그리고 외로운 사람들을 환영하는 교회 되게 하시옵소서.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믿음의 공동체, 희망의 공동체 되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죽어가는 신앙에서 다시 살아 나게 하옵소서. 우리 죽어 가는 정치가 정의와 생명의 정치로 다시 살아 나게 하옵소서. 죽어 가는 자연의 생명이 새 봄바람과 함께 부활하게 하옵소서. 호산나, 부활의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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