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Chiang Mai)”는 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북부의 장미”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태국 북부를 대표한다. 새로운 도시라는 뜻의 치앙마이는 란나 왕국의 수도로 1296년에 성곽도시로 건설되었다. 세월은 흘러 성벽은 무너졌지만, 해자 안쪽의 구시가는 700여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생활공간 속에 공존하는 사원들은 박물관처럼 딱딱하지 않고, 입장료도 받지 않아 길을 가다가 슬쩍 사원을 방문하면 그만이다. 오늘 일행들은 거의 코끼리학교로 간다고 했으나, 나와 룸메이트만 치앙마이 성곽도시를 돌아보기로 했다. 특히 룸메이트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혼자서 다닌다는 것이다.
호텔의 아침은 뷔페식이었는데 아주 다양하고 풍족했다. 아침을 먹고 나 홀로 작은 가방을 메고 치앙마이의 구시가지인 성곽도시 투어에 나섰다. 성곽도시에서 꼭 봐야할 사원은 왓 치앙만, 왓 째디 루앙, 왓 프라씽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곽도시의 동문인 빠뚜 타패(Pratu Tha Phae)를 기준으로 한다지만, 나는 숙소인 호텔 앞길로 가면 바로 북문(빠뚜 창프악)이 나오므로 그곳을 기준으로 삼았다.
호텔을 나와(08:00) 오른쪽으로 걸어가니 가게 앞으로 아침시장이 열렸다. 물건을 살 의사는 없었으나, 아침시장을 구경하며 걸어갔다. 얼마가지 않아 큰길이 나오고 신호등이 있었다. 신호등은 자동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고, 길을 건널 사람이 버튼을 눌러야 신호가 바뀌는 것이었다.
<호텔에서 성곽도시 북문인 "빠뚜 창프악"으로 가는 길의 아침시장 풍경>
신호등의 건널목을 건너자 바로 해자가 있고, 북문인“빠뚜 창프악(Pratu Chang Phuak )”이 있었다. 도시의 모든 성벽은 세월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졌으나, 모든 문들과 도시 네 모퉁이의 성벽은 복원한 것이었다. 이 북문도 성벽을 복원하고 문 이름을 써 붙였다. 거기서 사진을 찍고, 지도를 보며 동쪽에 있는 왓 치앙만을 찾아갔다.
<치앙마이의 해자가 있는 성곽도시 북문 쪽 풍경>
가는 도중에 “왓 람창(Wat Lam Chang)”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작은 사원이었다. 법전과 탑이 있었으나, 법전의 문을 아직까지 열어놓지 않고 있었다. 내가 찾던 왓 치앙만은 바로 앞에 있었다.
<왓 람창 간판>
<왓 람창 법전 건물>
“왓 치앙만(Wat Chiang Man)”은 멩라이 왕이 치앙라이에서 치앙마이로 천도하면서 가장 먼저 지은 사원이다. 새로운 도시 치앙마이가 완성될 때까지 멩라이 왕이 거주했던 곳이며,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기도 하단다. 대법전은 전형적인 란나 양식의 사원으로 사원내부는 목조 기둥에 금색을 칠했으며 18세기에 재건축했다고 한다. 금색으로 칠한 큰 불상을 모시고 있으며, 큰 불상 옆에는 여러 개의 불상이 있었다.
<왓 치앙만 간판>
<왓 치앙만 대법전 전경>
<왓 치앙만 대법전에 모신 불상>
<왓 치앙만 대법전 내부 옆에 모신 불상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법전 오른쪽의 작은 법전(건설 당시의 대법전)에 모신 두 개의 불상이었다. 돌부처로 알려진 프라 씰라(Phra Sila)는 인도에서 스리랑카를 거쳐 전래되었는데, 무려 2,500년 전에 만든 불상이란다. 프라 씰라는 20cm의 기단 위에 있는 30cm 크기의 불상으로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 이 사원은 수많은 이야기와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3왕 동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도중 한 중학교의 조회시간이어서 한참 구경했다.
<대법전 옆에 있는 법전(건설 당시의 대법전)모습>
<건설 당시의 대법전 내부 벽화>
<건설 당시의 대법전에 모신 프라 씰라 등 불상들>
<3왕 동상으로 가는 길에서 본 치앙마이의 고등학교 조회풍경>
“3왕 동상(Three King Monument)”은 태국 북부지방을 통치하던 3개 왕국의 국왕을 모신 동상이었다. 전형적인 그 시대의 왕실 복장을 하고 있으며, 중앙에 있는 인물이 란나 왕국의 멩라이 왕이었다. 13세기 후반부터 태국 중북부에는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란나 왕국, 쑤코타이 왕국, 파야오 왕국이 있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왕국은 쑤코타이 왕국이었는데, 서로 견제와 균형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파야오 왕국의 응암므앙 왕(King Ngam Meuang)이 왕비와 함께 쑤코타이 왕국의 람캄행 왕(King Ramkhamheeng)을 찾아갔다. 람캄행 왕은 파야오 왕국의 왕비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고, 이를 알게 된 응암므앙 왕은 람캄행 왕과 일전을 불사하며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에 멩라이 왕이 중재에 나서 세 나라가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3왕 동상이 만들어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치앙마이의 성곽도시에 있는 3왕 동상 1>
<치앙마이의 성곽도시에 있는 3왕 동상 2>
<3왕 동상 앞에 있는 건물 모습>
3왕 동상 옆에는 “왓 인타킨사듀무앙(Wat Inthakhin Saduemuang)”이 있었다. 작은 사원이었으며, 법전에는 하얀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자 왓 판타오가 있었다.
“왓 판타오(Wat Pan Tao)”는 왓 째디 루앙 옆에 있는 사원으로 1391년에 지어졌다. “천 개의 가마”라는 뜻의 사원 명칭에서 보듯 당시에는 엄청난 양의 불상을 제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란나 왕국이 망해가던 19세기에 들어서는 궁전의 일부로 사용됐으며, 치앙마이에 남아 있는 란나 왕국의 유일한 왕실건물이었다.
<왓 인타킨사듀무앙 간판>
<왓 인타킨사듀무앙 법전>
<왓 인타킨사듀무앙에 모신 하얀 불상>
<왓 인타킨사듀무앙의 탑(째디)>
<왓 판타오 간판>
대법전 입구 상단부를 장식한 박공에는 유리 모자이크 공예로 만든 커다란 황금 공작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공작은 통치자를 상징하는 것이며 공작 아래에는 잠자고 있는 개가 함께 조각되어 있었다. 개는“짜오 마하윙 왕(King Chao Mahawong)”이 태어난 해를 상징하는 동물로 대법전이 왕궁건물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왓 판타오를 앞쪽에서 본 전경>
<왓 판타오를 뒤쪽에서 본 전경>
<왓 판타오 대법전 박공의 유리 모자이크 황금 공작과 개가 있는 모습>
여기에도 대법전 내부에는 금색 불상이 모셔져 있었으며, 특히 대법전 안에 승려들의 밥그릇인 발우가 여러 개 진열되어 있었다. 대법전 뒤에는 불교와 관련된 학교가 있었으며, 학생인 것 같은 동자승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 뒤에는 째디(탑)가 있었으나 수리 중이었다.
<왓 판타오 대법전에 모신 불상>
<왓 판타오 대법전 안에 진열된 발우가 있는 풍경>
<왓 판타오에 있는 불교법률학교 모습>
<불교법률학교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현수막>
<불교법률학교 학생들 모습>
<불교법률학교 학생들의 숙소 모습>
<학교 뒤에 있는 왓 판타오의 탑(째디)>
첫댓글 매번 많은 것을 배워 갑니다. 내역을 알고 사진을 보니 무심히 스쳐 보던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항상 새로 여행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1진으로 다녀왔습니다. 전번에 기억에 없다고 하셨는데 모르는게 당연합니다. 감사합니다.
아~~~팔봉님은 1진으로 다녀오셨군요.
여하튼 저의 글을 계속 보신다니 고마워요~~~
라오스는 사찰과 학교의 경계가 모호해 보여요. 국교라서 그런가요? 이제 여행도 막바지군요.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이곳은 일반학교가 아니고 불교 법률학교이기 때문이예요.
목화밭님 이제 편한 백성되었네요~~~ㅎㅎㅎ
우리가 코끼리 투어 갈때 새로운 곳을 보셨내요
잘 보고 갑니다.
다른 분들은 코끼리하교에 갔지요~~~
못 본것 같기도 하고 ~
불교법률학교 학생들이랑
여행중 봐 왔던 스님들의 옷 색깔도 그렇고
저 벽돌주황색을 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레나닥 갔을땐 머리에 두르는것도 저 색으로 ~
단체로 가지 않고 혼자서 다녔기 때문에 본 곳이지요.
그리고 승려들이 왜 벽돌 주황색을 입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많이 보아온 사원들과
비슷하기도 하면서 다른 사원이군요.
못 가 본 곳 구경 잘하고 갑니다.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열심히 공부합니다~~~^^
이곳은 대부분의 일행들이 코끼리학교를 갔을 때이지요.
다른 곳보다 왓 치앙만은 역사상으로 꼭 가볼만 한 곳이죠~~~
일행들이 코끼리 학교를 간 동안, 소신 있게 혼자서 치앙마이의 왓 치앙만 등을 돌아보신 백호님은 진정한 여행가이십니다!
제가 보지 못했던 곳들 잘 보고 갑니당~~
시간이 벌써 많이 흘렀는데 하늘님이 방문하셨군요. 잘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