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왕 대축일 강론
교회는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며, 잃어버린 양과 같은 우리들을 찾아서 보살피기 위해(에제 34,11) 죄로 인한 상처들을 싸매주고 원기를 북돋아 주려고(에제 34,16) 착한 목자이며 사랑과 섬김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합당하게 맞아들이기 위해서 준비하라고 촉구합니다.
“너희 나의 양 떼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에제 34,17)
그분이 우리를 찾아오심은 단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에 맞닥뜨릴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줌으로써 우리가 잘 준비해서 영원한 생명의 상급을 얻게 하며 당신이 바라시는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b)
삶의 마지막 순간에 주님은 우리에게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무엇을 해주었느냐?”
우리 각자가 살아온 삶이 바로 우리를 심판하는 기준입니다.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인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이들을 제대로 돌보아 주었는지가 우리가 살아온 삶의 역사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풀어야할 문제에 대한 정답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준비해서 대답하지를 못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마지막 시험에서는 각자의 처지와 종교여부는 상관없습니다. 사랑하는 일에 특별한 자격과 준비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이웃의 처지에 엄마나 공감하고 사랑하였는가가 기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와 환경이나 배경 그리고 수준이 비슷하다고 여기는 이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보다 낮고 못나다고 여겨지는 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고 가까이 다가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안락함을 방해받고 싶지가 않아서, 이기적인 마음을 이기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고 가까이 다가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의 순간에 우리는 주님께 항변을 합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마태 25,44)
이웃의 등창이 제 고뿔만 못하다고 하는 속담처럼, 자기의 가족구성원이나 가까운 친지들만 챙기면서 우리 이웃의 딱한 처지에 대해 무관심하게 산다면, 억울하게 짓밟거나 파렴치하게 괴롭히지를 않았고 남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는 것에 만족하며 산다면 그런 우리의 삶이 우리들을 단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 안에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맞이한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나라를 차지할 자격이 부족해도 상으로 받게 될 것이지만, 주님께서 사랑으로 제공하시는 기회를 거절한다면 우리의 삶이 우리를 영원한 불길로 이끌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태 25,41)
사실 인간관계 속의 상처는 많은 경우에 가장 믿었고, 사랑을 했던 사람들로부터의 당한 배신의 상처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위에서 환대를 받기보다는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과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서 주님을 알아보고 그들을 맞아들이고 돌보며 사랑함이 구원의 시작이며, 아무런 대가나 보상 등을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 손상되고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하느님을 닮은 우리의 본모습을 되찾는 첫걸음입니다. 살면서 만나는 이웃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합당하도록 우리를 사랑으로 준비시키기 위한 은총의 선물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4~36)
우리가 영원히 머물 하늘나라의 유일한 법은 바로 서로 사랑이기 때문에,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가 되고 또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자기 형제로 돌보는가 아니면 아무 관련이 없는 존재로 대하나의 차이가 바로 마지막 날에 우리가 살아온 삶의 결과를 판가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시는 이유는 오늘 새롭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우리가 무관심으로 저질렀던 잘못들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특별한 신앙체험에 치중하거나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의 행위만으로는 마지막 시험에 올바로 대답할 수 없기에 믿음의 실천이 필요한 것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함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당신의 왕국을 이루시는 자비의 행위를 닮음으로써 시작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사랑의 눈으로 보려면 깨어있음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겪는 온갖 수모로 어깨가 처진 가장이,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느라고 스스로를 챙기지 못해서 초라해진 아내가, 바라는 것은 많지만 정작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식들이나 자식들에게 모두를 내어주고 이제는 늙고 지쳐버린 우리들의 부모님과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그런 동료가 미처 알아보지 못한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주의적 신앙에 만족하면서 자신의 이익과 편안함만을 찾지를 말고,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섬기는 마음으로 사랑하려고 훈련해야만 합니다. 성체를 통해서 우리의 삶속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께 당신을 알아보고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청해야 합니다. 저녁나절을 일하고 하루 품삯을 받은 포도원소작인의 비유를 기억하며 비록 지나온 한 해 동안 제대로 사랑을 실천하지를 못했었다고 할지라도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을 사랑의 실천으로 응답하며 갈무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당부하신 사랑의 계명으로 그분의 제자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