半강제적으로 벌인 '승용차 함께 타기'…
미혼 남녀 짝 찾기 겸한 '카풀팅'도 유행
국내의 '자가용차 함께 타기 운동'은 1977년쯤 시작됐다. 그해 3월 여의도에 살던 종합병원 부원장이 출근길에 비를 맞으며 버스를 기다리던 학생을 자기 차에 태워준 게 시작이라고 알려졌다(경향신문 1980년 11월 3일 자). 1979년 3월부터는 정부도 나섰다. 출근 시간엔 관용차들이 '○○ 방향. 함께 타고 갑시다'란 표지를 붙이곤 시민을 태웠다. 하지만 전시(展示) 행정의 냄새가 묻어 있던 이 운동은 이내 시들해졌다.
"함께 탑시다"라는 목소리가 또다시 울려 퍼진 건 1990년 2월이다. 서울의 자동차가 100만대를 돌파한 때였다. 서울시는 직원 3~4명을 1개 조로 편성, 이 중 1대씩만 운행하도록 했다. 시청 서무주임도 시장(市長) 관용차에 타고 함께 출근하며, 한동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을 맛봤다. 아파트에서도 이 운동을 강력히 추진했다. 아침마다 어깨띠 두른 부녀회원들은 출근하는 '나 홀로 승용차'들에 다가갔다. 어떤 운전자는 합승 손님 찾는 택시기사처럼 "광화문!" "퇴계로!" 등을 먼저 외치곤 방향 맞는 주민들을 태웠다(조선일보 1990년 2월 7일 자). 강남의 어느 동 직원들은 확성기로 방송까지 하며 승용차를 세운 뒤 "지하철역까지 이분을 함께 태우고 가시죠"라며 걸어가던 시민들을 억지로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언론은 '차 함께 타기'를 '참된 이웃의 흐뭇한 온정'으로 칭찬하고, 비협조적인 운전자는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한국인'으로 질타했다. 말이 '운동'이지 개인 차량에 함께 타자는 요구를 반강제로 한 셈이다. 결국 이 운동도 1990년대 중반엔 흐지부지됐다. 카풀이 엉뚱하게 변형돼, 1996년엔 미혼 남녀를 짝지어 승용차에 함께 태우고 목적지를 찾아가면서 짝도 찾게 한다는 '카풀팅'도 등장했다.
이런 식의 '차 함께 타기'란 승용차 운행을 줄이려는 선진국 카풀(car pool)의 본래 취지와는 거리가 있었다. 차 있는 사람이 베푸는 봉사처럼 여겼으니 합당한 규칙도 정착되지 못했다. 기름값 정도의 돈을 차 주인에게 내는 사람도 있었고, 안면몰수하고 공짜로 얻어 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타는 쪽도, 태워주는 쪽도 편치 않은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실패의 역사를 반복해 온 국내의 카풀이 다시 논란이다. 대자본의 카카오가 첨단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한 중개 시스템을 들고 뛰어들려 하자, 택시업계가 총파업 등으로 반발하고 있다. 카풀 앱은 이용자에게 '운전자와 이야기하며 가기' '그냥 조용히 가기'도 택하게 하고, 취향이 서로 맞는 사람끼리 연결해 준다니 옛 카풀의 '불편한 동승(同乘)' 문제에도 대안을 내놓은 셈이다. 택시업계의 반발이 큰 것도 카풀 앱의 잠재력이 작지 않다고 판단한 때문인 듯하다. 전국 승용차가 200만대 남짓 됐던 1990년에도 함께 타기 운동을 했는데, 승용차가 그때의 9배를 넘어선 오늘 카풀의 필요성은 더 커진 게 사실이다. 지난 19일 발표된 여론조사에선 카풀 찬성이 56%로 반대(28.7%)의 2배였다. 이 문제는 거리 집회가 아니라 대화와 토론으로 합리적 방안을 모색해야 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