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오던 날 공항으로 마중 나오셨던 모니카자매님을 며칠 만에 만나니 더욱 반갑다. 또한 삭막한 광야와 바위산이 많던 이집트, 이스라엘에 비해 로마는 도시도, 산도, 나무도 풍요롭고 정겨운 느낌이었다. 오르비에또로 가는 길에 있는 마을은 외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산꼭대기에 형성되어 있었다.
※성녀 크리스티나는 아버지가 이교도였는데 11세 때에 신자가 되자 집의 감옥에 가두어두고 몸에 보석과 부적 등을 붙여 주고 하녀를 붙여 두었다. 바퀴에 불을 붙여서 성녀를 호수에 넣었으나 성녀는 살아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성녀가 이교도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 쇠통에 기름과 송진을 넣고 끓여서 성녀를 넣었으나 죽지 않자 목에 줄을 묶고 바위를 매달아서 수장시켰다고 한다.(볼세냐호수) 신앙심이 투철한 성녀이시다. 세례 받을 때 그저 생일날에 맞춰서 세례명을 ‘크리스티나’라고 했는데 처음으로 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신앙을 주시도록 크리스티나성녀께 도움을 청해야겠다.
버스에서 내려 언덕 위로 선로를 따라 올라가는 케이블카 같은 것을 타고 올라가서 다시 작은 버스를 타고 올라가니 해발 300m 되는 곳에 어마어마한 두오모성당(두오모는 돔, 지역의 주교좌성당, 하느님의 집이라는 라틴어의 뜻)이 있었다. 1290년에 신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이 섞인 건축물로 3세기에 걸쳐서 지어졌다고 한다. 전면 벽화가 대리석의 모자이크였는데 아주 선명하였다. 이곳에는 성혈이 묻은 성체보가 모셔져 있었다.
1263년 독일의 한 신부님께서는 미사를 드리시면서 성체, 성혈에 대한 의심이 생겨서 괴로워하셨다. 이탈리아 성지순례와 고행을 하시면서 믿음을 청하셨다. 어느 날 성녀 크리스티나의 유해가 모셔진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시던 중 또 의구심이 들어서 기도를 하셨는데 성체를 반으로 쪼개는 순간 피가 쏟아져서 25방울이나 성체보에 떨어졌다. 당신께서 증거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셨지만 기쁘기도 하고 의심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성체보를 감추셨다고 한다. 그 후에 ‘주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 시작되었고 오르비에또에서는 가장 큰 축일로 지낸다고 했다.
아씨시로 가는 버스 안에서 모니카 자매님께 “태양의 찬가”를 배워가며 불렀다. 내륙도시인 옴브리아주 뻬루지아에 속해있는 아씨시는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탄생지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는데 마치 예수님처럼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된 후 영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또 다미아노성당에서 기도하는 중에 십자가의 예수님이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라”고 말씀하시자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성당을 보수하였다.
작은 형제회라는 수도회를 창설하셨고, 돌아가시기 2년 전에 오상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한 가난 속에서 주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였으며, 새들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을 전했다고 할 정도로 자연을 사랑했고, 대자연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 성인의 삶이 더욱 위대해보였다. 성인의 도우심을 청하며 김프란치스코를 위해 기도드렸다.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안에는 ‘뽀르치웅꿀라’(여기에서 작은 형제회가 시작되었다고 한다)라는 아주 작은 성당이 들어 있어서 매우 신기했다. 작은 성당을 그대로 두고 큰 성당을 지어서 성당 안에 들어오니 한 가운데 작은 성당이 있는 것이었다.
성녀 글라라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설교를 듣고 감화되어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나중에 글라라회를 창설하였다. 글라라성당은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위층을 모방하여 지었는데 유물전시관에 글라라 성녀의 머리카락, 성 프란치스코와 글라라 성인이 입던 옷,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말씀하신 다미아노 십자가가 모셔져 있었다. 오글라라 형님께서 매우 감격하셨다.
생가 위에 지어진 성당인 성 프란치스코 삐꼴리노, 태어나신 마굿간, 감옥 자리 성당 등을 둘러보았다.
성 프란치스코성당은 내부가 온통 화려한 그림들과 유리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특히 성인의 생애를 그린 지오토(Giotto)의 프레스코화(28개)가 있었는데,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인, 허물어져 가는 성당을 떠받치고 있는 성인, 오상을 받음, 성 다미아노의 십자가가 인상적이었다. 대성당의 광장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아기예수님을 경배하는 듯 실물크기의 구유가 있었다. 성당의 아래층 광장에는 회랑이 있었다. 평화의 경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오니 날이 저물었고 불빛 속에서 성당의 모습이 더욱 아름다웠고 모두들 감탄했다.
아씨시 그랜드호텔에서 이태리식 식사를 했다. 아씨시는 광장과 분수, 고풍스런 건물들과 골목길조차 그대로 보존된 무척 평화로운 마을이었고, 마치 영화의 세트장 같아서 그대로 머물러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첫댓글 아씨시는 그냥 머물러 살고싶은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