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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향연구회 두들마을향토사소개 '안'입니다.
고증, 확인,의견 등을 종합해서 표준자료를 만들고자하오니, 많은 고견을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문화유산은 아는만큼 보고 즐길 수 있다고 하며 정보화시대에 관광객이 받아들이는 취향에 맞춰
하나의 설명대상에 대하여 2~3분 스핏치, story telling위주로 만든 '안'임을 참고해 주시기바랍니다.
#향토사 두들마을 소개 -1-
노블리스오블리주를 실천한 재령이씨 집성촌 '두들마을'이야기입니다.
두들마을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석계 이시명 (1590~1674) 선생이 1640년 터를 닦은 곳으로
훌륭한 학자와 시인,독립운동가 등이 배출되었습니다.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 작가의 고향마을이기도 한 이곳에는 광산문우를 비롯하여 석계고택,
석간고택. 주곡고택. 석천서당 등 30여채의 전통가옥들과 한글로 쓴 최초의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여중군자 장계향 선생을 기리는 예절관과 유적비, 유물전시관, 전통반가음식전시관,
유교음식교육관 조선 후기 양반가의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음식디미방체험관". "전통주체험관"등이
마을의 주산인 광려산 아래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마을 들머리에는 언덕밑에 주남천 (인치천) 흐르고, 마을 안산인 병암산 밑으로 화매천이라는 내가
흐르고 마을 앞에는 나지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진 병암산있습니다.
시냇물이 산태극,물태극으로 굽이 돌아 산과 맞닿은 언덕머리에 자리했다하여 두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합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에 서 있는 암벽과 바위에는 석계 선생 넷째 아들 항재 이숭일이 새겼다는
동대. 서대. 세심대. 낙기대 등의 글씨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 석계 이시명 선생
퇴계 이황 선생의 정통 학맥을 이은 석계 이시명(1590-1674) 선생은 일찍이 생원에 올랐으나
입신양명에 뜻을 두지 않고 지절을 지키며 일생을 학문 연구에 바친 학자입니다.
조선조 영남의 명문가로 손꼽히는 운악 이함 종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1936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 임금이 청나라에 무릎을 꿀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치욕에
비분강개 하며.대명절의를 지킨다는 뜻으로 숭정 처사가 되려고 1640(인조18년)년 고향 영해를
떠나 산간벽지였던 영양석보촌으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물 맑은 주남천 시냇가 바위 위에 터를 잡고, 그 처소를 석계초당이라 하였으며,
조정에서 내린 벼슬도 마다하고 후학을 기르는 일에 전념 하였습니다. 후일 사람들이 그를 두고
'석계 선생"이라 부릅니다.^^
-참고문헌:영양군 발행'명가순례'
* 여중군자 장계향
위대한 어머니 장계향 (1598 -1680)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경당 장흥효'의 무남독녀이자 소설가 이문열의 선대 할머니입니다.
세상은 당신을 "위대한 어머니"라 부릅니다.
가슴을 울리는 시 아홉수를 남긴 시인입니다.
맹호도와 산수화에 조예가 깊었던 화가입니다.
당대 초서의 대가 정윤목이 절찬한 서예가입니다.
책보다 생활속의 실천을 중시한 교육자입니다.
수신공경 퇴계학풍을 이어온 사상가입니다.
굶주리는 백성들을 보듬어 안은 사회사업가입니다.
최초의 한글요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과학자입니다.
10남매와 남편을 일으켜 세운 현모양처입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을 품었던 여중군자 장계향 후세는 당신을 위대한 어머니라 부릅니다.^-^
-참고문헌 : '위대한 조선의 어머니 장계향' / 정동주 지음.
* 전통을 이어온 언덕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두들에 오르니 시간이 만든 아름다움에 눈 뜨다
여중군자라 칭송 받은 장계향에서 한국문학의 거장이라 불리우는 소설가 이문열까지 볼 수 있다.
음식 하나에도 접빈의 도리를 담고 고택마다 선비의 자부심이 살아 있는 곳이다.
두들마을에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풍토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풍토를 가꾼다는 것을" ^-^
-출처 : '사람과 자연이 함께하는 행복영양' 홍보게시판에서.
*이문열소설가(1948.5.18~)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중퇴하고 1977년 단편'나자레를 아십니까'가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1979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새하곡'이 당선되었고 같은 해 중편'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하여 80년대에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의 소설 특징은 탄탄한 구성과 문장의 탁월함으로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대표작으로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젊은 날의 초상'
"시인과 도둑' "선택' 등이 있다.
#향토사 두들마을 - 2 -
석계고택 - 경북도민속자료제91호 90.8.7.지정
조선 인조,현종 때의 학자인 석계 이시명(1590-1674)선생과 정부인 안동장씨가 살던 집으로
#향토사두들마을 -3-
石川書堂과 유물 소개
소 재 지: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318번지
건 축 주 : 이시명(李時明)
건축시기: 1640년 초당으로 창건
중건시기: 1762년 서당으로 개축
소 유 자: 재령이씨 석계파 종중
문 화 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 1985. 8. 5 지정
건축 배경
석천서당은 1640년(인조18)에 영해에서 석보로 온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 터를 잡고 ‘석계초당’을 지어 13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1674년에 이시명이 안동에서 세상을 떠나자 1676년(숙종2)에 상을 마친 넷째 아들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1631~1698)이
고향으로 돌아와 선업을 이어왔다.
이숭일이 세상을 떠난 뒤 70여 년 만에 만와(晩窩) 이인훈(李仁壎)의 주도로 퇴락한 초당을 개축하여 ‘석천서당(石川書堂)’이
라고 이름을 붙였다. 선친인 이시명의 호 ‘석계(石溪)’를 피해서 ‘천(川)’자로 바꿔서 이름을 지었다고 대산(大山) 이상정
(李象靖, 1711∼1781)의 기문에 실려 있다.
좌해(左海) 이수영(李秀榮, 1809~1892) 의 『석천서당중수기(石川書堂重修記)』를 살펴보면 석천서당은 1891년에 다시
한 번 중수를 거쳐서 오늘날의 규모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축 특징
석천서당은 광려산의 기슭에 위치하여 아래로 주남천을 굽어보는 자리에 있다. 서당의 입지는 두들마을 동편 끝자락의
경사진 대지에 있기 때문에 대를 쌓아서 마당을 만들어, 건물 밖에서는 담장이 매우 높지만 서당의 대청에서 앉으면 정면을
확 트여 조망하기에 매우 좋다.
건축 구성
석천서당은 서당 건물과 동쪽 담장 사이에 있는 대문채를 토석담으로 구구획하였고, 서당의 문쪽 대문채로 진입하는 입구
담을 경계로 주사(廚舍)가 있다.
서당은 전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주로 각이 진 자연석으로 1m가량의 기단을 만들었다. 그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전면 3번째에 원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평면은 가운데 2칸을 대청으로 만들고,
동쪽과 서쪽 한 칸씩을 온돌방으로 삼았고, 구들은 정면에 두었다. 건물의 뒤쪽을 제외한 3면에 30cm가량의 퇴칸을 두었는데,
박쥐문양을 새긴 헌함을 둘렀다. 동쪽 대청의 반 칸 정도를 터서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그 아래 섬돌을 두었다.
동쪽 방의 서쪽 면, 서편 방의 동쪽 면에는 문짝을 넷으로 만들어 여닫을 수 있도록 한 사분합문을 설치하였다. 동쪽 방의
정면에는 사분합문 안에 미닫이문을 만들었고, 서쪽 방의 정면에는 두 짝으로 된 여닫이문을 두었다. 기단에서 섬돌까지는
4층의 돌계단을 설치하였다. 서당은 오량가의 집으로, 처마는 홑처마이다. 서당은 동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서당의 동쪽에는 담장과 이어진 대문채가 서향하고 있다. 대문채는 전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을 얹었다.
가운데에는 출입할 수 있도록 두 짝 판문을 서당 쪽으로 열도록 만들었고, 양쪽에는 창고로 이용하고 있다. 건물은 돌을
한 층 깔고 그 위에 시멘트로 마감한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서당을 전체적으로 감싸고 있는 담장은 기와를 얹은 토석담으로 경사진 대지에 따라 층이 생기도록 만들었다. 담장아래에는
화단을 만들고 배수로를 만들었다.
석천서당을 관리하기 위한 용도의 주사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현재는 살림집으로 이용하고 있다.
현판
석천서당(石川書堂)
석계기(石溪記)
1640년(인조18) 이시명이 지은 글이다. 이시명이 영해에서 석보로 이거하면서 지은 초당 앞에 흐르는 물을 고을 이름인
‘석보(石保)’에서 이름을 따서 ‘석계(石溪)’라고 짓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초당 앞을 흐르는 물과 돌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하고, 석보의 풍광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글에 담았다.
수산수신수창임인십일월십사일(首山晬辰酬唱壬寅十一月十四日)
1662년(현종3) 73번째 생일을 맞이한 이시명이 동생 이시성(李時成)은 물론 아들들이 함께 모여 축수를 해주자, 감동하며
시를 지었다. 이 시에 대해 이상일, 이휘일, 이현일, 이숭일, 이정일, 이융일, 이운일 등 일곱 아들이 각각 차운한 시를
모아서 8수의 시를 적은 시판이다.
과석계유허유감(過石溪遺墟有感)
남곡(南谷) 권해(權瑎, 1639∼1704)가 1694년(숙종20)에 지은 시이다. 당시 권해는 갑술환국으로 단양으로 유배를 갔었는데,
이시명의 옛 집을 지나다가 과거를 회상하며 지은 시이다.
갈암차운(葛庵次韻)
이현일이 권해의 ‘과석계유허유감(過石溪遺墟有感)’시를 차운한 시이다. 이현일은 1694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조사기(趙嗣基)를 신구하다가 함경북도로 유배를 갔는데, 단양에서 유배살이를 하던 권해가 부쳐준 위의 시를 읽고 감회에
차서 지은 시이다. 시는 『갈암집』 권1에도 실려 있다.
석천서당기(石川書堂記)
이시명의 외현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1772년에 쓴 글이다. 기문은 『석계선생문집』 부록2권에 실려
있다.
석천서당중수기(石川書堂重修記)
이시명의 8세손인 좌해(左海) 이수영(李秀榮, 1809~1892)이 1891년에 석천서당을 중수한 전말을 기록한 기문이다. 『좌해유고』
권7에 실려 있다.
운악대훈(雲嶽大訓)
운악(雲嶽)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인 이함(李涵, 1554∼1632)의 호로, 이함은 이시명의 부친이다. 이함이 손자 이휘일(李徽逸,
1619∼1672)이 공부에 뜻이 있기는 하지만 어려서 그 뜻을 잘 지키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맹자(孟子)』 『등문공장구상
(滕文公章句上)』 제4장의 내용을 인용하여 인륜을 밝혀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이시명은 앞부분에 『맹자』의 구절을 쓰고,
뒷부분에 이함의 뜻을 풀이하여 자손들의 가르침으로 삼고 있다.
내력과 기능
향사일
석천서당에서는 따로 향사를 지내지 않고, 해마다 양력 1월 2일이면 석보면에 거주하고 있는 재령이씨 문중 2~30인이 서당에서
모임을 갖는다.
관련문집
- 『석계집』
이시명의 문집으로 석보의 풍광에 대해 읊은 시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또한 부록에는 이상정이 지은 『석천서당기
(石川書堂記)』, 이수영의 『석천서당중수기(石川書堂重修記)』, 이주원의 『석천서당상량문(石川書堂上梁文)』이 실려
있다.
- 『좌해유고(左海遺稿)』
이시명의 8세손인 이수영(李秀榮)의 문집으로 『석천서당중수기(石川書堂重修記)』를 포함하여 『석천서당판상운
(石川書堂板上韻)』 등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 『면운재집(眠雲齋集)』
이휘일(李徽逸)의 증손자인 이주원(李周遠, 1714∼1796)의 문집으로, 『석천서당상량문(石川書堂上樑文)』과
『차석천서당낙성운(次石川書堂落成韻)』이 실려 있다. 상량문은 석계선생의 유촉지인 석보(石保)에 석천서당(石川書堂)을
세울 때 지은 것으로, 가학(家學)을 크게 진작시킨 석계선생의 유덕을 칭송하고, 그 터에 세우는 석천서당에서 후진들의 학업이
진작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이밖에 그 외에 석천서당에서 종친회를 하거나 시회를 가진 내용, 석천서당을 지나면서 감회를 기록한 시를 수록한 문집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이시명의 자손이 남긴 문집 속에 석천서당과 관련된 기록이 많다.
관련유물
- 관련유물
석천서당 북쪽에 위치한 정부인장씨예절관의 동편 건물인 유물전시관에서 석계 이시명과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교지(敎旨)
1693년(숙종19)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된 석계 이시명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추증한다는 내용의 교지이다.
시권(試券)
1611년(광해3) 이시명이 22세 때 작성한 과거 답안지이다.
제문(祭文)
1616년(광해8) 이시명이 형님인 청계(淸溪) 이시청(李時晴, 1580~1616)을 장사지낼 때 지은 제문이다.
『석계선생문집』
이시명의 문집이다. 목판본이다.
별급문기(別給文記)
1626년(인조4)에 운악(雲嶽) 이함(李涵)이 장손인 매오(梅塢) 이신일(李莘逸, 1598~1658)에게 하인 연기(蓮己)를 내려준다는
별급문서이다. 석계 이시명의 친필이다.
관련인물
관련인물
- 이시명(李時明 ; 1590∼1674)
자는 회숙(晦叔)이고, 호는 석계(石溪)이며,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현감을 지낸 운악(雲嶽) 이함(李涵)의 아들이며, 이조판서를
지낸 이현일(李玄逸)의 아버지이다. 장흥효(張興孝)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1612년(광해4)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
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과거를 단념하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이후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거
하였으므로,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알려졌다. 학행으로 강릉참봉(康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640년(인조18)
에는 영양의 석보(石保), 1653년(효종4)에는 영양의 수비(首比), 1672년(현종13)에는 안동의 도솔원(兜率院)으로 옮겨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초서도 잘 썼으며, 특히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은 장흥효에게 이학(理學)을 전수받아 다시 아들
이휘일(李徽逸)·이현일에게 전해주어 주리학(主理學)의 전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 이숭일(李嵩逸, 1631~1698)
자는 응중(應中)이고, 호는 항재(恒齋)이며,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영양 석보(石保)에서 이시명과 장흥효의 딸인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경학 연구와 심성 수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1692년 의령현감(義寧縣監)에 제수되자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있는 길이라 여기고 흔쾌히 부임하여 모든 행정을 백성을 위하는
방편으로 수립하고 민폐를 혁신시켜 ‘이불자(李佛子)’라 불렸다. 그 후 고향인 석보로 돌아와 부친의 뜻을 이어 후진 양성과 저술로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 『항재집(恒齋集)』이 있다.
- 이상정(李象靖 ; 1711∼1781)
자는 경문(景文)이고, 호는 대산(大山)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아버지는 이태화(李泰和)이고,
어머니는 재령 이씨(載寧李氏)로 이현일의 손녀이니, 이시명의 외현손이다.
14세에 외조부 이재(李裁)를 사사(師事)했으며, 1735년 사마시(司馬試)와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1739년 다시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귀향하여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여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이기휘편(理氣彙編)』 등을 저술했다.
마을이야기
영양 > 석보입암권 > 석보면 원리리
- 광제원(廣濟院)이 있었던 마을 원리리.
원리리는 동쪽으로 석보면 주남리와 답곡리가 있고, 남쪽으로는 영덕군 지품면 토구리와 북쪽으로 영양의 양구리를 잇고 있는
고을이다. 이곳은 면소재지가 있는 마을로 파출소, 초등학교와 중학교, 우체국 등의 기관들이 밀집해 있다. 이곳은 본래 영양현
석보부곡의 땅으로 1500년대에 광제원이라는 역원이 있어서 원리(院里)라고 불리게 되었다. 원리리는 강변(혹은 갱빈), 아래강변
(또는 바람내기), 새장터, 두들, 맛들(혹은 마웃들), 솔밑(또는 송하), 가두들[가구(佳邱)], 옛터 등의 자연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광제원이 있었던 마을인 두들마을은 두들[언덕]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미 마을이 형성되어 석보(石保)로 부르고 있었던
이곳은 석계 이시명이 병자호란을 피해 들어와 살면서 유명해진 곳인데, 이시명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넷째 아들인 이숭일이
터전을 지키며 살면서 재령이씨들의 집성촌이 되었다. 이 마을 옆 두들에는 석계 선생의 서당인 석천서당이 있고, 마을 앞을
흐르는 주남천 가에 있는 절벽 아래 암석에는 이시명의 아들인 이숭일 선생이 새겼다는 동대,서대,낙기대,세심대 등의 글씨가
뚜렷하게 남아있다. 이곳에는 석천서당(石川書堂), 석계고택(石溪古宅), 유우당(惟宇堂), 주곡고택(做谷古宅) 등 문화재와 정부인
장씨유적비 등이 많아 1994년 10월 문화체육부로부터 두들문화마을로 지정받았다.
두들마을의 주차장과 전통한옥 체험관 사이로 난 길로 진입하면 4개의 마을길을 만난다.
첫 번째 가장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원리 주곡고택과 만석꾼집이 나온다. 주곡고택의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원리리의
쉼터이자 두들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두들광장이 나온다.
두 번째 만석꾼집에서 동쪽으로 갈라지는 길을 따라가면 이문열씨가 세운 광산문학연구소(광산문우)가 보이고, 그 옆에는 정부인
장씨예절관이 자리 잡고 있다. 두 건물은 두들광장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다.
세 번째 전통한옥체험관 동쪽으로 가는 길인데, 이 길에는 석계고택과 석계종택이 바로 옆에 붙어 있고, 50m정도 더 걸어가면
석간정사, 유우당과 정침을 둘러볼 수 있다.
네 번째로 석계고택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원리쉼터를 지나 정부인 안동장씨 유적비를 볼 수 있다. 유적비 맞은편에는
노계고택이 있다. 노계고택과는 밭을 사이에 두고 1997년 완공된 소규모 전시관으로 두들문화마을유물전시관이 있고, 그 옆에는
석천서당이 나타난다.
원리쉼터에는 정부인이 가난한 주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심었다는 도토리나무가 큰 키를 자랑하고 있다. 정부인 기념비가 위치한
대 아래 바위에 ‘낙기대’라고 새긴 글자를 볼 수 있다. 낙기대에서 광록정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면 계단 끝에 ‘세심대’라고
세긴 바위를 볼 수 있다. ‘동대’는 석천서당이 위치한 대의 동쪽에, 세심대는 낙기대에서 광록정으로 올라가는 계단 끝 서편에
새겨져 있다. 서대는 광록정 아래 살림집의 서쪽 대에 새겨져 있다.
두들마을을 세로로 보면 광산문학연구소(광산문우)와 석계고택, 석계종택, 이우호가옥이 같은 축에 있고, 정부인 안동장씨예절관
과 유우당 석천서당이 동쪽 축에 있다. 마을 안에는 각 건물마다 사방으로 통하는 골목이 있기 때문에 어느 길을 들어서든지
마을의 모든 건물들을 구경할 수 있다.
#향토사두들마을 -4-
정부인 안동 장씨 유적비(貞夫人安東張氏遺蹟碑)
석보면 원리에 세워진 정부인 안동 장씨 유적비는 1989년 9월에 정부인의 업적을 후세에 알려 올바른 여성상을 심어 주기 위해서
세운 비이다.
貞夫人安東張氏遺蹟碑文
貞夫人 安東張氏는 高麗太祖 貞弼의 後裔인 敬堂 興孝를 父親으로 하고 僉知 權士溫의 女를 母親으로 하여 一五九八年 宣祖 三一
年 十一月 二四日에 安東 金溪里에서 誕生하셨다.
어릴 때부터 才行이 뛰어나 遠近에 稱頌이 藉藉하였는데 十九歲 되던 해에 載寧 李氏 家門에 繼室로 出嫁하니 夫君은 곧 麗末節士
茅隱 午의 後裔인 石溪 時明이시다.
出嫁하신 지 六四年동안 오직 敬과 誠으로 舅姑를 奉養하고 君子를 받들며 七男三女를 훌륭하게 길러내었으며 李氏家門 三代에
四不遷位가 모셔지게 된 것은 夫人의 功이 至大하셨기 때문이다.
晩年에 第三子인 葛庵 玄逸의 士林薦으로 曺判書에 올랐는데 典例에 따라 朝家에서 貞夫人의 敎旨가 내렸다.
一八六十年 肅宗 六年 七月 七日에 이곳 石保村에서 逝去하시니 享年이 八三歲 였다.
夫人 은 天賦가 聰明慈孝하시고 恒常 聖賢의 말씀을 쫓아 樂善孝義 하시어 媤家 舅姑와 親庭 父母를 위한 誠孝가 極盡 하셨다.
出嫁前 親家 母親의 病救療에 남다르시 더니 出嫁後에도 安東 寧海 二百里 길을 咫尺같이 나들며 盡誠하셨다.
親家父親 敬堂이 六旬에 喪配하시고 後嗣가 없게 되자 親庭에 자주 들러 奉養 하시는 한편 父親께 諫請해서 繼室을 맞게 하여
三男一女를 두게 하였으며,
또한 敬堂이 別世하신 後에는 繼母一率을 媤家 側近으로 데려와 生計를 보살피고 男妹들의 娶嫁까지 돌보아 親家의 香火를 잇게
하였으니 父母에 대한 孝行과 同氣間의 友愛가 이토록 至極하셨다.
夫君을 섬김에 있어서는 恒常 貴賓처럼 尊敬하고 每事를 諮問 받아 內助하였으며, 잦은 移住로 生計가 困難였으나 조금도 怨尤의
빛이 없었고 媤父 別世로 夫君의 三年 廬墓 中에 數十眷口를 統率하여 모든 家事를 規範에 맞게 잘 處理하셨다.
懷妊 中에는 不潔한 飮食을 들지 않으시고 不淨한 자리는 避하시는 등 몸가짐은 반드시『烈女傳』의 訓戒에 쫓아서 胎敎 하셨으며
子女들을 慈愛함이 또한 至極 하셨으나 敎誨함이 甚嚴하셨는데 언제나 孝悌忠信과 敬과 義를 强調하셨다.
前室 光山 金氏의 子女를 보살핌에 있어서도 己出과 다름없이 撫育하시는 등 多子女를 啓導한 功이 이처럼 至大하시 더니 마침내
저 退溪 學統의 正脈을 傳授 한 太儒 存齋 徽逸, 葛庵 玄逸, 恒齋 嵩逸 을 비롯한 世稱 七賢子를 두셨으며,肖孫에 密庵 栽, 顧齋 槾
과 같은 碩學을 두시었으니 이 어찌 偶然일 수 있으며 兩程夫子를 낳은 侯夫人이 무엇이 부럽다 하리요.
婢僕을 부리되 親子女처럼 여겨 病苦時는 親히 看護하시며 비록 잘못을 저질러도 憤怒한 音聲과 顔色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조용히
타일러 感服케 하시니 洞里 下人 들이 모두 夫人宅 婢僕이 되지못함을 恨으로 여겼다.
可憐한 隣人과 鰥寡孤獨을 대함에는 賑恤賙饋를 내 몸과 같이 하시니 모두 夫人에 대한 冥報가 願이라 하였다.
日常의 衣食은 簡淡完潔했을 따름이요, 世俗의 芬華珍異는 좋아하지 않으셨다. 夫人 은 婦職만 닦았을 뿐 아니라 古今事變에도
通達하셨거늘 마침 淸軍이 來侵하여 稱臣을 强要하자 恥辱을 느끼시고 國威未振하여 北伐 못함을 慨然히 痛嘆하시는 등 當身의
識見은 實로 高尙하셨다.
夫人은 겨우 十餘歲에 元會運世의 理論을 側聞하고도 通曉하실 만큼 才操가 非凡하셨고 文藝에 있어서도 天才的 才能이 있어
詩 九篇, 書 一篇, 遺墨 三篇을 남기셨는데 詩는 그 密度나 水準에 있어 果然 白樂天을 따를 만하고 草書또한 能하
시어 當代 名筆인 鄭淸風子조차도 그 筆勢의 豪勁함에 놀라 이는 東國人의 書法이 아닌 다 中國人의 手蹟이라고 評價하였다.
飮食調味에도 出衆하시어 夫人의 所著인 閨壺是議方은 現今 朝鮮朝 傳統料理硏究의 指針書로 評價되고 있으며,日本에까지 飜刊
되고 있다. 特히 夫人이 世人들에게 推仰을 받게 되는 것은 女性으로서의 謙讓과 婦德을 갖추셨기 때문이다.
또한 夫人은 天賦의 才能으로 十歲前後에 學藝가 이미 哲人의 境地에 접어들었으나 出嫁後로는 이를 감추고 오로지 婦德만 닦으
셔서 그 絶異한 詩才나 學問과 筆法은 夫君조차도 몰랐으며 平素 子與孫들에게는 訓戒하시기를 大學者이신
웃어른들이 계신데 내가 어찌 學問을 論할 수 있으랴.“英雄이 함부로 拔劍하면 盜賊의 累를 입고 君子가 함부로 붓을 놀리면 名下
에 큰 汚點을 남기느니라. 앞날에 驕奢와 蠻勇이 없도록 銘心하라.”하셨다.
夫人의 이같은 志行은 萬古의 敎訓이라 하겠다.돌이켜 보건대 夫人께서는 學識과 德行이 凡人과는 比할 바가 아닌 絶人의 境地에
있으면서도 女性이기 때문에 숨기고 自制하시며 오직 犧牲的으로 三從之道를 따라 至誠으로 舅姑를
받들었으니 孝悌가 出天하셨고 恭敬으로써 君子를 섬겨 夫君의 學道를 도우셨으니 賢夫人 이요, 慈愛와 規誡로써 子女를 養育하여
바른 길로 誡導하셨으니 賢母요 偉大한 敎育者이셨으며 仁愛로 婢僕을 다스리며 賙恤로써 隣人을 돌보셨으니 훌륭한人格者이셨
다.
실로 夫人의 德行은 萬世人類의 師表가 될지어다. 이토록 崇高하신 夫人의 淑德懿行이 일찍이 世上에 드날리지 않았던 것도 兒女子
의 表彰이 分數가 아니라는 當身의 謙讓 때문이었으리라. 거룩하신 夫人의 德行을 萬世토록 기리고자 삼가 옷깃을 여미고 敢히
拙文으로 讚頌하면서 暫時 夫人所作의 蕭蕭吟으로 無我의 詩情에 젖어 보고 싶구나.
창밖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니 부슬부슬 빗소리 자연스럽네.
자연스런 빗소리 듣고 있으니 내 마음 또한 자연스럽네.
(窓外雨蕭蕭 蕭蕭聲自然 我聞自然聲 我心亦自然)
一九八九年 九月 日大韓民國 國史編纂委員會委員長 朴永錫 謹撰
#향토사 두들마을 -9-
원리리도사댁 만석꾼집
1800년대 건립. 두들마을의 좌후측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는데,인근에서는 이 집을 만석군집이라고도 부른다.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평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의 정침이 자리잡고 있으며 정침의 우측에는
4 칸 반 규모의 초옥인 방아간채가 배치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9칸.측면 5 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사랑채는 중문칸의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데, 평면은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1칸과 2칸씩의 온돌방을 연접시켰으며 전면에는 퇴칸을 두었다.
안채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너방과 안방을 연접시켰으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연접시켜 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출처:영양문화재대관.
#향토사 두들마을 -11-
두들 책사랑-북카페
두들마을 북카페"두들 책사랑"은 영양출신 문인들의 작품과 역사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멀티미디어 자료실과 휴게실이 조성되어 아늑한 공간에서 문학작품 감상과 차를 마시며 문학의
향취를 느끼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향토사 두들마을 -13-
경북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8경' 소개
<광려산-병암산-낙기대-세심대-동대-서대-석찬서당-광록초당>
1.두들마을8경의 제1경'광려산'
경북영양군석보면원리 두들마을 뒤에 있는 '광려산'은 일월산의 낙맥으로서 산상에 수천평이나 되는 넓은 잔디 광장이 있다.
봄,여름,가을이면 주변에 기화요초가 피어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연중 사계절을 통하여 자연탐방 산책로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각종 운동경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 이 곳에서 마을을 굽어 내려다 보면 고색창연한 옛 한옥이 즐비한 마을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다.
이 산은 남향으로 주남천.화매천 건너편 병암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마을 중심부가
중대로서 끝자락에 낙기대.세심대,석천서당.광록정이 있고 동쪽에 '동대', 서쪽에 '서대'가 있다.
마을 전체가 일목일초,일구일학이 모두 이름 없는 것이 없어,옛부터 재령이씨 일문이 번성해서 세거해 온 자취를 볼 수 있다.^^
마을 안에는 경상북도 민속자료인'석계고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인'석천서당',
'음식디미방체험관.음식디미방교육관,전시관','석간고택,'유우당','여중군자장계향예절관,유물전시관',현대 문학도를 양성하는
'광산문우'. 이문열소설가의'서재','두들책사랑방',문화재자료인 '주곡고택', 전통한옥인 '만석꾼지기집'.고가체험민박가능한
'석계공종가','병암댁'.'영감댁', 천연염색체험가능한 '백천댁','정부인안동장씨유적비','몽구 이병각 시비','두들광장'등을 둘러
볼 수 있다.
*출처: 석계선생문집 및 영양군발행'명가순례'
2.두들마을8경의 제2경'병암산'
경북영양군석보면원리 두들마을 안산인 '병암산'은 높이 약130m되는 단애로 이루어진 야산으로,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형성
되어 있다.
흡사 병풍을 펼쳐 놓은 것처럼 마을을 둘러 싸고 있으며,온갖 식물과 희귀한 산새들이 서식하며,철 따라 이름 모를 각종 화초들이
뽑내어, 산 아래 흐르는 화매천 강물에 취영 되고 있다.
화매천 물은 낙동강 상류천인 반변천으로 흘러 가며,강물에는 온갖 담수어들이 노닐고.녹음 짙은 여름에는 넓은 강변과 푸른
강물이 한데 어울려 장관을 이루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약50년전만 해도 이 산자락에 있던 울창한 송림은 석보면의 관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출처:석계선생 문집 및 항재집.
석보 병암산을 노래한 시가 있다.
"백 자 푸른 벼랑 저만치 누웠는데
그 봄 꽃 가을 잎을 그려내기 어렵구나
나그네여, 산중 집이 누추하다 웃지말라
문 앞에 산 그림 병풍이 길게 펼쳐 있느니."
'항재 이숭일'이 서른셋 나이일 때 석보 두들마을 두 바위 언덕에 '세심대'와
'낙기대'란 이름을 붙이고 따로 '광록정'을 지어 유유자적하며 학문전념하며
마을 앞산인 '병암산'을 노래한 '시'이다.^-^
*출처:선택(이문열 지음) P193에서^^
3.두들마을8경의 제3경'낙기대'
'낙기'는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의 '형문(누추한 집,오막살이 집)'이란 시에 나오는 말로서
衡門형문 - 오막살이 집 -
세상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찾아 헤맨다. 그들은 좋은 집을 짓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좋은 부인감을 맞이하는 것을 행복
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부질없는 것! 참으로 즐거운 건 그런 것을 잊고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데 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가장 초라하지만, 진리의 눈으로 보면 가장 넉넉하다. (시경강설)
1
衡門之下(형문지하) 오막살이 집이지만
可以棲遲(가이서지) 편안히 쉴 수 있고
泌之洋洋(필지양양) 샘물이 졸졸 흐름이여
可以樂飢(가이락기) 굶주림마저도 즐길 수 있네
부(賦)다. 형문(衡門)은 나무를 가로대 만든 문이다. 문의 깊은 집에는 아(阿)·숙(塾)·당(堂)·우(宇) 등이 있거늘 이에 오직
형목(衡木)만을 두었다. 서지(棲遲)는 놀고 쉬는 것이다. 필(泌)는 샘물이다. 양양(洋洋)은 물이 흐르는 모양이다.
이 시가는 은거(隱居)하면서 스스로 즐기며 달리 구함이 없는 사람의 노래이다. “ 형문(衡門)이 비록 초라하나 또한 능히
놀며 쉴 수가 있고 샘물로 비록 배부를 수는 없으나 또한 능히 즐기며 굶주림을 잊을 수 있다.”고 했다.
2
豈其食魚(개기식어) 어찌 먹는 물고기가
必河之魴(필하지방) 꼭 하수의 방어라야만 하나?
豈其取妻(개기취처) 어찌 부인으로 취하는 여인이
必齊之姜(필제지강) 꼭 제나라의 미인이어야만 하나?
부(賦)다. 강(姜)은 제나라 공실의 성으로 미인을 지칭한다.
3
豈其食魚(개기식어) 어찌 먹는 물고기가
必河之鯉(필하지이) 꼭 하수의 잉어여만 하나?
豈其取妻(개기취처) 어찌 부인으로 취하는 여인이
必宋之子(필송지자) 꼭 송나라의 미녀여만 하나?
부(賦)다. 자(子)는 송(宋)나라의 공실의 성(姓)으로 역시 미인을 말한다.
衡門 三章이니, 章 四句이다.
‘굶주림을 즐길 수 있다[可以樂飢]’에 대하여 《집전》에서는 “구경하고 즐거워하면서 굶주림을 잊을 수 있다.” 하였다.
만일 그 도가 즐길 만하다면 의당 바깥 환경은 필요 없을 텐데, 어찌하여 굳이 샘물을 구경한 뒤에 즐거워하는 것인가?
[서유구가 대답하였다.]
‘나무를 가로 대어 만든 문[衡門]’이 비록 하찮고 누추하지만 또한 놀고 쉴 수 있으며, 샘물은 비록 배부를 수 없지만 또한
굶주림을 잊을 수 있으니, 상황에 따라 편안히 여기고 밖에 구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반드시 샘물이 있은 뒤에야
즐거워한다고 한다면 융통성이 없는 것 같기 때문에 신은 “샘물을 빼고 즐거움을 말해서는 참으로 안 되지만 샘물에 구애
되어 즐거움을 찾는 것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기식어(豈其食魚)’와 ‘기기취처(豈其取妻)’에 대하여 《집전》에서 해석한 것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음식과 남녀는
사람의 큰 욕심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구함이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하여 굳이 음식과 색(色)을 말한 것인가?
[이명연이 대답하였다.]
원유(元儒) 주공천(朱公遷)이 이에 대하여 논하기를, “음식과 색(色)은 타고난 욕망인데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에 모두 완전하기를 구하고 구비되기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본분에 따라 행하고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집전》에서 다 해석하지 못한 뜻을 보충할 수 있습니다.
[이상은 진풍 형문편(衡門篇)에 대한 문답이다.]
詩經 《國風》陳風 (시경, 국풍, 진풍) 편
"낙기"는 '형문/누추한 집'의 싯귀에서 취한 것이다.어진 사람이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자 몸을 숨기면서 부른 노래이다.
선비는 먹는데 배 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연을 즐기며 배고품을 잊고,삶의 지혜를 찾았다고 볼 수 있다.
선비는 가난한 처지에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지켜 즐긴다. 은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분수를 지키고 만족할 줄 앎에 뜻을
두고 평생토록 변심하지 않는다는 안분지족.안빈락도를 덕목으로 삼고,궁불실의를 본령으로 실천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여겨 진다.
경북영양군석보면원리 두들마을 중대앞 주남천 언덕암벽에 '낙기대'가 있다.
이 대 글자는 '석계 이시명'선생의 넷째 아들인 조선조 숙종때의 학자 '항재(휘 숭일)선생이 각자 했다고 전해 진다.^^
*출처: 석계선생문집 및 시경
4.두들마을8경의 제4경'세심대洗心臺'
'세심洗心'이라는 말은 '易經역경' "계사상전繫辭上傳"의
"성인이차세심 퇴장어밀聖人以此洗心 退藏於密"에서 나왔는데,
"심중의 더러움을 씻어 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마음속의 더러움이란?
"일신의 안위와 재물을 탐하고 권력에 아부하는 인간의 속성이라 할 것"인데
이런 마음을 씻어 내고, 안분지족安分知足과 安貧樂道안빈락도를 실천하며
수신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심대洗心臺'는 두들마을 들머리에 흐르는 주남천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명인지사,선비,은자들이 대자연을 감상하던 곳으로서 특히 '세심대'에서 동쪽을
향하여 조망하면 눈 앞의 30리 전방 산천경관을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어 심신이
상쾌하여 잡념을 잊고 마음을 씻을 수 있는 곳이다.
조선조 숙종때의 학자 항재(휘 숭일)선생이 언덕 바위에 각자했다고 한다^^
*출처 석계선생문집 및 역경.
5.두들마을8경의 제5경'東臺동대'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 동쪽에 있는 언덕이다.
석계 이시명 선생의 넷째 아들이며 조선조 숙종때의 학자
항재(휘 숭일)선생이 언덕 바위에 각자했다고 한다^^
전통을 이어온 언덕.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두들에 오르니,시간이 만든 아름다움에 눈 뜨다.
여중군자라 칭송 받은 장계향에서 한국문학의 거장이라 불리우는 소설가 이문열
까지 볼 수 있다.
음식 하나에도 접빈의 도리를 담고 고택마다 선비의 자부심이 살아 있는 곳이다.
두들마을에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풍토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풍토를 가꾼다는 것을 ^-^
사람이 태어나고 자란 땅은 그 몸을 기를 뿐만 아니라 뜻을 키우고 마음도 딱아 준다.
이에 성현께서도 "그 사는 땅이 어질면 아름답다(里仁爲美리인위미)"라 하셨고.
"슬기롭기를 바란다면 어진 곳을 골라 살라(擇不處仁택불처인 焉得地언득지)"고
가르치셨다.^-^
동대 방향의 마을에는 가구교회.석보중학교가 있으며 천연기념물제399호 답곡리만지송.
천연기념물제476호주사골시무나무숲과 문화재로서'남악정'이 있다.
"남악정"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0호로서
*조선 후기의 문신 갈암 이현일의 정자이다.
*갈암 선생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직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전념하기 위해
초가2칸을 지어 남악초당이라 한 것이 시초이다.
*1674년(현종15년)에 건립되고,순조22년(1882년)에 중건되었다.사주문에는 현판'홍도문'이
있는데 숙종의 어필이라고 한다.
*갈암 선생의 문집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남악정의 명칭은 석보면 주남리의 옛지명인 '남악곡'에서 따온 것이다.
*영양군문화재대관 및 석계선생문집
6.두들마을8경의 제6경'서대西臺'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1리 두들마을 서쪽 언덕이다.
조선시대에는 西臺서대 인근에 관청인 광제원이 있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원리1리로서 면사무소.경찰파출소.보건소,교회 등이 소재하고 있다.
두들마을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석계 이시명(1590~1674) 선생이 1640년 터를 닦은 곳으로
훌륭한 학자와 시인,독립운동가 등이 배출되었다.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 작가의 고향마을이기도 한 이곳에는 광산문우를 비롯하여 석계고택,석천서당 등
30여채의 전통가옥들과 한글로 쓴 최초의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여중군자 장계향예절관과 유적비,
유물전시관, 음식디미방전시관,교육관,조선 후기 양반가의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음식디미방체험관"등이
마을의 주산인 광려산 아래에 배치되어 있다^^
마을 들머리에는 주남천 및 화매천이라는 내가 흐르고 마을 앞에는 나지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진 병암산
있다.
시냇물이 산태극,물태극으로 굽이 돌아 산과 맞닿은 언덕머리에 자리했다하여 두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한다.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에 서 있는 암벽과 바위에는 석계 이시명 선생의 넷째 아들 항재 이숭일이 새겼다는 동대.
서대. 세심대.낙기대 등의 글씨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7.두들마을8경의 제7경'석천서당'
영양석천서당은 경북도문화재자료79호(1985.8.5.지정)로
석계 이시명(1590~1674) 선생이 1640년(조선 인조 18년) 영해부에서 석보촌으로
이주하여 두들마을 중대위에 띠집'초당'을 지어 유생과 아들들을 강도한 곳이다.
영조 46년(1771)중수하고 석천서당이라 하였으며, 그 후 고종28년(1891)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당에는 대산 이상정이 쓴 석천서당기를 비롯하여 석계기,갈암 이현일 및 남곡
권해의 차운,운악대훈, 좌해 이수영의 중수기 등 기판과 시판이 있다.
또한 안릉세전,석계선생문집,정부인안동장씨실기.정묵재집,항재문집,냉천집 등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석천서당이 있는 이 곳은 1640년(인조18년)에 영해에서 석보로 온,
석계 이시명(1590-1674) 이 중대위에 터를 잡아 석계초당을 지어 13년간 살던 곳이다.
석계가 19년간을 일월산 동쪽마을 수비면 신원리 수양산에서 은거하다 1674년 안동에서 운명하자
1676년에 상을 마친 넷째 아들 항재 숭일이 돌아와 선업을 이어 오다가 석계가 강학하던 유적지를
그대로 둘 수 없다하여 1762년에 석천서당을 창건하게 되었으며 1771년 8월에 준공하였다.
서당은 두들 뒷산인 광려산을 배산한 경사진 대지에 남서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는데 우측 담장 사이에는 3칸 규모의 대문채를 세웠으며 대문채의
전면 우측에는 4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 주사를 배치하였다.
서당은 정면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 시켰으며 배면을 제외한 3면에는 평난간을 세운 헌함을 둘렀다.
가구는 오량가의 초익공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영양군문화재대관 및 석계선생문집
8.두들마을8경의 제8경'광록정廣麓亭'
원리리광록초당/광록정은 조선인조18년(서기1640년)
석계 이시명이 터를 잡은 두들에 넷째 아들인 항재 이숭일이 건립한 정자로
수차례에 걸쳐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다가 1926년에 현재의 규모로 중건하였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우측담장의 전면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시킨 후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으며 대청의 전면에는 사분합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다.
가구는 오량가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영양군문화재대관 및 석계선생문집
#향토사 두들마을 -15-
석계문집 [石溪文集]
*정의 : 조선 중기의 학자 이시명(李時明)의 시문집.
*편찬/발간 경위 :
서문과 발문이 없어 간행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부록에 수록된 「석천서당중수기
石川書堂重修記」로 보아 고종연간으로 추정된다.
*서지적 사항 :
6권 3책. 목판본.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내용 :
권1·2에 사(辭) 1편, 부(賦) 3편, 시 157수, 권3·4에 소(疏) 1편, 서(書) 13편, 서(序) 4편, 기(記) 6편, 발(跋) 2편,
잠명(箴銘) 3편, 축문 3편, 부록 권1·2에 만사 10수, 제문 5편, 행장·묘지명·묘갈명 각 1편, 비명 2편, 기 1편,
상량문 1편, 사실 1편이 수록되어 있다.
「감춘사感春辭」는 1651년(효종 2)에 죽을 때까지 학문과 덕행에 힘쓰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읊은 것이고,
「복거부卜居賦」는 병자호란 이후 절의를 지키기 위해 수비(首比)·석보(石保) 등지로 은거지를 옮겨 다니는
자신의 뜻을 밝힌 것이다.
시는 주로 교육과 탄시의 감정을 읊은 것으로 은거의 뜻을 밝힌 것과 세상이 잘못되어 감을 한탄한 내용이다.
「탄시歎時」·「유감有感」·「갑진원조甲辰元朝」 등은 병자호란 뒤에 어수선한 환경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뜻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견궁遣窮」·「석계음石溪吟」 등은 안빈낙도하는 자신의 지절(志節)을 밝힌 것이다. 「경학警學」·「영운詠雲」·
「추회秋悔」 등은 사상이 온건하며 표현력이 좋아 널리 회자되는 시이다.
「논우율종사소論牛栗從祀疏」는 1652년 경상도의 유림을 대신하여 지은 것으로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내용이다. 서(書)는 아들 이상일(李尙逸)·이휘일(李徽逸)·이현일(李玄逸) 등에게 보낸 것이 대부분인데,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하고 의로움을 행하여 선비의 기질을 연마할 것을 훈계한 글이다.
「석계기石溪記」에서는 은거지인 석보의 고사와 전설 등을 기록하고 지리적인 견해를 밝히면서 그 곳에 자리를 잡게 된
동기와 이유 등을 설명하고 있다. 「경당선생일원소장도발(敬堂先生一元消長圖跋)」은 스승인 장흥효(張興孝)의
「일원소장도」의 발문으로, 역학에 관한 견해를 밝힌 것이다.
*의의와 평가:
영남학파의 거두로 주리학의 이론을 정립한 이현일의 가학연원과 17세기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사대부의 학문적 경향과
배청사상(排淸思想)의 일면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석계문집 [石溪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사 두들마을 -16-
갈암 이현일과 도성암
검마사劍磨寺, 도성암道成庵, 계정磎亭
검마사(劍磨寺, 일명 도성암道成庵)
검마사는 수비면의 검마산 북편 중록(中麓) 석대 위에 있던 고찰인데, 사찰의 터전이 대단히 넓어 옛날에는
상당히 큰 가람이 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수비면은 산중이로되 들이 열려 산고수려 하다. 문자 그대로 산천이 아름답다. 검마사는 조선조 중엽까지도
큰 사찰이던 것이 중간에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도성암이라는 암자를 두었으니 이것을 검마사 또는 도성사라
일렀다.
이 곳은 높고 깊은 산속이라 경치가 그윽하고 시계가 넓은데, 동쪽으로 울련산이 수려하고 산 아래에는 촌락이
있어 경치가 아름답다.
효종 때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계정(磎亭)에 거처할 때 여러 형제와 같이 입산하여 도를 논하고 학문을
연구하 던 곳으로 유명한데 지금도 암자가 남아 있다.
향토사 두들마을-17-
영양군청의 동쪽 관문인 읍령(영양군의 호칭) or 울치재(영덕군의 호칭) 및
'연봉추(영양에 오고.가는 손님을 영접 및 송별하던 장소)'를 재조명합니다.
*읍령 = 서읍령 or 울치재
한 해에 서읍령을 다섯 번 넘었지만
절정에 오를 때면 날 것만 같은 기분이네.
소나무와 삼나무, 원숭이와 학까지 다 잘 알겠고
바람은 쏴아아 불어 내 옷자락 풀어헤치네.
푸른 바다 기울여서 금 술잔을 가득 채우고
태백산 아래 수많은 산 안주로 삼고 싶구나.
말고삐 잡고 선 마부는 어찌 그리 안달하는지.
내가 훌쩍 뛰어 별을 뚫을까 봐 걱정하나 보다.
西泣嶺
一年五踰西泣嶺(일년오유서읍령)
每凌絶頂神飛揚(매릉절정신비양)
松杉猿鶴盡相識(송삼원학진상식)
天 ? ? ? 披我裳(천뢰조조피아상)
要傾滄海崇金 ?(요경창해숭금준)
太白諸山爲 ? ? (태백제산위정두)
僕夫控馬何勤渠(복부공마하근거)
疑余騰 ? ? 星宿(의여등초참성숙)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경상도 병마평사
(兵馬評事)로 일하던 1467년 여름 각지를 순찰할 때 지었다.
영양군 석보면과 영덕군 창수면에 연결되는 고개인 서읍령은 높기도 하고,
관리에게 수탈당한 백성들이 울며 넘었다 하여 울치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고개다.
울치재를 자주 넘자니 고생이 말이 아니다. 그래도 이 고개만 오르면 신이 난다.
모든 게 익숙해진 고개 위에 섰더니 시원한 바람이 옷깃을 마구 날린다. 호쾌한 기분
끝에 동해 바다를 술잔에 따라 고개 아래 산들을 안주 삼아 마음껏 마시고 싶다.
그런데 웬일인지 말을 끄는 마부가 안절 부절 못하고 있다.
오호라! 내가 너무 호쾌해하여 별이라도 뚫고 하늘로 솟구칠까 봐 걱정인가 보구나.
*기고자: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읍령:울치재는 경북 영양군 석보면 삼의리와 영양읍 양구리에서 영덕군 창수면 울치로
넘어 가는 산등성이'재'입니다.
*읍령泣嶺과 연봉추延逢湫의 재발견
- 아래를 텃치하면 내용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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