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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追憶은 삶을 새롭고 豊饒하게
東洋의 巴里, ‘호찌민’의 그날과 오늘
■ 朴 大統領의 호찌민市 訪問ㅡ.
베트남을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 나흘째인 9월10일(화) 베트남 최대의 경제도시 호찌민을 방문(11일 귀국), '세일즈 외교'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박 대통령의 방문은 2004년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9년 만이다.
박 대통령의 호찌민 방문은 이번 순방 최대 목표인 '세일즈 외교'의 연장선상이다. 호찌민은 입지조건이나 비교적 양호한 인프라, 외국인 투자의 집중 등으로 베트남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다.
박 대통령은 호찌민에서 레 탄 하이 당서기와 레 황 꾸언 시장이 공동 주최하는 오찬에 참석, 친분을 쌓음으로써 우리 기업의 사업 수주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박 대통령은 호찌민에서 모범 투자기업 '한세 베트남'을 방문해 현지 기업인들을 격려하고 애로사항을 청취하는 한편 동포들과의 간담회도 열었다.
지난 7월말 현재 호찌민에는 베트남 산업무역부 인가 기준으로 2천340개의 외국상사 대표사무소가 설립돼 있다. 이 가운데 싱가포르 300개, 홍콩 249개, 한국 210개, 일본 138개사 등이 소재하고 있다.
호찌민은 2025년까지 인구 1천200만 대도시 발전 장기 마스터플랜 아래 신도시 개발, 하이테크파크 조성, 지하철ㆍ전철ㆍ고속도로ㆍ교량 건설, 사이공 항구와 떤선니엇 공항 확장공사 추진 등 대규모 인프라 건설을 추진한다.
■ 호치민의 `사이공 해방 30년‘ㅡ.
박 대통령의 호찌민 방문과 함께 1970년대 초 월남방문의 기억을 상기하며 그 시대에 들렀던 모든 한국 젊은이가 반사적으로 회고한 월남시퀀스에 감명이 새롭듯 나 또한 여기 그날의 소회를 점철(點綴)한다….
동양의 파리를 잊지 못한다. `신생 베트남’의 오늘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1986년 `도이모이‘(刷新)정책과 뒤이은 `전방위 외교‘로 1990년부터 80%의 고도성장을 반복해온다.
베트남 종전 30년 기념식(4.30 TV 외신)에서 본, 75년 생 젊은이들의 영광의 세기를 향한 다짐의 소리에서 표명한 열렬한 자세는 전후의 화려한 변신을 일깨우고 있었다.
월남전쟁 중 이 나라에 파병된 우리 국군은 교체병력 34만 명이었다. 1965년 야전군 사령부 설치로 그 주둔 병력이 4만8천 명ㅡ.
나는 한국방송 보도책임자 시찰단의 일원으로 71년 주월 한국군사령부(사령관 李世鎬 중장)를 방문했고 비둘기, 십자성, 은마, 백구부대와 전투사단, 맹호, 백마, 청룡부대 장병을 만났다.
격전지 후방 사이공(西貢․현 胡志明시)에서 또한 우연히 알게 된 한 소녀, Marie Borel을 잊지 못한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는 그녀에 대한 추억이 한 편의 상황과 인간을 담은 기록영화처럼 떠오른다.
30년이 훨씬 지난 오늘, 어떤 강한 실감으로 절박해 왔던 상황도 이제는 다만 희미할 뿐 그 같은 actuality를 더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그녀 때문에 안계(眼界)와 사각(死角)이 명료해지고, 그 날의 기억이 단안(單眼) 아닌, 복안의 회상으로 선연하게 자극한다.
■ 越南의 陸參總長 구엔 將軍ㅡ.
그는 조국이 패망하자 표연히 사이공을 버리고 미국에 망명했다. 그리고 버지니아의 어느 도시에 이름을 감추고 숨어살았다. 나라 잃은 슬픔에 백만 대군을 호령하던 자기 신분을 감추느라 얼마나 비통했을까?
그러나 그의 정체는 오래 은폐되지 못한 채 어느 외신 기자에게 폭로될 수밖에 없었다
구엔은 그 도시에서 주급 165 달러의 소규모 레스토랑 웨이터로 일하고 있었다. 얼마나 결백했던지 그는 장군이 된 후로도 시골 농부인 아버지에게서 생활비를 타다 썼다.
월남이 무너진 원인을, 군부가 부패해서라고 했다. 어느 날 그는 워싱턴 본부로 돌아가는 미군 고급 장성이 이별선물을 주겠다며 무엇이나 요청하라고 권할 때, 겨우 이런 주문을 했다.
“군화가 다 헐어, 튼튼한 걸로 한 켤레 달라!”
■ 印支半島의 東部 海岸地帶ㅡ.
안남산맥의 아열 계절풍대를 점유한 베트남은 특히 송코이 강, 메콩 강 하류 사이공 평원은 사바나 기후로 四月의 최고기온이 29도였다.
6.25 후 우리국민은 한때 베트남 쌀(安南米)를 수입해 먹을 만큼 4모작으로 쌀이 풍부하고, 지금은 해상유전 개발로 활기에 차 있다.
3월27일 바바리코트로 눈보라치는 金浦공항에서 DC-10 기를 타고 마닐라의 클라크 공군기지에 도착했을 때, 계절은 이미 한 여름이었다. 사이공에 건너올 때는 마치 바캉스라도 온 기분이었다.
이곳 서늘한 철은 十二月, 그러니까 한국의 늦은 봄에 해당되는 五月 기후(26도)와 같다. 거리에는 중국풍습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2세기 때 중국의 속방(屬邦)이었다던가?
1428년 국호를 안남(安南)으로 독립했다. 베트남(越南)으로 바뀐 때는 1803년 구엔 왕조가 들어서면서다. 사이공이 프랑스군에게 점령된 것은 1859년이다. 그 8년 뒤 식민지로 바뀐다.
1954년 월남 임시정부가 세워졌으며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됐다. 이들의 남북전쟁은 1960년에 시작됐고 76년 사이공 함락으로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에 남반부가 흡수됐다.
국민은 거의 불교신자인 베트남 족이다. 그러나 화교도 많이 살고 있었다.
■ 살결 흰 50代의 프랑스 女人ㅡ.
시인이나 화가로 파리에 살지 모른다. 두어 번 파리와 보르도 여행길에 수소문해도 그 곳 베트남인은 아무도 몰랐다. M. V. 마르티알리스는 `자나가 버린 생활을 즐기는 것은 인생을 두 번 사는 것이다‘ 고 했다.
나는 Miss Borel을 생각하며 지난 80년이래 아름다운 회상을 모아 몇 줄의 시를 남겨 온다.
G. 아폴리네르의 시 `사냥의 뿔피리‘를 들려주던 소녀ㅡ. 나는 지금 나의 시를 통해,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Correggio 의 〈Venus, Satyr, and Cupid〉에서 그녀의 모습을 연상한다. 베트남은 곧 마리의 외가 나라였고 사이공은 그녀의 출생지였다.
■ 熱帶樹 상그러운 四月의 都市ㅡ.
근대문화도시 동양의 파리다웠다. 넓고 넓은 아름다운 차도, 기복 없는 5-6층 고풍스런 장중한 건물들이 가지런히 도시의 풍치림 모양 도열해 황홀했다. 도심의 번화가 투도 거리의 밤 풍경은 화려한 수입 물품과 예쁜 여성들의 나들이로 더욱 매혹적이었다.
거리 모퉁이의 왁자한 술집과 노변에서 한몫 보는 검고 길쭉한 홍합 냄비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 즐비하게 겹쳐 서서 까먹고 버린 너절한 홍합껍질이 사이공에서 보는 색다른 풍경이었다.
오늘의 한국 도시에서 보는 홍합장수들은 그 뒤에 모방한 월남풍조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도시나 문패 대신 주택 표면 벽에 월남 삼색기와 일련번호가 프린트 돼 보기에 깨끗했다.
자동차보다 인력거와 자전거가 범람하는 거리의 시민들 또한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어 크게 혼잡했다. 중국인의 거리 숄롱은 납작한 건물들이 즐비하고 포목점, 식품가게, 유흥가와 잡화점이 잇대어 왁자했다.
사이공의 허약하고 키 작은 여성들에 비해 이 곳은 체격 좋고 매력 있는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화교 여성들은 몸집에서 다분히 전통적인 대륙여성의 아름다움을 타고났는지 모른다.
李世鎬 사령관이 주재하는 주월사령부의 환영 오찬은 현대문화의 액세서리보다, 영웅적인 허세보다, 고국에서 위문 온 방송인들을 깍듯하게 맞아주어 감명 깊었다. 사이공의 특산물로 산해진미, `아방궁‘ 같은 디럭스한 대향연의 인상에 충격적인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산하 각 부대는 붕타우, 캄란, 퀴논, 나트랑, 다낭... 등지에 분산해 있었다. 붕타우는 우리의 의무중대가 주둔한 곳이었다. 시찰단은 십자성 부대 맹호부대 등을 돌아보는 동안 일선 장병의 막사에서 숙식을 함께 했다.
나트랑은 프랑스인이 개설한 월남 최고의 휴양지였다.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규모 있는 해수욕장을 보유하고 있었었다.
시설 자체가 프랑스풍이었으며 멀리 남중국해를 지나가는 선박들로부터는 먼 나라, 알지 못하는 도시에의 동경으로 엑조틱한 노스탤지어에 젖게 했다.
■ 16年을 끌어온 지루한 戰爭ㅡ.
피로와 권태에 지쳐 1973년 1월28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다. 한국군은 참전 8년 만에 회군하게 돼 제1진 청룡부대 선발대가 1월30일 보잉 727 전세기로 水原 공군기지에 도착했을 때 환영시민의 감격은 무한했다.
1965년 1월26일 파병에 대한 표결 국회 본회에서 찬 106, 반 11, 기권 8로, 2월9일 崔斗善 대회장이 주재했던 제1진 파월 비둘기 부대에 대한 서울운동장 3만 시민 환송대회와는 대조적이었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장병들이 귀국해 기뻤다.
그러나 그 2년 후, 월남의 패망으로 망명인의 해상 유랑이 사뭇 비참했다. 이들 보트 피플 214명을 태운 우리의 `쌍룡호‘가 1975년 5월21일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 그 충격은 또 한번 컸다.
부패한 권력 재벌과 서민, 상하의 이질감... 이런 알력이 그 무엇보다 두렵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산 교훈으로 시사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75.7.3) 한국 해군 LST 815, 810은 월남 철수 난민 1364명을 釜山항에 내려놓았다. 이들은, 구호대상 1341(한국인 319, 월남인 988, 한국 교민과 결혼한 월남여성과 그 자녀 859, 순수 월남인 329) 중국인 33, 필리핀인 1, 주월 대사관 가족과 주한 월남대사 가족 등 23명이었다.
■ 내 못 잊을 프랑스 `少女 마리‘
프랑스계의 Marie Borel
숄롱에서 엄마가 그녀를 길렀을 뿐
아빠는 비스케灣 가까운 아귀떼느 분지에서
포도원을 일구고 있다고 했다.
그러기에 보르도에서 학교를 나온 뒤
나트랑에 다니러 왔다지만
그녀는 월남전 포연 속에 핀
백합으로, 둘레를 향긋하게 했거니
마리는 파리에서 방송학을 배우겠노라고 별렀다
기자가 되는 게 소원이라고 귀띔한 건
날 의식한 때문만도 아닌
그만큼 소녀는 하나의 흐름 위에
떠 있고 파 해서였다
그것은 별장지대를 휩쓸어오는
해풍으로 하늘을 덮은 울울한 수림이
짐승소리를 울리는데
두려워하지 않고 산책로를
나란히 거닐 수 있었던 것을
회상해도 알 것 같았다.
파월 장병이 머문 지역 찾아 돌고,
보름 뒤 귀국 전날 소녀를 불렀을 때
그녀는 밤새워 숄롱 시가를
헤매고 싶어했던 것을,,,
침침한 포도를 촘촘히 누비는 사이
그녀는 하늘 빈자리에
종달새 되어 들떠 있었고
파리를 연상케 하는 밤의 환락가는
전쟁과 인연 없는 도시답게
술꾼과 소음으로 휘청거렸다
타락한 퇴폐의 도시 숄롱,
황홀한 밤이슬에 젖은 채
어둠 밀리는 하얀 새벽까지
그녀는 파리한 어깨에서
피로를 닦아내야 했다
사이공을 떠나던 날
탄손누트 공항 대합실에서
몇 겹 너머 별빛소리 안 보이려고
마리는 머리칼 추스르며
애써 음산한 시간의 촉매를
털어 내고 있었다
`전쟁은 곧 끝날 거야
푸른 새벽 징 소리 울리면
다시 만날 채비를 서둘러야지‘
나는 입술을 깨물며
몇 번이고 질근질근 다져 보였다
1975년 4월 어느 날
印支전쟁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마리 보렐의 외가 나라는
영원히 지상에서 사라졌다.
`소녀 마리‘/시집 [鐘이여 울려라]
■ 西貢 함락 30周年 기념 祝祭ㅡ.
지난 4월30일(베트남 전쟁 30주년을 맞은 날) 아침 胡志明시(구 西貢)의 통일회당(구 월남 대통령궁) 광장에서 개최된 기념식은 5만 군중으로 화려한 페스티벌을 연출했다.
돌아보면 소멸된 `월남‘은 반세기도 채 이어지지 못한 단명의 전설을 남겼다. 시대적 격동기에 출발해 비극적인 사회 변혁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내형적, 상태적, 정신적, 불가시적, 불가청적, 사상의 여건을, 줄곧 퇴폐화 해 왔다. 결과적으로 처절한 단절의 분기점을 표류하다가 종언을 맞은 것이다.
나는 羅․唐의 연합군에게 좌절된 百濟를 연상했다. 해상을 유랑하다가 왜(倭)의 간사이(關西) 땅에 표착했던 옛 보트 피플... 유민들은 삶의 둥지를 발견해 그곳을 안숙(安宿)의 뜻으로 아스카(飛鳥)라고 했고 또 그 고장을 그들의 나라(奈良)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옛 아스카 시대의 환경문화에서 오늘을 보는 월남 유민의 한국생활에 관심이 쏠렸다. 플라톤은 말했다. ㅡ`우리가 태어난 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닌, 조국을 위해서다‘ 라고.
`사실‘과 `존재’ 안의 상황은 다분히 분열증을 일구고 있다. 우리의 남북 대치가 그렇다. 이는 `사실‘ 그대로의 `존재’와 다르다. 월남의 최후가 시사한 그 같은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파고들게 해 오늘의 현실이 분열증적 현대임을 무섭게 일깨운 것이다. ♠
사진: 오늘의 호찌민시 인민위원회 건물과 胡志明 동상
첫댓글 좋은글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