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정지 버튼 앞에서 외 1편 / 심수자
맛있는 음식을 혼자 먹다가
밑 빠진 독에 사랑을 쏟아 붓다가
순간들을 문득, 멈춰 세우고 싶어졌다
탑처럼 쌓인 신용카드 결제 금액 청구서를 바라보다가
몰려오는 편두통에 머리를 흔들다가
이 전에는 본 적 없는 디오라마를 헤맨다
거울을 깨고 거울 속으로 달아나고 싶어졌다
현실은 영화처럼 아름답지도 않았으므로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아
담장그늘 아래 검은 고양이로 앉아본다
혀로 윤기 도는 털을 가다듬어 보다가
순금만으로 그린 고려불교탱화 속으로
살그머니 손 들이밀어 보다가
절대 인간이 그린 게 아니라고 빡빡 우긴다
나도 모르게, 순간에서 순간으로 옮겨가는 나에게도
일지 정지 버튼을 달아주고 싶다
문장 속으로 들어
공감이란 단어를 공감하지 못해
가을 하늘에 민낯이 아리다
허공의 문장, 바람의 문장, 바다의 문장
쉼 없이 꾸역꾸역 받아먹었으나
겨울을 앞두고 느껴지는 허기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던
비우려 해도 비워지지 않던 웃음과 울음은
머지않아 길 위의 살얼음처럼 바스락거릴 테지
초록의 시간 잡으려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를 여러 번
힐끗 뒤돌아본 거기 또한 하얗게 낯선 곳
맨발의 내가, 눈 내린 길 위를 서성이고 있다
사방은 벽, 어디를 두드려도 보이지 않는 문
눈빛으로 읽는 단어들은 처마 끝에 매달려
제 무게 겨운 고드름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실낱같은 빛 한 줄기
쓴맛 뒤에 맛볼 단맛을 찾아
겨우내 꼭꼭 씹어 보아야겠다
문예지 한국작가 2023 겨울호
심수자 약력
2014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형상시학회, 대구시인협회, 수성문인협회, 모던포엠작가회
시집 『술뿔』 『구름의 서체』 『가시나무 뗏목』 『종이학 날다』 『각궁』
출처: 대구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겨울판화(박윤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