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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벌 쉘리
성경은 결혼생활을 하나의 규범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누구든 결혼해서 자녀를 가져야 된다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예수님도 결혼하지 않으셨으며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마 19:12) 결혼하기를 거부한 사람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도 한 가족의 가장 노릇을 한 일이 없으며 독신생활이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사” 라고까지 했다.(고전 7:7)
물론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평생을 지내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 중 비교적 적은 비율은 평생 결혼의 기회를 접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외의 대부분은 일부러 결혼을 기피한다. 그 중에는 또 결혼해서는 안될 사람들도 있다.
평생을 독신으로 재내야 할 사람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혼자 사는 사람들이나 배우자가 죽어 홀로된 사람들이 결혼하는 것을 조금도 탓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린도에 있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독신생활을 권면하기도 했다.
혼자 사는 데 따르는 여러 가지 이로운 면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런 독신생활의 장점이 오늘날 교회에서 크게 강조되지 않는 건 사실이다.
독신생활은 어떤 질병이 아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독신자에게 어떤 우월감을 느끼거나 중매를 하려고 수선을 피워서도 안 된다. 따라서 교회활동이나, 부부들끼리의 모임 또는 가족 간의 활동에서 독신들을 제외시켜서는 안되겠다.
첫째,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품어온 일종의 전문직에 대한 야심 때문에 결혼을 잠정적으로나마 보류한다.
바울이 독신으로 있기로 결심한데는 이런 생각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는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하여 마음이 나누이며”(고전 7:32~33)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도 바울은 유대주의 안에서 바쁘게 일에 몰두한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는, 그 당시 로마제국 전역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다. 위험한 사명을 수행하느라 자신의 건강이나 안전에 대한 염려는 한쪽으로 제쳐놓기 일쑤였다. 만약 아내와 자녀가 있었더라면 이런 요인들을 무시하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였을 것이다. 자신이 책임지고 완수하기로 한 어떤 일 때문에 자신을 희생시킬 수는 있지만 자신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강요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유감스럽게도 독신으로 남아 있었으면 좋을 전도자, 선교사, 교회 일꾼들을 주위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결혼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느라고 자신의 가족의 정서와 영적 필요는 등한시 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의 헌신이나 진실성을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의 판단력과 외부사람들보다는 더 큰 책임을 져야하는 가족에 대한 공정심, 또 여러 가지 책임을 공평한 우선 순위로 다룰 줄 아는 능력에 있다.
다른 분야에서도 같은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을 거느리기로 한 사람은, 가족과 가족의 필요를 출세에 대한 야심보다 앞세워야 한다. 가족보다 앞서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요일 4:20) 요한은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가족을 등한시하거나 부당하게 대우하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공박을 더 당당하게 할 수 있다.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할 위치에 있다면, 가족에 대한 책임을 앞세우고 직업에 대한 야심은 한편으로 밀어두어야 한다.
아주 바쁜 직업과 아내와 어머니의 위치를 함께 조화시켜 나가려는 여인들이 있다. 이들이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둘 중의 하나는 상대를 위해 양보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회적인 출세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책임이 희생당한 경우도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려는 의도를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남자나 여자가 사회진출과 결혼을 겸한다는 것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이 두 가지를 잘 조화시켜 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어 문제가 된다. 결정할 때 아주 정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자신들을 내 맡기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떤 개인적 희생이 따를 것인가를 충분히 생각하고 이해해야 한다. 어느 한편이라도 장래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그만한 희생을 치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두 사람은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개인적 자유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열심히 해 오던 일을 결혼하면 포기해야될 때 쉽게 단념할 수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아주 솔직하게 “그렇습니다”라고 답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결혼해서는 안 된다.
지나칠 정도로 독립심이 강해서 “사랑하고 존경하며 순종해야 한다”는 조항에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만 해도 비위가 거슬리는 여자들, 이런 여자들은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 결혼 관계에 있어서, 가족에 대한 최종적 결정을 남편에게 맡기는 것이 아내의 영적 책임이다. 「속박 받으며」 사는 것이 도무지 못 견딜 일이라고 생각하는 여인들에게 결혼이란 가당치 않다.
결혼하면, 상대를 위해 개인의 자유는 희생되어야 한다. 남편이나 아내가 가족이 필요로 하는 어떤 것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독신이었으면 아무문제 없이 했을 것!)을 희생하지 못할 때, 그 결혼은 파국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자신의 성격이 그렇게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견뎌내지 못한다면, 그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결혼하고도 지금까지 누려온 독립된 개인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다.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이 주의(注意)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인생 여정에 깊은 바퀴자국을 만들어 왔다. 그러므로 결혼하려고 이런 깊은 자국에서 빠져나오기란 아주 힘들 것이다. 그러니 결혼하지 말라!
어떤 미혼여성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몹시 학대하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평생 어떤 남자에게도 기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결국 결혼을 하게 됐다. 하지만 결혼 후에 자신의 성을 남편의 성으로 바꾸지 않고, 직장에 계속 다니면서 자신의 수입을 남편 것과 따로 취급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생활이 남편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때로 혼자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결혼 후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독립된 개체를 보호하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그 결혼은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파탄으로 끝나고 말았다.
결혼 생활이란 독립된 생활이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는 생활이다. 자신을 상대방에게 맡기지 못하는 남자나 여자는 독신생활을 고집해야 한다.
세째, 두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어떤 장애물을 교제기간 동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이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엡 5:21)
두 사람이 서로를 존귀히 여기고 사랑하면서 함께 힘쓸 때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 시댁문제, 금전문제, 직업들--- 어떤 종류의 문제라도 두 사람이 순수한 사랑으로 서로에게 헌신한다면 해결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떤 문제가 두 사람의 교제기간동안 계속 그들을 괴롭힌다고 가정해 보자. 이 문제 때문에 그들은 자주 신경전을 벌이게 되고 급기야는 그것에 대한 언급을 아예 피해 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고 하자. 그런데 「결혼하고 난 후에는 그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겠지」 라는 비 실제적인 기대를 품고 결혼을 진행시킨다면, 이것은 아주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는 결과가 된다. 교제 기간 중에 서로 충분히 다루고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후에 결혼생활을 망치게 된다. 결혼식을 취소하는 것보다 더 비참한 운명을 낳게 한다. 이 비참한 운명이란 비현실적인 결혼 후의 생활에서 오는 정신적 긴장과 쓰디쓴 후회의 열매를 계속 거두어들이는 현상을 말한다. 그 결혼이 지속된다면 말이다.
그 문제란 끝없이 열거될 수 있는 문제중 하나일 수 있다. 자주 문제를 일으키는 것 중에 종교의 갈등도 포함된다. 지각이 있고 깊은 신앙을 개인적으로 체험한 사람은 자신과 가장 가깝게 생활하는 사람과 신앙을 나누려고 한다.
에드워드(Edward)는 천주교 신자였다. 그런데 쥬디(Judy)가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두 사람사이엔 냉전이 벌어졌다. 처음 얼마동안은 일요일에 각기 따로 행동을 취하면서 교제를 계속했다. 약혼 반지도 받았고 결혼날짜도 1년 후 어떤 날로 정하였다. 그런데 쥬디는 신앙노선이 다른 가정의 부부들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여자들이, 기대했던 것 보다는 훨씬 소극적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또 아이들이 부모의 종교가 달라서 한번은 이쪽으로 또 한번은 저쪽으로 끌려 다니는 것을 보았다. 또 부모의 신앙이 다른 가정에서 자란 10대 청소년들이 아예 완전히 종교를 떠나는 것도 보게되었다.
종교를 전혀 무시해 버리는 태도가 가정에서 체험한 종교적 혼란과 함수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다. 쥬디는 에드워드에게 서로의 차이점을 직시하자고 고집했다. 그들은 목사님과 신부님도 만나보고 둘이서 이 문제를 놓고 토론도 해 보았다. 결국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무척 결정하기 어려웠겠지만 쥬디는 단호히 파혼을 했다. 그녀가 현명하게 평가한 바에 의하면 파혼의 설움이 종교적으로 뒤죽박죽 된 결혼의 설움보다 훨씬 가볍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죄는 아닐지 모르지만(고전 7:12~14, 벧전 3:1~2 참조) 결코 이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넷째, 정서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또 그 밖의 다른 면에서 상대방의 행복과 안녕을 책임질 수 없는 사람도 결혼해서는 안 된다.
성숙의 척도를 재기란 어려운 일이다. 꼭 연령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성숙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 분명 하지도 않고 자신의 실수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지도 못하며 문제를 실질적으로 다루지도 못한다. 이들은 잘못을 하고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나이가 들어가면서 같이 성숙하는 사고와 행동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할 줄도 모르며, 그때 그때 부는 바람의 강도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위기의 상황에 부딪히면 당황해 한다. 돈을 모을 줄도 모르며 빚도 책임지고 갚지도 못한다. 지각 있는 확신은 별로 없으면서도 고집스런 편견으로만 가득 차 있다. 또 성(性)에 대해서도 불건전한 태도를 취한다. 이들은 질서가 없이 혼잡하며 자신을 견제하지도 못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관심사를 양보할 줄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닥치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수준의 성숙도를 발휘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환경에서라도 전적으로 자신이 있고 침착한 사람만이 성숙한 어른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인생사를 다루는데 있어서 적절하고 건설적인 행동의 양식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성숙한 사람의 딱한 점은 자신의 비성숙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사실 비성숙한 사람이 자신의 비성숙을 깨닫고 결혼을 포기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몹시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한편, 위에 열거한 비성숙의 태도 중 몇 가지를 보이는 사람 결혼하려는 성숙인이 있다면 상대방이 좀더 성숙해질 때까지 일단 결혼을 연기해야 할 것이다. 만약 상대방이 전혀 성숙해지지 않는다면, 계속 풍파를 일으킬 사람과 함께 결혼이라는 조각배를 타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결론
결혼이 누구에게나 맞는 것은 아니다. 사회가 이 사실을 보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것은 “남들이 다 하기 때문에” 덩달아 결혼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것이라는 사실을 뜻할 수도 있겠다. 또 바라기는, 정말 서로 사랑하기에 결혼해서, 조금도 아낌없이 서로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서, 그리스도안에서 순수하게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을 기대한다.
독신들을 위해서 특별한 사역을 발전시킨 교회도 많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살면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외로와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겐 하나님의 영적 가족들이 용기를 주고 북돋아줄 필요가 있다. 또 이혼이나 배우자가 죽는 슬픔을 겪은 사람들에게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은혜와 신유를 베풀어야 한다. 교회의 몸은 혼자 사는 사람들 -- 영구적이건 잠정적이건 -- 에게 손을 뻗치고 그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독신들에게 교회 일을 맡길 때에도 하찮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필요에 따라서라기보다 본인들이 원해서 독신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뒤틀린 사람들이 아니다. 베푸는 사람들에 반해 받아들이기만을 즐겨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이들도 재주가 있고, 관심분야가 있으며, 교회생활에 유용한 지도자가 될 소질을 갖고 있다. †
* 「결혼은 예술이다」 - 생명의 말씀사 - 중에서 *
첫댓글 우리의 삶의 목적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던 안하던, 자식이 있던 없든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고 사는 삶일 뿐입니다.
할렐루야! 역시 코스모스 요원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