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둘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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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은 길림성뿐만 아니라 동북3성의 교통요충지이면서 상업의 중심 역할을 하며 일본의 위성국가 만주국의 수도였다고 하는데, 유명한 대학과 연구소가 많은 산업도시, 푸른 녹지로 잘 정비된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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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에서 소팔가자까지는 1시간30분 거리에 있으며 소팔가자라는 이름은 여덟 가구가 모여서 한 마을을 이루었다는 데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일찍이 교우 촌이 형성되었고 소팔가자 초대 교구장 베롤주교는 많은 토지를 매입하여 성당을 짓고 포교의 중요한 거점으로 형성되게 하였으므로,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의 주요한 거점이 되었다. 소팔가자 성당은 김대건 신부님이 1년여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중국당국에서 관리하는 애국교회의 소관으로 운영되어지는 성당이고 소팔가자 주민은 모두 중국인이지만 90%가 가톨릭 신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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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 들어서니 성당 내부며 낡은 장의자 등 관리하지 않은 듯 어수선한 가운데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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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팔가자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시는 정레오나르도 신부님, 사진에는 보이지않지만 복사는 중국인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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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제대와 연결이 되어있는 성당 뒤에는 성모동굴이 있고 맞은편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동상을 중심으로 원을 이루고 있는 자그마한 뒷마당이다. 뒤편 마당에는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께서 머물렀던 장소에 지금은 교육관이 들어서 있고 조선 선교사 페레올주교, 메스트로신부, 최양업과 김대건이 이곳에 거주하였고 페레올주교로부터 삭발례와 함께 부제품을 받은 곳으로 이국땅에서의 성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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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중국에서는 김대건 신부님은 많이들 알고 있지만 최양업 신부님은 알지 못했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님은 성격이 활달하시어서 이 곳 소팔가자에 일 년을 조금 넘게 계셨는데 사람들과 많이 사귀시었으며 당시에 이 소팔가자 근처에 사는 장씨 가문과 깊이 사귀었고 이 처럼 사귀던 그 가문에서 계속 김대건 신부님의 이야기가 전해져서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양업 신부님은 거의 육 년을 계시었으면서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헌데.. 성당 옆쪽에 있는 문 없는 화장실은 생전 처음 보는 형태로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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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을 나서서 조금 버스로 이동하니 김대건로(金大建路)가 비포장도로로 신작로처럼 나있었는데 중국정부가 인정한 공식도로의 명칭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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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 주교좌성당은 웅장한 고딕풍의 아름다운 성당으로 앞에는 송하강이 흐르고 주변과 성당내부가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공산화되기 전에는 길림시의 상징적 명소였다고 한다. 성당 옆 오솔길을 따라 30미터 정도 올라가면 성당과 성모상을 모신 동굴이 있는데 이 聖母동굴은 1920년에 처음 만들어 졌으며, 홀 안에 1.8미터의 성모상이 서 있고, 성모 발아래의 석판은 프랑스로부터 실어온 것이라 한다. 동굴 내부의 홀은 큰 덩어리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천연 동굴이며, 홀은 그다지 깊지 않고 면적이 대략 15평방미터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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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옆에 계신 예수님상은 조금 방치된 위치인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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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안에 들어가자 성전을 지키는 봉사자들이 사진 촬영을 못하게 손사레를 치더니 신부님임을 알자 안수해 달라고 하면서 사진을 찍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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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주교좌 성당 앞에 흐르는 송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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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의 종교 상황을 잘 볼 수 있는 것 중에 사제들의 요람인 주교좌성당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길림 신학교'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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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 신학교는 우리 한국의 신학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조그마한 신학원 규모였고 오랫동안 손질 하지 않아 허술하고 낡은 상태의 내부 곳곳을 보면서 잠시 혼돈이 온다. 한국의 신학교를 떠올리며 대형화되고 예술적인 멋스런 현대식 교정에서 하느님을 익히는 신학과 우리네 60년대쯤의 학교시설 같이 보여 지는 열악한 환경에서의 신학의 차이가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상념이 되어 괜스레 우울해 지며 절로 한숨이 나온다. 중국의 종교는 전시효과적인 이름뿐인 성당, 신학교.. 그 자체로 종교 자유가 없는 폐쇄된 국가임을 느낄 수 있었고 ‘중국의 복음화’는 현실적으로 막연하게 다가온다. 신학생 수도 총합하여 30명 정도라고 한다. 사제서품도 매년 있는 것이 아니고, 이나마도 중국 전체에 12개 정도 있다고 하는데 다른 곳은 어떨까? 궁금해진다. 문득 예수님께서 성 프란치스코에게 ‘교회를 재건하라’시는 지상 사명의 소리를, 몇 달 전에 새로 선출되신 라틴아메리카 출신 교황님의 첫 말씀이 이 사명을 재천명하신 뜻이 무엇일까 ‘새롭게 교회를 쇄신, 확장하라’시는 이 말씀이 거대한 중국의 15억 인구의 복음화를 간절히 바라시는 주님의 말씀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중국의 복음화’는 지금 눈으로, 귀로 보고 듣는 모든 이에게 내리시는 지상 과제일 것이다 하는 생각에 머물며 그 과제를 풀어야 할 북방선교는 한국교회라는 소리들을 간간히 들어 왔지만 과연 우리는 영적 힘이 있는가.. 현세가 주는 안일함에 이미 젖어버린 무디어진 감각, 물질만능의 가치관이 교회에 만연되어 있는데.. 많은 상념들이 스쳐 지나가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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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내부인데 아마도 휴게실인듯 작지만 정갈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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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100M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소 루르드 성모 동굴’은 루르드 성모 동굴을 모방하여 만든 성모 동굴인데, 실제 프랑스의 루르드 성모 동굴을 쏙 빼닮은 이 성모 동굴의 조성 역사를 들어보면 신기한 하느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이곳에 거주하는 어느 신부님이(아마 신학교 교수신부) 계속 꿈을 꾸었는데, 성모님께서 영상을 보여주시며 이 모양대로 여기에 성모 동굴을 조성하라고 하시며, 물이 솟는 샘을 보여주시더라는 것이었다. 이 신부님은 여러 검토를 한 후, 성모님의 계시임을 확신하고, 이곳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성모 동굴을 조성하였는데, 다 조성하고 보니, 이미 루르드 성지를 다녀온 신자가 말하기를 ‘루르드 성모 동굴’과 똑 같은 모양이다 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루르드 까지 갈 수없는 중국 신자들을 위하여 성모님께서 똑 같은 샘과 성모 경당을 만들어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번 순례의 목적인 중국교회 복음화의 실현을 위하여 작은 기도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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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에서 이도백하까지의 5시간의 긴 이동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옥수수밭, 감자밭 등은 작은 한반도에서 살아온 거리 개념을 뛰어 넘고 있었다. 누군가가 가이드에게 질문을 한다. 사람의 손으로 씨앗을 뿌리냐고.. 사람이 손으로 씨를 뿌리면 봄부터 가을까지 씨만 뿌려야 한다고.. 가이드의 답변이 재밌다. 백두산을 가기위해 이도백하로 가는 길은 흡사 우리나라 국도 여행을 하는듯한 나지막한 야산들의 생김새와 간간히 우리말의 표지판이 착각을 일으킬 만큼 참 많이 닮아 있음에 편안하고 친근감이 드는 자연이 살아있는 목가적인 농촌 풍경이었다. 또한 장백산(백두산) 아래의 이도백하 마을은 여행객들을 위한 식당, 숙소가 많은 곳으로 음식 종류와 맛은 영락없는 우리네 손맛이었다. 상추쌈과 재래식 고추장, 된장, 고소한 콩나물 맛이 입맛에 댕긴다고 너무 많이 먹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