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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
김기창(金基昶, 1913년 2월 18일 ~ 2001년 1월 23일)은 대한민국의 동양화가로, 호는 운보(雲甫), 운포(雲圃)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경성부 출생이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베드로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감리교인이었던 어머니 한윤명 여사의 손에 이끌려 교회의 유년 주일학교를 다녔으며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믿음을 가진 신자였다. 그런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신에게 선택받은 몸이었다”고 술회하였다. 한윤명 여사는 “찬송가를 잘 부르셨으며 때때로 나를 당신 옆에 앉혀 놓고 무릎을 꿇게 한 뒤 당시도 엎드려 조용하고 간절한 기도를 자주 올렸다.”고 교회생활을 밝히기도 했다. 한윤명 여사가 개성의 교사로 있었던 유년시절에는 북부예배당에 출석했으며, 서울로 상경한 이후로는 장로교회인 안국교회를 다니다가 1985년 막내딸 김수영이 수녀가 됨에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불렸다.]
김기창은 1913년 서울 운니동에서 당시 총독부 토지관리국 직원이던 아버지 김승환과 어머니 한윤명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여덟 살(승동보통학교 2학년)에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각을 상실한 후 언어 장애의 증세가 있어 수년간 휴학했다가 복학했다. 이때부터 김기창은 평생 동안 청각장애인으로 살게 되었다. 고열에 시달릴때 한방요법으로 외할머니가 해 준 인삼을 먹고 더 열이 올라 결국 귀가 멀게된 것이다. 이 부분은 김기창 본인이 쓴 수필에 잘 나와있다. '보약이라고 해서 외할머니가 인삼을 달여온 것을 먹고 나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열에 인삼이 나쁘다는 사실이라든지, 체질에 따라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보통학교 입학 이전까지의 유년기를 잠시 충청남도 공주에서 보내기도 했다.
어머니는 자식의 교육을 위해 손수 한글, 산수를 가르쳤고 김기창은 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운 기억이 있어 쉽게 이해했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재능이 있어, 선생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교실에서 혼자 교과서에 낙서를 하며 지냈다.
하지만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의 소개로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에게 동양화를 배워 1931년 조선미술대전에 출품하여 1940년까지 6회 입선, 특선 3회를 기록했다.
24살 때인 조선미술전람회(줄여서 ‘선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운보는 연4회 특선 경력으로 27살에 선전 추천작가가 되었는데, 이후로 광복 전까지 주로 일제의 내선일체 사상을 정당화하는 친일 활동이 이어졌다. 1942년에서 1944년까지 일제 말 친일 미술전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 1943년 8월 6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지에 실린 그림과 훈련병을 그린 〈총후병사〉,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경성일보사가 1944년 3월부터 7개월간 서울에서 연 ‘결전’ 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적진육박〉이 친일 작품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1940년 10월 조선남화연맹전, 1943년 1월 애국백인일수전람회를 통해 일제의 기금 모집에 협력하였다.
1943년에 아내 우향 박래현과 처음 만나서 3년간의 필담연애 끝에 1946년 결혼하였다.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교 한국 현대작가전에 초대 출품했다. 1960년 국전 초대작가가 되어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타이베이(台北)와 홍콩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 출품했고 이어 도쿄(東京)·마닐라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도 출품했다. 1962년 수도여자사범대학(훗날 세종대학교)으로 교직을 옮겼고 문화자유전에 출품했다. 1963년에 5월문예상 미술본상을 수상했고,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도 한국 대표로 출품했다. 1964년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도미(渡美), 1969년에 재차 도미하여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홍익대학교와 세종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에 취임하였고, 1984년에는 서울 역삼동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하였다.
대한민국 미술계에서 커다란 족적과 영향을 남긴 거장이다. 청각장애를 딛고 피나는 노력 끝에 화가가 된 인간승리의 주인공이지만 한편으로는 일제강점기 때 친일 활동을 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비판을 받는 등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한평생을 청각 장애인으로 살아왔기에 장애인에 대한 처우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한 장애인 미술지망생이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장애판정으로 진학을 못하자 격려의 말이 담긴 편지글을 보내고, 기부도 많이 했다.
말년에는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해 시인하고 공개적으로 고백, 과거행적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는 자세도 보였다.#
1995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조용히 요양하다 2001년 1월 23일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를 높이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사후인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미술 분야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출처 : 위키를 비롯한 여러곳
첫댓글 그림의 훌륭한 내용이 화가 본인의 실력도 있게지만 깊은 신앙의 표현이라고도 여겨집니다.
운보 김기창 화백
-감사합니다.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