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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학교 백남오 수필교실 수강 중
진등재 문학회 회원
hss580208@naver.com
수상 소감
십이월 중순의 한낮, 창문으로 들어온 따뜻한 햇살 아래 김장하느라 무채를 썰던 중, 에세이스트에서 신인상 당선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구나! 가벼운 흥분과 함께 떨림이 손끝으로 전해왔습니다.
초등학교 오 학년 때 경상남도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고전 읽기 대회 에 나가 상을 탄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종일 가슴이 두근댔던 저는 아마도 그때부터 문학에 대한 파란 싹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나는 결혼하고 삼십 대에 혼자가 되어 어린 자식 둘을 키워야 하는 생 \활인이 되었습니다. 삶이라는 현실 앞에 두 아이와 살아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끝이 없는 터널 같은 삶에 휘청거리기도 하면서 문학에 대한 꿈은 잠시 접었습니다.
조그만 밥집을 십여 년 하면서 두 아이를 키웠습니다. 아이들이 대학을 마치고 직장을 다닐 즈음, 백화점에서 여성복 판매직을 십여 년 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두 아이를 키워 출가시키고 나서야 저 자신을 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텅 빈 것 같은 제 삶에 그제야 접어두었던 문학의 꿈 이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평소에 꿈꾸었던 방송통신대에 입학하고. 그 이듬해 선배의 도움으로 수필 교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모든 게 운명이었는지 책쓰기 과정 반에 들어갔습니다. 지도교수인 백남오 교수님이 환대해 주셨고 문우님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저를 맞이했습니다. 수필을 공부하며 합평하는 분위 기가 저의 조그만 심장을 다시 두근거리게 했습니다. 책을 읽고, 글 쓰 는 것이 좋고 문학 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참 행복했습니다.
지도교수님은 말합니다. 문학이란 외딴집 농가의 식탁을 비추는 작은 등불과도 같아서 그 불빛은 수십 리 떨어진 길 잃은 사람에게 구원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고. 문학이 주는 힘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항상 초라하게 느꼈던 저에게 수필 교실 수업은 큰 용기와 꿈을 줍니다. 교수님의 가르침은 마침내 제게 신인상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열심히 더 잘하라는 말씀 같아서 부지런히 읽고, 수필을 공부하여 제 삶 을 아름답게 가꾸겠습니다.
오늘의 이 떨림을 갖게 해주신 에세이스트 관계자분과 모든게 미비한 저에게 수필을 지도해 주신 백남오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합평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평생교육원의 수필반 문우님들께도 고마움을 전하며, 마지막으로 온몸으로 용기를 준 가족에게 기쁜 마음을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인상작품
엄마의 콩잎
콩잎을 보면 그리움으로 가슴이 일렁인다. 어린 시절 자다가 기지개를 켜면 손에 툭 하고 부딪히는 것에 놀라 눈 을 뜨면 크고도 차가운 양철 대야가 버티고 있었다. 나지막하게 들리는 숨소리와 함께 엄마가 윗목에 혼자 앉아 계셨다. 아랫목이면 좀 더 따뜻 한 느낌으로 전해질 것 같은데 진한 그 무엇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낮에도 종일 일을 하셨을 텐데 밤이면 또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였다. 구부정한 엄마 뒷모습에 지친 듯한 손놀림, 늦가을 벼 수확을 끝내고 나면 언제나 하는 일이었다.
조그만 방에 올망졸망 일곱 자식을 눕혀놓고 호롱불을 사이에 둔 채 윗목에 앉아 큰 양철 대야에 가득 담긴 노란 콩잎을 개키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다가 일어나 어설픈 솜씨로 같이 개키다가 다시 꾸벅대는 나를 보고 엄마는 ‘그냥 자라’ 하시곤 눈길은 다시 양철 대야의 콩잎으로 간다. 누워서 보던 엄마의 뒷모습에는 가을 홑적삼으로 감춰진 가녀린 어깨가 어른거렸다.
어린 내 눈에 보이는 엄마의 생활은 눈만 뜨면 일이 기다리고 있었고, 잠자리에 들기까지 일 속에 파묻혀 지냈다. 잠도 아껴야 했던 그 무게를 나는 몰랐다. 당신의 그 수고로움으로 노란 콩잎김치를 즐겨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을. 젓갈과 고춧가루, 마늘, 통깨와 어우러진 콩잎김치는 보리밥이 담긴 숟가락에 착 달라붙어 입안을 향기롭게 만들었다. 쿰쿰한 콩잎만의 그 특유의 향기는 엄마의 땀 냄새와 묘하게 어우러져 코끝 을 찡하게 했다. 요즘 콩잎은 시설 하우스에도 재배하고 일반 밭에서도 심지만, 그 시절에는 모를 심고 난 직후에는 논두렁에 심었다.
모내기도 기계로 하는 요즘과는 달리 허리를 굽혀 못줄의 꽃눈에 맞춰 모를 심었다. 점심때가 다가오면 엄마는 흙투성이 옷 그대로 종종걸음으로 집에 와서 큰 대야 에 점심밥을 챙겨 이고 논으로 가셨다. 모내기가 끝나면 당신께서는 논 두렁에 오른발 뒤꿈치로 콕 찍어 콩 3알을 심고, 간격을 두고 또 콕 찍어 3알을 심고, 어둠이 내려올 때까지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굽혀 진 허리를 쭉 펴고 흙 묻은 손으로 땀을 훔치며 뒤돌아서는 당신의 얼 굴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힘든 삶 그 자체였다.
내가 어렸을 때 메주콩, 노란 콩이라고 부르던 콩은 지금은 백태, 대두 라고 부른다. 이 콩으로 간장과 된장을 만든다. 엄마는 우리 식생활에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재료였기에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심으셨나 보다. 시월 하순,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 이후부터 수확기가 되면 논두렁에 서서 어둠이 내릴 때까지 노랗게 물든 콩잎을 땄다. 엄마는 밤새 한 잎 한 잎 손바닥에 올려놓고 개키다가 어느 정도 양이 되면 볏짚으로 묶어 장독에 차곡차곡 넣고, 진하게 소금물을 만들어 붓고는 큰 돌멩이를 얹어 눌러 삭혔다. 그리고 조금씩 콩잎김치를 만들어 상에 올렸다.
나는 지금도 엄마의 콩잎김치 맛을 잊을 수 없어 삭힌 콩잎을 사러 시장엘 간다. 아니 엄마의 삶을 더듬고 싶어서이다. 요즘은 삭힌 콩잎을 거의 볼 수 없다. 어쩌다 시골 할머니가 삭혀온 콩잎을 파는 것을 볼 때 면, 재빠르게 사서 일부는 냉동실에 넣고 일부는 뜨거운 물에 데치고 씻어 몇 시간을 우린 뒤 양념한다. 그 옛날 엄마가 하던 방법보다 더 맛을 내려고 쪽파, 부추, 당근 등을 다져 한 겹, 한 겹 정성을 다한다. 하지만 그때의 맛을 느낄 수 없다. 아무리 공을 들여도 그런 맛이 나지 않는다. 콩잎김치를 딸에게 주었더니 외할머니 생각이 난단다. 나의 엄마와 콩잎은 떼어 놓을 수 없는, 우리들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서른네 살 젊은 시절, 나는 남편을 일찍 보내고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제주도에서 2년 반 동안 생활한 적이 있다.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방 한 칸 만들 수 없던 그때, 부모님께서는 같이 살자 하셨지만, 홀로 된 가난한 자식이 이웃의 시선을 받으면서 생활하는 것이 부모님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일 같아 스스로 용납되지 않았다. 조그마한 아파트라도 장만하여 아이들과 열심히 살아야 부모님을 떳떳하게 볼 수 있을 것 같 았다. 오로지 이 생각만으로 이모님의 주선으로 멀리 제주도에 가게 되 었다. 그때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은 어두웠다. 이 현실이 마치 당 신의 잘못인 양 돌아서서 고개를 숙이는 그 모습에 울컥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엄마의 눈빛을 뒤로 하고 제주행 비행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식당을 하는 이종 언니의 도움으로 두 아이를 데리고 식당 일을 하면서 힘든 나날을 보냈다. 제주도는 그 당시에 지역마다 관광특구로 지정 되어 새벽 2시까지 영업했다. 일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돌아오면 모로 누워 자거나 방 모서리에 기대어 잠든 아이를 볼 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산다는 게 이렇게도 힘든 일인가 싶었다. 그럴수록 아이들에게 든든한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졌다.
제주도 오일장에서 장을 보다 우연히 콩잎김치를 보았다. 고춧가루가 거의 묻지 않은 채로 자리돔과 버무려져 있는 그 모습은 엄마가 나를 제 주도로 보낼 때의 그 복잡했던 심정과 너무 닮아있어 나를 또 한 번 충 격에 빠뜨렸다. 그 이후로 시간이 나면 오일장으로 달려가 콩잎김치를 샀고, 엄마를 생각하며 나를 다독거렸다.
삶이 흐르는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는 것만 아니다. 바다의 성난 파도 처럼 휘몰아칠 때도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내가 원하지 않는 삶 이었는데도 시간은 나를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피할 수 없는 현실 은 나를 힘들게도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두 아이의 눈빛은 나를 더 강 한 엄마로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 든든하게 사회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두 아이는 나의 자존심이다.
냉동실 문을 열고 작년에 쟁여두었던 노란 콩잎을 꺼낸다. 한 겹 한 겹 양념을 묻혀가는 내 손이 가볍게 떨린다. 작고 샛노란 콩잎에는 엄마의 젊고 깨끗한 얼굴이 어린다.
심사평
황성숙의 「엄마의 콩잎」
백남오
글을 써야 하는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 첫 번째는 삶을 기록하는 일이다. 아무리 기쁘고 슬픈 사연들이 존재했다 할지라도 기록되지 않 는다면 그것 자체가 시간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기록함으 로써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또 하나의 새 로운 삶을 사는 것일 뿐만 아니라 치유의 효과까지 얻는다. 바로 문학 의 힘이자 문학을 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수필을 써야 하는 명분도 동 일 선상에 있는 것이라 본다. 이에 대한 해답을 황성숙의 수필이 보여준 다고 생각한다.
세상 그 누구의 삶인들 호락호락한 삶이 있겠는가마는 황성숙이 살 아온 인생 역정은 눈물 없이는 읽어 내려갈 수가 없다. 다음 작품의 한 부분을 보자.
서른네 살 젊은 시절, 나는 남편을 일찍 보내고 어린 두 아이를 데리 고 제주도에서 2년 반 동안 생활한 적이 있다.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방 한 칸 만들 수 없던 그때, 부모님께서는 같이 살자 하셨지만, 홀로 된 가난한 자식이 이웃의 시선을 받으면서 생활하는 것이 부모님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일 같아 스스로 용납되지 않았다. 조그마한 아 파트라도 장만하여 아이들과 열심히 살아야 부모님을 떳떳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로지 이 생각만으로 이모님의 주선으로 멀리 제주도에 가게 되었다. 그때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은 어두웠다. 이 현실이 마치 당신의 잘못인 양 돌아서서 고개를 숙이는 그 모습에 울컥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엄마의 눈빛을 뒤로 하고 제주행 비행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34세에 청상이 되어 어린 자식 두 명을 거느린 화자는 과연 어떻게 되 었을까. 이 풍진 세상에서 그는 과연 살아남기는 했을까. 그로부터 30년 이 더 지나 60대 중반을 넘기고 있는 지금 화자의 현실이 궁금하기만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는 성공적으로 살아남아 이렇게 작가의 길을 도전하고 있다. 도대체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살아온 그 길 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모질고 참혹했을 것이다. 당시, 마침 식당을 하는 이종 언니의 도움으로 두 아이를 데리고 식당 일 을 하면서 고난의 길은 시작되었다. 새벽 2시까지 일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돌아오면 방 모서리에 기대어 잠든 아이를 볼 때마다 이들을 지켜야 한다 는 강한 모성애가 발로되었다. 그 모진 삶을 이겨낸 힘은 결국 아이들에게 든든한 엄마가 되어야겠다는 신념이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삶이 흐르는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는 것만 아니다. 바다의 성난 파 도처럼 휘몰아칠 때도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내가 원하지 않 는 삶이었는데도 시간은 나를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피할 수 없 는 현실은 나를 힘들게도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두 아이의 눈빛은 나 를 더 강한 엄마로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 든든하게 사회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두 아이는 나의 자존심이다.
화자를 일으켜 세운 또 하나의 기둥은 엄마의 삶이었고, 그것은 콩잎으로 환치된다. 지금도 콩잎을 보면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일렁인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낮에 종일 일하고, 밤이면 콩잎을 손질하셨 다. 구부정한 뒷모습에 지친 듯한 손놀림으로 늦가을 벼 수확을 끝내 고 나면 언제나 콩잎김치를 만드셨다. 조그만 방에 올망졸망 일곱 자식 을 눕혀놓고 호롱불을 사이에 둔 채 윗목에 앉아 큰 양철 대야에 가득 담긴 노란 콩잎을 개키던 엄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자다가 일 어나 어설픈 솜씨로 같이 개키다가 꾸벅대는 화자를 보고 엄마는 ‘그냥 자라’ 하시고는 눈길은 다시 양철 대야의 콩잎으로 갔다. 누워서 보던 엄마의 뒷모습에는 가을 홑적삼으로 감춰진 가녀린 어깨가 어른거렸다. 그 결과로 화자는 지금 잔잔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 그 수많 은 고난을 극복했음이다. 아이들도 잘 자랐고 화자도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 이는 글을 쓰고 문학에 입문하면서 치유의 효과까지 누렸기 때문 이 아닐까 싶다.
수필은 삶의 체험을 통한 철학적 깨달음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기록의 차원을 넘어서는 단계이다. 그래야 문학 작품이 된다. 이 개념은, 수필가의 요건이 일차적으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사유와 형상화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형상화 속에는 문학적 역량이 잠재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 측면에서 황성숙의 작품은 이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본다. 우선 화자의 그러한 힘겨운 삶을 아주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풀어내어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는 점 이다. 감동이야말로 문학 작품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황성숙은 이미 작가로서의 충분한 수련을 거쳤다는 점이 작품 전체에서 묻어난다.
등단과 에세이스트 가족이 된 것을 축하드린다. 앞으로의 삶은 그동안 지난하게 살아왔던 수많은 삶의 편린을 문학 작품으로 풀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