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원문보기 글쓴이: 박희정
시인 |
시조집 |
출판사 |
수록지면 |
윤금초 |
『주몽의 하늘』 |
문학수첩, 2004 |
2013년 여름호 |
이우걸 |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발자국이여』 |
천년의 시작, 2009 |
2013년 가을호 |
유재영 |
『절반의 고요』 |
동학사, 2009 |
2013년 겨울호 |
이승은 |
『환한 적막』 |
동학사, 2007 |
2014년 봄호 |
박기섭 |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
만인사, 2003 |
2014년 여름호 |
이지엽 |
『북으로 가는 길』 |
고요아침, 2006 |
2014년 가을호 |
정수자 |
『허공우물』 |
천년의 시작, 2009 |
2014년 겨울호 |
고정국 |
『서울은 가짜다』 |
리토피아, 2003 |
2015년 봄호 |
박권숙 |
『홀씨들의 먼길』 |
고요아침, 2005 |
2015년 여름호 |
이종문 |
『봄날도 환한 봄날』 |
만인사, 2005 |
2015년 가을호 |
☐ 설문참여 시인 (등단 순)
정용국, 박희정, 유종인, 선안영, 손영희, 이송희, 이승현, 정혜숙, 이원식, 조성문, 김동인, 김남규, 김보람, 임채성, 박성민, 배우식, 변현상
--------------------------------------------
《나래시조》 특집 : 2000년대 출간 대표시조집 ④
이승은 『환한 적막』
메마른 습지에서 부르는 간절한 역설의 노래
정용국
1. 새 몸을 만드는 역정 - 역설
역설(逆說, paradox)은 비유 중 가장 강력한 처방이다. 의사가 사경을 헤매는 환자에게 하는 극단적 처치와 같은 것이다. 상대어, 또는 반대 개념의 이미지나 관념을 등장시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무너트리게 함으로써 나머지 하나를 강조하는 것이 역설의 기본 설계이다. 그러나 논리학에서의 언어유희와 같은 가설과 대치를 넘어 이승은의 시에서는 한결 따스하며 깊게 감성의 여린 곁가지들을 건드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시집 『환한 적막』은 제호의 강력한 역설에 힘입어 여성 특유의 에스프리와 잘 어우러진다. 또한 살가우면서도 간절한 음지의 언어들에게 더없이 큰 위무와 용기를 얹어주고 있는 다양한 모습들은 이승은 시의 제일 덕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환하다’와 ‘적막’이라는 상반 개념이 어우러져 도출해 내는 역설의 미학은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며 우울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의 부스러기 위에 잔 햇살처럼 내려 앉아 있다. 마치 맛있는 생크림이나 초콜릿이 단순한 밀가루 빵 덩어리를 감싸며 달콤하고 고소한 케이크를 완성해내는 마술과도 같이 거칠고 메마른 시어들을 가지고 끝내 따스하고 부드러운 여운을 이끌어 내는 모습은 이 시집의 백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은 시의 소재들은 대부분 우리 일상에서 쉽게 주어 들 수 있는 주변의 이야기들이다. 시사, 역사, 사회 등 무겁고 큰 주제를 많이 다루지 않으면서도 인간 의식의 내면을 속속들이 헤쳐 보이며 여성 특유의 음조를 앞세워 자상한 뉘앙스(nuance)를 행간에 묻어 두고 독자를 두세 번 멈칫거리게 한다. 그 ‘멈칫거림’이야말로 시인이 독자에게 속삭여 주는 밀어들에 해당한다.
밤새 불린 몸을 맷돌 구멍에 우겨넣는다
중쇠를 휘감으며 돌아가는 어처구니
옹이 져 앵돌아진 것도 걸쭉하게 풀리는 아침
가마솥에 부글대는 집착은 또 웬 것일까
퍼 담아 질펀한 허기 자루 속에 널브러질 때
밍밍한 변죽을 돌아 간간히 밴 눈물 맛
버릴 것 다 버리고 순한 이름 얻기까지
하마나 허물어질 듯 몽글몽글 맺는 몸을
따끈히 거둘 일이다, 목메는 일 없도록
-「순두부 - 몸」 전문
시인은 왜 ‘몸’이라는 부제를 달아 두었을까. “밤새 불린 몸”이 “몽글몽글 맺는 몸”으로 변하는 순두부 제조 과정을 통하여 “앵돌아진” 마음과 “부글대는 집착”이 넘쳐나는 세사를, “널브러진” 심신의 고단함과, 재미없고 고만고만하여 “밍밍한” 일상을, “목메는” 삶의 슬픔들을 풀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많은 ‘멈칫거림’을 유발하는 시어들은 대개 삶의 상처이고 은혈(隱穴)이게 마련인데 이승은은 이렇게 부정 성향을 가진 시어들을 도처에 투입하여 콩이 으깨지고 부글부글 끓어 “자루 속에 널브러”져서 순두부라는 새 몸을 만드는 것과 흡사하게 ‘긍정’의 새 이미지를 그려내는 높은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순두부 - 몸」에 도사리고 있는 부정 성향의 이미지들을 가려내 보면 “우겨넣는다, 앵돌아진, 부글대는 집착, 질펀한 허기, 널브러질, 밍밍한, 간간히 밴 눈물 맛, 하마나 허물어질, 목메는” 등이 있다. 그러나 마지막 수 종장을 “따끈히 거둘 일이다, 목메는 일 없도록”으로 마무리하며 역설로 대단원의 이미지를 일순에 뒤집어 놓고 만다. 콩이 우여곡절을 거쳐 전혀 다른 새 몸인 순두부로 거듭나는 것처럼 지난한 갈등 속에 처한 우리들의 신산하기 이를 데 없는 모진 삶을 풀어내고 감싸 안아 주는 것이다. 어느 새 그 고된 일상이 녹아내리고 먹음직스런 순두부 한 그릇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시집 『환한 적막』에 실려 있는 전편들의 이미지도 제호처럼 환하지 않다. 그러나 또 적막처럼 어둡고 깜깜하지 않은 이유는 위에 소개한 바 있는 역설의 화법 때문이다. 전편의 시제를 훑어보면 ‘마른’ (「마른 풀」, 「마른 추억」, 「마른 꽃대궁」), ‘아득한’ ‘어둔’ ‘흔들리는’ ‘그늘’ ‘어둠’ ‘적막’ ‘곰팡이’ ‘맨발’ 등이 주조를 이루며 아주 잔잔하게 독자와 소곤거리고 있다. 어머니와 꽃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도 큰 부분을 이루고 있는데 모두 아리고 가슴이 젖어오는 일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적막’ 같은 시집 전편을 읽고 났을 때의 느낌은 ‘환하다’에 가까운 감정에 기울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이 시집이 지니는 장점이라 할 수 있다.
2. 눌변의 갈피마다, 터진 앞섶의 마음마다 - 어머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만큼 그들이 가슴에 담고 있는 각기 다른 어머니의 모습들이 있을 것이고 어느 누구라도 애틋하고 눈가 짓무르는 사연을 담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교가 시대의 정신을 이끌었던 우리 사회에서의 ‘어머니’와 ‘여인’들의 삶은 희생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성 주류의 이면에서 농사, 가사, 출산과 육아 등의 고된 짐을 거의 혼자 짊어진 채 궁핍하고 어둡고 힘에 겨운 길을 꾸려온 우리 삶의 원천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아들보다는 딸들이 더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고 보듬는 것은 동병상련의 의식을 공유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20세기 전반부를 살았던 우리 시대의 어머니에게는 ‘현대-개화-평등’이라는 구호만 무성했고 사회 현실은 뒤따르지 못했던 후미진 세월이었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웠던 것이다. 21세기에 이르러서야 제법 여성이 세상의 또 다른 한 축이라는 기본 개념이 사회에 통념으로 자리 잡았고, 각 분야에서 그들의 힘이 강력하게 대두된 현실은 이제 시대적 대세라 하겠다.
혹한을 넘어오신 친정어머니가
하얀 봉투 하나를 수줍게 내미신다
귀퉁이 또박또박 쓰신, ‘사랑한 내 딸 행복해라.’
읽을수록 흐려지는 과거형의 그 한마디
눌변의 갈피마다 멈칫대는 흑백 필름
눈자위 마른 풀 같다, 곱게 낡은 사진 한 장
- 「마른 풀」 전문
어머니 그 앞섶의 애 터진 마음들이
사월 언저리에 꽃 무덤을 이루었네
꽃 속에 함께 묻혔을 못다 지운 시간이여.
- 「동백꽃」 전문
메마른 모랫벌의 시간을 건너느라
여울에 떠밀려간 꿈 조각을 건지느라
이렇게 까슬해지고 차가워진 손인 것을.
- 「명주고름」 부분
“혹한을 넘어 오신” “애 터진 마음들이” “메마른 모랫벌의 시간” 등의 구절들이 바로 20세기 전반부 어머니들이 건너 온 바로 그 모진 세월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들의 삶은 “눌변의 갈피마다 멈칫대는 흑백필름” “못 다 지운 시간” “까슬해지고 차가워진 손”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가 이러한 통념의 자리에서 멈추었다면 이승은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눈자위 마른 풀 같다, 곱게 낡은 사진 한 장”이라고 종장을 거두어들인 모습은 얼마나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역설인가. ‘마른 풀’이 일순에 ‘곱게 낡은’의 힘을 빌어서 가족이 어깨를 비비고 동그랗게 모여 찍었을 ‘사진 한 장’으로 발화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한 내 딸 행복해라.’에는 비록 삶의 종점에 다다른 듯 “과거형의 그 한 마디”였고 ‘당신’은 비록 행복하지 못하였다는 진한 소회가 담겨 있다 하더라도 딸은 꼭 행복할 것이라는 강한 계시와 바람과 통한이 모두 엉겨있는 한 마디라 할 수 있겠다.
“사월 언저리에 꽃 무덤을 이루었네 ”라는 구절이 이 작품의 화두이다. 초장과 종장에 이것을 뒷받침 하는 안타까움이 앞뒤로 서술되고 있지만 결국 “꽃 무덤”에 묻혀 붉고 화려한 동백꽃의 색다른 변신으로 돌아가 결코 외롭고 슬프지 않은 어머니의 삶으로 변하게 직조해냈다. “앞섶의 애 터진 마음”과 “못다 지운 시간”들은 화려하면서도 수굿한 동백꽃잎으로 인해 화려한 예단이 덮힌 귀하고 따스한 ‘꽃 무덤’으로 변했다.
3. 가장 낮은 곳, 생물의 자리에서 보는 삶 - 꽃
시집 전편 중 한 장이 온통 꽃들의 전언으로 채워져 있다. 시인이 불러 온 꽃들은 저마다 제몫의 색깔과 생명력으로 우리들의 삶에 스며들어 감성을 추스르게 하고 기쁨을 전하고 더 나아가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고귀한 것들이다. 중요한 사실은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목숨들을 살려내는 식물들은 생명의 원천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시인은 이들의 특장을 잘 갈무리하여 생의 굽이에 접목하고 인간과 상통할 수 있게 속 깊은 대화를 나누고 드러낸다.
햇살의 앙살거림도 슬쩍 넘겨받는 목련. -「저 꽃처럼」 부분
피 묻은 마음 한 자락 끌어안고 피는 것아. -「홍매화」 부분
숨죽인 채 엉겨 붙는 봄밤의 노란 벌떼 -「산수유」 부분
멋쩍은 작별의 말을 점점이 놓고 갔구나. -「앵두꽃」 부분
열 손톱 울음 울어 꽃점 찍어 놓았구나 -「봉숭아꽃」 부분
황사에 꽃샘바람 애 터지게 견디더니 봄밤도 사무쳤는지//
가난한 시간일수록 외려 따스한 체온
- 「벛꽃 앞에서」 부분
누군가 툭 치면서 안부라도 건네올 듯/
그 속에 타다가 스러진 내 손금이 보이네.
-「제비꽃 하루」 부분
초록의 몸부림 없이/ 피었다 지는 꽃 없다/ 텅 빈 씨방, 그 충만! -「꽃 진 자리」 부분
기침 끝/ 삭여 낸 피멍만/ 온 산천에 남습니다. -「단풍」 부분
날카롭게 모가 서는 언약의 유리 조각에//
메마른 혀를 다친다, 오래고 먼 맹세의 봄
-「복사꽃 그늘」 부분
이승은 시의 다른 장점 하나는 모든 작품의 높낮이가 ‘높은 수준에서 고르다’는 점이다. 여기 꽃들을 모아 둔 제 2장의 시를 보아도 어느 것 하나 처지고 늘어지는 것들을 찾기 힘들다. 균일한 수준을 유지하려면 늘 시를 안고 살아야 한다. 그것을 다시 품고 고르고 새 눈길로 돌아보는 쉼 없는 적공이 필요한 것이어서 그의 작업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여기 부분을 제시한 꽃 시편들에서는 우리들 삶의 여울목들이 곳곳에 드러난다. 꽃의 객관과 시인의 주관을 살갑게 추슬러서 마치 산적을 꼬치에 꿰듯 바지런히 주워 담은 시어의 애틋함도 그러려니와 상징의 정점에 애달프게 매달아 둔 삶의 흔적들은 악보에 두 선율이 어울려 합창의 진수를 뽑아내는 조화의 극점을 통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앙살거림도-「목련」” “피 묻은 마음 한 자락-홍매화” “엉겨 붙는 봄밤의 노란 벌떼-「산수유」” “멋쩍은 작별의 말-「앵두꽃」” “열 손톱 울음 울어-「봉숭아꽃」” 들의 비유는 바로 수없는 탁마의 결과물들이라 하겠다. 간절함과 열기가 없이는 도저히 가져올 수 없는 지난한 작업이다. 제비꽃, 단풍, 복사꽃들이 등장하는 시편들도 시인이 제시하고 강조하는 강력한 상징과 비유의 힘으로 각각 드리우는 그늘의 영역이 서늘하고 시원하다. “스러진 내 손금” “삭여 낸 피멍” “날카롭게 모가 서는 언약”들은 꽃들과 세파가 직조해낸 결이 고운 삶의 이면이라 할 수 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치켜뜬 하늘을 향해
맵싸한 울분을 사뭇 토해 내더니
까맣게 쏟아 놓고 마는
몇 마디 목숨의 언어.
- 「파꽃」 전문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다. 동물로 말하면 생식기라 할 수 있다. 다만 벌이나 나비, 곤충 등의 도움을 얻기 위해 화려하고 진한 향기를 뿜어내어 수정을 유도하는 것인데 그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함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꽃에만 집착한다.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즐길 뿐 식물 본연의 생식에는 관심이 없다. 식물의 꽃들은 각기 자기 종족의 번식에 맞도록 다양한 꽃과 열매를 맺는다. 위 시에 등장하는 파는 여러해살이 풀이어서 씨를 뿌려 번식하기도 하지만 뿌리를 다시 땅에 묻어 다년초로 길러서 음용한다. 파는 꽃대가 굵고 실하게 올라와 굵고 둥글게 꽃을 피운다. 그 사이사이에 새까만 씨를 많이 맺게 되는데 바로 이 과정이 시의 얼개이다. 파의 자극적인 맛을 강하고 거칠게 표현하며 격분하거나 열정에 가득한 투사의 면모로 등장시킨다. 까만 씨= “목숨의 언어”로 표현하여 강박한 열정의 결과로 드러내고 있다. 파의 맛과 향을 ‘인간이 어느 목적을 향해 펼치는 열정의 파열음’으로 그려 낸 모습은 마치 한 점으로 떨어지던 낙하산이 확 날개를 펼치는 순간을 연상하게 만들며 단숨에 절정을 이루고 끝을 맺는다. 파꽃의 속성을 인간의 열정처럼 피워내는 상징의 확장과 연상의 증속이 가파르고 힘차서 독자의 감정도 신속하게 펼쳐지며 파의 강력한 이미지에 휩싸이는 신선함을 주는 짧은 시이다.
4. ‘메마른 습지’와 ‘환한 적막’의 노래 - 희망
이승은이 즐겨 쓰는 시어는 대부분 부정과 음지의 영역이 많다. 인간의 일상이 고해의 바다이고 삶은 즐겁고 가능한 일보다는 힘들고 이룰 수 없는 일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보면 당연한 결과겠지만 많은 시인들은 그래도 희망가를 부른다. 굳이 어두운 면을 피하고 돌아가는 것을 시의 사명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승은은 어둡고 버거운 삶의 정면을 직시하고 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내 그가 바라보는 것은 그 어둠을 뚫고 힘든 언덕을 넘어 우리가 꿈꾸고 가야 할 목적지 근처에 닿아 있다. 어둠이 없다면 먼동의 의미도 느낄 수 없듯이 힘들고 거친 삶을 이겨내지 않고 어찌 평안과 희망에 가 닿을 수 있겠는가를 생각할 때 그의 시는 살아난다. “메마른” “처연히” “겨워하며” “들끓었던” “파열음이” “적막한” 등의 시어들은 우리가 지고 넘어가야 할 삶의 무게들이다.
바다에도 길은 있다. 물거품이 놓치는 길
마라도 발치쯤서 앞섶 다시 여미고
뒤채는 파도길 따라 새경 받으러 오는 봄
어멍도 아방도 없는 애기업개 홀로 남아
배 떠난 곳 바라보다 할 수 없이 꽃이 된 꽃
햇귀에 새눈 비비는 바위틈의 백년초
가파도 등에 업힌 맨발의 봄도 있다
찌르르 차오르는 젖줄을 부여잡은 채
보채다 보채다 못해 속 품 열어 보인다
헤일수록 헛된 꿈은 난바다에 묻어두고
문지방 넘어오는 정이월 새 날빛이여
서귀포 눈썹에 얹힌 섶섬 문섬 범섬이여
- 「맨발로 오는 봄」 전문
제주도는 화산섬이어서 교통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배고픔을 극복하는 일이 어려웠지만 오히려 절해고도였을 시절이 더 평화로웠다. 중국 대륙에 접근하기 용이하고 바다로 나가기 좋은 입지 때문에 제주는 오히려 비극의 역사를 안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 운명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몽고의 침탈에서부터 일제 강점기는 물론, 국제항의 탈을 쓰고 강정에 건설 중인 미 항공모함 기지가 제주의 현주소이다. 삼별초의 최종 항거지였고 유배지였으며 4․3 사건과 5․16 이후 민간인 강제 동원의 비극이 펼쳐진 배후에도 섬의 운명은 잘 드러난다 할 수 있다. 시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시를 이해하려면 제주의 슬픈 역사도 하나의 배경이 되는 것이다.
이런 섬 제주도에 봄이 오는데 하필이면 “맨발로” 오고 있다니 시제가 분위기를 압도한다. 봄도 “새경 받으러 오는” 각박한 상황, 백년초도 입지가 열악한 “바위틈”에 피어 있다. 이렇게 네 수 가운데 두 수까지는 제주의 가파른 상황이 전개 되다가 “젖줄을 부여잡”고 “속 품을 열어 보인다” 더 나아가 마지막 수에서는 “헛된 꿈은 난바다에 묻어두고” “정이월 새 날빛”이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훤하다. 종장의 구어투가 마음에 조금 걸리지만 제주도가 자식처럼 거느리고 있는 “섶섬, 문섬, 범섬”을 호명하며 마치 신의 자비가 꽃처럼 날리게 한 장면은 이승은 시의 좋은 전범이라 할 수 있겠다.
‘메마른 습지’와 ‘환한 적막’을 소제목으로 적어 글을 마무리하는 의도는 이승은 시조의 역설 화법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메마른’이 ‘습지’를 만나고 ‘적막’이 ‘환한’을 만나서 전세를 뒤집어 내는 것처럼 시집의 어둡고 음지에 깃든 시어들은 시인의 의지대로 환하게 피어나고 있다. 사람이 역경을 거치지 않고 목표를 이루기 어렵듯 도처에 무수하게 박혀 있는 어두운 시어들이 시인의 놀라운 힘으로 축제의 장에 놓여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정용국
경기 양주 출생. 2001년 시조세계로 등단. 이호우,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제1회) 수상. 시집 <명왕성은 있다> 외
-----------------------------------------------------------------------------------------------------
심금(心琴)을 타는 적막들
유종인
마음에 무슨 악기를 들이면 좋을까 싶은 날들이 있다. 요즘의 궁금함은 있는 듯 없는 허기와 말이 되지 못한 소리들, 어떤 인기척일 때가 있거나 까무룩 초저녁잠에 묻혀버리는 간밤의 기억 같은 것으로 소소해지기 십상이다. 천상 악기치(樂器痴)인 내게 그나마 욕심을 부릴 요량인 것이 늘상 따로이 들러 메거나 꿰차지 않아도 되는 이 어리석은 마음의 목청인가 싶기도 하다. 너나없이 다 가졌다. 그럼에도 다 다르고 두동지다. 동색(同色)인가 싶은데 각색(各色)이어서 넘나들이 하는 맛이 있다. 더러 툴툴거리며 등짝을 보이다가도 서로 낯을 깨며 웃기도 한다. 다 마음이 얼러낸 악보 없는 소절들이라 여긴다. 그러니 이 악기는 부리는 양반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바람소리가 나고 몸에 사철 푸성귀와 숲을 짓는 겨를을 갖는다.
무현금(無絃琴)이 들어앉은 줄 몰랐더니, 그걸 들어앉혀 적적한 무릎에 애인의 머리를 얹혀주듯 했으면 싶은 날들이 있다. 이승은에게 있어 이런 무현금의 위치는 마음에 얹히는 대상들의 내밀한 사연과 그 분위기를 고르는 서정적 눈썰미에서 도드라진다. 즉 그녀의 마음에 얹혀지는 여러 시적 대상, 즉 상관물(相關物)들은 오래 숙고의 무의식적 바탕과 즉물적 감각의 정서가 어울리면서 자아내는 무현(無絃)의 울림 상태를 곧잘 얼러낸다. 그런 마음의 가만한 울림 상태를 진작하는 것이 시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시적 발흥을 위한 정서적 소요(逍遙)인 것이다. 감각과 정서가 대상과 내밀하게 갈마드는 지경에서야 그녀다운 시구(詩句)가 틈입(闖入)하듯 가만히 마음에서 용출하는 것은 당연하다.
제목부터 놓고 보자면 적막은 자연의 상태이면서 심정의 상태로 일정한 정서의 그늘과 서슬을 갖는다. 화자가 보는 현상이 악기로 마음의 무릎에 안치려면 그 대상의 갖는 인상을 화자의 고유한 빛깔의 사유적 감각으로 더듬어내고 혹은 골라내는 탄주(彈奏) 속에서 열린다. 이는 그녀의 심정이 반응하는 서정의 촉발과과 일정한 관련을 갖는다.
환한 것과 적막한 것은 같은 계열인가, 싶은데 좀 버성긴다. 그런데 다시 들여다보니 적막은, 단지 어웅한 적막은 단색(單色)이자 단선(單線)이요, 환한 가운데 적막은 생기와 품(品)이 즐거이 더께진다.
이 환한 것의 적막은 ‘번지는’ 것으로서의 가만한 열기를 품는다. 서정의 습기와 심정적 되물음 속에 그의 시들은 아득하게 저물려는 우리들의 여러 온정들을 가만히 우려내듯 번져낸다. 호명(呼名)하지 않으면 그 아슴한 것들의 분위기는 이내 허공중에 풀어지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듯하다. 있었는가 싶게 맥이 빠져가는 것들에 다시 습기와 온도와 서정의 입김을 불어넣는다. 이 활성(活性)은 생의 막막한 가운데 화자의 흉금을 세상 밖으로 얼러내는 보이지 않는 견인차이기도 하다. 스스로 녹고 눅지고 번지지 않으면 존재는 그저 하나의 생물학적 단자(單子) 이상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그의 서정엔 드리워져 있다. 여럿의 하나, 하나의 여럿을 위한 이 서정의 땅자리에는 늘 번짐의 무늬가 드리워지기 마련이다. 즉 단수(單數)적 복수(複數)의 정서로 자리매김이 가능한 것은 이 번짐의 효과를 그녀가 심정적으로 풀어내려는 중년의 열망과 그 나눔의 분위기를 품고 있기에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중년의 그녀에게 드리운 정서적 완숙미는 삶의 고됨과 원숙, 생활의 분란함과 원만함 등이 고루 스미고 갈마들면서 일정한 서정적 아우라(aura)를 시각화(視覺化)했다고 볼 수 있다.
참았다 터뜨린 울음, 그렇게 가을은 와서/ 물드는 잎새마다 잠귀를 열어 놓고/ 성깃한 가지 사이로 그렁그렁 별이 뜬다.
속절없이 차려 놓은 저 가을의 제물이여/ 다 못 지운 바람벽의 녹슨 못자국이여 / 서둘러 꽃잎 받느라 잠시 환한 손바닥이여.
-「마른 추억」부분
이승은에게 있어 “아득한” 것은 먼 것이 아니라 가까운 것이다. 아니 먼 것이면서 가까운 것이고, 다시 고쳐 말하면 먼 것인데 가까운 바탕으로 삼고 싶은 눈길이 배접(褙接)돼 있다. 그것들을 호명하는 눈자위는 마르면서 젖어있고 그 목청은 허스키하게 메마르면서도 습습하다. 아득한 것은 단순히 어령칙한 옛일로 치부할 수 없는 “행간”이 배어있다. 그것은 사물과 시간과 기억 속에, 혹은 무심히 관성적으로 흘려버린 관계 속에 갈마들어 있다. 역설적이게도 잊혀지지 않은 추억은 마른 것이어야 한다. 드라이한 것이어야 오래 썩지 않고 아니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그 “다 못 지운 바람벽의 녹슨 못자국”으로 오롯하다. 앞서 ‘번짐’의 심정적 진행이나 확산은 ‘아득함’을 현재적인 것으로 나름 손쉽게 호출하는 정서적 기제를 통해서이다. 넓은 의미의 시간이 단선적인 일회성으로 소멸을 강구할 때 그의 시편을 역린(逆鱗)의 애잔한 눈빛과 목청으로 되새김하니, 그 소슬한 아름다움이 슬그머니 당겨진다. 그럴 때 담담한 슬픔은 기억을 넘어 현재적 자아를 환기시키는데, 그것은 인간의 기억이 결코 과거의 전유물만이 아니라 오늘의 실존을 일깨우는 촉매가 된다는 사실이다. 결국 삶은 유한한 시간의 굴레지만 ‘추억’이라는 되새김질 속에 실감(實感)을 향유하는 기억의 서정을 쟁이게 된다. 그걸 되받아 안는 자에게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현존이고, 하나의 작은 실물로 돌올해지고 서늘해지는 ‘환한 손바닥’이다. 아련한 슬픔을 재촉하듯 ‘잠시 환한’ 마음의 모서리가 어쩌면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을 호명할 때 환청이나 환각처럼 우리들의 시간은 상실을 넘어 여러 겹의 마음살이를 가지게 된다.
다 바래고 늘어진 빨랫줄의 백로 아침/ 허옇게 헹구어 낸 중년의 시간을 널면/ 받쳐 둔 바지랑대 끝으로 슬그머니 듣는 비.
맨발의 빗금으로 살금살금 꽃밭을 건너/ 지레 질러 온 가을이 던져 놓은 메모 쪽지/ 스미듯 눈물이 번져 끝내 다는 못 읽고.
한 손에 꽉 움켜쥔 고무공 같은 이것/ 다른 것을 쥘라치면 어차피 놓을 수밖에/ 마음은 이리 빤한데 차마 펼 수가 없구나.
그 여름 잘못 간 길을 지우려고 오시는가/ 잠깐 한눈팔다 놓친 길목 어디쯤을 / 온종일 지척거리며 울먹이며 바장이네.
-「가을 발자국」전문
그 시간의 현재형은 과거와 맞닿아 있는 “늘어진 빨랫줄”로 “슬그머니 듣는 비”로 번져있다. 현재진행형의 서정적 감각은 과거완료형의 바통을 받아 끝맺음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스미듯” “번져” 오는 연쇄와 파문의 곡절로 온다. 시간의 발자국은 과거의 것일 수밖에 없지만 도리어 그 발자국을 재장구치듯 보러가는 회고의 되새김질로 현재는 “지척거리며” 또 질척거리게 되는 젖은 길이기도 하다.
이승은의 시편들은 심정적 결로(結露)를 받아야만 그 서정의 활기와 늡늡합을 공급받는 경로를 능란하게 열어내는 속성을 드리웠다. 마치 도배사가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의 도배지를 일정한 수치의 틀 안에서 재단하더라도 한 공간의 벽을 치장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 풀을 바르듯이, 그녀의 시조가 서정적 활성을 갖는 것은 나름의 서정적 번짐, 그 내밀한 습기(濕氣)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이런 습습한 기운은 결코 일방적인 감상만의 것이 아니라 세상에 편만해 있는 현상을 자기화(自己化)하는 데서 얼러진다. 여기에 서정적 시선이 주된 동력으로 혹은 견인차로 사물과 풍경에 감정적 습윤(濕潤)을 제공하게 된다. 그래서 “온종일 지척거리며 울먹이며 바장이”는 가을은 가을만의 것이 아니라 화자의 심정적 동화(同化) 속에서 얼러지는 속종의 묘사로도 마뜩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 여름 잘못 간 길을 지우려고 오시는가”라는 삶의 정황으로 곧잘 계절적 현상은 오버랩되는 바도 이와 유사한 경로라 할 수 있다.
흙바람 속에서도 장미는 떼로 핀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망월동 등성이에/ 초록이 연방 뱉어 낸 가시들이 떠다닌다.
꽃송이는 꽃송이대로 타다 만 불씨 같고/ 다 못 지운 눈물 자국 그 얼룩을 읽다 보면/ 아무는 가장귀마다 다시 삐죽, 돋는 그것.
술렁이는 봄날 어디 산목숨도 힘겹구나/ 신경의 푸른 줄기를 더듬어 짚는 동안/ 단숨에 허공을 뚫고 와 가려운 등에 꽂힌다.
-「가시」전문
주로 개인적 서정의 품에서 능놀던 그녀의 시선이 역사적 사실과 부대낄 때는 눈시울이 젖어오는 아픈 서정으로 촉발된다. 「가시」는 그런 측면에서 생물학적인 식물의 가시와 서정적 삐침이 서늘한 가시와 역사적 아픔의 사실로서의 가시가 서로 갈마든다. 개인적 서정으로서의 가시와 역사적 서사의 상징으로서의 가시가 길항(拮抗)하는 이런 넘나듦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개인적 내면화라는 공식에만 그치지 않는다. 즉 아픈 현대사를 일별하는 통시성(通時性)과 그걸 되새김질하는 현재화된 내면의 공시성(共時性)이 “술렁이는 봄날” 의 “산목숨도 힘겹구나”라는 정서적 통회(痛悔)를 낳는다. 그런 의미에서 ‘가시’는 가학적인 공격성의 이미지가 아니라 삶을 견디는 한 존재방식의 뉘앙스를 가져온다. “초록이 연방 뱉어 낸 가시들” 이 “떠다닌다”’라고 언술하는 부분에서 가시가 가진 생래적인 고착성이나 완고성은 일정 부분 와해되며 존재의 통점(痛點)으로 전이되는 맛을 보여준다.
식탁 한 귀퉁이 눈길도 방치된 그 곳/ 식빵 몇 조각이 비닐 속에 지쳐 있다/ 갈수록 까칠해지는 삼킨 말의 몇 마디가.
울음을 참는 것도 이제는 모든 헛일!/ 보란 듯이 드러나는 얼룩의 꽃점들을/ 퍼렇게 감싸 안으며 헌 살을 버리는 중,
-「푸른곰팡이」전문
견디는 일이 존재의 내밀한 완성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그 견딤이 허망한 것으로 치부될 때는 서글프다. 서글픔조차 허망할 때는 무언가 다른 것이 와야 한다. 울음 다음에 오는 것, 그것은 단순한 넋두리만이 아닐 것이다. “헌 살”을 버리는 것은 새로운 존재의 분위기를 안치려는 나름의 몸부림에 가깝다. 아, 그렇다. 울음도 무언가를 간구하는 말 이전의 말이 아니었던가. 그것이 비록 빵을 부식시키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빵을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물질은 또 다른 물질의 상태를 꿈꾸고 넘보는 처연한 마음의 도정(途程)을 품는다. 여기에 궁구(窮究)하는 서정의 기미(機微)가 엿보인다 하겠다. 비록 ‘얼룩의 꽃점들’ 일망정 그것을 감싸 안는 퍼런 곰팡이의 잠식(蠶食)은 빵을 다른 무엇으로 전환하는 흐름의 물질로 이해하게 한다. 존재는 그렇다. 흐름을 타지 않는 존재는 실존이 박약할 수밖에 없다. 이승은에게 있어서의 서정은 본질적인 기율이기도 하지만 존재의 활성을 열어내는 마음의 탄주(彈奏)로 귀착된다. 그것은 ‘헌 살’ 을 버리는 상실의 개념만이 아니라 미구(未久)에 닥쳐올 새 살을 마음에 드리우려는 실존의 갈망과 결을 같이 한다.
총총총/ 깨금발로
건너간/ 풋냄새가
터지는/ 실핏줄마냥
싸아 하니/ 길을 낸다
저물녘/ 냇물이 삼킨
그 몇 마디/ 못다 한 말.
-「물수제비」전문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인에게 있어 존재의 활성(活性)은, 현실적인 것의 상실과 소멸의 기운, 실존적 소외의 환경을 직시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보편적인 숨탄것들의 소멸의 징후와 상실의 여줄가리들 속에서 더 오롯한 말의 정서와 여운을 품는다. 그것은 “저물녘/냇물이 삼”켜버린 돌멩이의 어찌할 수 없는 익수(溺水)의 상황 속에서도 마음에 잠기듯 오히려 떠오르는 “못다 한 말”의 가만한 되새김과 그 여운의 심줄을 고르는[彈] 연주로 옮아간다. 번연히 드러나는 말의 뻔뻔스러움은 사물의 겉모습이 주는 무미건조함과 닿아있다. 이승은에게 있어 적막은 시집 전편에 놓인 다양한 시편들의 심정적 바탕으로 바림 돼 있는 분위기다. 화려한 채색을 지닌 숨탄것들과 칙칙한 우울한 풍광의 언저리, 장삼이사 누구나 사소하게 겪어갈 수밖에 없는 일상의 파노라마를 열정적으로 호흡하고 삭힌 후에 드리워지는 ‘적막’은 외재적(外在的)인 상태가 아니라 시인의 마음속에 갈마든 심정적 감각적 발흥(發興)의 내연(內延)으로 겹을 이룬다. 들여다보라, 『환한 적막』속에 얼마나 “못다 한 말”이 입도 없이 말을 주워섬기고 있는가를. 심정에서 감각으로, 감각에서 심정으로, 사유에서 운치로 각각 혹은 서로 너나들이하며 얼러내는 시조의 분위기는 이 시집 도처에서 쓸쓸하게 혹은 열정적 훈기를 품고 도드라진다. 지나쳐버린 마음도 되돌려 그 쓸쓸한 등짝을 더듬으니 거기 예전에 보지 못한 가만한 노래의 숨결이 있었음을 알겠다.
마음에 오랜 사막을 들여놓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그 사막의 모래를 다 퍼내라 할 수는 없는 법, 사막에 장미가 기묘한 조화로 어울리듯이 적막을 환하게 밝히는 것도 이런 전차가 아닌가 싶다. 돌멩이를 쥐었거든 돌멩이의 노래가 가만히 스민 그 거칠음을 밝히고 반기는 심현(心絃)의 떨림이 이승은의 시편들에는 여전히 저물지 않고 품을 가진다. 연주하는 자, 마음을 고르는 자에게 주변이 갑자기 환해지는 순간은 괜한 햇빛의 들이침만은 아닐 것이다. “싸아하니/ 길을 낸다”니 기껍게 바라보게 된다. 마음을 탄주하는 자, 스스로 무언가를 밝히는 실존의 서정적 견자(見者)인 것이다.
유종인
96년 <문예중앙> 시신인상, 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당선, 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당선. 시조집 『얼굴을 더듬다』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