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만난 건 제대를 하고
이렇다할 직업없이 부모님과 함께 지내고 있을 때였다.
살림집에 가게가 딸려있는 건물에서
조그마한 장사를 하고 계시는 부모님이 가끔 자릴 비울 때면
대신 물건을 팔면서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1973년
당시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이곳은 아침저녁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제법 장사도 됐다.
지금은 마트가 생겨 재래시장이 다 죽었지만 당시엔 자가용 승용차가 없던 시절이라
가까운 곳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해 쓰는 편이었다.
이곳 선유리에는
손님 중 양공주라고 불리는 미군을 상대로 현지처 노릇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젊은 처자들이 많았다.
1972년 겨울 제대를 하고 이듬해 봄 1973년
우리 가게에서 그런 부류의 한 아가씨를 만나는데...
많은 손님 중에 유독 그 아가씨에게 눈이 간 것은 너무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서너번 정도 내 가게를 들렸을 때 나이를 물어봤다.
-그건 왜 물어요?-라고
면박이라도 하면 어쩌지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용기를 내 물었다.
그녀는 서슴없이
열여덟(18세)라고 대답했다.
경상도 사투리중에도 부산쪽 말씨 같다는 내말에 그녀는
우째 그걸 알았어요 라고 물었다.
나도 거기서 왔으니까요...라고 했을 때
친밀감을 갖는 것 같았다.
그런일이 있은 뒤 한참이 지났다.
안쪽 살림집에 있는 나를 찾는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가게로 나왔을 때
그녀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저씨 나 또 왔어...-
의례 물건을 사러 온 것으로 알고
뭐 필요하신 거라도...라며 물었을 때
오늘은 사러 온게 아니고 부탁이 있어 왔다며 들어 줄 수있냐고 물었다.
이 동네 살면서 동네 밖으러 한번도 나가 본 적이 없는데...
혼자 갈려해도 어디가 어딘 줄 몰라 그런다며
시간 좀 내 구경 좀 시켜주면 고맙겠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달러지폐를 한웅큼을 손에 쥐고 어디서 우리나라돈으로 바꾸면 되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매번 물건을 살 땐 꼭 달러로 지불했었다.
20불짜리가 몇장은 되어 보였다.
당시 20달러면 거금이었다.
30장 정도만 있으면 우리 가게집 같은 걸 살 수있는 돈이었다.
특별히 할 일도 없이 빈둥대며 부모님 눈치보며 있는 나로선 나쁠 것도 없겠다 싶어 응하기로 했다.
이렇다할 옷도 변변히 갖춰진 게 없다보니
유행지난 통 넓은바지와 푸른색 빛바랜 점퍼차림이 꼴 사나웠지만
그녀가 하자는 대로 따라 나섰다.
비포장 도로에
마이크로 버스라고 지금의 미니버스 크기의
작은 차가 시내버스 역활을 하며 다니던 시절이다.
시간도 들죽날쭉 언제 올지 모르는 차를 기다릴 게 뭐냐며
택시를 세운다.
검은색 아리랑택시다.
이거 비싼건데...미군 들만타고 다니는 거야....
내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용주골 저수지까지 얼마냐 묻자마자 먼저 선불을 건넨다.
-보트 저을 줄 아세요-란다.
송도바닷가에서 너만할 때 타 봤지...
-고2때요?-
그쯤이지...
-좋았겠다...사귀는 여학생하고...맞지요?-
별걸 다 알려고 해...한데 학교는 우짜고 왔노?
18세면 한참 학교를 다닐 나이다.
-2학년 다니다 .....-
학교는
-혜화여고-
공부는 되게 못했는가 봬...2차가 뭐꼬?
-아저씨 학교는 뭐2차 아녜요?-
우리학교는 우째 알았노?
-지난번에 말했잖아요...오빠가.....-
그랬던가? 근데 갑자기 아저씨에서 오빠고?
-여덟살(8)차인 데 오빠면 어때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소리가'오빠'다.
-와요?-
여동생 둘이 한데 질렸삤다.
-동생둘이 말 안들어요?-
그래 너 처럼 아빠엄마 말 안듣는 것 같다.
(앗! 실수 그녀의 사생활을 건든 것같다.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당황스럽다.
아니나 달라 순간 얼굴 빛이 달라지며 다리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하다 )
-나 집에 돌아 갈래요...배 돌려주세요 -
배를 출발 장소에 대자 마자 그녀는 손살같이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그일이 있은 후 달포즈음 지났을 때였다.
개통한지 얼마되지 않은 가게 전화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수화기를 들고 '여보세요'라는 말에 답변이 없다.
'여보세요...여보세요....'
새 전화긴데 벌써 고장인가 라며 전화기를 놓으려는 데
-아저씨...저예요- 라고 모기 만한 소리가 들린다.
그녀같기도 했지만 혹 다른 사람일가 싶어 크게 말하세요란 말이 떨어지자마자
-오빠... 나. 라. 구 .요!!!!-
그런데 우짠일이고.. 화가 나 혼자갈 때는 언제고,,,,아저씨라했다가 오빠라했다가
좌우지간 잘 있었니?
한데 대답이 없다.
딱히 할 말이 있어 전활 한 것 같지않은 것 같아 내쪽서 먼저 제안을 했다.
나 지금 마정친구네로 모내기 하러 갈려는 참인데 갈래?
-어디서 만나요?-
버스정류장으로 그녀가 나타났다.
버스를 문산서 한 번 더 갈아 타고 친구집으로 향했다.
친구 할머니가 우릴 반갑게 맞아 마루에 앉힌다.
-신부감이 참 곱다.근데 나이가 몇살이야?
아이쿠 할머니 ......
나이든 분에게 그렇지 않음을 설명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아니라는 변명(?)은 결국 둘다 나쁜사람- 풍기문란 행위로 인식될 게 뻔한데
굳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한번도 모를 심어 본 적없어 관 두라는 걸 마다하고 굳이 해 보겠다고 물 가득한 논으로 첨벙 들어선다.
얼마있지않아
-으아....피....-
거머리에 물린 하얀 종아리엔 분홍빛 선혈이 낭자 하다.
논바닥 흙을 움겨지고 손바닥으로 그녀의 피부를 문질러 거머리를 때어 내길 몇차례
결국 흙만 잔뜩묻힌 채 논 밖으로 나가 버린다.
-방해만 했지예...-라며 새참을 거들며 그녀는 미안해 한다.
농사꾼 되긴 틀렸다는 내말에
친구가
-처음하는 것 치곤 잘하시던데....내년에 한번 더 오면 잘 할껍니다...-라고 한다.
-저 내년에 못 와요...-라는 그녀.
그렇지...
내년은 무슨..
언제 여기를 떠날지 모르는 사람들인데 라는 생각이 그녀의 말에 동조한다.
-오빠 .....다음주 나 미국가요-
되돌아 오는 버스에서 그녀가 나즈막히 말했다.
당시 미국행은 보통시민으로선 로망이었다.
가난으로 부터 탈출이었기 때문이다.
잘사는 나라로 출발...고생끝 행복시작...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좋기도 하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네-
그녀는 한국을 떠났다.
그뒤 나는 결혼을 했다.
부모님 가게를 물려 받아 시설을 보다 확장하고 새롭게 치장을 하고
우리 내외가 경영을 한지 수년이 지난
1977년 어느날
"안녕하세요..."
내 가게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아닌 그녀였다.
'후 아유...하우 롱 해브 빈 리브 히어?'(이게 누구야? 얼마만 이야?)
'포어 이어즈'(4년)라며 손가락 넷을 펴 보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