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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보기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매바우
1943년 독일군에 의해 침공당한 소련 어느 한 도시의 참상을 한 소년의 시각을 통해 조명한 작품.
제14회 모스크바 영화제 그랑프리.
<BGM: Катюша>
어린 플로리아는 평생에 단 두 번뿐이 사진을 찍어보지 못했다.
한번은 갓 입대했을 때의 그 순수했던 모습 그대로의 사진.
그리고 또 다른 한 장은, 곧 죽기 직전의 제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사진이었다.
“1941년의 어느 늦은 여름철, 저와 제 가족들은 SS에게 잡혔어요. 그들은 제 등에 총을 겨눈 채, 그대로 수용소로 끌고 갔죠. 그 장소로부터 10분쯤 걸어갔을 무렵이었을까요? 여자, 남자, 노인, 젊은이들 할 것 없이 옷을 벗은 채 그 자리에서 벌벌 떨고 있었어요. 그들은 제게도 옷을 벗으라 명령했죠. 나신 그대로, 저를 포함한 한 무리의 사람들은 그들의 명령에 숲 속으로 향했어요. 저희가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 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죠. 길게 일렬로 깊숙이 파여있던 바로 그 구덩이를 말이에요.
그들은 저희를 일렬로 세웠어요. 대열에 휩쓸렸던 전, 제 가족들과 멀리 떨어지게 되었죠. 미처 제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일렬로 세워졌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어요. 그들이 저희를 일렬로 세워둔 것은 다름아닌, 총알을 아끼겠다는 이유에서였죠. 여자들의 팔에 안겨있던 갓난아기가 그 총알을 맞고는 1M 아래의 구덩이로 떨어졌어요. 어느덧 제 차례가 다가왔죠.
그때 주변에서 연합군의 포격이 시작되었어요. 저흰 살기 위해 그 자리에서 몸을 숙였죠. 혼란의 그 자체였어요. SS들이 포격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동안, 전 미친 듯이 그 자리에서 도망쳤어요.”
- Josef Perl (체코출신 유대인 - 동부지역 수용소 부근에서)
From the book: Forgotten voices of the Holocaust p.98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이래로 동유럽 지역에서 벌어진 대학살 과정을, 한편의 긴 과정을 엿본 느낌이었다. 한 장의 강렬한 포스터를 접하고는 보고자 했던 영화였는데, 의외로 명작이라는 소식. 더군다나 1985년 소련연방에서 제작된 아주 희귀한 작품이기도 했던 지라, 망설임 없이 작품을 감상하게 되었다.
1) 어린 아이의 시각으로 본 ‘전쟁’의 모습, 그리고 현실
철 없는 소년 ‘플로리아’에게 전쟁은 제 삶에 있어 새롭게 다가오는 존재였다. 제 아버지를 전쟁으로 잃었지만, 아직 이 철부지 소년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동네 친구와 함께 전쟁이 휩쓸고 간 벌판에서 총을 찾는 것이 하루의 일과이던 플로리아를 두고, 마을의 어르신은 그에게 주의를 준다. 하지만 그런 충고는 이 순수한 소년의 귀에 미처 들어가지 못하는데.
애써 건진 총을 통해 플로리아는 그 부근을 지키고 있던 게릴라 군대에 자연히 입대하게 된다. 이미 전쟁으로 남편과 사별한 그의 어머니는 그런 플로리아를 끝까지 말렸지만, 언젠가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플로리아는 머나먼 여정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전쟁’의 모습은 상상과는 너무도 달랐음을 플로리아는 몸소 체험하게 된다.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폭탄과 적들의 총알. 당당하고 용맹한 군인이 되겠다며, 늘 자부하곤 했던 플로리아였지만, 자신을 엄습해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급기야 그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간다.
죽음을 무릅쓰고 플로리아는 숲에서 만난 아이, 글라시아와 함께 제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집 안에는 정적만이 이어질 뿐이다. 아직 식지 않은 우유와 양초를 통해 플로리아는 그들이 방금 전까지 이 곳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온 마을을 들끓는 파리 때와 마을 담벼락에서 발견된 시체 더미들을 발견한 플로리아와 글라시아는 충격 속에서 벗어나오지 못한다. 몸을 피하는 도중, 인근에 있던 레지스탕스 대원과 합류하게 된 플로리아는 반쯤 불에 탄 채 겨우 숨만이 붙어있는 마을 어르신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토록 땅을 파지 말라고 했건만”
노인은 끝없이 플로리아에게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자신이 제 가족들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마저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플로리아는 식음을 전폐하고는 폐인처럼 살아간다. 그 어떤 위로와 말도 그의 죄책감을 덜어주지 못했다.
2) 폭행, 살인, 약탈 그리고 강간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모든 추악한 죄의 나열이다. ‘명분’은 존재하지만, 그 허울뿐인 명분 속에서 자행되는 온갖 만행들 앞에, 상처받는. 관계없는 이들의 희생은 그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총통 히틀러의 명령 아래 자행된 학살은 벨라루스의 628개 마을을 역사 속에서 지워버렸다. 1919년 4월 15일, 당시 일제 강점기 치하에 있었던 조선의 ‘제암리 학살 사건’처럼, 이 마을들에서도 침입자들은 손에 무기조차 없는 민간인들을 교회에 밀어놓고는 그대로 불을 질러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남성들과 어린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맞거나 총살당했으며, 여성들은 무자비하게 강간당했다. 마을에 있던 식량들과 가축들은 고스란히 이 침입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심지어 그러한 행동들을 마치 ‘자랑스러운 훈장’이라도 되는 듯, 이를 고스란히 사진첩 속에 남겨둔 이들도 있었다.
당시의 동유럽 인들은 이러한 독일인들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기록에 남겨져 있다. ‘설마, 그 문명화된. 이성적인 독일인들이 이렇게 행동할 리가 없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벌어진 가스실에 대한 소문을 들은 대다수의 동유럽 인들과 집시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애써 사실을 외면하며 그것이 거짓일거라, 그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설마’는 결국 그들을 죽음의 구덩이로 몰아넣는 비극을 가져오게 된다.
3) 감각으로 느끼는 영화
1985년이라는 제작 년도와 그 제작 국이 당시 ‘소련연방’아래에 있었던 ‘헝가리’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괜찮은 작품이라 할 수 있지만 사실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 스토리 구성이 썩 마음에 드는 작품은 아니었다. (후반은 괜찮았지만, 초반이;;) 무엇보다도 기존의 수많은 전쟁영화 중에서도 이 작품은 지나치리만치 ‘고요하다’. 게다가 중간에 등장하는 엉뚱한 장면들은 영화에 대한 긴장감을 높이기보다, 오히려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여타 작품처럼 화려한 액션이 존재하는 것도, 멋진 특수효과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밋밋하고 평범하기 그지 없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극중에 제시되는 풍경과 음향효과는 극중의 플로리아의 심리를 그대로 묘사하곤 한다. 때로는 그 효과들에 오히려 압도당할 정도로. 별 다른 장면이 등장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플로리아의 심리에 압도당한 관객들은 그 어린 아이가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그 어린 아이의 눈에 비춰진 이방인들의 만행에 저절로 인상을 쓰게 된다.
이러한 감각적인 접근은 이야기가 막판으로 치 닫을수록 극대화된다. 제 눈 앞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한 분노의 화살을 고스란히 히틀러의 초상화에 풀어내는 플로리아의 모습은, 이 모든 비극이 벌어지기 직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최고점에 이른다. 그 누구도 채 막지 못했던 악마의 씨앗을 향해 끊임없이 총을 쏘던 플로리아가 멈춘 것은 다름아닌, 갓 태어난 아이의 모습을 한 히틀러의 모습을 연상했을 때였다. 누구나 시작은 저와 같은, 순수하기 그지 없는 아이의 모습에 불과했음을. 그렇다면 그런 아이를 타락시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 역시 저와 같은 아이였음을 떠올리자, 플로리아의 총알은 제 갈 곳을 잃어버리고 만다. 애써 억눌러왔던 극중의 긴장감은, 그의 빛이 사라진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끝으로 사라진다. 그러한 플로리아의 내적 갈등을, 본 영화는 너무도 훌륭히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에렘 킬모프 (Элем Климов)’감독과 함께 스토리를 기획한 ‘알레스 아다모비치 (Алесь Адамовіч)’ 본인의 어린 시절 경험담이 바탕이 되어서였는지, 생각 이상으로 그 과정이 탄탄했던 듯. 본디 1977년부터 제작에 들어갔다 했으니, 이 작품에 그들이 얼마나 공을 들였던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한동안 상영을 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동유럽 지역에서 벌어진 레지스탕스 활동 혹은 SS, 홀로코스트 등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 그 당시 소련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이념적인 부분이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라 한 번 감상해도 괜찮을 듯 싶다.
- 전쟁은 순진한 소년을 한 순간에 바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