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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96권
87. 열반여화품(涅槃如化品)을 풀이함
【經】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법이 평등하여 작위가 없다면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평등한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으면서도 보시(佈施)와 애어(愛語)와 이익(利益)과 동사(同事)로써 보살의 일을 행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그대가 말한 바와 같아서 이 모든 법은 평등하여 짓는 일이 없느니라.
만일 이 중생이 스스로 모든 법이 평등한 줄 알면,
부처님은 신력으로써 모든 법의 평등한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으면서도 중생들을 아집에서 구출하거나,
공으로써 5도(道)의 생사 내지는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의 모양에서 제도하거나,
물질의 모양 내지는 분별의 모양과 눈의 모양 내지는 뜻의 모양과 땅의 요소[地種]의 모양 내지는 식의 요소[識種]의 모양에서 제도하거나,
유위의 성품과 모양[性相]을 멀리 여의면서 무위의 성품과 모양을 얻게 할 필요가 없었으리니,
무위의 성품의 모양이 곧 공이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공으로써 하기 때문에 온갖 법이 공한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온갖 법의 모양을 멀리 여의나니, 이 공으로써 하기 때문에 온갖 법이 공하느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변화로 된 사람이 변화한 사람을 만들 적에 이 변화는 행여 진실한 일이 있고 공하지 않은 것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변화한 사람은 진실한 일이 있거나 공하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 공한 것과 그리고 변화한 사람의 두 가지는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공공(空空)이기 때문에 공하나니,
‘이것이 공이요, 이것이 변화이다.’라고 분별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왜냐 하면, 이 두 가지 일은 똑같이 공한 것 가운데서 이른바
‘이것이 공이다, 이것이 변화이다.’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니,
그것은 왜냐하면, 수보리야, 물질이 곧 변화요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이 곧 변화이며 나아가 일체종지도 곧 변화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세간의 법이 곧 변화라면 출세간의 법[出世間法]도 역시 변화인지요?
이른바 4념처(念處)ㆍ4정근(正勤)ㆍ4여의족(如意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분(覺分)ㆍ8성도분(聖道分)ㆍ3해탈문(解脫門)과,
부처님의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4무애지(無礙智)ㆍ18불공법(不共法)과,
아울러 모든 법의 과위와 성현의 사람으로서 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陀含)ㆍ아라한(阿羅漢)ㆍ벽지불(辟支佛)과 보살마하살 그리고 모든 불ㆍ세존 등 이러한 법도 또한 변화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온갖 법은 모두가 변화이니라.
이 법에서는 성문의 법의 변화가 있고 벽지불의 법의 변화가 있으며,
보살마하살의 법의 변화가 있고 모든 부처님의 법의 변화가 있으며,
번뇌의 법의 변화가 있고 업 인연의 법의 변화가 있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수보리야, 온갖 법은 모두가 변화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번뇌가 끊어진 것, 다시 말해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로써 모든 번뇌와 습기가 끊어진 것은 모두가 변화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법에 나고[生] 없어지는[滅] 모양이 있으면, 모두 그것은 변화이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법이 변화가 아닌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법으로서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면, 그것은 곧 변화가 아니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어떤 것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아 변화가 아닌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거짓이 없는 모양의 열반이니, 이 법이 변화가 아니니라.”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한 것과 같아서 모든 법의 평등은 성문이 만든 것도 아니고 벽지불이 만든 것도 아니며 모든 보살마하살이 만든 것도 아니고 모든 부처님께서 만든 것도 아니어서,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모든 법의 성품은 언제나 공하며, 그 공한 성품이 곧 열반이거늘,
어찌하여 ‘열반의 한 법만이 변화와 같은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시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모든 법의 평등은 성문(聲聞)이 만든 것이 아니요 나아가 성품의 공한 것이 곧 열반이니라.
만일 새로 뜻을 낸 보살이
‘이 온갖 법은 마침내 성품이 공하며 나아가 열반도 또한 모두가 변화와 같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으로 곧 놀라고 두려워하나니,
이 새로 뜻을 낸 보살을 위하여,
‘나고 없어지는 것은 변화와 같으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은 변화와 같지 않다’고 분별하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새로 뜻을 낸 보살들을 교화하여 이 성품이 공한[性空] 것을 알게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 본래는 있었다가 지금에 와서 없어진 것이더냐?”
【論】
【문】 이 일에 대해서는 부처님은 앞에서 이미 대답하셨거늘,
수보리는 지금 무엇 때문에 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법이 평등하여서 짓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하여 보살은 모든 법의 평등한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으면서 중생들을 크게 이롭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는가?
【답】 이 일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록 앞에서 말씀했다 하더라도 다시 물은 것이다.
또 이제 경을 막 마치려 하면서 부처님은 깊은 공에 대하여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범부나 성인이 행할 수 없는 것이요 도달할 수도 없는 곳이다.
이 때문에 수보리는
“온갖 법의 평등한 모양은 결정코 공인 줄 알겠거늘 어떻게 하여 보살은 이 법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이롭게 할까?”라고 한 것이니,
평등한 법은 조작이 없는 모양이요, 이롭게 하는 것은 조작이 있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수보리의 뜻을 인가하시고 도리어 수보리가 물은 것으로 대답하셨다.
곧, 평등을 인정하시면서도 그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에 대하여 답하시길,
“만일 중생들 스스로가 모든 법의 평등과 필경 공임을 안다면, 부처님의 은혜나 힘도 없다.”라고 하셨다.
가령 병든 사람이 스스로 알맞게 약을 고를 줄 안다면, 곧 약사(藥師)의 공력도 없게 되는 것이다.
수보리는 또 여쭈기를,
“만일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 필경 공하여서 짓는 것이 없다 한다면, 보살은 무엇 때문에 이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지요?
만일 보살이 이 평등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한다면 곧 실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모든 법의 실상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중생들이 필경 공인 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보살은 가르쳐 주어 알게 할 뿐이니라”라고 하셨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은 바로 대치실단(對治悉檀)으로,
수보리는 제일의(第一義)의 실단에서는 이익이 없다는 것으로 따졌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중생들이 뒤바뀌어서 모르고 있으므로 부처님은 다만 그 뒤바뀜만을 깨뜨릴 뿐이니,
‘이것은 진실하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보살은 이 평등한 모양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나라는 모양[我相] 내지는 아는 이ㆍ보는 이의 모양[知者見者相]을 멀리 여의게 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중생공(衆生空)이라 한다. 이 온갖 나 없는 법[無我法]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느니라”라고 하셨다.
중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애욕[愛]이 많은 이요,
둘째는 소견[見]이 많은 이이다.
애욕이 많은 이는 이 나 없는 법을 얻으면 곧 싫증을 내고 욕탐을 여의면서 생각하기를,
‘만일 내가 없다면 그 밖의 물건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한다.
소견이 많은 이는 비록 나 없는 법을 안다고 하더라도 물질 등의 법에 대하여
‘항상 있다’거나 ‘무상하다’는 등의 희론을 하게 된다.
이 때문에 다음에서 물질의 모양과 5중(衆)ㆍ12입(入)ㆍ18계(界)를 말하며 나아가 유위의 성품[性]과 모양[相]을 멀리 여의고 무위의 성품과 모양을 얻게 한다.
무위의 성품과 모양이 곧 공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법공(法空)이라 한다.
【문】 수보리는 무엇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였으며, 또 “어떠한 공을 쓰기 때문에 온갖 법은 공한 것입니까?”라고 물었는가?
【답】 공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마치 불 속에는 물이 없고 물 속에는 불이 없는 것과 같은 것도 역시 공이요,
5중(衆) 속에 나[我]가 없는 것도 또한 그와 같아서 혹은 중생공이 있기도 하고 혹은 법공이 있기도 하다.
법공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법이 비록 공하다 하더라도 역시 모두가 다 공한 것은 아니니,
마치 공한 가운데에는 작은 티끌의 근본은 존재하여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한다.
이 때문에 수보리는 여쭈기를,
“어떠한 공을 쓰기 때문에 온갖 법은 공한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얻을 것이 없으면서[無所得] 필경 공하기 때문에 온갖 모양을 멀리 여의느니라”라고 하셨다.
이 때문에 이 가운데서는 중생공과 법공을 말씀하고 계시며, 이 두 가지 공 때문에 온갖 법은 공하지 않음이 없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온갖 법의 모양을 여읜다.”라고 말씀하셨는가?
【답】 온갖 법은 모조리 다 파괴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삿된 기억과 생각을 여의기만 하면 온갖 법은 저절로 여의게 된다.
마치 신통 있는 사람은 물질의 모양을 파괴하기 때문에 석벽(石壁)도 장애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5중(衆) 가운데서 바른 기억을 닦고 탐욕을 끊으면서 바른 해탈을 얻어야 하나니, 이 때문에 여읨의 모양[離相]을 말한 것이니라”라고 하신 것과 같다.
수보리는 이런 말씀을 듣고 마음에 놀라면서
‘어떻게 하여 온갖 법은 크건 작건 간에 도무지 근본과 실체가 없다 하실까? 범
부의 사람은 허망하므로 진실한 일이 없을 수도 있지만, 성인에게는 조그마한 진실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수보리는 아라한이어서 부처님의 법을 몹시 귀히 여기고 있기는 하나 역시 새로 뜻을 낸 보살들을 위하여 일부러 물은 것이며,
부처님은 수보리의 뜻을 아시면서 이 일에 대하여 분명히 알게 하려고 비유를 말하면서 되받아 수보리에게 묻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변화로 된 사람이 다시 변화를 짓는 것과 같아서 이 변화로 된 것은 근본과 실체가 있으며 공하지 않은 것이더냐?”라고 하신 것이다.
[수보리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자,
[부처님께서는]
“이 변화하는 것에는 진실한 일이나 공하지 않은 일이 없다.
공과 변화한 사람의 두 가지 일이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모두가 공하기 때문에 이요, 그 공한 것도 공하기에 공하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어찌하여 공한 것도 공하기에 공하다 하는가?
【답】 열여덟 가지 일의 실상을 타파하기 위하여 18공(空)이 있으며,
중생의 마음속에서 변화하는 그 공한 법까지 타파하기 위하여 공공(空空)을 쓰는 것이다.
세간 사람들은 환화(幻化)의 법은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하고 짓는 이[能作]가 없기에 공이라 부름을 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공한 것도 공하기에 공하니,
‘이것은 공하다’거나 ‘이것은 변화이다.’라고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범부는 변화는 공하여서 진실하지 않은 것인 줄 알면서도 그 밖의 다른 법은 진실하다고 여기고 있나니, 이 때문에 변화로써 비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밖의 다른 법과 변화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인들이 이해하는 것과 같다면 변화로써 비유를 삼을 수가 없으리니, 분별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온갖 법을 5중(衆)이라 한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물질[色]ㆍ느낌[受]ㆍ생각[想]ㆍ의욕[行]ㆍ인식[識]은 곧 변화가 아닌 것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으니,
공하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범부의 법은 허망하므로 변화와 같아야 하겠지만, 출세간의 법도 또한 변화와 같은 것입니까?
이른바 4념처 내지는 18불공법이니,
4념처의 법 등은 인(因)과 연(緣)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변화와 같겠지만,
이 법의 결과는 이른바 열반인데도 변화와 같으며,
그리고 이 행(行)을 일으키고 있는 이로서 수다원이나 나아가 부처님까지도 역시 변화와 같은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유위와 무위와 그리고 모든 성현은 모두가 변화이니, 그것은 필경 공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이 이치는 초품(初品)을 비롯해 곳곳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나니, 이 때문에
“온갖 법은 모두가 변화와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문】 만일 온갖 법이 모두가 공하여 마치 변화와 같다면 무엇 때문에 갖가지 법의 차별이 있는가?
【답】 부처님께서 변화로 만든 것이나 그 밖의 사람이 변화로 만든 것이 비록 진실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갖가지 형상으로 다름이 있다.
꿈속에서 보는 갖가지 형상도 이와 같으니, 사람은 꿈속에서 좋고 나쁜 일을 보면서 기뻐하는 이도 있고 두려워하는 이도 있다.
마치 거울 속의 형상에도 비록 진실한 일이 없기는 하나 본래의 형상에 따라 곱고 추한 것이 있듯이,
모든 법도 이와 같아서 비록 공하다 하더라도 저마다의 인연이 있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이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이 변화하는 법에는 성문(聲聞)의 변화가 있고 벽지불(辟支佛)의 변화가 있으며,
보살(菩薩)의 변화가 있고 부처님[佛]의 변화가 있으며,
번뇌(煩惱)의 변화가 있고 업(業)의 변화가 있느니라.
이 때문에 온갖 법은 모두가 변화이니라.”라고 하신 것과 같다.
‘성문의 변화’라 함은, 37품(品)과 4성제(聖諦) 내지는 3해탈문(解脫門)이다.
왜냐 하면, 성문의 사람은 지계(持戒)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선정(禪定)으로 마음을 가다듬어 열반을 구하며 안팎으로 몸의 부정(不淨)을 닦기 때문이니, 이것을 신념처(身念處)라고 한다.
이와 같은 등의 법은 열반을 위하기 때문이니,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 법을 일으키면 본래 없었던 것이 비로소 있게 되고 이미 있었던 것은 다시 없게 되므로 이것이 곧 성문의 변화이다.
‘벽지불의 변화’라 함은,
이른바 12인연(因緣) 등의 모든 법을 관(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벽지불의 지혜는 성문의 사람보다 깊기 때문이다.
‘보살의 변화’라 함은,
이른바 6바라밀과 그리고 두 가지 신통 즉 과보로 얻는 것[報得]과 수행으로 얻는 것[修得]이 있다.
‘부처님 법의 변화’라 함은,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와 10력(力)과 일체종지(一切種智) 등의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이다.
‘번뇌의 변화’라 함은,
번뇌는 갖가지 업을 일으키나니,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업(無記)의 업과 필정업(畢定業)ㆍ불필정업(不畢定業)과 선(善)ㆍ불선(不善)ㆍ무동(無動)의 업 등 한량없는 업들이 있다.
【문】 모든 번뇌는 그것이 거친 업[惡業]이거늘, 어찌하여 선업과 무동업을 낼 수 있는가?
【답】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가까운 원인[近因]이요,
둘째는 먼 원인[遠因]이다.
사람에게 나라는 마음[我心]이 있으면서 후생에 받는 몸이 언제나 쾌락이 있게 하기 위하여 보시를 닦는 것은 바로 가까운 원인이며,
욕계(欲界)의 쇠뇌(衰惱)와 깨끗하지 못한 몸을 여의기 위하여 선정을 닦는 것은 바로 먼 원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온갖 범부는 모두가 나라는 마음[我心]이 화합하기 때문에 업을 일으킨다.”라고 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라는 마음을 여의면 제6식(識)이 일어남이 없지만, 나라는 마음에 머무르기 때문에 제6식이 일어나나니, 나라는 마음이 곧 모든 번뇌의 근본이다.”라고 한다.
【문】 번뇌는 더러운 마음[垢心]이요,
착한 마음은 깨끗한 마음[淨心]이다.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은 화합하지 못하거늘 무엇 때문에
“나라는 마음[我心]에 머무르면서 착한 업을 일으킬 수 있다.”라고 말하는가?
【답】 그렇지 않다. 온갖 마음은 모두가 지혜와 함께 생기는 것이므로 무명(無明)의 마음에서도 역시 지혜는 있어야 한다.
지혜와 무명은 서로 반대되는 법이면서도 한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니,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범부는 아직 성인의 도를 얻지 못한 이거늘, 어떻게 나[我]라는 마음을 여읠 수 있으며 착한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성을 내는 등의 번뇌 가운데서는 선(善)을 행할 수 없지만,
나라는 마음은 무기(無記)이어서 유연(柔軟)하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번뇌의 마음속에서 선업과 무동업(無動業)과 무구업(無咎業)이 생긴다.
업의 변화라는 것은 온갖 과보의 법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른바 6도(道)를 말한다.
나쁜 업의 과보는 3악도이고, 착한 업의 과보는 3선도이다.
나쁜 업에는 상(上)ㆍ중(中)ㆍ하(下)가 있어서,
상은 지옥이요, 중은 축생이며, 하는 아귀이다.
착한 업에도 상ㆍ중ㆍ하가 있어서,
상은 하늘이요, 중은 사람이며, 하는 아수라 등이다.
상(上)의 착한 업에도 갖가지 경중(輕重) 등의 분별이 있고, 상의 나쁜 업에도 경중의 차별이 있다.
그 차례와 경중에 대해서는 지옥(地獄)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그 밖의 세계[道]에 대해서는 역시 「분별업품(分別業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만일 업을 따라 있게 된다면 무엇 때문에 변화를 말하는가?
【답】 범부의 사람은 모든 법을 변화와 같지 않다고 보지만,
성인은 필경 공한 모양인 줄 알기 때문에 천안(天眼)으로 중생을 볼 적에,
모두가 처음도 나중도 중간도 없는 것이 마치 변화를 짓는 이[化主]가 먼 곳에 있으면서 그 변화를 짓는 것과 같다고 보나니,
업도 또한 이와 같아서 과거 세상 동안에 지금의 몸의 변화를 짓는 것이다.
변화로 된 일들의 갖가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근심과 기쁨과 두려움을 내게 한다. 지혜 있는 이는 그 모두에 실체가 없다고 보지만,
사람들은 제멋대로 근심이나 기쁨을 내고 있으니,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가히 우스운 것이다.
업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 때문에 “업의 변화”라고 말한다.
【문】 이 모든 변화는 모두가 업으로 된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업의 변화’라고만 말하지 않는가?
【답】 업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깨끗한 업[淨業]과 더러운 업[垢業]이다.
깨끗한 업이란 성문의 변화 내지는 부처님의 변화이며,
더러운 업이란 곧 번뇌의 변화이다.
또한 두 가지 업이 있으니,
범부의 업과 성인의 업이다.
범부의 업이란 곧 번뇌의 변화요,
성인의 업이란 수다원에서부터 부처님까지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 모두가 업의 변화라 하더라도 자세히 분별한다 하여 허물될 것은 없다. 이 때문에
“수보리야, 온갖 법은 공하여서 모두가 변화와 같은 줄 알아야 하느니라”라고 하셨다.
수보리는 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이 모든 성인으로서 번뇌가 끊어진 이른바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로써 온갖 번뇌와 습기가 끊어진 이의 이 모든 끊어진 것도 모두가 변화와 같습니까?”라고 하였다.
곧, 수보리는
‘유위의 법은 거짓이기 때문에 변화와 같다 하겠지만, 무위의 법은 진실이요 조작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변화가 아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부처님은 이에 대답하시기를,
“온갖 법은 나는 것이나 없어지는 것이나 간에 모두가 변화와 같으니라”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본래는 없었다가 지금은 있게 되고 지금은 있던 것이 나중에는 없어지기도 하며 사람의 마음을 헷갈리고 미혹하게 하기 때문이니,
부처님의 뜻은
‘온갖 것은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법이어서 모두가 제 성품이 없고,
제 성품이 없기 때문에 필경 공하며, 필경 공하기 때문에 모두가 변화와 같다’는 것이다.
수보리는 모든 법의 실상을 구하려는 뜻을 오히려 쉬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어떠한 법이 변화와 같지 않은 것입니까?”라고 하였으니,
수보리의 뜻은 ‘
어느 하나의 결정된 진실한 법으로서 변화와 같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 법에 의지하여 정진하면서 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어서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만일 어떤 법으로서 나는[生]것도 없고 없어지는[滅] 것도 없다면 곧 그것은 변화가 아니니라”라고 하셨으니,
어느 것이냐 하면 이른바 거짓됨이 없는 모양의 열반이니,
이 법은 생함이 없기 때문에 없어지는 것이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근심을 내게 할 수도 없다.
부처님은
‘온갖 유위의 법은 필경 공하여서 모두가 변화와 같지만 오직 열반이란 이 하나의 법만이 변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분별해 주신 것이다.
그때에 수보리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평등한 법은 부처님께서 만든 것도 아니고 성문이나 벽지불이 만든 것도 아니어서,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모든 법은 항상 머물러 있어서 성품이 공한 모양이며 그 성품이 공한 모양이 곧 열반입니다.”라고 하였다.
수보리의 뜻에서는
‘반야바라밀에 깊이 들어가면 열반도 또한 공하다는 것을 앞의 품의 곳곳에서 말씀하셨거늘,
이제 와서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오직 이 하나의 열반만이 변화와 같지 않다고 하실까?’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따지는 것이니, 곧
“모든 법의 실상은 성품이 공하고 그 법은 항상 머물러 있다 함을 모든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연설했을 뿐입니다.
성품이 공하다는 것이 곧 열반이거늘 이제 나고 없어지는 법에서 따로
‘거짓이 없는 모양인 열반이 변화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십니까?”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모든 법은 평등하여 항상 머물러 있으니, 성현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새로 배우는 보살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곧 두려움을 낼 것이다.
이 때문에 분별하면서
‘나고 없어지는 것은 변화와 같지만, 나고 없어지지 않는 것은 변화와 같지 않다’고 하느니라”라고 하셨다.
【문】 오직 부처님 한 분만은 거짓이 없는 사람이므로 온갖 사람들은 모두가 부처님에게서 진실한 일을 구하려고 하고 있거늘,
지금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온갖 법은 도무지 공하다.”라고 말씀하기도 하고, 혹은
“도무지 공하지 않다.”라고 하시기도 하는가?
【답】 부처님은 이 가운데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새로 뜻을 낸 보살들을 위하는 까닭에 ‘열반은 변화와 같지 않다’고 말하느니라”라고 하셨다.
【문】 사람들을 위해서는 모든 법의 모양을 바꿀 수 있는 것인가?
【답】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의 모양이란 성품이 공하다. 성품이 공하거늘 어떻게 바꿀 수 있겠느냐?”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처음에 이 모든 법의 실상을 얻었을 적에 마음은 다만 열반의 고요히 사라진[寂滅] 곳으로만 향하고 있었는데,
그때에 시방에 계신 모든 부처님과 하늘들은 부처님께 청하기를,
“열반에 들지 마시고 이 온갖 중생들을 고뇌에서 제도하여 벗어나게 해야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곧 그 청을 받아들이셨으니, 부처님은 다만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머물렀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롭게 할 중생이 있기만 하면 그 일에 따라서 그를 위해 법을 설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유위의 법은 거짓이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이 열반은 진실한 것이어서 변하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지만,
새로 뜻을 낸 보살이 이 열반에 집착한다면 이 집착으로 인하여 모든 번뇌를 일으키게 되나니,
이 집착을 끊게 하기 위하여
“열반은 변화와 같다.”라고 말씀한 것이요,
만일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때에는 곧
“열반은 변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또 두 가지 도가 있나니,
소승의 도[小乘道]와 대승의 도[大乘道]이다.
소승의 논의(論議)에서는 열반으로 진실을 삼지만,
대승의 논의에서는 예리한 지혜로써 깊이 들어가기 때문에 물질 등의 모든 법은 모두가 열반과 같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두 가지의 설명에 허물은 없다.
수보리는 또 여쭈기를,
“어떻게 새로 뜻을 낸 보살을 교화하여 그로 하여금 평등하고 성품이 공한 것을 알게 합니까?”라고 하였다.
수보리의 생각에는
‘성품이 공한 법은 범부들로서는 크게 두려워할 만한 곳이다.
성품이 공하여 있는 바가 없다는 말을 듣게 되면 마치 깊은 구덩이에 임한 것과 같나니,
왜냐 하면, 아직 도를 얻지 못한 모든 이들은 나[我]라는 마음에 깊이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공하다는 법을 두려워하면서 생각하기를
〈부처님은 사람들에게 착한 행을 부지런히 닦도록 가르치면서도 끝내는 아무것도 없는 데로 돌아가게 하는 구나〉라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수보리는 여쭈기를,
“무슨 방편으로써 이 새로 발심한 이들을 가르쳐 주겠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모든 법은 먼저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더냐?”라고 하셨다.
부처님의 뜻은, 새로 뜻을 낸 이들은 나중에는 없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먼저는 있었다가 지금은 없는 것이더냐?”라고 하신 것이다.
수보리가 스스로
‘모든 법은 먼저도 저절로 없었고 지금에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다만 새로 뜻을 낸 이들이 나라는 소견[我見]으로 마음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놀라며 두려워하고 있으므로, 그들을 위하여 그 뒤바뀜을 없애 주면서 진실한 소견을 얻게 한 것이니,
마침내 잃는 것도 없으면서 모든 번뇌와 뒤바뀜의 실상 즉 성품이 공한 것을 알게 되면 이때에는 곧 두려움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등의 법으로써 새로이 발심한 이에게 가르치기를,
“만일 모든 법이 먼저는 있었다가 도를 행했기 때문에 없는 것이라면 마땅히 두려워해야 되지만,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니, 다만 뒤바뀜을 제거하면 될 뿐이다.”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