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최해성(崔海成) 요한은, 1839년에 순교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의 먼 친척이다. 그의 집안은 본래 충청도 홍주 다락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았는데, 1801년의 신유박해 때 그의 조부가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온 가족이 그 지방으로 가서 생활하였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도 이곳이다.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 성장한 요한은 성격이 온순하고 정직하였다. 이후 그는 좀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의 서지(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 2리)로 이주하였고, 이곳에 작은 교우촌을 이루었다.
요한은 천주교의 모든 본분을 이행하는 데 뛰어난 열성을 보였으며, 언제나 자신의 영혼을 보살피는 일에 전심하였다. 그는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애긍을 잊지 않았다. 또 자주 교우들을 격려하면서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서지 교우촌에 선교사가 와서 성사를 베풀 때면, 요한은 말할 수 없는 열심에 불탔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이러한 덕행 때문에 그는 그 마을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견진성사를 받은 후에는 성령 칠은의 특은을 충만히 받은 징표가 나타났으며, 이내 그의 마음은 순교 원의로 가득 차게 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해성 요한은 우선 부모와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교회 서적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집으로 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쇠도리깨로 그를 때리면서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의 몸은 이내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눌 수조차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그는 영혼의 눈으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상으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원주 관장 앞으로 끌려간 요한은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형제들을 고발할 수 없다’고 용감하게 대답하였다. 관장이 ‘네가 사악한 종교를 믿는다니 정말이냐?’고 하자, 그는 “저는 사악한 종교를 믿지는 아니합니다. 하늘의 주님을 섬기는 천주교를 믿을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요한은 일단 옥에 갇혔다가 며칠 후 다시 끌려나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여러 가지 말로 유혹하면서 배교를 권유하자, 그는 이를 거부하면서 “원주 고을을 다 주신다고 해도 거짓말을 할 수 없고,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후에도 요한은 자주 옥에서 끌려나가 감사나 영장 앞에서 수없이 많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불평하지 않고 예수 마리아의 도움만을 청하였다. 그는 살이 너덜너덜해지고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매를 맞아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곤 하였다. 어느 날 그는 다시 관장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를 받게 되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지금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의 목숨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제 영혼은 영원히 죽을 것이므로 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임금과 의(義)를 위해 죽겠다고 약속하고 나서 배반하는 백성이 있다면, 그는 반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의 위대한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맹세한 제가 어찌 형벌을 두려워하여 이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관장은 화가 나서 그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요한의 몸은 다시 피투성이가 되었고, 살은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붙은 그의 영혼은 기쁨으로 용약하였다.
옥으로 돌아온 요한은 일시적으로 유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 주 예수의 발아래 엎드림으로써 인성의 나약함을 억누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기쁨과 평화가 다시 그의 마음에 찾아왔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마침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9월 6일(음력 7월 2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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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최해성 요한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에이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