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reason
4. 고려불교의 변화와 흐름
84) 불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 고려
왕건 통합의 리더십
불교의 시대, 불교의 나라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도선의 비보사찰설
왕건의 훈요십조 2조
'고려의 모든 사찰은 도선이 산수의 형세를 감안하여 조율해 놓은 것이니 함부로 추가하면 지기가 훼손되어 왕조가 길지 못할 것이다. 신라가 망한 원인이 신라하대에 함부로 사찰을 짓다가 지기가 손상되었기 때문이니 경계해야 한다'
선종을 중심으로 하는 산사는 이후 교종이 중심이 되는 도심사찰의 번잡함과는 달리 수행처에 적합하다는 공간적인 신성함과 정화의 이미지를 줌. 이것이 선종이 발달하게 된 계기로 작용함.
85) 승과제도의 시행, 불교종파의 통합
고려의 4대 왕 '광종'은 승과 과거제를 실시.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 시험을 보게 함.
불교교단의 통합과 화엄종의 균여
..975년 광종이 사망함으로써 불교 종단통합의 노력은 실패로 끝남. 이후에도 통합의 노력은 계속됨.
광종이후 주목할 만한 인물은 11대 문종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임. 의천은 1085년 상선을 타고 몰래 송으로 건너가 '화엄종, 천태종, 법상종, 선종, 율종'의 승려 등 50여명을 만나 교류하면서 가르침을 받음. 고려로 돌아온 의천은 1097년 천태종의 본산인 천태산에 '국청사'를 지어 고려 천태종 확립을 위한 거점사찰을 완공함. 당시 1천여명의 승려들이 운집하였는데 대부분이 선종의 승려임. 이들의 60-70%가 천태종으로 개종함. 이로써 천태종과 선종의 연결관계를 이해할 수 있음.
당시 고려불교에서 영향력을 확보한 종파는 '화엄종, 법상종, 선종'임. 의천은 천태종을 도입해 고려불교의 융합을 도모함. 그는 교관겸수 '교와 선'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함. 그러나 국청사가 완공된 4년 뒤 1101년 의천이 사망하면서 고려불교의 통합은 실패함.
86) 팔만대장경의 판각과 의천의 교장간행
거란의 2차 침입과 초조대장경의 탄생
1011년부터 현종이 사망하는 1031년까지 송나라의 개보칙판 대장경(1076종 5048권)과 그동안 우리나라에 전래된 경전을 바탕으로 초조대장경 5천여권이 완성됨.
몽골의 침략과 재조대장경
몽골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몽고군에 의해 소실됨. 이에 초조대장경의 구조를 기본으로 해서 재조대장경이 탄생함. 수록된 경전은 1562종 6,778권으로 1251년까지 16년에 걸쳐 판각됨. 이 모든 경전을 담은 경판이 8만 1천개이므로 팔만대장경이라고 함.
재조대장경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조선초에 일본이 계속해서 대장경판을 요청했다는 사실임. 이유는 일본은 여전히 불교를 믿지만 조선은 아니니 일본으로 경판을 넘겨달라는 것임.
'세종'
'대장경판은 한벌뿐이고 또 선조로부터 전래된 것이므로 줄수없다'
의천의 원대한 이상과 고려의 찬란한 문화
대장경이란 '경, 율, 론 삼장'을 모은 불교의 전체를 포괄하는 총서를 의미함. 불교가 전래된 이후 삼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에서는 다시금 여러가지 주석서들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 주석서의 분량 역시 삼장에 필적할 정도로 방대함. 이를 모두 모아서 편찬해야겠다고 발원하는 인물이 바로 의천임.
1085년부터 1086년까지 송나라에 머물다 귀국하던 의천은 1074년네 발원한 일을 실천하고자 3천여권의 주석서를 가져옴.
87) 지눌, 교학을 포함한 선종을 천명
한국선종의 중흥조 지눌
한국교종에 원효가 있다면 선종에 지눌이 있는 셈임. 지눌이 활동하던 시기 고려는 1170-1270년까지 무신정권의 시대. 당시 고려왕실은 화엄종과 함께 신흥 종파인 천태종과 연결되어 있었고 선종은 천태종의 수립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고 주춤한 상태였음. 이런 상황에서 한국 선종을 일신시키며 중흥을 이루어 내는 인물이 바로 '보조국사 지눌'임.
지눌의 깨달음과 정혜결사
지눌은 1161년 10세의 나이로 '사굴산문'으로 출가. 1182년 승과에 합격한 뒤 선을 논하던 담선법회에서 '선정과 지혜 수행'을 아우르는 결사모임인 정혜결사를 제안함. 담양의 창평에 위치한 청원사에서 수학하던 중 지눌은 혜능이 육조단경 '정혜제사"에 나오는
진여의 본래 청정한 본성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어떤 것에도 더렵혀지지 않고 항상 자재하다'
라는 구절을 읽다가 첫 깨달음을 이룸. 이후 1185년 경북 예천의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공부하던 중 '신화엄경론'을 보고 원돈 즉 완전함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됨. 지눌은 1188년 대구 팔공산 동화사의 거조암으로 거쳐를 옮겨 이곳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함. 정혜결사란 '선종의 수행과 화엄경 사상의 중심인 교종(지혜)를 아울러 수학해서 깨달음을 얻자는 수행결사 운동임.
결사가 점차 활성화되자 전남 순천의 송광산 길상사(송광사)에 제자인 수우을 파견하여 정비하도록 함.

송광사(順天 松廣寺)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다. 부산 범어사(불보사찰), 양산 통도사(불보사찰), 합천 해인사(법보사찰)와 더불어 한국 삼보사찰로 불리고 있다. 신라 말엽에 혜린대사(慧璘大師)가 작은 암자를 짓고 길상사(吉祥寺)라 부르던 것을 시작으로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사(定慧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도, 참선 도량으로 삼은 뒤부터 승보사찰이 되었다. 지눌, 혜심을 비롯한 16국사를 배출하였다.[1] 외국 승려가 수도하는 국제선원이 있다.
신라 말 혜린대사(慧璘大師)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길상사(吉祥寺)로 작은 규모의 절이었다. 이후 고려 인종 때 석조대사(釋照大師)가 절을 확장하려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2]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곳으로 옮기면서부터이다.[2] 이때 고려 희종이 길상사를 수선사(修禪社)로, 송광산을 조계산(曹溪山)으로 개명하였다.[3] 이후 보조국사의 법맥을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이어받아 중창한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 동안 16명의 국사를 배출하면서 승보사찰의 지위를 굳혔다.
진각국사 혜심과 주류가 되는 선종
지눌의 정혜결사는 천태종에 의해 타격을 받았던 선종을 화려하게 부활시키는 초석이 됨. 이후 지눌의 가르침은 혜심(1178-1234)에게 전해짐. 혜심은 무신정권의 최우의 막대한 후원을 이끌어 내면서 선종을 재편하는 역할을 함. 혜심의 '선문염송'은 모든 선어록을 수선사의 관점에서 재정리하여 선종 승과의 교재로 삼기 위해 만든 책. 이후 지눌의 수선사는 선종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지눌과 혜심을 포함해 16국사가 배출되는 기염을 토함.

88) 혼란의 시대에 불교를 기록한 일연
삼국유사로 유명한 일연(1206-1289)은 본래 가지산문의 대표하는 선승. 일연은 고려 23대 고종때인 1227년 승과에 합격함. 이시기는 1231년부터 1270년까지 38년간 대몽항쟁기임.
89) 선종을 중심으로 자정노력이 이루어짐
당시 중국불교는 원나라의 지지를 받는 티베트 불교와 한족 중심의 선종으로 양분.
90) 꺼져가는 불교부흥의 등불과 고려
공민왕와 불교계의 3인 '보우, 신돈, 나옹'
나옹의 두 걸출한 제자 '혼수와 무학'
무학은 이성계가 왕이 될 꿈을 해석해주면서 조선건국과 함께 왕사가 됨.
5. 억눌린 불교와 민중의 염원
91) 불교교단의 통폐합과 사찰수의 축소
태종, 세종대의 불교교단 통합
태조와 정종이 불교에 호의적이었던 것과 달리 태종은 종파들을 통합하고 사찰을 대거 철폐함. 당시 유력했던 종파는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총남종, 시흥종' 7종파로 강제 통합되고 사찰 또한 대부분 파괴되어 242곳만 남게 됨.
이후 세종은 7종파를 다시 통폐합하여 '조계종, 천태종, 총남종을 통합하여 선종'으로,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을 통합하여 교종'으로 축소함. 424개 사찰을 36곳으로 축소. 1429년에는 여자의 사찰출입을 금지

92) 성리학의 비판에 직면한 불교
정도전의 불씨잡변 - 붓다의 잡변이라는 뜻의 불교 비판서
94) 경국대전이 결정한 조선불교의 그늘
95) 문정왕후의 불교후원과 허응 보우의 불교 중흥
명종실록 권 13.
일찍이 문정왕후가 불교를 중흥하려고 했으나 책임을 맡을 적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 금강산에서 보우를 만나게 되었다'
1551년 보우는 선종의 책임자가 되고 4천명의 승려에게 도첩을 주어 안전장치를 마련함. 유학자들의 반발이 극심해짐.
96) 국가의 위기속에서 타오르는 불교
서산대사 '휴정', 사명대사 '유정'은 보우와 문정왕후가 부활시킨 승과가 배출한 최고의 인물임.
불교가 강한 국가였던 일본은 처음에는 사찰을 파괴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승려들이 의병으로 참가하면서 사찰을 무차별로 파괴함.
97) 통제되지 않는 국가와 불교의 발전
98) 초의와 추사, 차와 불교를 논하다
우리나라 차문화의 완성자 초의
조선후기 승려 중 사상, 문화 양 방면에 걸쳐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초의 의순(1786-1866)임. 초의는 1830년 '다신전'과 1837년 '동다송'은 한국 차문화에 있어 금자탑같은 저술임.


초의와 백파의 선에 대한 논쟁
초의와 백파의 관점에 의한 논쟁은 이후 추사가 가세하면서 가열됨.
99) 구한말의 불교와 불교로 모인 지식인들
1902년 대한제국은 일본침략을 막기 위해 동대문 밖의 현 창신고등학교 자리에 '원흥사'를 창건. 원흥사는 모든 사찰을 총괄하는 대본산으로 하부에 16중법산을 둠. 원흥사 창건을 통해 불교를 체계화하려고 했던 대한제국의 노력은 국가의 몰락과 함께 2년만에 관리부서가 폐지됨.
1910년 도성출입이 해제된 후 최초로 사대문 안에 각황사가 창건됨. 각황사는 1962년 조계사로 명칭이 변경되어 현재에 이름. 이외에도 원흥사를 터전으로 1906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개 개교됨.
참고) 조계사(曹溪寺)는 조계종 절로 1395년에 지어졌다. 1910년에 승려들의 모금으로 설립된 각황사가 모태이다. 1938년에는 태고사가 설립되었고, 1954년에 조계사로 개칭되었다. 현재 조계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에 위치한다.

100) 일제강점기 불교의 명암과 조계종의 성립
대처승 한용운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일제강점기 승려의 대다수가 결혼하는 한국불교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함. 이 문제는 해방이후 일본불교의 그림자를 지우고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한 정화운동이라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전개됨 . 전체 승려수 6,500명 중 결혼하지 않은 승려는 4% 260명에 지나지 않음. 한국불교는 1954년부터 1962녀까지 뼈를 깎는 정화운동에 돌입, 새롭게 재건되는 불교가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임.
대한불교조계종은 선불교의 전통에 입각해서 1962년 재정립된 종단임. 이 조계종의 원류에는 고려시대에 남종선을 조계종으로 판단한 인식과 일제강점기 초기의 임제종, 그리고 1941년 불교 조계종의 초대 종정이었던 한암이야 말로 조계종의 현대적 시원을 이룬 인물임.
참고)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은 대한민국 불교 최대 종단(종파)이다. 조계종은 중국 선종이 크게 흥했던 중국 조계산에서 비롯되었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이하,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중국 선종의 조사들 중에서 중국 선종 초조 달마 제6조 혜능의 법맥을 계승한다고 한다. 도의 원적국사와 지눌 보조국사와 보우 태고국사 세 국사를 대게 종조로 보는데 정확히 누가 종조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보조국사를 종조라고 주장하는 쪽은 돈오점수를 주장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이영주)은 돈오돈수를 주장하는데 돈오점수를 주장하면, 중국 선종 제6조 혜능의 법맥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법맥과 전등을 중시하면, 사자상승 즉 스승 없이 깨닫기는 석가모니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대한불교조계종은 공식상 도의국사를 종조로, 지눌국사를 중천조로, 보우국사를 중흥조로 인정한다. 해방 이후 비구승과 분규를 겪은 대처승단은 한국불교태고종으로 분립했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수장은 종정이나 실제 행정은 총무원장이 관할한다.
참고)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은 1970년 1월에 진종(박대륜)을 종정으로 하여 출범한 대한민국의 불교 단체이다. 한국불교태고종은 해방 이후 대처승이 비구승과 분규하는 과정에 설립된 종교단체이다. 1970년 4월 8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51의 7에서 대종사 진종(振宗)이 창종하였다.[1]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태고보우(太古普愚)를 종조로,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는다.[1] 종지(宗旨)는 석가세존이 자각 각여한 각행원만의 근본 정신을 봉체하고 태고 종조의 종풍을 선양하여 전법도생을 근본으로 한다.[1]
原태고종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년) 중국에서 전래되어 조선 초기의 태고 보우국사를 종조로 삼아 청허 · 부휴의 법맥을 잇는다.[1] 종교단체 한국불교태고종 예하 기구로서 종정하에 총무원 · 감사원 · 종회와, 상벌 · 법규 · 고시의 3위원회를 두고 총무원하에 5부 3국이 있다.[1] 또한 총무원 예하에 각도 종무원과 사찰이 있으며, 총무원장은 종회의 선거를 이용하여 종정의 승인을 얻어 취임하고 주지는 선거에 의하여 종정이 임명한다.[1] 신도 조직으로는 중앙에 전국중앙신도회와 지방에 총무원 예하 지방신도회가 있다.[1]
교육 문화 사업 일환으로 1972년 2월에 《불교성전(佛敎聖典)》을 간행하였고 기관지인 《월간불교》를 발행한다.[1] 포교 활동은 봄가을로 교육자 특별 수련 대회를 개최하고 종로구 사간동 법륜사(法輪寺)를 비롯하여 각 사찰은 일요일 일제히 정기법회를 주관한다.[1]
태고종은 승려의 혼인을 자율에 맡긴다.
조계종 삼보 종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