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Ⅱ] 갈릴레오 재판 사건 (9)제2차 갈릴레오 재판(1633년)
지동설 계속 지지하다 종교 재판… 불순명에 의한 유죄 판결
천동설과 지동설 비교한 서적 출간
인기 얻으며 논란의 도마 위 올라
결국 교황청 재판에 소환되고
판결 뒤 가택 연금 상태로 살아가
조제프 니콜라 로베르-플뢰리 ‘교황청에서의 갈릴레오’.(1847·루브르박물관 소장) 갈릴레오는 유죄 판결 직후 그 자리에서 추기경 재판관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선고된 형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행위를 “잘못과 이단”이라고 선언했다.
갈릴레오는 1623년 8월에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Maffeo Barberini·1568-1644)이 우르바노 8세 교황으로 즉위한 이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하는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주목할 활동은 바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내용을 담은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1632년에 이탈리아어로 출판되었으며, 그의 후견인인 토스카니의 대공 페르디난도 2세(이전 후견인인 코시모 2세의 맏아들)에게 헌정되었습니다. 이 책은 출판 직후 대단한 인기를 얻게 됩니다.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 표지.CNS 자료사진
문제는 바로 이 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지자인 심플리치오(Simplicio), 코페르니쿠스의 지지자인 살비아티(Salviati), 그리고 지적인 보통 사람 사그레도(Sagredo) 이 세 사람 사이에서 4일 동안 벌어진 공정한 토론 형식으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보기에는 (사실상 갈릴레오 본인의 관점을 대변하는) 살비아티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옹호하는 논증들이 심플리치오가 천동설을 옹호하는 논증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방식으로 저술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지지자를 상징하는 인물의 이름인 심플리치오는 6세기 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자의 실제 이름이면서 또한 이탈리아어로 ‘바보’라는 뜻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더 심각한 도발은, 바보 심플리치오가 책의 마지막에 제시한 논증이 바로 1624년 우르바노 8세 교황이 갈릴레오에게 제시했던 논증,
즉 “하느님은 자연을 본인이 원하는 어떤 방식으로든 창조하실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어떤 물리적 가설이 반드시 필연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의 전능을 제한하는 것으로서 옳지 않다”는 논증이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노골적으로 옹호하면서 교황을 조롱하는 서적을 출판함으로써 교황에게 크나큰 모욕감이 들도록 했습니다.
게다가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가 출판된 시기는 갈릴레오에게 대단히 불리했습니다. 이 책이 출판된 1632년은 로마가 큰 정치적 위기에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우르바노 8세 교황은 30년 전쟁 와중에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외교적 의존도를 옮기던 중이었고, 그래서 새로운 보수적 동맹자들에게 가톨릭 신앙의 방어자로서 결단력과 권위를 보여 주어야만 했습니다.
교황은 갈릴레오와 같은 방종을 허용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교황은 세 명의 신학자들에게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의 신학적 문제점을 보고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특히 그들 중 한 명인 예수회원 멜키오르 인초페르(Melchior Inchofer)는 교황에게 가장 상세하면서도 갈릴레오에게 불리한 보고를 하게 됩니다.
그의 보고서는 제2차 갈릴레오 재판 이후에 「문자적 및 비유적 조사」(Tractatus Syllepticus)라는 책으로 출판됩니다.
그 결과 갈릴레오는 결국 교황에 의해 로마로 소환되고, 교황이 소집을 명령한 검사성성의 특별위원회로부터 다시 종교 재판을 받게 됩니다.
갈릴레오는 1633년 4월 12일 첫 번째 법정 진술을 시작으로 6월 21일 네 번째 진술까지 종교 재판의 피고인으로서 네 차례 법정 진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6월 22일, 68세의 노인인 갈릴레오는 결국 10명의 추기경 재판관들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 판결을 받은 이유는 한마디로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완전히 포기하고 그것을 말이나 글로써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말 것이며 이 명령을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구속에 처해질 것이다”는 1616년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명령에 불순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1616년에 약속한 순명을 어긴 죄로 금고형(재판 이후에 가택 연금형으로 감형되었다)을 선고받았고, ‘건전한 속죄’의 의미로 향후 3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참회의 일곱 시편을 암송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유죄 판결 직후 갈릴레오는 그 자리에서 ‘추기경 재판관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선고된 형을 받아들였고,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에 대한 온전한 순명을 맹세했으며, 자신이 저지른 “잘못과 이단 행위를 저주하고 혐오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참고로 과학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흔히 대중들에게 알려진 “그래도 지구는 돈다”(Eppur si muove)라는 말을 갈릴레오가 했다는 증거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재판 이후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는 금서 목록에 오르게 되고 코페르니쿠스, 케플러의 저서들과 마찬가지로 1835년에야 비로소 금서에서 풀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가택 연금 상태로 살아갑니다.
과거의 많은 계몽주의자들과 문학가들은 갈릴레오가 교회 당국에 의해 고문을 받고 감옥에 구속을 당한 것처럼 주장했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많은 일반 대중들이 이것을 당연시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과학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갈릴레오 재판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피노치아로(Finocchiaro) 교수는 “갈릴레오의 고문과 구속에 관한 신화는 명백한 신화다.
실제로는 거짓인데 사실처럼 보이는 이 생각들은 덜 교육받은 사람들과 부주의한 학자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두 과학에 관한 담론 및 수학적 증명」 표지.김도현 신부 제공
그는 가택 연금 와중에 1638년 과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물리학 서적 중 하나로 꼽히는 명저인 「새로운 두 과학에 관한 담론 및 수학적 증명」(Discorsi e Dimostrazioni Matematiche Intorno a Due Nuove Scienze)을 출판합니다.
이 책 역시 전작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와 비슷하게 심플리치오, 살비아티, 사그레도 세 사람 간의 토론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심플리치오가 더 이상 바보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과 천문학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책은 갈릴레오가 평생 연구한 주제인 물체의 운동(저항, 가속도, 포물선 운동, 진자 운동 등)과 관련된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현대적 의미의 물리학을 정립한 최초의 서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4년 뒤인 1642년 1월 8일에 그는 77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숨을 거둡니다.
김도현 바오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