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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5. 묵상글 들 ( 부활 5주 금요일-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릴 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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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5.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3
부활 5주 금요일-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릴 때
주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것 중에서 제일 중요한 말씀을
오늘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이 제일 중요한 말씀이고 계명이라고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다른 중요치 않은 것 때문에 제일 중요한 계명을 어깁니다.
곧 제일 중요한 계명인 사랑을 덜 중요하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때문에
어기고 형제를 미워하는데 저뿐 아니라 여러분 중에도 계실 겁니다.
예를 들어, 저는 생태 영성의 주보성인인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물 한 방울이나 종이 한 장도 함부로 쓰지 않고,
세제나 일회용이나 플라스틱 제품을 가능한 한 쓰지 않습니다.
그런 저이기에 누가 그러지 않는 것을 보면 화가 나고 미웁곤 했습니다.
그런데 뭡니까? 생태계와 자연을 사랑하면서 인간은 미워하고,
제일 큰 계명인 인간 사랑을 놓치고 이웃을 미워하는 우를 범하는 거지요.
그리고 길을 가다 보면 반려견을 동반한 사람이 개의 똥을 치우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때 그것을 공중예절을 잘 지킨다고 좋게 볼 때도 있지만
비딱하게 볼 때는 ‘그래 개의 똥은 치우면서 인간에 대해서는
너무 무관심 하는 것은 아니냐?’고 속으로 비판적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비판하면서 똑같은 짓, 곧 사람보다 개를 더 사랑한 것을 저도 한 거지요.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이런 면에서
성숙한 초기 사도들의 교회를 보게 되어 참으로 흐뭇합니다.
어느 공동체나 별 거 아닌 것을 가지고 공동체를 뒤흔드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초대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행전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킨 짓이란 할례 받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주장을 일부 유다 지방 신자들이 한 거지요.
그런데 할례 받아야 구원 받는다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할례 안 받으면 구원 못 받는다는 얘기이고 할례가 곧 구원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이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은 어떤 공동체나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부 주장이 있을 때 전체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미성숙하면 할수록 그런 사람은 아주 작은 것을 가지고 문제를 크게 만들고,
미성숙하면 할수록 그런 공동체는 문제를 옳게 해결하지 못하고
그런 사람에 의해 흔들리고, 깨지고, 파괴됩니다.
반면 성숙한 공동체는 일부가 잘못한 것을 옳게 판단하여
일부의 잘못으로 그치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오히려
공동체가 성장하고 풍파에 좌우되지 않고 공고해집니다.
이런 면에서 초대 교회 공동체는 이 소동으로 인해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의 아류에서 세계 종교로 성장케 되고,
앞으로 이단들과의 싸움에서 흔들리지 않을 기틀을 놓습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는 우리말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우리 공동체가 사도들의 초대 교회처럼
어떤 짓이 물을 흐리는 짓인지 식별할 수 있고,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미꾸라지라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느냐 그것입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초대 교회처럼 성령에 이끌리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사랑의 계명에 공고히 입각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미꾸라지를 용으로 생각하여 제어치 못 하고,
그 분탕질에 공동체는 흔들리고 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꾸라지를 식별할 눈과 제어할 힘을 주십사고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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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5.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주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아주 간결하게 직설적으로 전달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7).
이 말씀 안에는 단순하지만 매우 단호한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을 명령하실 때 그분은 주저하거나 머뭇거리는 일이 없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실 터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계명은 이것 뿐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고 하였었지요. 이웃을 사랑하되,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이 예수님에게서는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으로 변합니다. 이제 이웃사랑의 기준은 더 이상 내가 아니고 그분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생명은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 타인을 구한 이야기들은 듣는 이를 숙연하게 만들지요.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타인에게 선물하는 마음에는 그가 어느 종교를 가지고 어떤 이념으로 살아가건 사랑이 실재합니다.
제1독서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사도회의의 결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사도 15,26).
먼저 사도들과 원로들은 안티오키아에 복음의 씨를 뿌린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보증합니다. 예수님 이름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이라는 이 보증은 그들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가장 큰 사랑"의 장본인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곧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이고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이라는 뜻이지요.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사도 15,29).
참으로 간명하면서도 사려 깊은 결정이 안티오키아 신생 교회에 전달됩니다. 몇 가지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틀을 잡아 주고는 그 안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허용하고 있지요. 흔히 초보자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노파심으로 중언부언 하지 않고 군더더기도 없습니다.
사도들과 원로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이나 할례 등의 유다교 관습을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이를 있는 그대로 전합니다. 유다교의 뿌리를 둔 자신들에게도 버거웠던 짐을 새 구성원들에게 굳이 지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들의 기초는 모세의 율법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고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진리를 전하면서 조건과 부연 설명을 덧입혀 자꾸만 규정을 더 크고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면 오히려 하느님의 목소리인지 되짚어 보야야 합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은 벗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답니다. 그래서 벗님을 친구라 여기며 직접 벗님을 뽑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씀을 통해 매일 아버지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바를 하라."는 유명한 권고를 남기셨지요. 오늘 내가 남을 위해 목숨은 못 내어 놓을지라도 예수님이 나를 친구라 부르며 해주시는 그 사랑을 생각하며 그렇게 서로서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로써 우리도 서로 친구가 되어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서로의 짐을 덜어 주고, 생명을 북돋우며, 기쁨을 나누게 될 것이니까요.
▶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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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5.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3)
오늘 복음 묵상글은 한 여류작가가 체험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사흘만 기다리세요!'
미국을 방문한 한 여류작가가 뉴욕 거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를 우연히 만났다. 할머니는 남루한 옷차림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나약한 모습이었는데, 얼굴은 온통 즐거운 표정이었다.
여류작가는 꽃을 고르면서 할머니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할머니, 뭐가 그렇게 즐거우신가요?"
그러자 할머니는 한껏 미소를 띤 얼굴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왜 즐겁지 않겠어요.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요."
여류작가는 말했다.
"번내에 대해 마음 편히 생각하시는 재주가 있으신 것 같군요."
그러자 할머니는 여류작가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가장 슬픈 하루였다. 그런데 사흘 후 부활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저는 불행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사흘을 기다린답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모든게 정상으로 변해 있거든요."
할머니의 답변은 여류작가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슬픈 일이 있을 때 사흘을 기다린다?'
얼마나 평범하면서도 철학적인 삶의 태도입니까...
지금의 번뇌와 고통을 미래에 찾아올 즐거움에 대한 믿음으로 녹일줄 아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
여러분도 즐거움을 위해 3일만 기다려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 사이에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잋혀지진 않을까요?]
한 여류작가를 깜짝 놀라게 만든 할머니의 모습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온전히 믿는 살아있는 믿음을 봅니다.
친구인 우리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친구이신 예수님을 믿는 살아있는 참신앙인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도 나의 믿음과 신앙과 사랑이 이처럼 죽지 않고 살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사도15,26)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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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5.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15,22-31
요한 15,12-17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복음 15장 12절)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종종 성인(聖人)들의 생애를 통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청소년들의 벗이요 스승이요 아버지셨던 돈보스코는 아이들을 만날 때 마다 환하게 웃으면서,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목숨바쳐 아이들을 사랑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동시에 아이들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돈보스코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살짝 맛볼 수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기쁘게 해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찼습니다.
또한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평생 간직하고픈 멋진 추억의 사진들을 남겨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돈보스코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영혼을 하느님 마음에 들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한 그는 아이들 사이에 앉아 있을 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마주앉아 있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십니다.
태어난 지 한달 정도 된 아기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돌아 누울 수도,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먹여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 아기는 부모에게 아무 것도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부모의 손길만을 필요로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그 아기를 사랑합니다.
존재 자체로 사랑합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애지중지, 극진히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사랑받을만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뭔가 해드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그분은 그냥 존재 자체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야말로 조건없는 사랑입니다.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콜코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명료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미소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다정하고 겸손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사람들을 즉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이 어딘가 나타나면 즉시 사람들이 뺑 둘러쌌습니다.
연세도 지긋하셔서, 허리도 굽으시고, 주름투성이의 수녀님 얼굴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하느님의 얼굴과 사랑을 봤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한 존재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녀를 잠시라도 만난 사람들은 그녀의 깊은 눈과 마주치며,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즉시 알수 있었습니다.
다들 수녀님께서 지금 이 순간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나와 일대일의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십니다.
그분은 나와 함께 개인적으로 머물고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십니다.
나와 함께 앉아 있는 순간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십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계시며, 나보다 더 나를 극진히 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느님의 본질은 증여(贈與)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결핍투성이인 우리들에게 무엇 하나 더 주지 못해 안달인 분이십니다.
주다 주다 못해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늘 우리에게 반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나라는 존재에 완전 매료되시는 분입니다.
나라는 존재에 푹 빠지시는 분입니다.
나란 존재에 죽고 못사는 분, 결국 나 때문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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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5.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15,22-31
요한 15,12-17
십자가의 가난과 포용력의 관계
오늘 아침식사를 신부님 한분과 함께 하면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어떤 원로신부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처음엔 그 분의 결단력과 성품에 대해 좋은 평을 서로 늘어놓았습니다.
그 분은 정말 가난하게 사시고 교회 정신에 맞게 성인처럼 사시는 분입니다.
개인적인 삶으로는 누구도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단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포용력의 부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함께 식사하던 신부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분은 실패한 경험도 없고 당신이 완벽하셔서 다른 사제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수긍이 가는 말이다 싶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모습이 저의 모습이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사는 삶이 모범이라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살도록 권유하고 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안 될까?’라는 생각을 많이 해 왔습니다.
이는 아마 나와 같은 수준의 사람을 만들어서 나를 이해해주는 누군가를 갖기를 원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같은 사제들을 보면서 많이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엔 제가 생각하기에 좋지 않은 모습들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냥 내버려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사제가 목자로서 신자들을 잘 이끌면 되지.’라고 생각하여 사제들보다는 신자들에게 먼저 신경을 쓰며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사제들보다 신자들이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그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제 자신을 돌아보니 저도 혼자서는 잘 살지만 함께 받아들이며 사랑하는 형제적인 모습을 이루는 것에는 많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에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은 모두가 성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부족한 사람들도 있었고 좀 더 완전한 사람들도 있었고, 유다와 같은 배신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단을 성인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로 구성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보통 사람들이 모여 당신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모범을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포용하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유다는 그런 면에서는 다른 사도들의 스승이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거짓말쟁이이며 도둑이고 배신자인 유다를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가 배신자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모두가 유다를 형제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그렇게 참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종이 아닌 친구로 부르시는 것을 보면서 정말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흠이 많은 인간을 친구로 여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범은 당신의 생명까지도 벗을 위해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신다는 뜻은 자신을 온전히 비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은 자신을 온전히 남에게 주어서 자신을 비웠기에 누구도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는 무한한 포용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나로 가득 찰수록 사랑이 줄어들어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있으면 부딪혀서 감정이 상하느니 그냥 외면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누구 하나 놓치지 말고 품어줄 수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 넓은 마음은 또한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랑의 마음에서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상대방을 감싸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비워버린 십자가의 예수님을 묵상해봅시다.
당신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고 주실 수 있었던 사랑, 그렇게 자신을 비울 줄 아는 사랑을 가져야만 우리도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가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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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5. 새벽을 열며.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빠다킹신부님.
인천과 김포지역에 산발적으로 코로나19 전염병이 재확산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신자와 주민안전을 위해 5월 15일(금) ~ 22일(금)까지 또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지만, 모두의 안전을 위한 것이기에 성지도 이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물론 저 혼자서 개인적으로 미사는 하겠지만, 성지에 공식적인 11시 미사는 없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 오늘의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20년 전, 전 세계적으로 자폐증 환자가 급증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시기에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이 여기에 푹 빠지게 되었지요. 그러자 인터넷이 자폐증을 부추긴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권위 있는 옥스퍼드 대학의 연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인터넷의 해로움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주장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서로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두 사건이라도 우연히 동시에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어느 해에 황새의 수가 증가했는데 동시에 아기 출산도 증가했습니다. 그렇다면 황새의 숫자 증가가 아기 출산과 큰 연관이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믿을까요? 황새와 사람은 전혀 연관이 없다면서, 억지로 꿰맞추지 말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판단의 오류 속에서 사는 우리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무조건 옳다는 식으로 주장한다는 것이지요.
신앙 안에서도 커다란 착각이 있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선택했다는 착각입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은 어렵고 힘든 상황이 되면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제가 당신을 선택했는데, 당신께서는 저를 위해서 도대체 무엇을 하십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믿는 사람은 다른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마치 고통 속에 있었던 욥이 원망하는 아내에게 했던 말처럼,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 2,10) 라면서 겸손한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겸손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찾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괜히 뽑아 세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어서 주님과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역시 주님에게 어떤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 자신에게 더 큰 혜택이 돌아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이 계명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이 계명을 따르지 않고서는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의 선택을 외면하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먼저 선택하셨음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분명히 더 좋은 선물이 주님의 은총과 함께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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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외모나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나와 똑같은 영혼을 알아보았기에 사랑하는 것이다(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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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운 것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학창 시절에는 공부 잘하는 아이를 보면 부럽고, 운동 잘하는 아이를 봐도 부럽고, 그림 잘 그리는 아이도 엄청 부럽고, 말 잘하는 아이를 보면 특히 부러웠습니다. 이 밖에도 부러운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다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되면서 그 부러움을 내려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내 삶에 충실하면 충분히 만족스럽게 살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뭐든 1등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공부하고, 조금이라도 좋다고 하면 다 그리로 몰립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즉, 자신의 삶에 충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아닐까요? 특히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내 삶의 한 자락을 차지하게 될 때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욕심, 질투, 비교, 열등감 등은 나로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입니다. 이를 벗어던질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요? 사랑이 있으면 괜히 욕심을 부릴 일도 없고, 질투하지도 않으며, 비교를 통한 열등감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딱 하나의 계명을 큰소리로 외치셨나 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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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5. 이영근 신부님.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 양주 올리베따노
오늘도 우리는 여기 공동체에 모여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함께 모여 살고 있는가요?
우리가 꼭 함께 모여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대체 왜 모여 살아야 하나요?
그 이유를 오늘 <복음>에서는 “서로 사랑하기 위함”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모여 살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려면, 먼저 함께 있어야 하니까요. 곁에 함께 있지 않고서 서로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함께 모여 사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을 해야 서로 사랑할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되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지 말고,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벗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왜, 벗을 위한 사랑이 원수나 죄인을 위한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대체 “벗”이 누구이기에, 그러실까? 나에게는 그러한 벗이 있는가?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벗”이라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벗이 되는가?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시며’(요한 1,15 참조), 우리를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친구란? 깊은 친교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친숙하고 깊은 관계로 사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고, 함께 깊이 믿기에 예수님과 서로 친구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당신의 계명 실천을 통해, 당신과의 신의를 몸으로 드러내면서 친구임을 드러냅니다. 당신이 하신 것처럼,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친구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벗”인 우리 주님과 함께 즐거운 날 되시기 바랍니다.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당신의 벗, 당신 것으로 뽑으셨습니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사랑, 당신의 자애와 호의를 입히셨습니다.
당신 진리를 가르치시고, 당신을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양식을 먹이셨습니다.
저는 끝없이 빗나가지만, 당신은 끝없이 충실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의 소명을 살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으로 세상을 축복하게 하소서.
저의 전 존재, 전 생애가 당신의 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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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5. 부활 5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증거 되어야 하고, 기회는 많지만 실제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말하지만 자신을 죽이는 희생의 사랑보다는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유를 주지 못하고 일방적이며, 상대를 속박할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랑을 이유로 붙잡고 집착하며 기대를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상처를 주고받으며 후회합니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 안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2-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데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심한 모욕과 침 뱉음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선언하시며 당신 친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벗으로 삼으시고 벗을 위해 목숨을 내 놓으셨습니다. 사실 목숨을 내 놓는다는 것은 모두를 바쳤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미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 마지막 남은 것을 주는 행위입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모두를 내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할 기회는 끊임없이 주어지지만 지금 놓치면 그 기회는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다음에 오는 기회는 또 다른 기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나의 일방적인 방식으로 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너무 많은 사랑을 요구하여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고, 아무런 구속이나 강요가 없이 자유를 주는 사랑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는 날로 기뻐하고 자유롭도다. 사랑은 짐을 모르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기에…”(성녀 젤뚜르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자유를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사랑할 수 있게 하려고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유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게 사랑의 노예가 되는 데 있습니다. ” ... 사랑은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잘 꾸며놓은 연극, 그저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 번 해 본 빈말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피에르신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나를 뽑아 세우셨으니 내가 예수님께 맞춰야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뽑으신 분에게 맞게 나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자유를 주는 사랑, 고통을 감당하는 사랑에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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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5.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2-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여기서 ‘친구들’이라는 말은 ‘이웃’을 가리키는 말인데,
산상 설교를 보면,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이기 때문에(마태 5,43-48) ‘사랑 실천’의 관점에서는
‘친구들’이라는 말은 사실상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의 친구’ 라는 말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앞의 10절에,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이” 라는 말은,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충실한 신앙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방법인데, 우리는 이 말씀을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은 큰 사랑을
서로 실천하여라.” 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또 이 말씀은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은 큰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 그 사랑이고(마태 22,37),
‘이웃 사랑’에서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그 사랑입니다(마태 22,39).
<‘목숨’이라는 말 때문에 크게 부담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항상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강조점’은 ‘목숨’이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큰 사랑이든지 작은 사랑이든지 간에 모든 사랑은 전부 다 위대하고 고귀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찬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3).”
(몸을 넘겨준다는 말은 목숨을 내놓는다는 뜻입니다.)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은 큰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해설과 같습니다.
목숨을 내놓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중요합니다.
실제로는 사랑이 없는데도 자기 목숨을 내놓는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말은 과장된 표현으로 생각되지만,
어떻든 사랑 없이 목숨을 내놓는 것은 사랑하는 척 하는 위선일 뿐입니다.
반대로 정말로 사랑한다면 목숨보다 더 크고 더 중요한 것도 내놓을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사람들을 위해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은 일을(요한 6,9)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예로 삼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를 모두 내놓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먹을 것을 남겨 놓지 않고 모두 내놓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목숨을 내놓은 것과 같은 가치가 있는 행동입니다.
“한 끼 식사에 해당되는 빵과 물고기를 내놓는다고 해서 굶어죽지는 않는다.”,
또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어찌 목숨과 같은가?”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아이의 마음과 사랑을 생각하면, 목숨을 내놓은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라는 말을 했습니다(요한 6,9).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오천 명 이상의 군중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즉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아이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를 모두 내놓은 것은,
계산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계산하지 않는 것입니다.)
계산하지 않고 오직 사랑을 위해서만 사랑을 실천할 때,
그때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은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명령’이라는 말과 ‘사랑’이라는 말은,
또 ‘명령’이라는 말과 ‘친구’ 라는 말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줍니다.
(서로 모순되는 말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랑이란, 정말로 내가 원해서 하는 것, 또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와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할 텐데, 사랑을 명령할 수 있을까?
또 만일에 예수님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한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음속으로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위선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왜 ‘명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그냥 ‘권고’나 ‘당부’ 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이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말씀하셨으면서
왜 ‘명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명령은 ‘종’에게만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랑이란 원래 강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강제로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명령이 아니라, 사실은 ‘간곡한 호소’입니다.
‘명령’이라는 표현은, ‘사랑의 계명’은 구원과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할 기본 계명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기도 하고,
동시에 모든 사람이 구원과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를 바치실 때에
당신의 그 간절한 심정을 이렇게 나타내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따라서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은 ‘주님의 명령’이면서
동시에 당신이 얼마나 인간들을 열렬하게 사랑하시는지를 나타내는
일종의 ‘사랑의 고백’과도 같은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명령만 하고 멀찍이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이 먼저 그 명령을 실천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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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5. 부활 제5주간 금요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과 친구가 되는 길을 예수님께서 친히 알려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들으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예수님 덕택에 우리는 예수님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친구가 된 것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관계라는 것이 참 신비롭습니다. 한 사람을 좋아하고 의지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삶조차 파탄 나고 어지럽게 될 때가 있는가 하면, 파탄 난 삶이 새롭게 고쳐지고 다듬어져 더욱 아름다운 삶으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실은 둘만의 일이 아니라 둘의 만남 속에 드러나는 기대하지 않은 창조 활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로 생각이 분명 다른데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하나의 새로운 생각으로 거듭나기도 하다가, 생각이 같아서 만났는데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합니다.
둘의 만남은 늘 또 하나의 다른 존재를 불러오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안에서 수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을 소개하시고 선포하시며,
그 아버지와 한 분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창조적 자리를 함께 얻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자신의 마음 안에 예수님과 한 분이신 아버지의 자리도 마련하는 여유로운 일입니다.
서로 만나면 만날수록 우리 마음의 자리는 더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예수님을 만날수록 사랑의 마음은 더 커져 더 많은 이를 품고 껴안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한 관계의 신비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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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5. 부활 제5주간 금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기(氣)’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기를 느끼기도 하고, 체험하기도 합니다. 자석을 통해서 우리는 기를 볼 수 있습니다. 종위 위에 있는 쇳가루는 자석에 따라서 움직이게 됩니다. 자석에는 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잘 먹어도 기운이 없는 사람이 있고, 잘 먹지 못했지만 생기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가 센 사람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기가 약한 사람은 넘어지면 ‘탓’을 합니다. 기는 하나의 문화를 이루기도 합니다. 철학에서는 경험론, 합리론, 실존주의가 되기도 합니다. 문학에서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근대주의, 후기 근대주의가 되기도 합니다. 예술에서는 고린트, 바로코, 로코코, 고딕, 비잔틴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신학에서는 정통신학, 정치신학, 여성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기가 흘러가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기는 잘 사용하면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기는 잘못 사용하면 광기(狂氣)가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기도 합니다. 나치즘, 파시즘은 기가 잘못 사용된 것입니다.
코로나19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기운을 주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시작은 간호사관학교의 졸업식에서였습니다. 졸업한 사관학생들은 모두 자원해서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은 구호를 외쳤습니다. “힘내세요! 대구, 경북, 힘내세요! 대한민국!” 학생들의 생기발랄한 모습과 힘찬 구호는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다음 응원을 BTS(방탄소년단)에게 부탁했습니다. 방탄소년단도 자신들의 기운을 힘찬 구호로 나누어주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과 전 세계의 팬들에게 코로나19를 이겨내자고 기운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방탄소년단은 손홍민 선수에게 다음 응원을 부탁했습니다. 손홍민 선수는 봉준호 감독에게 부탁했습니다.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입증하기는 힘들겠지만 응원의 메시지는 분명 코로나19를 극복하는데 기운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기가 약한 사람은 코로나19로 인해서 두려워하고, 걱정합니다. 그러니 잠을 잘 못자고, 잘 먹지도 못하고, 힘들어합니다. 아직 슬픔이 오지도 않았는데 기쁨을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오늘 옷이 젖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일 내릴 비 때문에 오늘 우산을 펴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어제 내린 비인데도 오늘 옷이 푹 젖기도 합니다. 아직 비가 오지 않는데 걱정의 우산을 펴곤 합니다.
공동체에 분열과 혼란이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 이방인은 안 된다.”는 말로 혼란을 부추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사람을 보내어 기운을 넣어줍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명쾌하게 정리해 주었습니다. 공동체는 사도들의 말에 기운을 얻었고, 신앙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운을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기운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세상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너희가 세상에서 용서하면 하늘에서도 용서 받을 것이다.” 제자들은 신이 나서 거리로 나갔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은 무엇을 통해서 기운을 얻을까요? 보약, 재물, 명예는 아닙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기운을 얻을 수 있습니다.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합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얻은 기운을 이웃에게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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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5.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 예찬禮讚-
오늘은 성 파코미오 아빠스 기념일이자 조선 최고의 성군聖君이라 일컫는 세종대왕 탄신일이자 더불어 스승의 날이기도 합니다. 민족의 스승 세종대왕을 통해 스승의 진가를 새롭게 확인하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백성을 사랑했던 애민愛民의 성군이었기에 훈민정음, 한글의 창제도 가능했음을 깨닫습니다. 또 오늘은 우리 요셉 수도원의 원장인 최파코미오 신부의 영명축일이라 경사가 겹친 느낌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행복하리란 예감이 듭니다. 오늘 복음도 어제와 중복됩니다.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롭게 깨닫습니다. 강론 제목도 세 번째 비로소 확정되었습니다. “사랑의 학교-평생 사랑의 학인-”으로 정했다가, “사랑의 여정, 사랑의 학교-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은 사랑뿐이다-”로 했다가, 마침내 “서로 사랑하여라-사랑 예찬禮讚-”으로 정했습니다.
어제도 참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수도원을 방문하거나 면담고백성사를 본 분들에게 사랑의 표현으로 두편의 시를 출력해 선물하여 큰 소리로 읽게 했는데 너무 공감하며 기뻐했습니다. 최근 시중 저 역시 가장 아끼는 아주 짧은, 금방 외워지는 시詩라 다시 나눕니다.
-“사람은 꽃이다/늘 피는 꽃이다”-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그냥 오세요/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산이 산에 가다니요/그냥 있으세요/당신은 산보다 더 좋은 산이예요”-
참으로 사랑스런 꽃같은 사람이요, 아니 꽃보다 더 예쁜, 산보다 더 좋은 산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아름답고 품위있고 향기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어제 저녁 식사중 파코미오 원장 축일 축하식도 “서로 사랑하라”는 오늘 복음 말씀이 그대로 실현된 참 아름다운 분위기라 사진도 여러 장 찍었습니다.
사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행복하게 합니다. 말그대로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사랑의 여정에, 사랑의 학교인 인생이라 평생 배워가야할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입니다. 사랑은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생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만병의 근원이 사랑결핍에 있고, 만병통치약은 사랑뿐입니다. 수십년간 강론중 가장 많이 나눴던 주제가 사랑입니다. 다음 행복기도 역시 ‘사랑의 눈’이 열렸을 때의 행복한 상태를 고백한 시입니다.
-“주님/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하늘 나라/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신록의 생명으로 빛나는 5월의 아름다운 산야山野는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복음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주님의 사랑이 그대로 표현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계명은 그대로 사랑의 명령이 됩니다. “되면 하라”가 아닌 “하면 되라”입니다. 사랑하면 사랑됩니다. 마냥 될 때까지 기다리면 언제 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을 실행하는, 사랑의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랑은 추상 명사가 아닌 실천 동사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말마디에서 평생 주님께 배워 실천해야 할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눈만 열려 실천하기로 하면 널려 있는 사랑입니다. 끊임없이 겸손히 자기를 비워내 나누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런 사랑이 자라나 목숨을 내놓은 순교의 사랑, 헌신의 사랑도 가능합니다.
사랑을 실천할 때 주님의 친구요 우정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라니 얼마나 영예로운 호칭인지요. 참으로 주님의 친구답게 아름다운 사랑, 품위있는 사랑, 향기로운 사랑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자랑스럽고 고마운 것은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택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의 열매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도 사랑의 열매요 주님은 물론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도 이런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아버지께서도 다 들어 주십니다. 이런 사랑의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바오로입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친구 두 사도입니다. 사랑은 또한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참으로 현명한 판단은 성령의 은총, 사랑에서 나옵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현명한 결정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가지 외에는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하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처럼 짐을 최소화하여 가볍게 해주는 것이 바로 실천적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틀림없이 더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예수 성심의 사랑이 궁극의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여정, 사랑의 학교입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사랑의 학교에서 평생 배워야 할 사랑이요, 평생 사랑의 여정에서 날로 평생 친구인 예수님과 우정의 사랑을 깊이해야할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의미요 보람입니다. 인생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도, 서로 사랑에 대한 답도, 이런 주님과 우정의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 우정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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