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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마 경(S12:70)
♦ 10. susimasuttaṃ (SN 12.70) 수시마 경(S12:70) Susīma-sutta
♦ 70. evaṃ me sutaṃ —
ekaṃ samayaṃ bhagavā rājagahe viharati veḷuvane kalandakanivāpe.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무셨다.
(i)
tena kho pana samayena bhagavā sakkato hoti garukato mānito pūjito apacito lābhī
cīvara-piṇḍapāta-senāsana-gilānappaccaya-bhesajjaparikkhārānaṃ.
bhikkhusaṅghopi sakkato hoti garukato mānito pūjito apacito lābhī
cīvara-piṇḍapāta-senāsanagilānappaccaya-bhesajjaparikkhārānaṃ.
aññatitthiyā pana paribbājakā asakkatā honti agarukatā amānitā apūjitā anapacitā,
na lābhino cīvara-piṇḍapāta-senāsanagilānappaccaya-bhesajjaparikkhārānaṃ.
2. 그 무렵 세존께서는 존경받았고 존중받았고 공경받았고 숭상받으셨으며
의복과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얻으셨다.
비구 승가도 역시 존경받았고 존중받았고 공경받았고 숭상받았으며
의복과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얻었다.
그러나 외도 유행승들은 존경받지 못했고 존중받지 못했고 공경받지 못했고 숭상받지 못했으며
의복과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얻지 못하였다.
(ii)
♦ tena kho pana samayena susimo paribbājako rājagahe paṭivasati
mahatiyā paribbājakaparisāya saddhiṃ.
atha kho susimassa paribbājakassa parisā susimaṃ paribbājakaṃ etadavocuṃ —
3. 그 무렵 수시마 유행승400)이 많은 유행승들의 회중과 함께 라자가하에 살고 있었다.
그때 [120] 수시마 유행승의 회중들이 수시마 유행승에게 이렇게 말했다.
400) 수시마 유행승(Susīma paribbājaka)이 누구인지 주석서와 복주서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주석서는 단지 “베당가에 능한 현명한 유행승(vedaṅgesu kusalo paṇḍitaparibbājako)”(SA.ii.124)이라고만 적고 있다. 그는 본경 §§16~17의 오온의 무상 · 고 · 무아와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에 관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SA.ii.127)
“ehi tvaṃ, āvuso susima, samaṇe gotame brahmacariyaṃ cara.
tvaṃ dhammaṃ pariyāpuṇitvā amhe vāceyyāsi .
taṃ mayaṃ dhammaṃ pariyāpuṇitvā gihīnaṃ bhāsissāma.
evaṃ mayampi sakkatā bhavissāma garukatā mānitā pūjitā apacitā lābhino
cīvara-piṇḍapātasenāsana-gilānappaccaya-bhesajjaparikkhārānan”ti.
“이리 오시오, 도반 수시마여. 그대는 사문 고따마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으시오.
그래서 그대가 법을 철저히 배운 뒤 우리에게 말해주시오.
우리도 그 법을 철저히 배워서 재가자들에게 설해줄 것이오.
그러면 우리도 존경을 받고 존중받고 공경받고 숭상받게 되고
의복과 탁발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얻게 될 것이오.”
“evamāvuso”ti kho susimo paribbājako sakāya parisāya paṭissuṇitvā
yenāyasmā ānand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āyasmatā ānandena saddhiṃ sammodi.
sammodanīyaṃ kathaṃ sāraṇīyaṃ vītisār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susimo paribbājako āyasmantaṃ ānandaṃ etadavoca —
“icchāmahaṃ, āvuso ānanda, imasmiṃ dhammavinaye brahmacariyaṃ caritun”ti.
4. “알겠습니다, 도반들이여.”라고 수시마 유행승은 자신의 회중에게 대답한 뒤
아난다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아난다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수시마 유행승은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아난다여, 나는 이 법과 율에서 청정범행을 닦고자 합니다.”
(iii)
♦ atha kho āyasmā ānando susimaṃ paribbājakaṃ ādāya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ānando bhagavantaṃ etadavoca —
“ayaṃ, bhante, susimo paribbājako evamāha —
‘icchāmahaṃ, āvuso ānanda, imasmiṃ dhammavinaye brahmacariyaṃ caritun”ti.
“tenahānanda, susimaṃ pabbājethā”ti .
alattha kho susimo paribbājako bhagavato santike pabbajjaṃ, alattha upasampadaṃ.
5. 그때 아난다 존자는 수시마 유행승을 데리고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수시마 유행승이
'도반 아난다여, 나는 이 법과 율에서 청정범행을 닦고자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수시마를 가하게 하라.”
수시마 유행승은 세존의 곁에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401)
401) 주석서에 의하면 수시마는 '아난다 존자는 가장 많이 배운 제자이고, 세존은 여러 곳에서 설한 법들을 자주 그에게 말해준다. 그러니 그의 문하에 있으면 내가 법을 빨리 배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여서 아난다 존자에게 다가갔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아난다 존자는 수시마가 유행승들을 가르치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는 출가한 뒤에 교법(sāsana)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알았기 때문에 그를 세존께 데리고 간 것이다. 세존께서는 수시마가 출가하여 법을 훔치려고 한다(dhammaṃ thenessāmi)고 아셨지만 수시마가 곧 마음을 바꾸어서 아라한과를 얻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아난다 존자에게 그를 출가시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SA.ii.125~126)
다른 경들에 의하면 외도였던 자가 출가하려면 넉 달의 견습기간을 거쳐야 하는데(본서 「나체수행자 깟사빠 경」(S12:17) §12와 D8 §24; M57 §14;『율장』의 『대품』(Vin.i.69) 등) 여기서 세존께서는 그런 언급 없이 그를 출가시키고 계신다.
『율장 주석서』에 의하면 이 규정은 나체 수행자(nagga-paribbājaka, acelaka 등)였던 외도들이 교단으로 출가할 때만 적용되었다고 한다.(VinA.v.990~991) 수시마는 나체 수행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규정을 적용시키지 않으셨을 것이다.
♦ tena kho pana samayena sambahulehi bhikkhūhi bhagavato santike aññā byākatā hoti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mā”ti.
6.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세존의 곁에서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꿰뚫어 압니다.'라고 구경의 지혜를 드러내었다.
(iv)
assosi kho āyasmā susimo — “sambahulehi kira bhikkhūhi bhagavato santike aññā byākatā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mā”ti.
atha kho āyasmā susimo yena te bhikkhū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tehi bhikkhūhi saddhiṃ sammodi.
sammodanīyaṃ kathaṃ sāraṇīyaṃ vītisār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susimo te bhikkhū etadavoca —
7. 수시마 존자는 [121] 많은 비구들이 세존의 곁에서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꿰뚫어 압니다.'라고
구경의 지혜를 드러내었다는 것을 들었다.
그때 수시마 존자는 그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그 비구들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수시마 존자는 그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saccaṃ kirāyasmantehi bhagavato santike aññā byākatā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mā”ti?
“evamāvuso”ti.
“존자들이 세존의 곁에서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꿰뚫어 압니다.'라고
구경의 지혜를 드러내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402)
“그렇습니다, 도반이여.”
402) “이 비구들은 세존으로부터 명상주제를 받아 3개월간 우기철의 안거(vassa)에 들어갔다. 안거동안 그들은 열심히 정진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안거가 끝나자 그들은 세존께 다가가서 그들의 증득을 말씀드린 것이다.
'구경의 지혜(aññā)'란 아라한과(arahatta)의 이름(nāma)이다. '드러내었다(vyākatā).'는 것은 말씀드렸다(ārocitā)는 뜻이다. 수시마 존자는 '구경의 지혜란 이 교법(sāsana)에서 '으뜸가는 권위(parama-ppamāṇa)'여서 핵심이 되는(sāra-bhūtā) 스승의 주먹(師券, ācariya-muṭṭhi]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나는 그들에게 물어서 사실을 확인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SA.ii.126)
'스승의 주먹'에 대해서는 본서 제5권 「병 경」(S47:9) §7의 주해를 참조할 것.
♦ “api pana tumhe āyasmanto evaṃ jānantā evaṃ passantā
anekavihitaṃ iddhividhaṃ paccanubhotha —
ekopi hutvā bahudhā hotha, bahudhāpi hutvā eko hotha;
āvibhāvaṃ, tirobhāvaṃ, tirokuṭṭaṃ tiropākāraṃ tiropabbataṃ asajjamānā gacchatha,
seyyathāpi ākāse; pathaviyāpi ummujjanimujjaṃ karotha,
seyyathāpi udake; udakepi abhijjamāne gacchatha,
seyyathāpi pathaviyaṃ; ākāsepi pallaṅkena kamatha,
seyyathāpi pakkhī sakuṇo;
imepi candimasūriye evaṃmahiddhike evaṃmahānubhāve pāṇinā parimasatha parimajjatha,
yāva brahmalokāpi kāyena vasaṃ vattethā”ti?
“no hetaṃ, āvuso”.
8. “그렇다면 그대 존자들은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면서 여러 가지 신통변화를 나툽니까? 403)
즉, 하나인 채 여럿이 되기도 하고 여럿이 되었다가 하나가 되기도 합니까?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고 벽이나 담이나 산을 아무런 장애 없이 통과하기를
마치 허공에서처럼 합니까?
땅에서도 떠올랐다 잠겼다 하기를 물속에서처럼 합니까?
물 위에서 빠지지 않고 걸어가기를 땅 위에서처럼 합니까?
가부좌한 채 허공을 날아가기를 날개 달린 새처럼 합니까?
저 막강하고 위력적인 태양과 달을 손으로 만져 쓰다듬기도 하며
심지어는 저 멀리 범천의 세상404)에까지도 몸의 자유자재함을 발합니까?[神足通]”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403) 본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다섯 가지 신통지(abhiññā)의 정형구는 『청정도론』XII장과 XIII장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404) '범천의 세상(brahma-loka)'에 대해서는 본서 제6권 「병 경」(S55:54) §11의 주해를 참조할 것.
♦ “api pana tumhe āyasmanto evaṃ jānantā evaṃ passantā dibbāya sotadhātuyā visuddhāya
atikkantamānusikāya ubho sadde suṇātha dibbe ca mānuse ca ye dūre santike cā”ti?
“no hetaṃ, āvuso”.
9. “그렇다면 그대 존자들은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면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청정하고 신성한 귀의 요소로 천상이나 인간의 소리 둘 다를
멀든 가깝든 간에 다 듣는 신성한 귀의 요소를 나툽니까?[天耳通]”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 “api pana tumhe āyasmanto evaṃ jānantā evaṃ passantā parasattānaṃ parapuggalānaṃ
cetasā ceto paricca pajānātha —
sarāgaṃ vā cittaṃ sarāgaṃ cittanti pajānātha; vītarāgaṃ vā cittaṃ vītarāgaṃ cittanti pajānātha;
sadosaṃ vā cittaṃ sadosaṃ cittanti pajānātha; vītadosaṃ vā cittaṃ vītadosaṃ cittanti pajānātha;
samohaṃ vā cittaṃ samohaṃ cittanti pajānātha; vītamohaṃ vā cittaṃ vītamohaṃ cittanti pajānātha;
saṃkhittaṃ vā cittaṃ saṃkhittaṃ cittanti pajānātha;
vikkhittaṃ vā cittaṃ vikkhittaṃ cittanti pajānātha;
mahaggataṃ vā cittaṃ mahaggataṃ cittanti pajānātha;
amahaggataṃ vā cittaṃ amahaggataṃ cittanti pajānātha;
sauttaraṃ vā cittaṃ sauttaraṃ cittanti pajānātha; anuttaraṃ vā cittaṃ anuttaraṃ cittanti pajānātha;
samāhitaṃ vā cittaṃ samāhitaṃ cittanti pajānātha;
asamāhitaṃ vā cittaṃ asamāhitaṃ cittanti pajānātha;
vimuttaṃ vā cittaṃ vimuttaṃ cittanti pajānātha; avimuttaṃ vā cittaṃ avimuttaṃ cittanti pajānāthā”ti?
“no hetaṃ, āvuso”.
10. “그렇다면 그대 존자들은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면서
자기의 마음으로 다른 중생들과 다른 인간들의 마음을 꿰뚫어 압니까?
즉, 탐욕이 있는 마음은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꿰뚫어 알고
탐욕을 여린 마음은 탐욕을 여린 마음이라고 꿰뚫어 압니까?
성냄이 있는 마음은 성냄이 있는 마음이라고 꿰뚫어 알고
성냄을 여린 마음은 성냄을 여린 마음이라고 꿰뚫어 압니까?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은 [122]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이라고 꿰뚫어 알고
어리석음을 여린 마음은 어리석음을 여린 마음이라고 꿰뚫어 압니까?
수축한 마음은 수축한 마음이라고 꿰뚫어 알고
흩어진 마음은 흩어진 마음이라고 꿰뚫어 압니까?
고귀한 마음은 고귀한 마음이라고 꿰뚫어 알고
고귀하지 않은 마음은 고귀하지 않은 마음이라고 꿰뚫어 압니까?
위가 있는 마음은 위가 있는 마음이라고 꿰뚫어 알고
위가 없는 마음은 위가 없는 마음이라고 꿰뚫어 압니까?
삼매에 든 마음은 삼매에 든 마음이라고 꿰뚫어 알고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은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이라고 꿰뚫어 압니까?
해탈한 마음은 해탈한 마음이라고 꿰뚫어 알고
해탈하지 않은 마음은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라고 꿰뚫어 압니까?[他心通]”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 “api pana tumhe āyasmanto evaṃ jānantā evaṃ passantā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ha, seyyathidaṃ —
ekampi jātiṃ dvepi jātiyo tissopi jātiyo catassopi jātiyo pañcapi jātiyo dasapi jātiyo vīsampi jātiyo
tiṃsampi jātiyo cattārīsampi jātiyo paññāsampi jātiyo jātisatampi jātisahassampi jātisatasahassampi,
anekepi saṃvaṭṭakappe anekepi vivaṭṭakappe anekepi saṃvaṭṭavivaṭṭakappe —
‘amutrāsiṃ evaṃnāmo evaṃgotto evaṃvaṇṇo evamāhāro
evaṃsukhadukkhapaṭisaṃvedī evamāyupariyanto,
so tato cuto amutra udapādiṃ;
tatrāpāsiṃ evaṃnāmo evaṃgotto evaṃvaṇṇo evamāhāro
evaṃsukhadukkhapaṭisaṃvedī evamāyupariyanto, so tato cuto idhūpapanno’ti.
iti sākāraṃ sauddesaṃ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hā”ti?
“no hetaṃ, āvuso”.
11. “그렇다면 그대 존자들은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면서 수많은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합니까?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십만생, 세계가 수축하는 여러 겁, 세계가 팽창하는 여러 겁,
세계가 수축하고 팽창하는 여러 겁을 기억합니까?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여기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 냅니까?[宿命通]”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 “api pana tumhe āyasmanto evaṃ jānantā evaṃ passantā
dibbena cakkhunā visuddhena atikkantamānusakena satte passatha cavamāne upapajjamāne
hīne paṇīte suvaṇṇe dubbaṇṇe, sugate duggate yathākammūpage satte pajānātha —
‘ime vata bhonto sattā kāyaduccaritena samannāgatā vacīduccaritena samannāgatā
manoduccaritena samannāgatā, ariyānaṃ upavādakā micchādiṭṭhikā micchādiṭṭhikammasamādānā,
te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apāyaṃ duggatiṃ vinipātaṃ nirayaṃ upapannā;
ime vā pana bhonto sattā kāyasucaritena samannāgatā vacīsucaritena samannāgatā
manosucaritena samannāgatā, ariyānaṃ anupavādakā sammādiṭṭhikā sammādiṭṭhikammasamādānā
te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sugatiṃ saggaṃ lokaṃ upapannā’ti,
iti dibbena cakkhunā visuddhena atikkantamānusakena satte passatha cavamāne upapajjamāne
hīne paṇīte suvaṇṇe dubbaṇṇe, sugate duggate yathākammūpage satte pajānāthā”ti?
“no hetaṃ, āvuso”.
12. “그렇다면 그대 존자들은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면서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가는 것을 꿰뚫어 압니까?
이들은 몸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123] 입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또 마음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니어 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죽어서 몸이 무너진 다음에는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몸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입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마음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
이들은 죽어서 몸이 무너진 다음에는 좋은 곳[善處], 천상세계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그대 존자들은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그 업에 따라가는 것을 꿰뚫어 압니까?[天眼通]”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 “api pana tumhe āyasmanto evaṃ jānantā evaṃ passantā
ye te santā vimokkhā atikkamma rūpe āruppā, te kāyena phusitvā viharathā”ti?
“no hetaṃ, āvuso”.
13. “그렇다면 그대 존자들은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면서 물질[色]을 초월하여
물질이 없는[無色] 저 [네 가지] 평화로운 해탈들을 몸으로 체득하여 머뭅니까?” 405)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405) 먼저 '평화로운 해탈(santa vimokkha)'이 무엇을 뜻하는가부터 살펴보자.
『청정도론 주석서』는 평화로운 해탈을 무색계禪(arūpa-jjhāna)이라고 설명하고 있다.(santavimokkhato ti arūpajjhānato - Pm.394 = Vis.X.5에 대한 주석)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평화로운 해탈들(santā vimokkhā)'이란 구성요소들도 평화롭고 대상도 평화롭기 때문에 평화로운데 이것은 무색계의 해탈들(ārūpa-vimokkhā)을 말한다. '몸으로 체득하여(kāyena phusitvā)'란 정신적인 몸(nāmakāya)으로 체득하여, 증득하여(paṭilabhitvā)라는 뜻이다.”(SA.ii.126)
복주서는 '정신적인 몸'이란 함께 생긴 정신의 무더기(nāma-kkhandha = 수 · 상 · 행 · 식의 4온)를 뜻한다고 설명하고 있다.(MAȚ.i.265)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평화로운'이란 것은 구성요소가 평화롭고 대상이 평화롭기 때문에 평화롭다. '해탈'이란 반대되는 법들로부터 해탈했고(vimuttatta) 또 대상에 대해 확신이 있기 때문에(adhimuttatta) 해탈이다. '물질을 초월한다(atikkamma rūpe).'는 것은 색계선(rūpa-avacara-jjhāna)을 초월한다는 것이다.”(MA.i.162)
수시마는 여기서 육신통 가운데 마지막인 누진통 대신에 공무변처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의 네 가지 무색계 삼매를 들고 있다. 이 무색계 삼매는 양면해탈(즉 누진통)을 성취하기 위한 토대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하는 듯하다. 아래 §14의 주해를 참조할 것. 그리고 양면해탈 등에 대해서는 본서 「선(禪)과 최상의 지혜 경」 (S16:9) §17의 주해를 참조할 것.
♦ “ettha dāni āyasmanto idañca veyyākaraṇaṃ imesañca dhammānaṃ asamāpatti;
idaṃ no, āvuso, kathan”ti?
“paññāvimuttā kho mayaṃ, āvuso susimā”ti.
14. “여기서 존자들은 [구경의 지혜를] 드러내었지만 이러한 법들은 증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됩니까?” 406)
“도반 수시마여, 우리는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하였습니다.”407)
406) Ee에는 본문단의 끝에 () 안에 넣어서 §§22~23에 나타났던 'api pana tumhe … imesañcadhammānaṃ asamāpatti' 를 다시 표기하고 있는데 오히려 이 부분이 없어야 문맥이 통한다. 그래서 역자는 이 부분을 빼고 옮겼다. Be와 Se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보디 스님도 이렇게 번역하였다.
407) “'우리는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하였습니다(paññavimuttā kho mayaṃ).'라는 것은, 우리는● 禪이 없는(nijjhānaka)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sukkha-vipassaka)들이어서 오직 통찰지(paññā-matta)로써 해탈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SA.iii.126~127)
“여기서 오직 통찰지로써 해탈하였다[慧解脫]는 것은 양면으로 해탈하지 않은 것(na ubhato-bhāga-vimutta)이다.”(SAȚ.ii.107)
위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신통은 반드시 삼매, 특히 제4선에 들어야 나툴 수 있다.(『앙굿따라 니까야』「삼매 경」(A6:70) §1 참조) 그래서 제4선을 신통지(초월지)를 위한 '기초가 되는 선(padaka-jjhāna)'이라 한다.(여기에 대해서는 『청정도론』 XII.57 이하를 참조할 것.) 그리고 양면해탈은 무색계삼매를 토대로 해야 가능하다. 그래서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도 아라한과를 증득했다는 이 비구들에게 5신통과 평화로운 해탈이라 불리는 무색계 삼매가 없는 이유를 그들은 禪이 없는 마른 위빳사나를 닦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주석서는 통찰지를 통한 해탈을 성취한 아라한을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초선부터 제4선까지의 네 가지 禪으로부터 출정하여 아라한이 된 네 가지 경우에다 이러한 네 가지 禪의 체험 없이 해탈한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를 더한 것이다.(DA.ii.512; MA.iii.188 등)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는 순수 위빳사나를 닦는 자(suddha-vipassaka,『청정도론』 XVII.8)라고도 불린다.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는『아비담마 길라잡이』 9장 29의 해설과 『청정도론』 XXI.112의 주해 등을 참조할 것.
* 지금까지의 질문에서 색계 선정(바른 삼매- 8정도의 마지막 지분)에 대한
어떠한 질문이나 대답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주석에서 '禪이 없는 마른 위빳사나'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 “na khvāhaṃ imassa āyasmantānaṃ saṃkhittena bhāsitassa vitthārena atthaṃ ājānāmi.
sādhu me āyasmanto tathā bhāsantu
yathāhaṃ imassa āyasmantānaṃ saṃkhittena bhāsitassa vitthārena atthaṃ ājāneyyan”ti.
“ājāneyyāsi vā tvaṃ, āvuso susima, na vā tvaṃ ājāneyyāsi atha kho paññāvimuttā mayan”ti.
“나는 존자들이 간략하게 말씀하신 뜻을 자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존자들이 제게 상세하게 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존자들이 간략하게 말씀하신 뜻을 자세하게 알 것입니다.”
“도반 수시마여, [124] 그대가 자세하게 알든 자세하게 알지 못하든 간에
우리는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하였습니다.”
(v)
♦ atha kho āyasmā susimo uṭṭhāyāsanā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susimo yāvatako tehi bhikkhūhi saddhiṃ ahosi
kathāsallāpo taṃ sabbaṃ bhagavato ārocesi.
15. 그때 수시마 존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수시마 존자는 그 비구들과 함께 주고받은 대화를 모두 세존께 말씀드렸다.
“pubbe kho, susima, dhammaṭṭhitiñāṇaṃ, pacchā nibbāne ñāṇan”ti.
“수시마여, 먼저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가 있고 나중에 열반에 대한 지혜가 있다.”408)
408)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dhammaṭṭhiti-ñāṇa)'란 조건의 다양한 형태(paccay-ākāra)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 조건의 다양한 형태란 법들이 전개되고 머무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pavatti-ṭṭhiti-kāraṇattā) 법들의 머묾(dhamma-ṭṭhiti)이라 부른다.”(SA.ii.68 본서 「지혜의 토대 경」2(S12:34)의 주해임.)
“법들의 머묾이란 법들의 [보편적] 성질(sabhāvatā)을 말하나니 그것은 바로 무상함과 괴로움과 무아임(anicca-dukkha-anattatā)을 말한다.”(SAȚ.ii.107)
“여기서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법주지)'는 위빳사나의 지혜(vipassanā-ñāṇa)이다. 이것이 먼저 일어난다. '●열반에 대한 지혜(nibbāne ñāṇa.열반지)'는 위빳사나의 [과정이] 끝났을 때 일어나는 도의 지혜(magga-ñāṇa)를 말한다. 이것은 뒤에 일어난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SA.ii.127)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法住智]에 대해서는 본서 「지혜의 토대 경」2(S12:34)의 주해와 『청정도론』 VII.20; 22, XIX.25~26을 참조할 것.
*법주지(dhammaṭṭhitiñāṇa)는 연기(고집, 혹은 고)에 대한 지혜이고
열반지(nibbāne ñāṇa)는 말 그대로 고멸(혹은 고멸도)에 대한 지혜이다.
♦ “na khvāhaṃ, bhante, imassa bhagavatā saṃkhittena bhāsitassa vitthārena atthaṃ ājānāmi.
sādhu me, bhante, bhagavā tathā bhāsatu
yathāhaṃ imassa bhagavatā saṃkhittena bhāsitassa vitthārena atthaṃ ājāneyyan”ti.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말씀하신 뜻을 자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세존께서 제게 상세하게 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말씀하신 뜻을 자세하게 알 것입니다.”
“ājāneyyāsi vā tvaṃ, susima, na vā tvaṃ ājāneyyāsi,
atha kho dhammaṭṭhitiñāṇaṃ pubbe, pacchā nibbāne ñāṇaṃ”.
“수시마여, 그대가 자세하게 알든 자세하게 알지 못하든 간에
먼저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가 있고 나중에 열반에 대한 지혜가 있다.” 409)
409) “세존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삼매(samādhi)가 없이도 지혜가 일어남을 보여주시기 위해서(ñāṇ-uppatti-dassanattha)이다.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수시마여, 도(magga)와 과(phala)는 삼매의 소산(samādhi-nissanda)이 아니고 삼매의 이익(samādhi-ānisaṃsa)도 아니고 삼매의 결과물(nipphatti)도 아니다. 이 둘은 위빳사나의 소산이고 위빳사나에서 생긴 이익이고 위빳사나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자세하게 알든 자세하게 알지 못하든 간에 먼저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가 있고 나중에 열반에 대한 지혜가 있다.'라고.”(SA.ii.127)
“여기서 '삼매가 없이도'라는 것은 고요함이라는 특징을 얻는 것(samatha-lakkhaṇa-ppatta)을 먼저 성취(purima-siddha)하는 삼매가 없이도라는 뜻이다. 이것은 위빳사나를 수레로 삼은 자(vipassanā-yānika)를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SAȚ.ii.107)
주석서에 나타나는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sukkha-vipassaka)'나 복주서에 나타나는 ‘위빳사나를 수레로 삼은 자(vipassanā-yānika)' 등의 술어는 초기불전들에는 나타나지 않는 술어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나타나는 본경의 가르침은 오온의 무상 · 고 · 무아를 통찰함에 의해서 염오-이욕-해탈- 구경해탈지 성취하여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는 것을 분명하게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주석서와 복주서는 순수 위빳사나를 닦아서 아라한이 되는 경우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미얀마의 위빳사나 스승들의 주장대로 『디가 니까야』 「대념처 경」(D22) 이야말로 순수 위빳사나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대념처 경」은 21가지(혹은 수념처와 심념처를 더 세분하면 44가지가 됨) 수행방법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 가운데 몇 가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수행방법은 순수 위빳사나의 입장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설명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역자가 번역한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를 참조할 것.
♦ “taṃ kiṃ maññasi, susima, rūpaṃ niccaṃ vā aniccaṃ vā”ti?
“anicc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ā taṃ sukhaṃ vā”ti?
“dukkh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ṃ, kallaṃ nu taṃ samanupassituṃ —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no hetaṃ, bhante”.
“vedanā niccā vā aniccā vā”ti?
“aniccā, bhante” .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ā taṃ sukhaṃ vā”ti?
“dukkh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ṃ, kallaṃ nu taṃ samanupassituṃ —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no hetaṃ, bhante”.
“saññā niccā vā aniccā vā”ti?
“aniccā, bhante” ... pe ...
“saṅkhārā niccā vā aniccā vā”ti?
“aniccā,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ā taṃ sukhaṃ vā”ti?
“dukkh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ṃ, kallaṃ nu taṃ samanupassituṃ —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no hetaṃ, bhante”.
“viññāṇaṃ niccaṃ vā aniccaṃ vā”ti?
“anicc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ā taṃ sukhaṃ vā”ti?
“dukkh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ṃ, kallaṃ nu taṃ samanupassituṃ —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no hetaṃ, bhante”.
16. “수시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410)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410) “이제 세존께서는 그가 통찰을 할 수 있음(paṭivedha-bhabbata)을 아시고 세 번에 걸쳐서(te-parivaṭṭaṃ) 설법을 하시면서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이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장로는 아라한과를 얻었다.”(SA.ii.127)
“여기서 '세 번에 걸쳐서'란 오온에 대해서 삼특상(무상 · 고 · 무아)을 제기하는 것을 말한다.”(SAȚ.ii.108)
삼특상에 대한 교리문답은 본서 제3권 「무더기 상윳따」(S22) 전체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특히 S22:49; 59; 79; 80; 82 등을 들 수 있다.
수시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 인식은 … 심리현상들은 …
알음알이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125]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 “tasmātiha, susima, yaṃ kiñci rūpaṃ atītānāgatapaccuppannaṃ
ajjhattaṃ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ṃ vā sukhumaṃ vā hīnaṃ vā paṇītaṃ vā yaṃ dūre santike vā,
sabbaṃ rūp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17. “수시마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yā kāci vedanā atītānāgatapaccuppannā ajjhattaṃ vā bahiddhā vā oḷārikā vā sukhumā vā
hīnā vā paṇītā vā yā dūre santike vā,
sabbā vedanā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yā kāci saññā ... pe ...
ye keci saṅkhārā atītānāgatapaccuppannā ajjhattaṃ vā bahiddhā vā oḷārikā vā sukhumā vā hīnā vā
paṇītā vā ye dūre santike vā, sabbe saṅkhārā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yaṃ kiñci viññāṇaṃ
atītānāgatapaccuppannaṃ ajjhattaṃ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ṃ vā sukhumaṃ vā hīnaṃ vā paṇītaṃ
vā yaṃ dūre santike vā, sabbaṃ viññāṇ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수시마여,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 그것이 어떠한 심리현상들이건 …
그것이 어떠한 알음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 “evaṃ passaṃ, susima, sutavā ariyasāvako rūpasmim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saññāyapi nibbindati, saṅkhāresupi nibbindati, viññāṇasmimpi nibbindati.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18. “수시마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susima, passasī”ti? “evaṃ, bhante”.
19. “수시마여, 그대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고 보는가?” 411)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411) “앞에서 물질 등에 대해서 삼특상을 제기하여 가르침을 설하셨다. 이제 이러한 세 가기 양상(무상 · 고 · 무아)에 대한 가르침(te-parivaṭṭa-desanā)을 더 깊이 적용(anuyoga) 시키시면서 '수시마여, 아라한과를 증득한 자는 모든 곳에서 조건의 형태(paccay-ākāra)를 꿰뚫은 뒤에 미혹을 제거(vigata-sammoha) 한다.'라고 하시면서 [이제 12연기를 설하시는 것이다.]”(SAȚ.ii. 108)
“‘bhavapaccayā jātī’ti, susima, passasī”ti? “evaṃ, bhante”.
“‘upādānapaccayā bhavo’ti, susima, passasī”ti? “evaṃ, bhante”.
“‘taṇhāpaccayā upādānan’ti, susima, passasī”ti? “evaṃ, bhante”.
“vedanāpaccayā taṇhāti... phassapaccayā vedanāti... saḷāyatanapaccayā phassoti...
nāmarūpapaccayā saḷāyatananti...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nti...
avijjāpaccayā saṅkhārāti, susima, passasī”ti? “evaṃ, bhante”.
“수시마여, 그대는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고 …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고 … [126]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있다고 …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고 …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고 …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고 …
정신 · 물길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고 …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이 있다고 …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있다고 …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 “‘jātinirodhā jarāmaraṇanirodho’ti, susima, passasī”ti? “evaṃ, bhante” .
“‘bhavanirodhā jātinirodho’ti susima, passasī”ti? “evaṃ, bhante”.
“upādānanirodhā bhavanirodhoti... taṇhānirodhā upādānanirodhoti... vedanānirodhā taṇhānirodhoti...
phassanirodhā vedanānirodhoti... saḷāyatananirodhā phassanirodhoti... nāmarūpanirodhā saḷāyatananirodhoti... viññāṇanirodhā nāmarūpanirodhoti... saṅkhāranirodhā viññāṇanirodhoti...
avijjānirodhā saṅkhāranirodhoti, susima, passasī”ti? “evaṃ, bhante”.
20. “수시마여, 그대는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 · 죽음이 소멸한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시마여, 그대는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한다고 …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한다고 …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한다고 …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한다고 …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한다고 …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한다고 …
정신 · 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한다고 …
알음알이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 · 물질이 소멸한다고 …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한다고 …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한다고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 “api pana tvaṃ, susima, evaṃ jānanto evaṃ passanto anekavihitaṃ iddhividhaṃ paccanubhosi
— ekopi hutvā bahudhā hosi, bahudhāpi hutvā eko hosi;
āvibhāvaṃ, tirobhāvaṃ, tirokuṭṭaṃ tiropākāraṃ tiropabbataṃ asajjamāno gacchasi,
seyyathāpi ākāse; pathaviyāpi ummujjanimujjaṃ karosi,
seyyathāpi udake; udakepi abhijjamāno gacchasi,
seyyathāpi pathaviyaṃ; ākāsepi pallaṅkena kamasi,
seyyathāpi pakkhī sakuṇo; imepi candimasūriye evaṃmahiddhike evaṃmahānubhāve
pāṇinā parimasasi parimajjasi, yāva brahmalokāpi kāyena vasaṃ vattesī”ti? “no hetaṃ, bhante”.
21. “수시마여, 그런데 그대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면서 여러가지 신통변화를 나투는가?412)
즉, 하나인 채 여럿이 되기도 하고 …
심지어는 저 멀리 범천의 세상에까지도 몸의 자유자재함을 발하는가?[神足通]”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412) “그런데 이 말씀은 왜 하셨는가? 禪이 없는(nijjhānaka)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sukkha-vipassaka) 비구들이 있음을 분명하게 하시기 위해서(pākaṭa-karaṇattha)이다. 즉, '그대만이 禪이 없는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가 아니라 이 비구들도 마찬가지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SA.ii.127)
♦ “api pana tvaṃ, susima, evaṃ jānanto evaṃ passanto dibbāya sotadhātuyā visuddhāya
atikkantamānusikāya ubho sadde suṇasi dibbe ca mānuse ca ye dūre santike cā”ti?
“no hetaṃ, bhante”.
“그렇다면 그대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면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청정하고 신성한 귀의 요소로
천상이나 인간의 소리 둘 다를 멀든 가깝든 간에 다 듣는 신성한 귀의 요소를 나투는가?[天耳通]” [127]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 “api pana tvaṃ, susima, evaṃ jānanto evaṃ passanto parasattānaṃ parapuggalānaṃ
cetasā ceto paricca pajānāsi — sarāgaṃ vā cittaṃ sarāgaṃ cittanti pajānāsi ... pe ...
vimuttaṃ vā cittaṃ vimuttaṃ cittanti pajānāsī”ti? “no hetaṃ, bhante”.
“그렇다면 그대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면서 자기의 마음으로
다른 중생들과 다른 인간들의 마음을 꿰뚫어 아는가?
즉, 탐욕이 있는 마음은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꿰뚫어 알고 …
해탈하지 않은 마음은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라고 꿰뚫어 아는가?[他心通]”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 “api pana tvaṃ, susima, evaṃ jānanto evaṃ passanto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si,
seyyathidaṃ — ekampi jātiṃ ... pe ...
iti sākāraṃ sauddesaṃ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sī”ti? “no hetaṃ, bhante”.
“그렇다면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그대는 수많은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하는가?
즉, 한 생, 두 생, …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하는가?[宿命通]”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 “api pana tvaṃ, susima, evaṃ jānanto evaṃ passanto
dibbena cakkhunā visuddhena atikkantamānusakena satte passasi cavamāne ... pe ...
yathākammūpage satte pajānāsī”ti? “no hetaṃ, bhante”.
“그렇다면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그대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가는 것을 꿰뚫어 아는가?[天眼通]”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 “api pana tvaṃ, susima, evaṃ jānanto evaṃ passanto
ye te santā vimokkhā atikkamma rūpe, āruppā te kāyena phusitvā viharasī”ti? “no hetaṃ, bhante”.
“그렇다면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그대는 물질[色]을 초월하여
물질이 없는[無色] 저 [네 가지] 평화로운 해탈들을 몸으로 체득하여 머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 “ettha dāni, susima, idañca veyyākaraṇaṃ imesañca dhammānaṃ asamāpatti,
idaṃ no, susima, kathan”ti?
“수시마여, 여기서 그대는 이렇게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었지만 이러한 법들은 증득하지 못하였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가?” 413)
413) 세존께서는 이렇게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나 통찰지로 해탈한 자[慧解脫]는 오온의 무상 · 고 · 무아를 통찰해서 깨달음을 실현하여 아라한이 되었지만 본삼매 특히 제4선의 힘이 없기 때문에 신통을 나투지 못하는 것으로 멋지게 설명하고 계신다.
(vi)
♦ atha kho āyasmā susimo bhagavato pādesu sirasā nipatitvā bhagavantaṃ etadavoca —
“accayo maṃ, bhante, accagamā yathābālaṃ yathāmūḷhaṃ yathāakusalaṃ,
yvāhaṃ evaṃ svākkhāte dhammavinaye dhammatthenako pabbajito.
tassa me, bhante, bhagavā accayaṃ accayato paṭiggaṇhātu āyatiṃ saṃvarāyā”ti.
22. 그때 수시마 존자는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린 뒤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참으로 어리석고 미혹하고 신중하지 못해서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법을 훔치려고414) 이처럼 잘 설해진 법과 율에 출가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러한 제가 미래에 [다시 이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고]
제 자신을 단속할 수 있도록 제 잘못에 대한 참회를 섭수하여 주소서.”
414) '법을 훔침'은 dhamma-tthenaka를 옮긴 것이다. 잘못을 범하여 용서를 구하고 이를 용서하는 정형구는 본서 「교계 경」1(S16:6/i.205) §§8~9에도 나타나고 있다.
♦ “taggha tvaṃ, susima, accayo accagamā yathābālaṃ yathāmūḷhaṃ yathāakusalaṃ,
yo tvaṃ evaṃ svākkhāte dhammavinaye dhammatthenako pabbajito.
“수시마여, 확실히 그대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대는 법을 훔치려고 이처럼 잘 설해진 법과 율에 출가하였다.
seyyathāpi, susima, coraṃ āgucāriṃ gahetvā rañño dasseyyuṃ —
‘ayaṃ te, deva, coro āgucārī, imassa yaṃ icchasi taṃ daṇḍaṃ paṇehī’ti.
tamenaṃ rājā evaṃ vadeyya —
‘gacchatha, bho, imaṃ purisaṃ daḷhāya rajjuyā pacchābāhaṃ gāḷhabandhanaṃ bandhitvā
khuramuṇḍaṃ karitvā kharassarena paṇavena rathiyāya rathiyaṃ siṅghāṭakena siṅghāṭakaṃ
parinetvā dakkhiṇena dvārena nikkhāmetvā dakkhiṇato nagarassa sīsaṃ chindathā’ti .
tamenaṃ rañño purisā daḷhāya rajjuyā pacchābāhaṃ gāḷhabandhanaṃ bandhitvā
khuramuṇḍaṃ karitvā kharassarena paṇavena rathiyāya rathiyaṃ siṅghāṭakena siṅghāṭakaṃ
parinetvā dakkhiṇena dvārena nikkhāmetvā dakkhiṇato nagarassa sīsaṃ chindeyyuṃ.
taṃ kiṃ maññasi, susima, api nu so puriso tatonidānaṃ
dukkhaṃ domanassaṃ paṭisaṃvediyethā”ti? “evaṃ, bhante”.
23. “수시마여, [128] 예를 들면 죄를 지은 도둑을 붙잡아
'폐하, 이 자는 죄를 지은 도둑입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처벌을 내리십시오.'라고 하면서 대령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봐라, 그렇다면 이 사람을 단단한 밧줄로 손을 뒤로 한 채 꽁꽁 묶어서
머리를 깎고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이 골목 저 골목 이 거리 저 거리로 끌고 다니다가
남쪽 문으로 데리고 가서는 도시의 남쪽에서 머리를 잘라버려라.'라고.
그러면 왕의 사람들은 그 사람을 단단한 밧줄로 손을 뒤로 한 채
꽁꽁 묶어서 머리를 깎고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이 골목 저 골목 이 거리 저 거리로 끌고 다니다가
남쪽 문으로 데리고 가서는 도시의 남쪽에서 머리를 자를 것이다.”
24. “수시마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면 그 사람은 그 때문에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겪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 “yaṃ kho so, susima, puriso tatonidānaṃ dukkhaṃ domanassaṃ paṭisaṃvediyetha .
yā evaṃ svākkhāte dhammavinaye dhammatthenakassa pabbajjā,
ayaṃ tato dukkhavipākatarā ca kaṭukavipākatarā ca, api ca vinipātāya saṃvattati.
yato ca kho tvaṃ, susima, accayaṃ accayato disvā yathādhammaṃ paṭikarosi
taṃ te mayaṃ paṭiggaṇhāma.
vuddhi hesā, susima, ariyassa vinaye yo accayaṃ accayato disvā yathādhammaṃ paṭikaroti,
āyatiñca saṃvaraṃ āpajjatī”ti.
“수시마여, 그 사람이 그 때문에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겪든 겪지 않든 간에
법을 훔치려고 이처럼 잘 설해진 법과 율에 출가하는 것은
그보다 더 큰 괴로움의 과보가 있고 더 혹독한 과보가 있고 게다가 파멸처로 떨어지게 된다.
수시마여, 그러나 그대는 잘못을 범한 것을 잘못을 범했다고 인정하고 법답게 참회를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대를 받아들인다.
수시마여, 잘못을 범한 것을 잘못을 범했다고 인정한 다음 법답게 참회하고
미래에 [그러한 잘못을] 단속하는 자는 성자의 율에서 향상하기 때문이다.”
dasamaṃ.
♦ mahāvaggo sattamo. 제7장 대품이 끝났다.
♦ tassuddānaṃ —
♦ dve assutavatā vuttā, puttamaṃsena cāparaṃ.
♦ atthirāgo ca nagaraṃ, sammasaṃ naḷakalāpiyaṃ.
♦ kosambī upayanti ca, dasamo susimena cāti .
일곱 번째 품에 포함된 경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두 가지 ①~② 배우지 못한 자 ③ 아들의 고기 ④ 탐욕 있음 ⑤ 도시
⑥ 명상 ⑦ 갈대 다발 ⑧ 꼬삼비 ⑨ 불어남, 열 번째로 ⑩ 수시마이다.
∴
ㅡㅡㅡ
♦ 8. kosambisuttaṃ (SN 12.68) 꼬삼비 경(S12:68) Kosambi-sutta
♦ 68. ekaṃ samayaṃ āyasmā ca musilo āyasmā ca paviṭṭho āyasmā ca
nārado āyasmā ca ānando kosambiyaṃ viharanti ghositārāme.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무실라 존자와 사윗타 존자와 나라다 존자389)와 아난다 존자는
꼬삼비에서 고시따 원림390)에 머물렀다.
389)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에는 사윗타 존자(āyasmā Saviṭṭha)와 무실라 존자(āyasmā Musīla)와 나라다 존자(āyasmā Nārada)에 대한 설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윗타 존자는 『앙굿따라 니까야』 「몸으로 체험한 자 경」(A3:21/i.118~119)에 나타나는데 그 경에 해당하는 주석서에 의하면 그는 믿음(saddhā)을 통해서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나라다 존자는 『앙굿따라니까야』「나라다 경」 (A5:50/iii.57~62)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만일 「나라다 경」(A5:50)의 문다 왕이 아자따삿뚜 왕의 증손자라면 본경에 나타나는 나라다 존자와 「나라다 경」의 나라다 존자는 다른 인물일 것이다.
390) 꼬삼비(Kosambī)와 고시따 원림(Gositārāma)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 「빠릴레야 경」(S22:81) §1의 주해를 참조할 것.
(i)
atha kho āyasmā paviṭṭho āyasmantaṃ musilaṃ etadavoca —
“aññatreva, āvuso musil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tthāyasmato musilassa paccattameva ñāṇaṃ —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2. 그때 사윗타 존자가 무실라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3.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구전과 관계없이,
이론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391)
그대는 자기 스스로의 지혜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라고 압니까?”
391) “(1) 어떤 자는 남을 믿고 그 '믿음(saddhā)'을 통해서 그가 말한 것을 사실(bhūta)이라고 받아들인다. (2) 어떤 자는 앉아서 생각하면서 그가 좋아하는 이론(kāraṇa)에 대해서 '이것이 옳다.'고 하면서 '좋아함(ruci)'을 통해서 받아들인다. (3) 어떤 자는 '오랫동안 이것이 사실이라고 전해 들었다.' 라면서 '구전(anussava)'을 통해서 받아들인다. (4) 어떤 자는 일으킨 생각(vitakka)을 통해서 어떤 이론을 확립한다. 이렇게 하여 '이것이 옳다.'라고 '이론적인 생각(ākāra-parivitakka)'을 받아들인다. (5) 어떤 자는 생각을 하다가 어떤 견해가 떠오르면 그 이론을 사색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이것이 옳다.'고 하면서 그 '사색하여 얻은 견해(dṭṭhi-nijjhāna-kkhanti)'를 받아들인다.
장로는 이러한 이론들을 모두 내던지고 자기 스스로의 지혜(paccakkha-ñāṇa)를 통해서 통찰한 것(paṭividdha-bhāva)을 질문하면서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라고 말한 것이다.”(SA.ii.122)
여기에 나타나는 남의 이론(kāraṇa)을 인정하는 다섯 가지 토대는 본서 제4권 「방법이 있는가 경」(S35:153) §3 이하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맛지마 니까야』 「다섯과 셋 경」 (M102/ii.233~234) §§14~16에서 세존께서는 이 다섯 가지를 토대로 과거에 관한 16가지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계신다. 『맛지마 니까야』「데와다하 경」(M101/ii.218)도 참조할 것.
이것은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자기 스스로의 지혜(paccattam eva ñāṇa)'와는 대조가 된다.
자세한 논의는 Jayatilleke, Early Buddhist Theory of Knowledge, pp.182~188, 274~276을 참조할 것.
“aññatreva, āvuso paviṭṭh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hametaṃ jānāmi ahametaṃ passāmi —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구전과 관계없이,
이론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나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 “aññatreva, āvuso musil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tthāyasmato musilassa paccattameva ñāṇaṃ —
‘bhavapaccayā jātīti ... pe ... upādānapaccayā bhavoti... taṇhāpaccayā upādānanti...
vedanāpaccayā taṇhāti... phassapaccayā vedanāti... saḷāyatanapaccayā phassoti...
nāmarūpapaccayā saḷāyatananti...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nti... avijjāpaccayā saṅkhārā’”ti?
“aññatreva, āvuso paviṭṭh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hametaṃ jānāmi ahametaṃ passāmi — ‘avijjāpaccayā saṅkhārā’”ti.
“도반 무실라여, [116]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구전과 관계없이,
이론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그대는 자기 스스로의 지혜로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라고 …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라고 …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있다.'라고 …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라고 …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라고 …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라고 …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 장소가 있다.'라고 …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이 있다.'라고 …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있다.'라고 …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라고 압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구전과 관계없이,
이론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나는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 “aññatreva, āvuso musil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tthāyasmato musilassa paccattameva ñāṇaṃ —
‘jātinirodhā jarāmaraṇanirodho’”ti?
“aññatreva, āvuso paviṭṭh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hametaṃ jānāmi ahametaṃ passāmi —
‘jātinirodhā jarāmaraṇanirodho’”ti.
4.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구전과 관계없이,
이론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그대는 자기 스스로의 지혜로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 · 죽음이 소멸한다.'라고 압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구전과 관계없이,
이론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나는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 · 죽음이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 “aññatreva, āvuso musil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tthāyasmato musilassa paccattameva ñāṇaṃ —
‘bhavanirodhā jātinirodhoti ... pe ... upādānanirodhā bhavanirodhoti...
taṇhānirodhā upādānanirodhoti... vedanānirodhā taṇhānirodhoti... phassanirodhā vedanānirodhoti...
saḷāyatananirodhā phassanirodhoti... nāmarūpanirodhā saḷāyatananirodhoti...
viññāṇanirodhā nāmarūpanirodhoti ... saṅkhāranirodhā viññāṇanirodhoti...
avijjānirodhā saṅkhāranirodho’”ti?
“aññatreva, āvuso paviṭṭh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hametaṃ jānāmi ahametaṃ passāmi —
‘avijjānirodhā saṅkhāranirodho’”ti.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구전과 관계없이,
이론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그대는 자기 스스로의 지혜로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한다.'라고 …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한다.'라고 …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한다.'라고 …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한다.'라고 …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한다.'라고 …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한다.'라고 …
'정신 · 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한다.'라고 …
'알음알이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 · 물질이 소멸한다.'라고 [117] …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한다.'라고 …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한다.'라고 압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구전과 관계없이,
이론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나는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 “aññatreva, āvuso musil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tthāyasmato musilassa paccattameva ñāṇaṃ —
‘bhavanirodho nibbānan’”ti?
“aññatreva, āvuso paviṭṭh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hametaṃ jānāmi ahametaṃ passāmi — ‘bhavanirodho nibbānan’”ti.
5.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구전과 관계없이,
이론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그대는 자기 스스로의 지혜로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392)라고 압니까?”
392)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는 bhava-nirodho nibbānaṃ을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오온의 소멸(pañca-kkhandha-nirodha)이 열반이다.”(SA.ii.123)라고 설명하고 있다.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라는 것은 아홉 가지 존재(bhava)가 여기서 소멸하여 존재의 소멸인 열반이 증득된다는 말이다. 이 존재는 오온이 적집된 것(pañcakkhandha-saṅgaha)이라서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존재란 것은 없다. 그래서 오온의 소멸을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SAȚ.ii.106)
아홉 가지 존재는 “욕계 존재, 색계 존재, 무색계 존재, 인식을 가진 존재, 인식이 없는 존재, 비상비비상의 존재, 한 가지 무더기를 가진 존재, 네 가지 무더기를 가진 존재, 다섯 가지 무더기를 가진 존재”(Vbh.137; 『청정도론』XVII. §253)를 뜻함.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구전과 관계없이,
이론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나는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 “tenahāyasmā musilo arahaṃ khīṇāsavo”ti?
evaṃ vutte, āyasmā musilo tuṇhī ahosi.
atha kho āyasmā nārado āyasmantaṃ paviṭṭhaṃ etadavoca —
“sādhāvuso paviṭṭha, ahaṃ etaṃ pañhaṃ labheyyaṃ.
maṃ etaṃ pañhaṃ puccha.
ahaṃ te etaṃ pañhaṃ byākarissāmī”ti.
“labhatāyasmā nārado etaṃ pañhaṃ.
pucchāmahaṃ āyasmantaṃ nāradaṃ etaṃ pañhaṃ.
byākarotu ca me āyasmā nārado etaṃ pañhaṃ”.
“그렇다면 무실라 존자는 번뇌 다한 아라한입니까?”
이렇게 말하자 무실라 존자는 침묵하였다. 393)
393) “장로는 번뇌 다한(khīṇāsava) [아라한]이었다. 그러나 '나는 번뇌 다한 자입니다.'라거나 '아닙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침묵하였다.”(SA.ii.123)
(ii)
6. 그때 나라다 존자가 사윗타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사윗타여, 내가 이런 질문을 받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이 질문을 해 주십시오. 나는 그대에게 설명하겠습니다. 394)
394) “그러면 왜 그는 이렇게 말하였는가? 그는 생각하기를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라는 것은 유학(sekha)들도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사윗타] 존자는 저 [무실라] 존자를 무학의 경지(asekha-bhūmi)에 올려놓는다. 그러니 내가 이 경우를 바르게 알도록 해야겠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SA.ii.123)
“그렇다면 나라다 존자는 질문을 받으십시오. 나는 나라다 존자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나라다 존자는 나에게 설명을 해 주십시오.”
♦ “aññatreva, āvuso nārad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tthāyasmato nāradassa paccattameva ñāṇaṃ —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aññatreva, āvuso paviṭṭh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hametaṃ jānāmi ahametaṃ passāmi —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 “aññatreva, āvuso nārad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tthāyasmato nāradassa paccattameva ñāṇaṃ —
bhavapaccayā jāti ... pe ... avijjāpaccayā saṅkhārā”ti?
“aññatreva, āvuso paviṭṭh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hametaṃ jānāmi ahametaṃ passāmi — ‘avijjāpaccayā saṅkhārā’”ti.
♦ “aññatreva, āvuso nārad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tthāyasmato nāradassa paccattameva ñāṇaṃ —
‘jātinirodhā jarāmaraṇanirodho’”ti?
“aññatreva, āvuso paviṭṭh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hametaṃ jānāmi ahametaṃ passāmi —
‘jātinirodhā jarāmaraṇanirodho’”ti.
♦ “aññatreva, āvuso nārad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tthāyasmato nāradassa paccattameva ñāṇaṃ —
‘bhavanirodhā jātinirodhoti ... pe ... avijjānirodhā saṅkhāranirodho’”ti?
“aññatreva, āvuso paviṭṭh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hametaṃ jānāmi ahametaṃ passāmi —
‘avijjānirodhā saṅkhāranirodho’”ti.
♦ “aññatreva, āvuso nārad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tthāyasmato nāradassa paccattameva ñāṇaṃ —
‘bhavanirodho nibbānan’”ti?
“aññatreva, āvuso paviṭṭh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hametaṃ jānāmi ahametaṃ passāmi — ‘bhavanirodho nibbānan’”ti.
7. “도반 나라다여, 믿음과 관계없이, …
그대는 자기 스스로의 지혜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라고 …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라고 압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나는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한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도반 나라다여, 믿음과 관계없이, 그대는 자기 스스로의 지혜로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라고 압니까?”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나는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라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 “tenahāyasmā nārado arahaṃ khīṇāsavo”ti?
8. “그렇다면 나라다 존자는 번뇌 다한 아라한입니까?”
“‘bhavanirodho nibbānan’ti kho me, āvuso,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sudiṭṭhaṃ,
na camhi arahaṃ khīṇāsavo.
“도반이여, [118] 나는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잘 보았지만
나는 번뇌 다한 아라한이 아닙니다. 395)
395) “'바른 통찰지로 잘 보았지만(sammappaññāya sudiṭṭhaṃ)'이란 위빳사나와 더불어 도의 통찰지(magga-paññā)로 잘 보았다는 말이다. '나는 아라한은 아니다(na camhi arahaṃ).'는 것은 나는 불환도(anāgāmi-magga)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아라한은 아니라고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라고 하는 지혜는 19가지 [정상적인] 반조의 지혜(paccavekkkhaṇa-ñāṇa)와는 다른 반조의 지혜이다.”(SA.ii.123)
19가지 반조의 지혜는 『청정도론』 XXII.19~21을 참조할 것.
seyyathāpi, āvuso, kantāramagge udapāno. tatra nevassa rajju na udakavārako.
atha puriso āgaccheyya ghammābhitatto ghammapareto kilanto tasito pipāsito,
so taṃ udapānaṃ olokeyya.
tassa ‘udakan’ti hi kho ñāṇaṃ assa, na ca kāyena phusitvā vihareyya.
“도반이여, 예를 들면 사막의 길에 [스무 길이나 되는] 깊은 우물이 있는데
밧줄이 달린 물 긷는 두레박이 없습니다.
그때 더위에 시달리고 더위에 압도되었으며 지쳐있고
심한 갈증을 느끼고 목마른 사람이 거기로 온다고 합시다.
그는 그 우물을 들여다보고 '저기에 물이 있구나.'라고 알지만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뒤 그것을 마셔서]396) 몸으로 직접 체득하지는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396) [] 안은, “그는 그 물을 길어 올려서(udakaṃ nīharitvā) 몸으로 직접 마시지 못한다는 말이다.” (SA.ii.123)라는 주석서의 설명을 참조하여서 역자가 넣은 것이다.
evameva kho, āvuso, ‘bhavanirodho nibbānan’ti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sudiṭṭhaṃ,
na camhi arahaṃ khīṇāsavo”ti.
도반이여, 그와 같이 나는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잘 보았지만
나는 번뇌 다한 ■아라한이 아닙니다.” 397)
397) 주석서는 비유를 다음과 같이 적용시키고 있다.
'더위에 시달린 자(ghamma-abhitatta)'는 불환자에, 우물에 물이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불환자가 열반을 보는 것(nibbāna-dassana)에, '물 긷는 두레박(udaka-vāraka)'은 아라한도(arahatta-magga)에 비유된다. 마치 더위에 시달린 자가 우물에 물이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불환자는 반조의 지혜(paccavekkhaṇa-ñāṇa)로 '이 위에 아라한과를 관통하는 것(arahatta-phala-samaya)이 있다.'라고 안다. 그러나 마치 두레박이 없는 사람이 물을 길어서 몸으로 그것에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불환자도 아라한도가 없기 때문에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아라한과의 증득(arahatta-phala-samāpatti)에 계합하여(appetvā) 앉아있을 수 없다.(SA.ii.123)
여기서 유념할 점은, 이것은 무실라 존자가 침묵으로 자신이 아라한임을 밝힌 것에 대한 나라다 존자의 대꾸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라다 존자는 단지 ●연기의 가르침과 ●열반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만을 가지고 ■아라한의 특징을 정의하는 사윗타 존자의■잘못된 추측을 바로 잡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Gombrich는 How Buddhism Began, pp.128~129에서 나라다 존자는 무실라 존자가 침묵으로 아라한임을 드러낸 것을 비판하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이고 있다.
아라한과 유학의 차이점은 연기나 다른 가르침에 대한 통찰(위빳사나)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차이점은 바로 아라한은 자신의 통찰로 번뇌를 모두 멸진하여서 아라한과의 증득(arahatta-phala-samāpatti)이라는 특별한 삼매의 상태를 체득한 것에 있다. 이런 특별한 상태에서 그는 '불사의 경지를 몸으로 직접 체득하는 것이다. 본서 제5권 「유학 경」 (S48:53) §8에도 유학과 무학의 결정적인 차이는 '몸으로 직접 체득'하여 머문다(kāyena phusitvā viharati)'는 표현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그곳의 주해도 참조할 것) 같은 방법으로 예류자와 아라한의 차이는 본서 제3권 S22:109~110에서는 오온을 통해서, 제5권 S48:2~5; 26~27; 32~33에서는 다섯 가지 기능(오근)을 통해서 언급되고 있다.
(iii)
♦ evaṃ vutte, āyasmā ānando āyasmantaṃ paviṭṭhaṃ etadavoca —
“evaṃvādī tvaṃ, āvuso paviṭṭha, āyasmantaṃ nāradaṃ kiṃ vadesī”ti?
“evaṃvādāhaṃ, āvuso ānanda, āyasmantaṃ nāradaṃ
na kiñci vadāmi aññatra kalyāṇā aññatra kusalā”ti.
9. 이렇게 말하자 아난다 존자가 사윗타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사윗타여, 그대는 이렇게 말하는 나라다 존자에게398) 무어라 말하겠습니까?”
“도반 아난다여, 이렇게 말하는 나라다 존자에게
좋다는 말과 유익하다는 말 외에는 다른 할 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399)
398) Ee, Be, Se에는 모두 evaṃvādī tva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 [사윗타 존자] 그대는'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문맥과 맞지 않다. 그래서 역자는 보디 스님의 의견대로 이를 evaṃvādiṃ(목적격) tvaṃ으로 이해해서 evaṃvādiṃ을 나라다 존자를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렇게 해야 문맥에 맞기 때문이다. 보디 스님도 이렇게 옮기고 주를 달고 있다.(보디 스님, 783쪽 205번 주해 참조) 주석서와 복주서는 여기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다.
399) 같은 표현이 본서 제6권 「고다 경」 (S55:23/v.374) §14에도 나타난다. 이「고다 경」 에서는 Ee: evaṃvādiṃ tvam으로 나타나고 있다.(Be, Se에는 본경처럼 evaṃvādī tvaṃ으로 나타난다.)
aṭṭhama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