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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아가서(10)/사랑
제목 : 사랑은 죽음같이 강합니다!
성경 : 아 8:1~14
찬송 : 314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11215 낙양교회 수요 예배
아 8:1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아 8:2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머니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게 하겠고
아 8:3 너는 왼팔로는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안았으리라
아 8:4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아 8:5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너로 말미암아 네 어머니가 고생한 곳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아 8:6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7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 8:8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아 8:9 그가 성벽이라면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이라면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아 8:10 나는 성벽이요 내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가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아 8:11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그들로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아 8:12 솔로몬 너는 천을 얻겠고 열매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아 8:13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내가 듣게 하려무나
아 8:14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사랑은 위대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죽음보다 강합니다. 아가서에 있는 모든 말씀 가운데 가장 강력한 말씀이 그 사실을 대변해 줍니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6~7)
사도 바울은 사랑의 이런 특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모든 것의 기초가 사랑이며, 그 위에 서 있을 때라야 비로소 의미가 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사랑은 진정 강하고 위대합니다. 부모는 사랑 때문에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자녀들은 사랑 때문에 부모를 봉양합니다. 신부는 사랑 때문에 신랑을 섬기고, 신랑은 사랑 때문에 신부를 보석과 같이 여깁니다. 그 사랑을 깨뜨리기 위해 작은 여우들이 수시로 공격하지만, 참된 사랑은 모든 위기를 극복하게 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며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가서의 전체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가서의 이야기는 7장에서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8장은 주제시(1~7절)와 단편적인 소재의 에필로그(8~14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가의 주제시에 해당하는 아가 8:1~7절은은 아가서의 줄거리를 요약한 전반부(1~5절)와 아가서의 주제인 사랑의 힘을 노래한 후반부(6~7절)로 나뉩니다. 에필로그에는 이전의 내용과 독립적인 시들이 세 편 수록되었는데, 특히 13~14절의 시는 아가서를 보다 넓은 정경적 문맥과 연결시켜 줍니다.
아가서의 요약(1~5절)
아 8:1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1절은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랑을 싹 띄우는 과정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젊은 남자와 여자가 공공장소에서 애정을 표현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젊은 여자가 남자에게 공개된 장소에서 입 맞춘다면 사람들은 그녀를 창녀나 음녀로 간주할 것입니다.
잠 7:13 그 여인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입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그에게 말하되
여자는 창녀나 음녀로 오해받지 않으면서 남자에게 애정을 표현할 방법에 대해 상상합니다. ‘업신여기다’(부즈)는 것은 개인적 호(好), 불호(不好)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에 위배되었을 때, 공동체가 느끼는 불쾌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업신여김이 7절에서 돈으로 매수하려는 사람에게도 적용됩니다. 사회적 경멸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남자와 공개적으로 입 맞출 수 있는 상황은 그 남자가 자신의 오빠일 때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가까운 친척이나 남매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볼이나 코에 입맞춤으로 인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친남매였다면 좋았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둘만의 친밀함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아 8:2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머니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게 하겠고
여자는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머니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3:4절과 유사합니다.
아 3: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여자는 남자를 자신의 어머니 방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을 주겠다고 합니다. 어머니 집은 말 그대로 어머니가 딸에게 결혼에 관한 여러 가지를 준비시키는 장소입니다. 물론 그 중에서 첫날밤에 대한 교훈도 포함되어 있을 수는 있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또한 ‘어머니 집’은 남자가 첫날밤을 치르는 곳이기도 합니다. 즉 남자와 여자가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준비된 최고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값비싼 향신료가 첨가된 최고의 포도주와 석류즙을 마시게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여자의 가슴이 석류 열매로 비유되곤 했습니다.
아 8:3 너는 왼팔로는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안았으리라
아 2:6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남자의 왼팔은 여인의 머리 아래에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여인을 감쌉니다. 본절이 암시하는 바는 포도주의 집에서 남녀가 어느 정도의 스킨십을 나누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 8:4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아 3:5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여자는 방해받지 않고 남자와 사랑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아 8:5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너로 말미암아 네 어머니가 고생한 곳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5절의 시작은 결혼식 장면을 강하게 연상시킵니다. 이제 이야기의 장면이 바뀌어 새로운 장소가 나타납니다. 4절까지는 왕궁에서의 대화였다면 5절부터는 신부의 고향인 술람미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먼저 두 사람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아 3:6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내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
여기의 경우에는 예루살렘 거민들이 도성으로 오는 신부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마치 첫사랑의 때와 같이 확신에 찬 사랑으로 남편의 팔에 자신을 의지하는 신부의 모습 가운데서 참되고 순수한 애정을 단장하며 오고 있는 한 쌍의 사랑하는 자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서 첫사랑의 회복과 완성을 느낍니다.
신랑은 신부를 어디에서 깨웠다고 하였습니까?
신부의 어머니가 그녀를 낳기 위하여 애쓴 사과나무 아래서 그녀를 깨웠다고 했습니다. 사과나무는 신부가 태어난 집 근처에 있어서 그 가지가 창문까지 내려오거나 울타리를 덮었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과나무 아래’란 신부의 집을 말합니다(2:8~10절 참조). ‘깨웠다’는 것은 신부에게 첫사랑의 고백을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해서 신랑은 처음 사랑의 이야기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도가 믿음이 연약해질 때 영적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당시를 회상하는 것보다 성도에게 기쁨을 주고 도움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때에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고, 그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웠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 생활에 큰 용기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죽음 같이 강한 사랑(6~7절)
아 8:6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7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6절에서 ‘마음’은 가슴을, ‘팔’은 손목 부위 즉 하박(下膊)을 가리킵니다. ‘도장’으로 번역된 ‘호탐’은 소유를 상징하는데, 두 번 반복되면서 소유 개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호탐’이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는 목에 두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손목에 두르는 것입니다. 목에 두르는 ‘호탐’은 작은 원통형 도장으로, 가슴 부위에 위치하게 되어 있었고, 팔찌 형태의 ‘호탐’은 손목(팔)에 위치했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을 소유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은 명령형으로 시작합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소유 개념이 죽을 만큼 강한 사랑으로 묘사됩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죽음은 모든 것을 삼키고 고요케 합니다. 요란했던 삶을 적막으로 만들고, 미움과 분노와 싸움도 정적으로 바꿉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무릎을 꿇습니다. 그만큼 죽음은 강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사랑이 죽음만큼 강하다고 노래합니다. 아니, 사랑이 죽음보다 강합니다. 사랑은 죽음을 불사하기 때문입니다.
‘질투’로 번역된 ‘칸아’는 ‘질투’라는 뜻 외에 ‘적의, 분노, 호전성, 열정’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가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와 평행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질투’보다는 ‘열정’이 더 적절한 의미로 여겨집니다. 즉 사랑이 죽음처럼 강하고, (사랑의) 열정이 스올(죽음)처럼 격렬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과 열정은 많은 물과 홍수도 끄지 못합니다.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7절)
사랑은 가산을 다 털어 바친다고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비웃음거리만 될 뿐입니다. ‘비웃다’로 번역된 ‘부즈’는 부정사와 미완료입니다. 이것은 동사의 의미를 강조하는 용법입니다. 사랑을 돈 주고 사려 한다면 ‘반드시’ 비웃음(멸시)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에필로그(8~14절)
1)오빠들과 누이
아 8:8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아 8:9 그가 성벽이라면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이라면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아 8:10 나는 성벽이요 내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가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오라버니들이 결혼하기에는 아직 어려 보이는 동생(작은 누이)을 두고 걱정하는 내용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그녀가 성벽이면 은 망대를 세워 주고, 문이라면 백향목 판자를 둘러주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성벽’(호마)은 그녀의 처녀성이 잘 보호되었음을, ‘문’(델레트)은 그녀의 처녀성이 보호되지 않았음을 상징합니다. 오라버니들의 눈에 비친 여동생이 결혼하기에는 아직 어려 보이기에 그들은 여동생을 보호 하려 듭니다. 이 모습은 1장과 다릅니다. 1장에서 오라버니들이 그녀를 포도원지기로 삼았었습니다(1:6절). 어쨌든 오라버니들은 동생의 미성숙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듯합니다.
“나는 성벽이요 내 유방은 망대 같으니”
자신의 처녀성이 잘 보호되었고, 결혼하기에 충분히 성숙했노라고 말합니다. 즉 그녀는 강한 성벽처럼 자신을 유혹하는 모든 시험을 물리쳤으며 또한 망대와 같이 신성한 아름다움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결혼을 통하여 ‘화평을 얻은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자는 자신이 남자에게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복의 통로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오빠들은 여동생을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여동생은 신체적으로 성숙했고, 절개를 잘 지킴으로써 혼인을 잘 준비했을 뿐 아니라, 샬롬을 가져오는 자로서 신랑에게 인정받으니 오빠들은 누이를 걱정할 필요도, 벌을 줄 필요도 없어진 것입니다.
2)솔로몬의 포도원과 여자의 포도원
아 8:11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그들로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아 8:12 솔로몬 너는 천을 얻겠고 열매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솔로몬은 ‘바알하몬’(수넴에서 가까운 평원)에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술람미 여인의 오라버니들에게 맡기어 포도 수확기에 은 1,000세겔을 세로 바치게 하였고 그들에게는 1인당 은 200세겔씩을 지급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인의 형제들은 술람미 여인이 처녀로 있을 때에 순결과 덕을 지켜 준 것으로 이러한 기업을 왕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솔로몬을 그리스도로, 포도원을 교회의 모형으로 볼 때 지키는 자들은 교회의 사역자 또는 여러 일꾼들을 비유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들과 솔로몬이 회계를 하였듯이 하나님도 마지막 날 성도들, 즉 교회의 일군들과 회계하실 것입니다(마25:14~30; 히13:17).
3)향품나무 산으로 돌아오세요
아 8:13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내가 듣게 하려무나
아 8:14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신랑은 신부의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신부에게 노래를 청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완전한 사랑을 기뻐하면서 신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신랑은 신부를 ‘동산에 거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신부가 첫사랑의 순결함을 가지고 있음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그리스도께서 믿음 안에서 생활하는 성도를 일컫는 호칭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순결한 신앙을 가진 성도의 기도와 노래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고난당할 때 기도하고, 즐거울 때 찬송하면서 늘 주님과 교제하는 데 힘써야 하겠습니다(약5:13).
13절의 요청에 응답하여, 여자는 남자를 애칭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르며, 노루와 어린 사슴처럼 자신이 거하는 향품나무 동산으로 서둘러 올 것을 간청합니다. 아가서가 남자가 어서 여자에게로 오기를 희망하는 말로 끝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가서의 줄거리는 남녀가 위기를 극복하고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해피 앤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줄거리 속에는 남녀의 한 몸이 됨의 모티브와 남녀가 서로와 멀리 있는 모티브가 날실과 씨줄처럼 얽혀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 와서 함께 있음의 모티브와 아직 오심을 기다리는 모티브가 혼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가서가 아직 오심을 기다리는 모티브로 끝나는 것은 구약 성경이 묘사하는 구속사가 아직 오실 하나님을 고대하는 줄거리라는 사실과 잘 부합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가서를 그동안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성경 가운데서 해석하기가 힘들고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것이 아가서입니다. 결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부부관계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가서를 통해서 사랑과 성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답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오직 결혼의 법도 안에서 이뤄질 때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아가서에서 배운 교훈들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고, 건강한 남녀 교제의 문화를 확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이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묵상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