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은설님
추억의 인사동찻집, 군방원(群芳園)
아주 오래전... 1980년경으로 돌아간다..
따져보면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상기해보면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새롭다.
학생 신분이던 나는 한가한 주말인 토요일 오후가 되면 종로 인사동에 가곤 했다.
인사동에 가면 꼭 들리는 가게가 있었는데, 群芳園(군방원)이라는 중년의 중국남자분이 운영하는 찻집이었다.
그곳은 찻집이라기 보담은 공예품가게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정도로 茶와 자사호와 찻잔 등 茶器를 포함해서 玉으로 만든 장신구, 도자기 그리고 동양화 그림과 香과 향로, 골동품 등 진귀하면서 다양한 예술품을 파는 곳이었다.
언제나 찾아가면 반갑게 맞아주던 그곳 군방원에서 나는 향기로운 중국차를 마시며, 蘭과 茶와 골동품의 대가인 사장님과 중국차와 난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배우던 마음 속 추억의 찻집이었던 것이다.
이 군방원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70년대 후반에 남대문 대도상가 옥상에 가면 박태규 사장님의 撫蘭房, 홍승표 사장님의 梅蘭芳이라는 난가게가 있어서 가끔씩 난초를 구경하려고 들리곤 했는데( 학생신분이라 단지 구경만...) , 그 옆에 群芳園이라는 난가게가 하나 더 생기게 되었다.
이 가게는 앞에 다른 2군데의 난가게와 달리 사뭇 이국적 느낌인데다가, 40세쯤 되어보이는 주인아저씨의 헤어스타일과 인상이 마치 무서운 사자를 연상시키는데다, 사람을 보아도 별 말씀이 없고, 무뚝뚝하여 선뜻 안으로 구경하러 들어가기가 머뭇거리게 하는 특이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난가게에서는 보기 어려운 중국춘란과 묵란과 석곡 등 특이한 난들이 자주 들어와 눈길을 끌었기에 한번은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들어서니 앉아있다가 일어서며 꾸벅하며 눈인사를 하신다.
어색하고 겸연쩍은 웃음을 띄우며 구경차 왔다고 하니 천천히 구경하라신다. 그리고 나서 조그만 방으로 들어가더니 자사호에서 차를 한 잔 따라 주신다. 그때까지 마셔왔던 우리나라 녹차와는 다른 풍미의 향기가 진한 차인데 烏龒茶인 것 같다. 무슨 차인가 물어보니 오룡차의 한 종류인 鐵觀音茶란다. 따라주신 철관음차를 마시며 천천히 둘러보니 중국과 대만에서 건너온 여러 종류의 난과식물들이 보인다. 이것저것 구경하며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해보니 중국화교 2세인 畢重華(필중화)라는 분이다.
그는 교포 2세임에도 한국말이 그리 유창하진 않은 편인데, 중국인이라 취직을 할 수 없어서 고향인 인천 중구에서 부친때부터 해온 중국음식점에서 일을 하였는데 운영이 잘 안되었던지 그만두고 취미로 길렀던 난초를 생계를 위해서 팔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가끔씩 들러서 난초구경을 하면서 차를 얻어 마시곤 했다.
필중화 사장은 중국인답게 차에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 그때까지 나는 차보다는 난초에 더 관심이 많았으므로 이야기의 초점은 언제나 난초가 중심화제가 되었었다.
그 후에도 가끔씩 대도상가에 난초구경을 나오면 무란방, 매란방, 군방원을 두루두루 들르게 되는데, 다른 두 곳은 그런대로 장사가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비해서, 군방원은 별 재미가 없는 듯 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난가게가 제일 안쪽의 구석에 위치한데다 필사장이 화교이기에 한국말이 서툰데다가, 술담배도 못하는 등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한 내성적인 성격도 있었고, 게다가 상품가격이 비쌌고, 대부분의 화교들이 그랬듯이 어렸을 때부터 곤궁한 관계로 뭐든지 아끼기만 하는 습관에 젖어서 그랬는지 고객에 대한 기마이(서비스)가 그다지 안좋았었던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한다. 결과적으로 1년 후쯤에 필사장은 대도상가에서 군방원 간판을 내렸다.
그 이후에 필사장은 인사동으로 옮겨서 난가게를 열었는데, 인사동에 오가는 사람들은 정작 난보다는 차와 중국공예품, 골동품 등 문화상품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알고는 방향을 바꾸어 본격적으로 중국차와 중국다기 그리고 각종 중국공예상품을 팔게 되었다.
당시에는 평범한 일반인들은 대만이나 홍콩 등 해외여행이 그다지 쉽지않았지만, 화교인 그는 이러한 여행에 많이 자유로웠기에 다양하고 많은 물품을 가져와서 이를 판매하고 부터 사업이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도 중국차에 좀더 관심을 가지게 되어 차를 많이 마시게 되었다
당시에 많이 마셨던 차는 우리나라 작설차였는데, 군방원을 다니면서 부터는 중국의 반발효차인 철관음이나 무이암차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학생 신분에 겁없이 100g에 3~5만원씩 하는 극품 오룡차를 사서 마시곤 했으니 차맛을 알긴 알았나 보다. ( 80년대에 3~5만원이란 가격은 상당한 가치를 갖는 금액이었음 )
그때 군방원에 피어있던 향기로운 관음소심난의 하얀 꽃을 보며 마셨던 동정오룡과 목책철관음의 맛은 지금도 잊지를 못한다. 특히 농향 철관음 극품을 아주 좋아했었는데, 요즘에는 그때 마셨던 철관음의 맛을 내는 차를 먹어볼 수 없어 많이 아쉽다.
[ 인사동길....푸른 대나무 너머에 군방원이 있던 가게 앞으로 행인이 무심하게 지나고 있다 ]
그로부터 10년간 인사동을 가면 군방원에 들려서 차마시고 구경하고 좋은 차가 나오면 사오곤 했는데, 회사일이 정신없이 바쁘고 거기에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나서부터 시간과 경제적으로 빠듯한 삶을 사느라 언제부터인가 인사동 출입이 뜸하게 되면서 군방원을 찾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고.... 어느 한가한 주말에 인사동에 가보니 군방원이 보이질 않는거다. 어찌된 일인지 알아보니 필사장이 돈을 많이 벌어 그 돈과 일부는 빚을 얻어 군방원 가게와 또 다른 이웃가게를 구입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필사장에게 커다란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외국인은 부동산 매입이 금지되었었는데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 항상 따라다녔는데, 그 사람의 명의로 인사동 점포를 구입을 했다고 한다.
그 박가라는 사람은 눈 한쪽의 눈동자가 바깥쪽으로 쏠려있어 눈빛이 특이한데다, 대머리에 배는 남산만큼 부르고 항상 콜라병을 입에 물고 쓰레빠(슬리퍼)를 직직 끌며 신고 다니며, 상스런 말투를 내뱉고 다녀서 별로 좋은 인상이 아니라서 왜 저런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지 이해가 안되었지만 어쨌거나 둘 사이는 상당히 친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필사장이란 사람은 한국사회에서 항상 뙈놈이라고 불리며 아웃사이더로 살아오다보니 친하게 지낼 말동무가 그리웠던 모양....
그런데... 아뿔사! 그토록 믿었던 박가에게 부동산의 소유권을 가로채이는 배신을 당하였던 것.... 결국 그 녀석에게 모든 재산을 빼앗긴채 알몸으로 쫒겨나 피눈물을 흘리며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고, 그 후 박가 녀석은 그 점포들을 차지한 후 비싼 점포세를 받아가며 이를 자본으로 주변의 부동산 매입을 꾸준히 해나가서 몇년이 지난후에는 여러채의 점포를 소유하게 되어 지금은 인사동의 빵빵한 부동산재벌로 꽤나 행세하면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
한편 필사장님은 인천 챠이나타운 어딘가에서 부인과 둘이서 조그만 가게를 한다는 소문이 있 었는데, 하도 안부가 궁금하여 예전의 군방원 전화번호를 눌렀더니 전화를 받는 분이 예전의 필사장이었던 것... 그 후 인천 차이나 타운에 갈 일이 있어서 연락하고 잠시 만났던 그 분의 몰골은 예전의 그 분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또 수년이 흘러서 청계산의 매란방 홍승표 사장님으로부터 그분의 소식을 들었는데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전에 타계를 하셨다는.... ㅜㅜ
난과 차가 어우러진 아름답고 즐거운 추억을 갖게해준 인사동 군방원.....
인사동 '군방원'이 있었던 그 자리에는 ‘옛찻집’이라는 고전찻집이 생겨 영업을 하고 있다.
그 후로 인사동을 지날 때마다 군방원이 있었던 자리의 가게를 기웃거리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 가게를 볼 때마다 쇼윈도우 창너머 언제나 항상 그 자리에 앉아있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 웃으며 손짓하시는 필사장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