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야영지에서 잠시 빠져나와 경북 왜관베네딕도 수도원에서 1월 23일부터 27일까지 실시하는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피정에 왔다. 아내와 아이들이 아침 기도를 하며 5일 동안의 여정을 축복해주었다. 기도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6시 30이 넘어간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약간 걱정이 앞선다. 지리산 언저리 길을 넘어 경상북도까지 가야하는데....고약한 88도로에 눈이라도 내리면 큰일이다. 톨게이트를 지나서 성크리스토폴의 전구를 통해 주님께서 보호해주시리라 의탁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바친다. 순창을 넘어 지나면 왕복 2차선도로다. 아마도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고속도로는 지구상에서도 드물 것이다. 안개가 짙고 여전히 비가 내린다. 노면 상태가 염려되어 서행을 하니 뒷 차가 금방 따라 붙는다. 난 서서히 가고 싶은 데 난처한 상황이다. 약간의 속도를 높이자 또 다시 따라 붙는다. 불안하다. 2차선만 되더라도 양보차선으로 갈 수 있는데... 할 수 없이 우측 깜빡이를 넣고 갓길로 양보를 하니 쏜살 같이 추월을 한다. 이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을 하며 삶을 생각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리라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외길로만 살아간다면 얼마나 숨가쁘고 긴장된 삶의 연속일까?
나는 신앙인이다.l 참 신앙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렇듯 악조건 속에서도 먼 길을 마다않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길을 나서지 않았던가?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 다른 길을 추구해야한다. 그래야 삶의 숨통이 트이고 여유가 생긴다. 신앙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거창 휴게소에서 홀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며 이런 저런 상념에 빠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진눈개비가 내린다. 걱정이다. 도로 조건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다행히 고령군에 진입하니 3차선 도로로 바뀌고 다시 진눈개비가 가랑비로 바뀐다. 오후 3시까지 수도원에 가면 되니 한티와 신나무골 성지를 들러 작년에 순례했던 가실 성당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칠곡나들목을 통과하여 한티로 향했다.
팔공산 기슭에 도착하니 비가 다시 눈으로 바뀐다. 내심 기대 만땅이다. 비에 젖을 염려도 없고 눈길을 따라 순례를 하는 상상을 하니 스스로도 멋지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아픔과 무명순교자들의 삶의 애환이 깃든 성지를 낭만적인 감정으로만 생각하다니.... 주님께서 질책하시는 것일까? 산길로 올라갈수록 눈이 거세지고 급기야는 커브길을 돌때마다 차가 미끄러진다. 긴장이다. 네비게이션을 보니 아직도 몇 KM는 더 올라가야한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된다. 지나가는 차도 없다. 다행이 우측에 한티 성지가 보인다. 성지로 가는 내리막길엔 눈이 수북이 쌓여있다. 10여 미터를 내려가다 길옆에 주차를 하고 노면 상태를 확인해 보니 겁이 덜컥 난다. 순례는 고사하고 돌아 갈 길이 걱정이다. 포기하고 차문을 여니 차가 스스로 움직이다. 수호천사만 연신 부른다.
한 참을 후진과 미끄러짐을 반복하다 간신히 오르막길로 다시 들어섰다. 네비에 왜관 수도원을 치고 바로 직진한다. 그런데 웬걸? 네비가 산위 정상으로 계속가라고 한다. 거리도 더 멀어진다. 반대 방향으로 잘 못 왔다. 차라리 산 정상에 수도원이 있으면 더 좋겠다. 정상을 지나 내리막 길로 들어서자 커브길 만 나오면 차가 미끌어진다. 오 주님....다행이 평지에 도착하였다. 군위군이다. 길 옆 카페에 들어가 물어보니 반대길로 왔단다. 멀어도 좋으니 평지로 해서 왜관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산길을 통과해야 한다고 한다. 인적도 없는 눈 덮인 산간 길을 어찌 어찌 고생하여 빠져 나오니 다부동이다. 아, 여기가 한국전쟁의 유명한 격전지였구나. 온 힘이 빠진다.
주님과 수호천사의 도움으로 무사히 왜관수도원에 도착했다. 시간을 보니 점심 시간이지만 밥먹을 힘도 없고 마음이 불안정하여 피정에 임할 수가 없다. 한 참을 쉼호흡을 한다. 어쩌나? 그래, 신나무골 성지를 찾아보자. 다행히 신나무골 성지가 왜관의 지척에 있다. 가다가 산길이면 돌아 오려고 마음먹고 출발하였다.
신나무골 성지는 칠곡으로 가는 큰 도로 옆에 있었다. 성지에 도착하니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눈이 아니니 다행이다. 오늘은 눈이 싫다. 아니 눈이 무섭다. 신나무골엔 이선이엘리사벳순교자의 묘지와 대구교구 최초의 성당터가 있었다. 묘지 참배를 하고 약식으로 십자가의 길을 마친다. 대구교구 첫 본당 터에는 한옥으로 옛 본당을 복원해 놓았지만 관리가 너무 엉망이어서 누가 볼까봐 순례자인 내가 부끄러웠다. 이렇게 관리할려면 차라리 복원을 하지나 말지...착찹한 심정을 하소연 할 수 없어 이선이묘지에 가서 한참을 앉아 마음을 추스르고 조금 내려와 베네딕도수녀회 연화리 피정집에 가 보았다.
근처 도로에서 들리는 소음이 맘에 거슬려 실망이다. 계획대로 하면 올 겨울 개인 피정은 이집에서 하려고 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어서 가실 성당에 가서 마음을 진정해야 겠다.
역시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성당에 들어가니 아무도 없다. 맨 앞에 가서 주님을 대면하고 싶다. 한참을 앉아 있자니 갑자기 알 수 없는 고독이 밀려 왔다. 오늘 일들이 스쳐간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눈물이 난다. 한참을 주님을 본다. 한참을 오늘 일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한참을 나를 본다. 다시 주님을 본다. 주님도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하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독에 휩싸여 몸서리치는 내가 안쓰러운지 주님이 위로하신다. “수고했다, 나의 형제여. 너무 고독해하지 말라.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 야곱을 생각해보라! 형의 보복이 두려워 사랑하는 어머니와 고향을 떠나 수 백리 먼 길을 고독 속에서 걸었던 그를 생각해보라. 추위와 들짐승이 두려워 돌베개를 베고 잤던 그를 생각해보라. 고독의 여정 중에 우물가에서 아름다운 여인 라헬을 만나고 사랑에 빠졌던 야곱을 생각해보라. 이제 내가 그대를 이 먼 곳까지 초대한 이유를 알겠는가? 렉시오디비나를 통하여 나의 이야기를 새롭게 들려주겠다. 다니엘, 나의 형제여. 이렇게 네가 잘 있지 않느냐? 이제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
감사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다시 힘이 쏫는다. 그래 5일 동안의 렉시오디비나 여정에 집중하자. 주님의 사랑에 모든 것을 의탁하자. 성당 뒷산을 따라 십자가의 기도를 조용히 바치고 왜관수도원에 도착한다.
마음이 편하다. “너무 기도하려고 애쓰지 말고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는 대로 편하게 의탁해 보세요” 나의 기도천사도 다정히 격려한다. 그래....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의탁하자.
수도원 성당에서 수사님들의 성무일도로 피정의 첫 날을 맞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