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麻衣太子
(新羅가 亡하자 마지막 임금 敬順王의 王子가 麻衣를 입고 金剛山으로 들어가 草根木皮로 餘生을 마친대서 由來한 말이다. 끝까지 自尊心을 지키는 사람을 比喩한다)
● 東國輿地勝覽, 韓國人名大辭典에
新羅의 마지막 王 敬順王 (在位927~935) 때에 後百濟의 甄萱의 잦은 侵攻으로 國力이 極度로 惡化되고, 邊方도 야금야금 掠奪當해 領土가 좁아졌다. 거기에다가 高麗의 勢力이 强해지자 敬順王은 大臣들과 太子에게 疲弊한 百姓들을 그냥 둘 수 없으니 高麗에 降服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太子가 悲憤하며 말했다.
“한 나라의 存亡은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千年社稷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내어주려 하십니까?”
敬順王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外的으로는 百濟의 侵攻이 잦고, 內的으로는 群雄이 割據하여 나라의 危殆함이 이 地境에 이르렀는데, 罪 없는 百姓들을 戰爭터에 내몰아 피를 흘리게 하는 짓은 차마 못 하겠다.”
結局 君臣會議에서 贊反討論 끝에 高 麗의 太祖에게 降服할 것을 決議했다.
그러자 太子는 父王에게 痛哭으로 下直하고 皆骨山(겨울의 金剛山의 이름)에 들어가 바위를 지붕삼아 平生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으면서 恨 많은 生을 마쳤다. 사람들은 太子가 삼베옷을 입고 節槪와 威信을 지켰다고 하여 麻衣太子라고 불렀다.
敬順王은 高麗의 太祖로부터 宥和宮을 下賜받고 王建의 딸 樂浪公主를 맞아 政丞에 封해졌으며, 慶州를 食邑으로 받았다. 그리고 慶州의 事審官이 되었다.
🍎 莫非天運
(하늘의 運은 막지 못한다는 말로, 太祖 李成桂가 아들인 太宗을 除去하려 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혼자 중얼거렸던 말이다)
● 太宗實錄. 韓國人名大辭典에.
朝鮮의 太祖 李成桂 (1335~1408)는 第1次 王者의 亂이 일어나자 둘째 아들 芳果(定宗)에게 禪位한 뒤 上王이 되었다. 1400年 다섯째 王子 芳遠 (1367~1422)이 第2次 王子의 亂을 일으켜 太宗으로 卽位하자 太上王이 되어 咸興으로 隱居해 버렸다. 太宗은 太上王의 怒여움을 풀고자 成石璘, 朴淳 等을 太上王이 隱居하고 있는 咸興으로 보냈으나 모두 죽임을 當하여 돌아오지 못했다. 여기에서 由來된 말이 咸興差使이다. 太宗은 마지막으로 無學大師를 불러 自己의 心情을 털어놓고 아버지를 꼭 모셔 오도록 懇曲히 付託했다.
李成桂와 가깝게 지냈던 無學大師는 釋王寺에서 李成桂를 만나 그間의 情을 나누었다. 그리고 太宗에 對해 말했다.
“今上에게 비록 過失이 있다 하나 殿下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닙니까? 이제 人倫을 끊어버리신다면 今上은 그 자리에 便安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保位가 不安하면 臣下와 百姓들의 마음이 動搖되고, 나라가 危殆롭게 될 것입니다. 부디 이를 洞察하시어 하늘이 맡기신 王業을 保全케 하시옵소서.”
이렇게 無學大師의 懇切한 說得으로 李成桂는 咸興을 떠나 漢陽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消息을 들은 太宗은 心腹 河崙 以下 百官들을 거느리고 親히 議政府까지 出迎했다. 구름 같은 遮日을 치고 歡迎 準備를 서두를 때, 河崙이 太宗에게 아뢰었다.
“遮日의 기둥을 아름드리 나무로 해야 하옵니다.”
“왜 그래야 되오?”
太宗은 勿論 다른 여러 臣下들도 怪異하게 여길 뿐, 河崙의 底意를 아는 이가 없었다.
“次次 아시게 될 테니 꼭 큰 기둥을 써야 되옵니다.”
워낙에 智慧 주머니인 河崙이요, 또 누구보다도 信任이 두터운 그인지라 太宗은 더 以上 묻지 않고 그러하게 했다.
이윽고 太上王의 還都式이 嚴肅하고도 莊嚴한 雰圍氣 속에서 擧行되고 있었다. 李成桂는 마련된 上座에 앉아 太宗이 들어와 拜謁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太宗이 袞龍袍와 翼蟬冠에 威儀도 堂堂하게 滿朝百官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가 凜凜하게 들어오는 양을 굽어보고 있던 李成桂의 얼굴에는 瞬間 怒氣의 빛이 번뜩였다. 조금 前까지만 해도 마음을 돌리려 했던 그였으나 생각이 突變하여 自己도 모르게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고얀놈! 네가 무슨 面目으로 그리도 華麗하게 내 앞에 나타난단 말이냐?”
瞬間 그는 옆에 놓인 활을 들어 太宗을 向하여 시위를 당겼다. 實로 아슬아슬한 瞬間, 太宗은 날쌔게 기둥 뒤로 몸을 避했고, 화살은 瞬息間에 날아가 遮日의 큰 기둥에 꽂혔다.
李成桂는 화살을 내던지면서 嘆息했다.
“天運은 어쩔 수가 없구나.(莫非天運)”
이어서 獻酒 儀式이 進行되었다. 勿論 太宗이 손수 술을 따라 父王에게 올려야 했다. 그때 옆에 있던 河崙이 太宗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아직도 太上王의 怒氣를 測量키 어렵사오니 侍官으로 하여금 盞을 代身 드리게 하옵소서.”
이에 太宗이 술은 自己가 손수 따랐지만 그 盞은 侍官을 시켜 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李成桂는 긴 한숨과 함께 소매 속에서 쇠뭉치를 꺼내어 던져버리고, 盞을 받으며 말했다.
“어찌하랴! 하늘이 定한 運數로다.”
그제야 玉璽를 太宗에게 내어주며 말했다.
“옛다. 이놈! 貪내던 게 바로 이것이지?”
太宗은 세 番 辭讓하는 척하다가 그것을 받았다.
李成桂는 王位에서 7年, 上王으로 10年 만인 春秋 74歲에 昇遐했다.
한便, 太宗으로 하여금 危機를 謀免케 했던 河崙은 實로 太宗의 名參謀요, 팔과 다리와 같은 股肱之臣으로 많은 功勞를 세웠으나 李成桂로서는 얄밉기 짝이 없는 存在였다. 그래서인지 河崙은 꿈에 李成桂의 怒氣 찬 꾸지람을 듣고 病을 얻어 結局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太宗은 舊派勢力의 巨物인 鄭夢周를 暗殺하고, 여덟째 아우 芳碩에 이어 일곱째 아우 芳藩도 죽였다. 나중에는 바로 위 兄인 芳軒마저 平定했다. 그러니까 王位를 承繼하기 爲해서 兄과 아우 셋을 죽인 것이다.
그는 抑佛崇儒 政策을 펴고, 私兵을 革罷했으며, 號牌法 實施, 鑄字所 設置, 高麗史 編纂, 申聞鼓 設置 等 많은 治績을 남긴 後 셋째 아들 世宗에게 禪位하였다.
🍎 萬德慈善
(萬德이 베푼 慈悲로움이라는 말로, 어렵게 돈을 모아 不遇한 이웃을 돕는 境遇를 比喩하여 쓴다. 濟州道의 妓女 金萬德의 善行에서 由來했다)
● 朝鮮史의 女人들에.
朝鮮 正祖(1752~1800) 때 金萬德은 濟州道의 한 裕福한 家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全羅道 羅州에 往復하면서 特産物인 미역과 全鰒, 橘 等을 파는 商人이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보리와 밀을 耕作하여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꾸러나갔다.
그러나 金萬德은 어려서 父母를 잃고 家産이 기울어 妓女의 生活을 始作하였다. 漸次 나이가 들어 世上의 理致를 깨우치자 自身이 兩人의 身分임을 내세워 妓女 生活을 淸算하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장사를 始作, 客酒집을 차렸다. 그리고 거기에서 모은 돈을 밑천으로 濟州道와 陸地를 連結하는 交易을 始作하였는데 쌀과 옷감과 藥劑 等 陸地에 貴한 것을 濟州道에서 보내 30如 年의 努力 끝에 濟州道에서 손꼽히는 富豪가 되었다.
그때 濟州道에는 몇 年째 極甚한 가뭄으로 凶年이 들어 곳곳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續出하였다. 그러나 官家에서는 하늘의 일이니 人力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傍觀만 하고 있었다.
金萬德에게는 이웃들의 苦痛이 決코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았다.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구나. 풀뿌리, 나무뿌리까지 캐 먹으면서도 목숨을 扶持하지 못하니, 저들을 爲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되겠다. 모두가 내 兄弟요. 姉妹인데 어찌 外面만 하겠는가.”
金萬德은 朝廷에서도 손을 쓸 수 없었던 百姓들의 疲弊한 삶을 救濟하고자 苦生하여 모은 돈을 떨어 陸地에서 穀食을 사들여 나누어 주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救할 수 있었다.
그 女의 慈善은 朝廷에까지 알려져 正祖는 金萬德을 宮에 불러들여 ‘內醫院 醫女班首’라는 벼슬을 내리고, 稱讚하였다.
“네가 女子의 몸으로 千如 名의 貴重한 목숨을 살려냈으니 참으로 갸륵한 일이다. 남을 爲해 自己 財産을 쓰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거늘 躊躇 없이 慈善을 베푼 것은 너의 마음이 至極히 善하고 아름다운 까닭인 것이다.”
正祖는 그 女를 激勵하는 뜻으로 金剛山을 구경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後, 그 女는 平凡한 村婦로 돌아와 餘生을 보냈다.
顯宗 6年, 濟州道로 流配된 秋史 金正喜는 그 女의 行跡에 크게 感動하여 ‘恩光世(恩惠의 빛이 온 世上에 번진다.)’ 라고 쓴 扁額을 써서 그 女의 後孫에게 보냈다. 政丞 蔡濟恭은 金萬德의 行實을 記錄한 傳記를 쓰기도 했다.
🍎 忙僧渡水
(바쁜 스님의 물 건너기란 말로, 되는 일이 없이 이리저리 모이기만 하는 것을 뜻한다)
● 慵齊叢話에.
朝鮮時代에는 抑佛崇儒 政策을 폈던 關係로 스님에 對한 巷說이 많았다. 이 이야기도 그런 背景에서 由來했다.
한 스님이 寡婦에게 장가를 가려 하자 마땅찮게 생각한 上座가 男女가 和合할 때에는 생콩가루를 먹고 물을 마시면 最高로 좋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스님은 上座의 말대로 생콩가루를 물에 타 먹고 寡婦의 房에 들어갔다.
그런데 생콩가루를 먹고 물을 마시면 泄瀉가 나기 마련이다. 新房에 들어간 스님도 例外가 될 수는 없었다.
寡婦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뱃속이 부글부글 끓다가 뒤가 急해서 겨우 참고 막 便所로 가려 하는데 눈치 없는 寡婦가 들어와 툭 쳤다. 그러자 새 이불에 排泄物이 쏟아져 惡臭가 振動했다. 寡婦는 질겁을 하고 스님을 내쫓아버렸다.
스님이 精神없이 달아나다 보니 하얀 메밀꽃이 달빛에 비쳐 개울처럼 보이는 곳이 나타났다. 스님은 그곳이 냇물인 줄 알고 옷을 벗고 들어가니 밭이었다.
다음에 또 하얀 물이 나타나니 이番에는 속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걸어가니 그건 眞짜 물이어서 옷이 모두 젖어 버렸다. 물속에서 기어 나와 할 수 없이 옷을 말리느라 다리 아래에서 쉬고 있는데 동네 婦人들이 와서 沐浴을 하기 始作했다. 그러다가 至毒한 냄새를 피우고 있는 스님을 發見하고는 ‘우’ 하고 달려들어 흠씬 두들겨 팼다.
스님은 실컷 얻어맞고 옷을 벗은 채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이番에는 지나가던 行人이 스님의 陰莖은 藥에 좋다며 자르려고 달려들었다. 魂飛魄散한 스님이 줄行廊 끝에 겨우 절로 돌아와 門을 열라고 했으나 對答이 없자, 개구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자 上座가 ‘이놈의 개가 어제 밤에 와서 기름을 훔쳐 먹더니 오늘 또 왔다.’ 고 하며 몽둥이로 내리쳤다. 스님은 急한 나머지 ‘나요! 나란 말이요!’ 하며 쓰러지자 그때서야 上座가 업고 들어갔다.
이때부터 무슨 일을 하다가 거듭 狼狽하는 일을 가리켜 忙僧渡水라 했다.
🍎 亡者還債
(죽은 者가 빚을 갚아주었다는 말로, 債務者가 죽은 사람을 핑계로 빚을 蕩減받은 故事에서 由來했다. 터무니없는 일을 끌어대어 責任을 回避하는 境遇를 이른다)
● 傭齊叢話 雜記
禮山의 高利貸金業者 金長得은 愚直하면서도 吝嗇하기 짝이 없어 빚을 주면 督促이 불같았다. 때문에 그에게서 돈을 빌린 姜鎭海라는 사람도 그에게 톡톡히 當했다. 그래서 그에게 골탕을 먹여주려고 꾀를 내어 아내에게 말했다.
“長得이가 來日 틀림없이 종놈을 보내 빚을 督促할 텐데, 그러면 當身은 只今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시오.”
이튿날, 그는 홑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屍體처럼 누워 있었다. 그의 아내는 男便이 시킨대로 머리를 풀고 슬피 울었다. 그때 아니나 다를까 金長得의 종이 찾아왔는데, 그 光景을 보고는 웬일이냐고 물었다.
“男便이 어제 저녁 늦게 돌아와 식은 밥 몇 숟갈을 뜨고는 밤중에 가슴을 치더니 瞥眼間 죽었지 뭐예요. 이제 어린 것들하고 살아갈 일을 생각하니 天地가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흑!흑!흑!”
종이 急히 돌아가 보고 들은 대로 告하자 長得은 돈을 떼이는가싶어 가슴이 쓰라렸다.
그런데 며칠 後, 뜻밖에 죽었다던 姜鎭海가 찾아왔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어찌 된 일인가?”
“小人이 죽은 지 사흘 만에 多幸히 다시 살아나 이제야 겨우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罪悚합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實際로 보기는 처음이네. 그럼 자네는 저승 구경도 했겠구먼?”
“예. 저승도 이승과 비슷하던걸요.”
“그래? 어디 저승 얘기 좀 들어보세.”
“예. 얼굴이 凶惡한 差使가 小人을 끌고 가는데 꼭 이승과 같더라고요. 閻羅國에 들어서니 큰 宮殿에 鬼神 졸개들이 늘어서 있고, 한 險狀궂게 생긴 者가 붉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데 그이가 바로 閻羅大王이라고 하더군요. 그 閻羅大王이 冊을 들추어 보더니 ‘이者는 아직 오지 않을 사람이니 當場 돌려보내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差史를 따라 나오는데 길가에서 어떤 사람이 小人의 손을 잡고 반가워하기에 仔細히 보니 바로 어르신의 돌아가신 아버지였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돌아가신 우리 先親을 뵈었단 말이냐?”
“예. 그런데 어르신이 워낙 襤褸한 모습이어서 처음에는 몰라뵈었다가 或是나 해서 물었더니 只今은 거지 身世가 되었다지 뭡니까? 宅의 消息을 물으시기에 仔細히 여쭈었더니 눈물을 禁치 못하셨습니다. 마침 小人의 주머니에 돈이 한 푼 있어서 그것을 드려 외상 술값을 갚게 했는데, 小人의 마음도 매우 슬펐습니다.”
“그럼 或是 母親은 못 만나 뵈었느냐?”
“왜요 뵈었지요. 그런데 惶悚해서 敢히 여쭙기 어렵습니다.”
“괜찮다. 우리 둘뿐인데 뭘 망설이느냐?”
“물으시니 不得已 實相을 말씀 드릴 수밖에 없군요. 事實은 小人이 差使와 한 客酒 집에 들렀더니 그 집 안主人이 바로 어르신의 母親이 아니겠습니까? 母親께서 반가워하시며 좋은 술과 按酒를 푸짐하게 주시기에 잘 먹고 나왔습니다.”
“그럼 우리 母親께서는 어떻게 살고 계시던가?”
“不幸히도 어르신의 母親은 어르신의 先親과 義가 맞지 않아 헤어지고, 小人의 아버지와 함께 사시는데 아주 情이 깊다고 했습니다.”
金長得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 事實이 漏說되면 내 體面이 말이 아니니 이 일은 絶對 입 밖에 내지 말게. 그 代身 자네가 빌려간 돈은 모두 蕩減해 주겠네.”
그 後부터 姜鎭海는 金長得의 집을 뻔질나게 찾아가서 밥과 술을 푸짐하게 待接받고 金錢도 마음대로 빌려 썼다.
🍎 買夢得華
(꿈을 팔아 榮華를 얻는다는 말로, 新羅 金庾信의 누이同生 文姬가 언니 寶姬의 꿈을 사서 太宗武烈王의 王后가 된 故事에서 由來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큰 利得을 보는 것을 比喩)
● 新羅史話에.
新羅의 金庾信(595~673)은 伽倻國 사람으로 舒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萬明夫人으로 金庾信의 精神的인 支柱였다.
金庾信에게는 寶姬와 文姬라는 두 名의 누이同生이 있었다. 어느 날, 寶嬉가 꿈에 西岳의 仙桃山에 올라가 小便을 보니 그 量이 엄청나 徐羅伐이 모두 오줌물에 잠겨버렸다. 그래서 同生 文姬에게 그 꿈 이야기를 들려주자 文姬는 그 꿈을 팔라고 졸라 緋緞옷감 한 벌을 주고 샀다.
그런 일이 있은 뒤 正月 어느 날, 金庾信이 金春秋를 데리고 와서 自己 집 앞에서 공차기를 하고 놀았다. 그러다가 짐짓 春秋의 옷을 밟아 옷고름을 떼어놓고는 自己 집에 들어가 꿰매자고 勸했다. 春秋는 庾信을 따라 들어갔다. 庾信은 누이 寶姬에게 春秋의 옷고름을 달아 주도록 勸했다.
“오라버니, 男女가 有別하온데 어찌 그런 일로 남의 男子를 가까이 하겠습니까?”
寶姬는 兩갓집 處女로서 責잡힐 짓을 걱정하여 鄭重히 辭讓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文姬가 自請하여 떨어진 옷고름을 달아주었다. 그것이 因緣이 되어 文姬는 春秋와 깊은 關係를 맺어 姙娠을 했고, 그 事實을 庾信이 알게 되었다.
“媤집도 안 간 處女가 孕胎를 하다니, 이는 우리 家門을 더럽힌 것으로 容納할 수 없는 일이다.”
金庾信은 文姬를 짐짓 크게 꾸짖으면서 불태워 죽이겠다고 消聞을 퍼뜨렸다. 그리고 善德女王의 南山 行次에 맞추어 自己 집 뜰에다 長斫과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질러 煙氣를 치솟게 했다.
王이 고을 복판에서 올라오는 煙氣를 보고 웬일이냐고 묻자 臣下들이 아뢰었다.
“金庾信 公의 누이가 媤집도 가지 않았는데 姙娠하였기로 그 罪를 물어 火刑에 處한다 하옵니다.”
“그럼 姙娠시킨 男子는 누구라 하더냐?”
그러자 王을 모시고 있던 金春秋의 顔色이 검게 變하면서 안절부절못했다. 女王은 조카 春秋의 所行임을 알고 꾸짖었다.
“네가 한 짓이로구나. 빨리 가서 救해주도록 해라.”
일이 이렇게 되자 金春秋는 吉日을 擇하여 文姬와 婚禮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善德女王이 昇遐하고 眞德女王에 이어 金春秋가 王位에 오르니 바로 太宗武烈王이다. 文姬는 文明王后가 되어 三國統一을 內助했고, 五男五女를 낳았으며 得華한 生活을 하였다. 꿈을 판 寶姬는 平凡한 無名의 女性으로 一生을 마쳤다.
🍎 妹好妹夫樂
(누이 좋고 妹夫 좋다. 朝鮮 肅宗 때 한 陵參奉에게서 由來한 말로, 한 가지 일로 여러 사람이 좋아지는 境遇를 이른다)
● 大東奇聞, 古今淸談에.
朝鮮 肅宗 때 安東의 선비 權道溫은 性品이 어질고 집안도 넉넉해서 春窮期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救濟하는 일을 樂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에 對한 稱頌이 藉藉했다.
새로 赴任한 府使는 그가 善行만 하는 것이 아니라 經學에도 밝은 것을 알고 朝廷에 薦擧하여 楊州의 陵參奉으로 任命받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나이 60의 老軀를 이끌고 官職에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權 參奉에게 不足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는 일찍이 喪妻를 했기 때문에 不行하게도 膝下에 子女가 없었다. 周圍 사람들은 그러한 그를 두고 하늘도 無心하다면서 同情했다.
權 參奉은 楊州에 赴任하여 別檢 金宇杭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陵을 지키는 사람들이 허름한 차림의 總角 하나를 끌고 왔다. 權 參奉이 그 曲折을 묻자 總角이 對答했다.
“小人은 70이 넘은 어머니와 35歲의 未婚 누님을 모시고 나무를 해다가 팔아 延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많이 와서 나무를 할 수 없어 陵 안까지 들어가 나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容恕하여 주십시오.”
總角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權 參奉은 總角의 處地가 안타까워 金 別檢에게 罰하지 말고 다른 方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金 別檢 亦是 그를 가엾게 여겨 잘 타이른 다음 가여운 생각에 밥床을 차려주니 總角은 국과 김치만 개 눈 감추듯 먹고 밥은 먹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理由를 물으니 어머니와 누님에게 갖다 드리기 爲해서라고 했다.
權 參奉은 그 밥을 다 먹게 하고 따로 쌀 한 말과 닭 한 마리를 주어 어머니를 奉養하게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추위는 더욱 甚해져 가는데 그 總角이 또 붙들려 왔다.
權 參奉이 火가 나서 물었다.
“왜 또 그랬느냐?”
“參奉 어른을 뵈올 面目이 없습니다만 陵 밖에 있는 삭정이(죽은 나뭇가지)를 꺾으려고 나무에 올랐다가 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陵 안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金 別檢이 말했다.
“또 容恕해 준다 해도 總角의 形便이 나아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方法이 있긴 한데…….”
“무슨 좋은 方法이라도 있다는 것입니까?”
金 別檢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는가? 只今 參奉이 홀로 사는데 總角의 누이가 35歲 老處 女라고 하니 두 사람이 婚姻을 하면 妻家도 돌보아 주게 되고, 權 參奉도 一身이 平安해질 터이니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權 參奉은 金 別檢의 提案이 싫지 않아 總角에게 어머니의 承諾을 받아 오게 했다. 勿論 總角의 집에서는 拒絶할 理由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60歲의 新郞과 35歲 新婦의 婚姻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妹好妹夫樂 慶事였다.
歲月이 흘러 그 사이 別檢 金宇杭은 府使로 昇進하여 安東에서 勤務하고 있었다. 어느 날, 權 參奉이 찾아와 말했다.
“府使 나리의 配慮로 只今은 23歲와 24歲의 두 아들을 두게 되었는데 그 아들들이 올해 監試에 應試하여 同時及第라는 慶事를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感謝합니다.”
金 府使는 權 參奉의 人事를 받고 그를 白馬에 태워 故鄕 마을로 가게 하니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歡迎했다.
🍎 賣畵買樂
(그림을 팔아 즐거움을 샀다는 말로, 正祖 때의 風俗畵家 金弘道가 그림을 팔아 風流를 즐긴 逸話에서 由來했다. 自己가 즐기는 일을 豪氣롭게 해내는 것을 比喩한다)
● 正祖實錄. 弘濟全書. 朝鮮名人傳에.
朝鮮 正祖(1752~1800) 때의 畵家 檀園 金弘道(1745~?)는 風俗畵의 大家였다. 그는 圖畵署의 畵員으로 縣監 待遇를 받았지만 家庭生活은 돌보지 않고 그림과 風流에만 젖어 살았다.
그가 어느 날, 한 마을을 지나다가 울타리 안에 있는 아름다운 梅花나무를 보고 안으로 들어가 主人에게 물었다.
“여보시오. 이 나무를 내가 사고 싶은데 얼마면 팔 거요?”
“나도 매우 아끼는 건데. 正히 사시려면 2百 兩만 주십시오.”
“2百 兩이라…….”
金弘道는 더 以上 할 말이 없었다. 끼니를 이어 가기도 힘든 形便에 2百 兩이라는 巨金을 주고 梅花나무를 살 수는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梅花나무를 鑑賞하는 것으로 滿足해야 했다.
며칠 後, 큰 富者로부터 그림을 그려 달라는 付託을 받았다.
金弘道는 서둘러서 不過 며칠 만에 그림을 完成해 주고 3百 兩을 받았다.
돈을 받은 그는 2百 兩을 주고 예전 집主人과 흥정했던 그 梅花나무를 샀다. 그리고 나머지 돈으로 盛大한 술잔치를 마련하여 親舊들을 待接했다.
金弘道는 아름다운 梅花를 鑑賞하면서 가까운 親舊들과 술을 마시는 것이 무척이나 洽足했다. 親舊들도 興겹게 술을 마시면서 마음껏 즐겼다.
“여보게, 檀園! 자네가 이런 자리를 마련할 때도 있으니 世上 많이 좋아졌구먼. 그런데 자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저런 훌륭한 梅花나무도 사고, 이렇게 푸짐한 飮食을 마련했는가?”
金弘道는 豪宕하게 웃으면서 자랑했다.
“그림을 그려 주고 3百 兩을 받았네. 그 中에서 2百 兩으로는 梅花나무를 샀고, 나머지 돈으로 술과 按酒를 마련하고 쌀과 땔나무도 샀지. 어떤가? 이만하면 사나이 生活이 괜찮지?”
“아암. 亦是 자네답네.”
끼니도 이어 가기 힘든 生活이었지만 아름다움과 風流를 爲해서라면 自己가 가진 모든 財物을 아낌없이 버릴 수 있는 金弘道였다.
그는 山水畵, 人物畵, 花鳥圖 等에 두루 能했으며, 特히 庶民들의 生活 모습을 그린 風俗畵를 自己만의 獨特한 方法으로 그려냈다.
🍎 麥飯政丞
(보리밥 政丞이라는 말로, 朝鮮 正祖 때의 政丞 金鍾秀의 故事에서 由來했다. 社會的 身分이나 物質的으로 豊富한 사람이 勤儉節約하는 것을 比喩하여 쓴다)
● 正祖實錄 夢悟集에
朝鮮 正宗 때의 政丞 金鍾秀 (1728~1799)는 매우 淸廉하고 剛直한 사람이었다. 當時의 慣習으로 地方官이 새로 任命되면 赴任하기 前에 그 地域에 居住하고 있는 前職 大臣들에게 人事를 하는 것이 禮義였다.
金鍾秀는 新任 地方官들이 찾아오면 허름한 베옷에 나막신을 끌고 나와서 반가이 맞이하며 人事를 받은 後에 굳이 붙들어 앉히고 밥 한 끼를 待接했다.
그러면 그들은 老宰相이 勸하는 것이라 辭讓을 못하고 惶悚해하며 밥床을 받게 되는데, 밥床에는 언제나 꽁보리밥에 김치 한 접시와 막걸리 한 盞이 全部였다.
地方官들로서는 只今까지 그렇게 險한 飮食을 먹어 본 일이 없고, 또 將次 赴任하면 好衣好食할 터라 그런 飮食이 목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정작 兼床하고 있는 金 政丞이 맛있게 먹는지라 억지로라도 아니 먹을 수 없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苦役 中의 上苦役이었다. 金 政丞은 그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어떤가? 이 밥 먹기가 어렵지? 자네가 赴任하면 珍羞盛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데, 그때마다 이 밥床을 생각하게. 자네가 먹는 珍羞盛饌은 보리밥도 제대로 못 먹는 百姓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百姓들을 먹여 살려야 할 자네들만 잘 먹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앞으로 부디 이 늙은이 말을 잊지 말고 善政을 베풀고 百姓을 괴롭히지 말게.”
그의 忠告를 들은 地方官들은 큰 깨달음을 얻고 百姓을 잘 보살폈다.
🍎 面鬼心水
(얼굴은 鬼神처럼 醜하지만 마음은 물처럼 맑다. 卽 겉보기는 나빠 보이지만 속마음은 더없이 고우니. 겉만보고 그 사람의 마음까지 速斷하지 말라는 뜻)
● 馬山의 魂. 古今淸談에.
高麗 高宗 (1192~1259) 때 朱悅은 僉議府使를 지냈다. 그는 治績이 쌓이자 觀察使로 昇進했고, 그에 따른 威嚴과 名聲이 높아져 사람들이 다 尊敬하고 두려워했다. 中國에 使臣을 보낼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가 맨 처음 推薦되어 사람들은 그를 專門 奉命使臣이라고 불렀다.
朱悅은 度量이 컸다.
한 番은 어느 고을에 가서 留宿을 하는데 房바닥이 갈라져 있어 그 틈으로 불씨가 들어와 所持品을 다 태워버렸다. 衙前들은 불號令이 내릴 것이라 豫想하고 벌벌 떨고 있는데 그는 潛潛했다. 큰 颱風이 닥칠 것이라고 豫想했으나 微風도 불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또 한 番은 어느 고을 守令이 賂物을 받았다는 報告를 받고는 ‘貪慾스런 武夫가 조그만 賂物을 받은 것은 개가 飮食 찌꺼기를 먹는 것과 같으니 들춰서 問題 삼을 價値가 없다.’ 하고 不問에 부치니, 그 守令은 다시는 不正을 저지르지 않았다.
한 番은 그가 어떤 자리에서 宰相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姿勢가 恭遜하지 않은 지라 그것을 倨慢하게 본 한 衙前이 過剩 忠誠하여 말했다.
“宰相이 말씀하시니 마땅히 땅에 엎드려 들으시오.”
그러자 朱悅이 말했다.
“宰相의 말을 엎드려 들어야 한다면 임금님의 말씀은 땅을 파고 들어가서 들어야 된단 말입니까?”
하니 그 衙前은 아무말도 못했다.
그가 能力 있는 官吏요, 훌륭한 外交官이었으나 얼굴이 못생기고, 코가 橘과 같았다. 때문에 한 宴會場에서 그가 公主에게 술을 獻壽하자 公主가 外面하며 말했다.
“왜 늙고 더러운 鬼神같은 사람이 술을 따르는가?”
그러자 임금이 말했다.
“이 늙은이는 얼굴이 醜하기는 鬼神같으나 마음이 맑기는 물과 같으니라.”
이에 公主는 無顔하여 곧 謝過하고 所重히 盞을 받았다.
🍎 棉授花衣
(木花는 꽃과 옷을 提供하여 준다는 말. 두 가지를 다 이롭게 해주는 境遇를 뜻한다)
● 韓國人의 智慧. 朝鮮五百年野史.
朝鮮 英祖의 妃 貞聖皇后가 別世하여 3年喪을 치자 英祖가 直接 새로운 中殿을 揀擇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綺羅星 같은 士大夫의 閨秀들을 차례로 둘러보는데, 한 閨秀가 方席을 避해 맨바닥에 앉아 있었다. 異常히 여긴 英祖가 물었다.
“어찌하여 方席에 앉지 않고 그리 앉아 있는가?”
“예, 비록 딸이라고는 하오나 아버지의 尊銜이 맨땅 위에 있는데 제가 敢히 方席 위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王妃를 揀擇할 때는 그 閨秀가 뉘 宅의 딸인지 알아보기 쉽도록 저마다의 方席머리에 그 아버지의 名牌를 두었는데 그를 두고 한 말이었다. 英祖는 그 閨秀의 思慮 깊은 行動에 感歎했다.
英祖가 다시 여러 閨秀들에게 試驗하여 물었다.
“이 世上에서 가장 깊은 것은 무엇인가?”
어떤 閨秀는 山골짜기가 가장 깊다 하고, 어떤 閨秀는 물이 가장 깊을 것이라 하는 等 對答이 句句했으나 唯獨 조금 전의 그 閨秀만이 다르게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습니다.”
“무슨 理由인가?”
“事物의 깊이는 자로 잴 수가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잴 수 없기 때문입니다.”
英祖가 또 물었다.
“그럼 世上에서 가장 좋은 꽃은 무엇인가?”
어떤 閨秀는 복숭아꽃이 좋다 하고, 或은 牡丹꽃이 좋다 하고, 或은 海棠花가 좋다고 하는데, 그 閨秀만은 또 달랐다.
“木花꽃이 가장 좋습니다.”
英祖가 그 까닭을 물었다.
“다른 꽃은 한때만 보기 좋으나 木花꽃은 피었을 때에는 꽃이 좋고, 나중에는 솜이 되거나 무명베가 되어서 世上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니 좋습니다.”
한 番도 아니고 세 番이나 智慧로운 對答을 들은 英祖 感歎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女를 中殿으로 맞으니 바로 貞純皇后였다.
훗날 正祖가 이 일을 想起하여 朝官들에게 花復花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蔡濟恭 한 사람만이 맞혔다 한다.
그 閨秀가 大闕로 들어가니 그 女의 衣裳을 만들기 爲하여 尙宮이 나인(內人)에게 치數를 재라 했다. 그러자 尙宮에게 無禮함을 指摘하여 말하였다.
“내가 이제 中殿이 될 몸이니 尙宮이 直接 재어야 되지 않는가?”
그 女의 나이 겨우 15歲 때의 일이었다.
🍎 命如牛蝨
(소의 목숨이나 이의 목숨은 같다. 卽 큰 動物이나 작은 微物이나 그 生命의 價値는 똑같이 重要하다는 뜻)
● 이야기 韓國歷史, 韓國人物史에.
高麗 高宗 때 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文章家 李奎報(1168~1241)에게 한 親舊가 찾아와서 말했다.
“엊저녁에 어떤 사람이 큰 소를 죽이는 것을 보았네. 그 光景이 너무 慘酷하여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더군. 앞으로는 盟誓코 쇠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動物의 고기는 먹지 않으려고 하네.”
李奎報가 말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이글 피어오르는 火爐를 끼고 앉아 옷의 이를 잡아 태워 죽이는 것을 보았는데, 惻隱해서 못 견디겠더군. 그래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겠다고 作定했네.”
“아니 그건 微物이 아닌가. 나는 큰 짐승이 죽는 것을 보고 悲慘한 생각이 들어서 한 말인데, 그대는 하찮은 微物을 들먹여 딴청을 부리니 이는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닌가?”
親舊가 火를 내자 李奎報가 말했다.
“그게 아닐세! 사람은 勿論 소, 말, 돼지, 염소 같은 畜生과 하찮은 벌레까지 피를 가진 모든 生物은 죽기를 願치 않네. 그런데 어찌 큰 것만 대수(大事)이겠는가. 소의 죽음이나 이의 죽음이나 모두 마찬가지라는 말일세. 그래서 例를 들어 말한 것이니 怒여워하지 말게. 내 말을 納得하지 못하겠으면 그대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게 엄지손가락만 아프고 나머지는 안 아플까? 한 몸에 있는 것은 크건 작건 모두 피와 살로 되어 있기에 그 아픔은 같은 것일세. 더구나 소와 이는 獨立된 生命體인데 어떤 生物은 죽음을 싫어하고, 어떤 生物은 죽음을 좋아하겠는가? 돌아가서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게나. 그래서 달팽이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鳳凰처럼 볼 수 있는 마음을 기르게. 그런 뒤에 다시 道를 論하기로 하세.”
李奎報는 傑出한 詩豪로서 豪宕하고 豁達한 詩風으로 當代를 風靡했다. 그는 詩와 거문고와 술을 즐겨 自稱 三酷好 先生이라고 했다. 號는 白雲居士였다.
🍎 母過不聞
(어머니 허물을 듣지 못하겠다)
● 里鄕見聞錄에.
壬辰倭亂 때의 義兵長이었던 文烈公(諡號) 重峯(號) 趙憲(1544~1592)은 일찍이 그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繼母가 愛情을 주지 않았다. 外할머니가 울며 어루만지고 말씀하기를, "繼母가 사납게 하는 것을 내가 가슴 아파한다."라고 하니, 그 後에 文烈公이 外家집에 발길을 끊고 다시는 가지 않았다. 外할머니가 "네가 왜 오지 않느냐?"라고 하니, 文烈公이 對答하기를, "子息을 두고 어머니의 허물을 말하니, 차마 못들을 일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안 온 것입니다."라고 하니, 外할머니가 奇特하게 여겨 다시 말하지 아니하였다. 뒤에 壬辰倭亂을 當하여 義兵을 일으켜 壯烈하게 나라 爲해 죽으니, 世上 사람들이 일컫기를 重峯先生이라 하였다. 七百義塚이 아직도 錦山에 있다.
🍎 母女相哭
(어머니와 딸이 부둥켜안고 울다)
● 三國史記에.
孝女 知恩은 홀로 그 어머니를 奉養하느라, 나이 서른 둘이 될 때 까지 媤집을 가지 않았다. 품팔이를 하기도 하고 求乞하기도 하였으나 困窮함을 免하지 못하자, 富者집에 가서 스스로 몸을 팔아 奴婢가 되어, 그 費用으로 어머니를 奉養하였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지난番에는 飮食이 形便없었지만 맛이 좋았는데, 요즈음은 飮食은 좋아졌지만 가슴을 찌르는 듯 하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구나."고 하니, 딸이 事實대로 여쭈어 말하였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어미 때문에 네가 奴婢가 되었으니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하고는 어머니와 딸이 서로 서럽게 울었는데, 花郞 孝宗이 노닐다가 그 光景을 보고는, 쌀 一 百석을 주어 報償해서 다시 兩人으로 回復시켜 주었다. 眞聖女王(在位 887~897)이 이를 듣고 아름답게 여겨 그 마을에 旌表 하되 孝養坊이라 일컫고 그 집의 賦役을 免除해 주었다.
🍎 貌比智德
(外貌보다는 智慧와 德이 于先이라는 말로, 高麗時代의 將帥 姜邯贊을 두고 이루어진 말이다. 사람은 못생긴 外貌보다는 智慧와 德이 더 重要하다는 뜻이다)
● 韓國史, 高麗史列傳에.
高麗時代에 나라를 危機에서 救한 名將 姜邯贊(948~1031)은 三韓壁上功臣 姜弓珍의 아들이다.
그에게는 태어날 때를 비롯해서 몇 가지 傳說이 傳해 오고 있다.
그는 漢陽의 南쪽 冠岳山 近處에서 태어났다. 後世 사람들은 그가 태어난 곳을 落星臺라 이름 지었는데. 그가 태어날 때 별이 내려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가 태어날 무렵, 高麗의 政勢는 매우 어지러웠다. 隣接해 있는 거란(契丹)이라는 나라가 虎視眈眈 侵略을 일삼자, 高麗 사람들은 뛰어난 將帥가나타나 그들을 물리쳐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자네, 어젯밤에 우리 동네로 큰 별 하나가 내려오는 것 봤나?”
“그랬어? 뛰어난 將帥라도 태어나려나?”
어느 날, 冠岳山 아래 한 마을 사람들은 별이 내려앉은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한便 姜弓珍의 집안에서도 夫婦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젯밤 꿈에 별이 제 품 속에 와서 안겼어요.”
“그래요? 그건 틀림없이 胎夢이오. 當身이 드디어 훌륭한 아이를 낳을 模樣이구려.”
이렇게 해서 姜邯贊이 태어났는데 아이는 못생긴 얼굴에 키가 작아 동네 아이들이 놀리고 같이 놀아주지도 않았다.
“야. 쟤는 왜 저렇게 생겼을까? 얼굴이 網보다 더 얽었잖아.”
姜邯贊은 이렇게 嘲弄과 侮辱을 받으면서 자라야 했다. 마음속으로는 本人의 잘못이 아닌데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處地를 안타깝게도 여겼다.
어머니는 그런 姜邯贊의 마음을 읽고 따뜻이 다독여 주었다.
姜邯贊의 어릴 때 이름은 殷川이었다.
“殷川아, 얼굴이 못생겼다고 해서 못할 일이 무엇이며, 또 잘났다 한들 기쁠 것이 무엇이겠느냐? 重要한 것은 智慧가 있고, 知識이 많아야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고 남에게 尊敬을 받는 것이란다. 只今부터는 얼굴이 못생겨 猖彼하다 생각하지 말고 德이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도록 하여라.”
“어머니, 그럼 어떻게 하면 智慧가 많고, 德이 높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學問을 通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야 智慧가 깊어지고, 마음을 넓게 써야 德이 쌓이는 것이며, 큰 일을 成就할 수 있는 것이다. 네 自身을 두고 스스로 높다고 생각하면 自慢心이고, 남이 너를 높게 봐야 眞實로 높은 사람일 것이니라. 外貌의 잘 생기고 못 생긴 것은 아무 相關이 없는 것이야.”
어머니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은 殷川은 그대부터 書堂에 들어가 글을 배우기 始作하고, 남보다 더 많은 努力을 기울여 마침내 높은 境地에 이르렀다.
못생겼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더욱 努力하여 學識과 智慧를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姜邯贊은 儒學은 勿論, 佛經과 兵書까지 通達하여 高麗 成宗 때에는 科擧에서 甲科에 一等으로 뽑혀 禮部侍郞 等 要職을 지냈다. 또 1018年, 契丹의 大軍이 侵攻해 왔을 때에는 많은 軍士들이 降服을 主張하였으나 이를 反對하고 맞서 싸워 큰 功勳을 세움으로서 (龜州大捷) 王으로부터 金으로 만든 꽃을 여덟 송이나 下賜받는 榮光도 얻었다. 그가 크게 成功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敎訓 때문이었다.
高麗史列傳에도 못생긴 姜邯贊이 오히려 훌륭한 人物로 成長하게 된 背景은 모두 어머니의 힘이 있다고 記錄되어 있다.
🍎 母心之釘
(어머니 마음에 박힌 못이라는 말로, 子息이 잘못할 때마다 어머니의 마음에 생기는 傷處를 이르는 말이다. 孝道할 것을 訓育할 때 쓰인다)
● 鄭鳳采閑談에.
한 홀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愛之重之하면서 精誠들여 키웠다. 아들은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어딘지 漸漸 버릇이 나빠졌다.
어느덧 나이 열다섯 살의 애티를 벗어나 웬만큼 世上 物情을 알 때가 되었는데도 天方地軸이었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어르고 타일렀으나 所用이 없었다. 어떻게든 눌러 앉혀 제자리를 잡도록 해주어야 할텐데 하며 속만 태웠다. 그래서 그날부터 아들이 속을 썩일 때마다 마루 가운데 서 있는 기둥에다 못을 하나씩 박았다.
十如 年이 지나자 더 以上 박을 수 없을 程度로 못이 다닥다닥 박혔다.
어느 날, 아들이 기둥에 박힌 못을 보고 물었다.
“어머니! 여기에 왜 못을 이렇게 박아 놓으셨습니까?”
어머니가 눈물 젖은 얼굴로 아들을 보며 말했다.
“그건 네가 나를 속상하게 할 때마다 그 標識으로 박아 놓은 것이니라.”
어머니의 울음 섞인 말을 듣고 아들은 생각했다.
‘아, 내가 그 間 어머니께 못 할 일을 너무 많이 했구나.’
그 後부터 아들은 마음을 고쳐먹고 날마다 어머니의 마음을 慰勞해 드리고, 힘든 일을 거들기도 하면서 기쁘게 해드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때마다 기둥에 박힌 못을 하나씩 빼내었다. 그렇게 하기를 十如 年. 드디어 박혔던 못이 모두 빠지고 없었다. 기쁘게 해 드린 횟수가 마음을 아프게 한 횟수에 이른 것이다.
어머니가 아들을 불렀다. 그리고 기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 기둥을 보거라. 처음에는 네가 나를 失望시켜 못을 박았는데 어느 때부턴가 네가 나를 기쁘게 해주기에 그때마다 하나씩 뽑아냈다. 이제 못이 다 뽑히고 하나도 남지 않았구나. 고맙다.”
어머니는 아들이 대견하여 稱讚했다.
아들은 어머니 얼굴의 주름살을 보고 나서 기둥에 뚫린 못자국을 보더니 엉엉 울었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오늘 이 기둥을 보니 벌집과 같이 傷處투성이군요. 어머니의 마음도 이 기둥과 같이 傷處투성이일 것을 생각하니 ……. 흑!흑! 이제부터는 어머니의 마음이 便安하게 精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가슴에 꼭 안고 눈물을 흘렸다.
🍎 木中無花
(나무속에는 꽃이 들어 있지 않다. 卽 꽃은 나무속에 있는 게 아니라 때가 되면 저절로 생긴다는 말로, 모든 일은 억지로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되고 順理的으로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 大東奇聞 古今淸談에.
雉岳山의 뒷편 溪谷에 도둑들의 巢窟이 있었다. 그들은 걸핏하면 上元寺에 찾아와 行悖를 부렸다.
“뭐. 스님이면 다야? 너희들은 便히 앉아서 信徒들이 갖다 바치는 돈으로 먹고 살고 있으니 無爲徒食하기는 우리와 다를 바 없잖아, 於此彼 너희들도 땀 흘려 번 것이 아닌데 조금 나눠 먹자는 것이 뭐가 나쁘냐?”
도둑들이 윽박지르면 스님들은 抵抗 한 番 못하고 그들이 要求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주어야 했다. 그런 일이 繼續되자 몇몇 스님들은 官家에 알리자고 했으나 住持 스님은 限死코 許諾하지 않았다.
“저들이 迷惑하여 그런 것이니 怨恨을 사서는 안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밤 住持 스님의 房에 盜賊이 칼을 들고 들어 왔다. 住持 스님은 손님을 맞이하듯 자리에서 일어나 泰然히 마주 앉았다.
“그 칼을 버리시오.”
“헛소리 하지 말라. 이 칼이야말로 내 守護神이다.
“칼을 든 者는 칼로 죽게 되는 法이오.”
그러나 盜賊은 코웃음을 치면서 쏘아 보았다.
“너희들은 佛法이니 무어니 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駭怪한 말들을 주절거리는데, 우리 같은 盜賊들은 주린 창자를 채우는 게 急하단 말이야!”
“佛法을 올바로 깨달으면 모든 근심에서 벗어날 수가 있소.”
“都大體 佛法이라는 게 어디 있느냐?”
“當身들의 가슴속에 있소. 다만 그대가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오.”
“그럼 네 가슴에도 있겠구나?”
“그렇소.”
“거. 잘됐다. 내가 보고 싶으니 어디 네 가슴 좀 열어보자.”
도둑은 시퍼렇게 날선 칼을 住持 스님의 가슴에 겨누었다. 住持 스님은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참으로 어리석은 者로다.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고 그 나무를 쪼개면 그 속에 꽃이 들어 있더이까? 꽃은 나무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저절로 생기는 것, 그 칼로 不法을 犯하지 마시오.”
그 말에 한참 생각하던 도둑은 그제야 自己가 한 짓을 깨우친 듯 칼을 내던지고 住持 스님 앞에 넙죽 엎드렸다.
🍎 木枕絞首
(木枕을 絞首刑에 處하다. 朝鮮時代의 文人 林亨秀가 政爭에 휘말려 死刑을 當하게 되었을 때 木枕을 絞首刑에 處하게 해 戱弄했던 故事에서 由來했다. 絶體絶命의 危機에서도 超然한 姿勢를 잃지 않는 餘裕를 이른다)
● 韓國奇人列傳, 韓國人의 諧謔에.
朝鮮 第11代 中宗 때의 文人 錦湖 林亨秀(1504~1547)는 快活한 性格에 장난치기를 좋아했다. 그는 明宗 때 副提學에까지 올랐으나 乙巳士禍로 罷職되었다. 그 後 大尹 尹任의 一破로 몰려 死刑을 當하게 되었다.
賜藥을 받던 날, 그는 顔色 하나 變하지 않고 泰然하였다.
禁府都事가 賜藥을 내려놓자 下人이 울면서 부엌으로 들어가 按酒를 가져왔다. 그는 下人이 가져온 按酒를 물리치면서 말했다.
“치워라! 술도 말로 마실 때에는 按酒가 없는 法인데, 賜藥에 무슨 按酒란 말이냐!”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가 妻子와 作別을 하고 나오면서 열 살 난 아들을 불러 일렀다.
“너는 絶對로 글을 배우지 마라. 아니, 배우지 않으면 無識한 人間이 될 터이니 배우기는 하되 벼슬은 하지 마라.”
그가 밖으로 나오자 禁府都事가 물었다.
“이제 賜藥 받을 準備가 다 되었습니까?”
林亨秀가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나는 藥을 마시고 苦痛스럽게 죽느니 목을 졸려 빨리 죽는 것이 좋은데 그리해도 되겠는가?”
그러자 禁府都事는 於此彼 마지막인데 그만한 뜻 하나 못 들어주랴 싶어 許諾했다.
許諾을 받은 그는 舍廊房으로 들어가 壁에 구멍을 뚫고 노끈을 그곳으로 내밀며 큰소리로 외쳤다.
“자 이제 노끈을 내 목에 걸었으니 힘껏 잡아당겨라!”
禁府 羅卒들은 힘껏 노끈을 잡아 당겼다.
얼마 後, 이만하면 죽었으리라고 생각하여 門을 열고 들어가 보니, 林亨秀는 노끈에다 木枕을 걸어놓고 그 곁에 누워서 껄껄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平生 諧謔을 즐겨 왔는데,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니 섭섭하여 마지막으로 한 番 해본 것이니 그리 怒여워 말게.”
그러고 나서 林亨秀는 陛下가 있는 北쪽을 向하여 큰절을 올리고 賜藥을 들이켰다.
그는 죽는 瞬間까지도 諧謔을 잃지 않은 큰 그릇이었다.
🍎 夢負三椽
(꿈에 서까래 세 個를 짊어졌다는 말로, 太祖 李成桂가 朝鮮을 創業하기 前 꾼 꿈에서 由來했다. 所望했던 일을 이루게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 韓國人物史에.
朝鮮의 太祖 李成桂(1335~1408)는 말을 타고 활 쏘는 才주가 뛰어났다. 그는 元나라 柳仁雨가 恭愍王 5年에 雙城摠管府를 侵攻했을 때 아버지와 함께 對應하여 큰 功을 세웠다.
그 後 東北面 女眞 出身의 私兵들을 거느리고 紅巾賊의 侵入을 막아냈으며, 元나라 將帥 나하추(納哈出)가 쳐들어왔을 때에도 咸興平野에서 물리쳐 나라를 救했다. 또 明나라의 힘을 입은 女眞의 酋長 호바투(胡拔都)가 侵入하자 吉州에서 물리쳐 咸鏡道 땅을 收復했다.
禑王 14年에 鐵嶺衛를 設置하는 問題로 崔瑩에 依해 遼東征伐이 決定되자 新進 留學者와 李成桂가 反對했으나 容納되지 않았다. 李成桂는 右軍都統使로 任命되어 遼東을 向하다가 威化島에서 軍士를 돌이켜 돌아와서 崔瑩 一派를 肅淸하고, 1392年 朝鮮을 開國하였다. 그리고 1394年에는 서울을 漢陽으로 옮겼다.
李成桂가 王位에 오르기 前, 安邊에 머무를 때 꿈을 꾸었는데 그 內容이 怪異하여 理解할 수가 없었다. 卽, 온 동네 닭이 一時에 울고, 무너진 집에서 서까래 세 個를 짊어지고 나오는데 피었던 꽃들이 떨어지고, 거울이 땅에 떨어져 깨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李成桂는 破字占을 잘 친다는 道僧을 찾아갔다. 그가 바로 無學大師였는데 그에게 解夢을 付託했다.
無學大師는 크게 놀라며 말했다.
“賀禮 드립니다. 닭 울음소리는 꼬끼오이니, 이는 高貴한 분이 온다는 뜻이고, 서까래 석 張을 짊어진 모습은 바로 王字를 뜻하는 것이니, 將次 君王이 될 것을 뜻하는 꿈입니다.”
“하하! 설마요……. 그럼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지는 것은 무슨 意味입니까?”
“꽃이 떨어지면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되지요. 또 거울이 깨지면 소리가 나는 法입니다. 그러니까 열매가 맺는다는 것은 計劃하고 있는 王業의 結實을 意味하고, 소리가 난다는 것은 國威가 四方에 떨치는 것을 意味합니다.”
그 後 李成桂는 朝鮮을 建國하고, 太祖가 되었다.
그는 훗날 無學大師를 만난 곳에 큰 절을 짓고, 王의 꿈을 解釋했다하여 이름을 釋王寺라 했다.
🍎 猫脚裁判
(고양이 다리의 裁判이라는 말로, 고양이에 依해서 火災가 나자 訟事를 벌였던 故事에서 由來했다. 어떤
일이든지 判斷하는 基準에 따라 그 結果가 바뀔 수 있음을 意味한다)
● 韓國人의 野談에.
木花 장사를 하기 爲해 네 사람이 똑같이 投資하여 木花 값이 쌀때에 많은 木花를 사들였다. 木花 값이 오르면 내다 팔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木花를 倉庫에 쌓아두다 보니 쥐가 여기저기에 오줌을 싸는 바람에 木花가 누렇게 되어 苦憫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議論한 끝에 고양이를 한 마리 共同으로 사다 놓고 넷이서 다리 하나씩을 맡아 責任지고 보살피기로 했다.
그 後부터 倉庫에 쥐가 들어오지 않아서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이가 잘못하여 왼쪽 앞발을 다치게 되었다. 그 발을 맡은 親舊는 傷處에 藥을 바르고 헝겊으로 감아 주니 고양이는 절름거리면서도 나머지 세 발로 곧잘 뛰어다녔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불 때는 아궁이 앞을 지나다가 그만 아픈 다리에 감긴 헝겊에 불이 붙었다. 唐慌한 고양이는 自己가 살고 있는 木花 倉庫로 뛰어 들어가 이곳저곳으로 마구 뛰어다녔다. 그러자 불이 여기저기에 옮겨 붙어 倉庫는 瞬息間에 불더미에 휩싸이고 말았다. 勿論 고양이도 그 안에서 타 죽었다.
큰 損害를 보게 된 세 사람들은 고양이의 다친 다리를 맡은 親舊에게 責任이 있다고 따졌다.
“자네의 잘못으로 큰 損害를 입었으니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가 이대로 損害를 보고 있을 수는 없네. 그러니 賠償을 해주게.”
고양이 발에 난 傷處를 治療해준 親舊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보게들, 倉庫에 불을 낸 건 내가 아니라 우리가 共同으로 산 고양이 아닌가. 게다가 자네들도 알다시피 나 亦是 자네들과 똑같이 損害를 보았고……. 그런데 나에게 損害賠償을 하라니, 이렇게 얼토당토 않은 일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세 親舊는 莫無可奈였다.
아무리 소리 지르며 싸워도 結論은 쉽게 나지 않았다. 네 사람은 마침내 고을 사또(使道)를 찾아가서 判定을 받기로 했다. 사또를 찾아간 네 親舊가 저마다 自己主張을 폈다.
“그러니까 애초에 저 親舊가 맡은 고양이 다리를 잘 보살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傷處에 헝겊을 감지만 않았더라도 괜찮았을 거구요.”
“그래서 損害賠償을 해달라고 要求했는데, 저 親舊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 親舊가 熱을 올리는 동안 傷處를 治療해준 親舊는 아무 말도 못하고 사또의 判決을 기다렸다. 이야기를 傾聽한 사또가 嚴肅하게 말했다.
“듣거라! 木花 값을 물어낼 사람은 저 사람이 아니라 너희들 세 사람이다. 그러니 너희 세 사람은 돈을 모아서 저 사람에게 木花 값을 물어주도록 해라.”
사또의 判決에 세 親舊는 놀라서 물었다.
“사또나리, 그게 都大體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들은 저 親舊 때문에 損害를 본 사람들이옵니다.”
“아뢰옵기 惶悚하오나, 사또 나리께서 무언가 잘못 생각하신 것은 아니신지요? 判決을 反對로 내린 것 같사옵니다.”
세 親舊가 一時에 사또의 判決이 잘못되었다고 抗議하자 사또가 큰소리로 말했다.
“어허, 버릇없는지고! 그렇다면 只今부터 判決의 根據를 說明해 줄 테니 잘 들어라. 고양이가 다리를 다쳤든, 거기에 헝겊을 감아 불이 붙었던 간에 고양이가 倉庫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불이 나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그야 그렇습니다만 고양이는 헝겊에 불이 붙자 木花倉庫로 달려간 것이고, 그 結果 불이 났으니 木花 값은 當然히 그 다리의 主人인 저 親舊가 물어내야 합니다.”
사또는 혀를 끌끌 차더니 다시 說明했다.
“沓沓하구나, 잘 생각해 보아라. 그 고양이가 불붙은 다리를 끌고 木花倉庫로 달려갈 때 어떤 다리를 利用했겠느냐?”
“그야 勿論 성한 다리로 달려갔겠지요.”
“그래. 바로 그것이다. 너희들 세 사람이 보살피던 성한 다리가 아니었다면 고양이가 木花倉庫로 달려갈 수 있었겠느냐? 結局 木花 倉庫에 불이 붙게 한 건 성한 세 다리였다는 말이다. 그러니 너희 셋이 저 사람에게 木花 값을 물어 주는 것이 當然하다.”
사또의 說明을 들은 세 親舊는 아무 말도 못했다.
🍎 墓前泣敎
(무덤 앞에서 눈물로 가르치다)
● 里鄕見聞錄에.
박세영은 열 아홉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어머니 李氏가 울며 公에게 이르기를, "네게 바라는 것은 아우를 가르쳐서 다시 朴氏 家門을 일으키는 것이다."라고 하시니, 逍遙堂 朴世茂는 나이가 겨우 열 두살이고, 막내 同生 박세옹은 이제 여섯 살이었다.
박세영이 둘을 敎育하면서 或是라도 安逸하게 하고 게으름을 피우면, 아버지 墓所 앞에서 自身의 종아리를 치고 나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同生들이 배움을 부지런하지 못함은 이 兄의 罪가 됨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니, 同生들이 敢히 어기지 못하고 마침내 文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 里鄕見聞錄 ~ 朝鮮 哲宗 때 劉在建이 지은 人物行跡記. 冊머리에 《壺山外記》의 作者 趙熙龍이 쓴 序文이 있고, 다음에 著者의 里鄕見聞錄義例와 目次·引用書目이 配列되어 있다. 朝鮮 初期 以來 下層階級 出身으로 各 方面에 뛰어난 人物의 行蹟을 學行 · 忠孝 · 智謀 · 烈女 · 文學 · 書畵 · 雜藝 · 僧侶의 順으로 分類하여 284項에 걸쳐 記錄하였는데, 引用한 書冊은 52種이고 收錄된 人物은 모두 308名에 이른다. 兩班層에 依하여 記錄된 것을 引用한 部分과 兩班 中心의 社會倫理가 눈에 띄지만, 朝鮮時代 下層階級 出身의 人物硏究에 도움이 되는 重要한 資料이다. 많은 文獻을 涉獵하여 類書의 集成에 依한 人物行蹟 記錄의 功이 높이 評價된다.
🍎 猫項懸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다. 方法은 그럴 듯한데 全혀 實現 可能性이 없는 일을 일컫는다)
● 旬五志에.
고양이(猫)에게 몹시 시달리는 쥐들이 生存을 爲해 相議했다.
“고양이만 없다면 우리들의 生活도 부러울 것이 없을 텐데 꼭 우리들의 먹을 것이 있을만한 데에 고양이가 있어 늘 生命의 威脅을 느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對한 좋은 對策이 있으면 忌憚없이 말해주시오.”
그러자 한 쥐가 나서며 말했다.
“우리가 萬若 고양이 목에 방울만 매달 수 있다면 그 소리를 듣고 逃亡가면 죽음을 避할 수 있을 것이오.”
쥐들이 모두 좋은 意見이라고 뜨거운 拍手喝采를 보냈다.
그때 늙은 쥐 한 마리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자네 말이 옳네. 그렇게만 되면 두려울게 없겠지.”
늙은 쥐는 座中을 쭉 둘러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누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겠는가?”
그러자 쥐들은 고개를 숙이며 뿔뿔이 흩어졌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旬五志는 朝鮮時代 때 評論集이다. 孝宗 때 學者이며 批評家인 玄黙子 洪萬宗과 鄭澈, 宋純 等이 1678年 肅宗 때 十五志라고도 한다. 附錄에는 130如 種의 俗談이 실려 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는 바로 이 이야기 속에 실려 있다. 國立中央圖書館에 所藏되어 있다.
🍎 無國之王
(나라가 없는 王이라는 말로, 허울만 그럴듯할 뿐 實勢가 없음을 이른다)
● 新增東國輿地勝覽 이야기 韓國史에.
新羅의 마지막 王 敬順王(?~979)의 이름은 傅이며, 伊飡 孝宗의 아들이다. 그는 927年 後百濟의 甄萱의 侵攻으로 景哀王이 죽자 甄萱에 依하여 卽位하게 되었다.
敬順王 4年(930年) 正月에 載巖城의 將軍 善弼이 高麗에 投降하니 太祖 王建은 厚한 禮로 待接하고 尙父라는 職爲를 주었다. 이듬해 2月에 王建은 騎馬 兵 50如 名을 거느리고 京畿에 이르러 敬順王에게 만나기를 請하므로, 敬順王은 百官과 더불어 臨海殿에서 그를 맞아들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나는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하여 患亂이 자주 일어나고, 또 甄萱이 우리나라를 자주 侵害하니 얼마나 憤慟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니 左右에서 흐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王建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慰勞했다.
王建이 그렇게 數十 日 동안 머물다가 돌아가려고 하니 敬順王은 穴城에까지 餞送해주며 아우 裕廉을 人質로 딸려 보냈다.
王建 麾下의 軍士들은 軍氣가 嚴正하여 머무는 동안 一切의 民弊를 끼치지 않았다. 이에 徐羅伐의 婦女子들이 기뻐하며 말했다.
“前日에 甄萱이 왔을 때에는 豺虎 (승냥이와 호랑이, 사납고 惡毒한 사람을 이르기도 함)를 만난 것과 같더니, 王公은 父母를 만나는 것과 같구나.”
王建은 新羅의 王에게는 錦彩 緋緞 말鞍裝을, 官僚와 壯兵들에게는 布帛을 膳物로 보냈다.
王建의 卽位 9年(935年) 10月, 敬順王은 疆土를 거의 다 빼앗기고 百姓들의 生活은 極度로 疲弊했다. 그래서 君臣들과 더불어 王建에게 降服할 것을 議論했는데, 意見이 紛紛하자 王子 (麻衣太子)가 말했다.
“國家에는 天命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스스로 最善을 다하여 굳게 지키다가 最後에 힘이 다하면 그때 議論함이 옳을 것인데, 어찌 싸워보지도 않고 千年社稷을 허수로이 하루아침에 他人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太子의 懇曲한 말에 王이 말했다.
“이처럼 危殆로운 形勢로 時間만 끌어 無辜한 百姓들을 慘酷하게 죽게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敬順王은 侍郞 金封休에게 命하여 高麗 太祖에게 降服文을 보냈다. 그러자 王子는 痛哭하면서 허름한 麻로 만든 옷을 입고 皆骨山(겨울의 金剛山)으로 들어가서 一生을 마쳤다.
王建은 敬順王의 글을 받고, 大相 王鐵 等을 보내어 隆崇하게 迎接하게 한 後, 臣下들을 거느리고 直接 郊外까지 마중 나와 慰勞했다. 王建의 行列은 香車寶馬가 30如 里에 連하여 道路가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이 담을 둘러싼 듯했다.
太祖는 東쪽의 좋은 집 한 채를 敬順王에게 주고, 맏딸 樂浪公主를 그에게 媤집보냈다. 그리고 正承으로 封하니 그 地位는 太子의 윗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나라도 百姓도 없는 無國之王이었다.
🍎 無影無愛
(그림자가 없으면 사랑도 없다. 無影塔을 만든 阿斯達과 그의 아내 阿斯女의 이야기에서 由來했다. 사랑한다는 根據가 없어 믿을 수 없다는 뜻으로 쓴다)
● 玄鎭健 無影塔에.
佛國寺는 新羅 第23代 法興王 (?~540) 22年에 創建되었다. 그리고 35代 景德王(在位742~762) 10年에 改修되었다. 그때 뜰에 多寶塔과 釋迦塔을 세우게 되었다.
廣大한 佛國寺 境內에 築成된 多寶塔과 釋迦塔은 構造의 絶倫함을 보여주어 보는 이로 하여금 感動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이를 築成한 金大城은 牟梁里에서 태어났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넓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金大城이 낳아주신 父母를 爲하여 佛國寺를 세우고 또 前生의 父母를 爲하여 石佛寺, 石窟庵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多寶塔과 釋迦塔을 세우기 爲해 마땅한 石工이 없어 애를 태우던 中 百濟의 石工 阿斯達의 技術이 뛰어나다는 所聞을 듣고 그를 招請했다.
그대 阿斯達에게는 갓 結婚한 阿斯女라는 예쁜 아내가 있었다. 阿斯女는 男便 阿斯達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길이 남을 作品을 만들고 싶어 하는 男便의 藝術에 대한 欲心을 아는지라 울며 배웅했다. 阿斯達은 新羅로 와 佛國寺 뜰에서 釋迦塔과 多寶塔을 築造하면서도 틈만 나면 故鄕에 있는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그때 王의 行次에 따라왔던 구슬아기가 阿斯達을 보고는 한눈에 반하여 戀慕하게 되었다. 그 女는 날마다 阿斯達을 찾아왔다. 阿斯達은 그렇잖아도 쓸쓸하던 참이라 그 女가 싫지 않았다. 그렇다고 自己의 아내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女를 볼 때마다 아내가 더 그리워졌다.
阿斯達에게는 팽개라는 戀敵이 있었다. 그는 阿斯達이 新羅에 가고 없음을 機會로 阿斯女에게 接近하여 치근덕 거렸다. 견디다 못한 阿斯女는 阿斯達이 있는 新羅로 왔다. 그리고 佛國寺의 住持를 찾아가 男便에 對해서 물었다.
住持 스님은 塔이 거의 다 完成되어 가는데 아내가 왔으니 作業이 늦어질까봐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率直하게 털어놓았다.
“只今 郎君께서는 塔을 거의 다 만들어 가고 있소, 이제 며칠만 참고 있으면 千年萬年 後孫들에게 傳해질 훌륭한 塔이 完成될 豫定이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시오. 그리고 절 아래에 影池라는 蓮못이 있는데 塔이 完成되면 그 蓮못에 塔의 모습이 비칠 것이니 그때 그것을 確認하고 올라오면 만나게 해드리리다.”
阿斯女는 住持 스님의 말대로 影池로 가서 每日 影池의 水面에 塔의 모습이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어찌된 까닭인지 塔의 모습은 좀처럼 비치지 않았다. 阿斯達이 구슬아기와 사랑에 빠져 時間을 浪費했기 때문에 塔의 竣工이 늦어졌던 것이다. 애가 닳은 阿斯女는 食飮을 全廢하고 오로지 影池에 비칠 塔만을 기다리다가 氣盡하여 結局 죽고 말았다.
그 後 世上 사람들은 當然히 影池에 모습이 비쳐져야 할 塔이 비쳐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塔을 그림자 없는 塔 卽, 無影塔이라 하고 多寶塔을 有影塔이라 했다.
🍎 無蝶無香
(나비가 없음으로 미루어 香氣가 없을 것이다. 善德女王이 어렸을 적 牡丹꽃 그림을 보고 香氣가 없을 것이라고 豫言한 故事에서 由來한 말로 어떤 일에 반드시 갖추어져야 할 要件이 없다면 그것은 完全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 三國史記에.
新羅 第27代 善德女王은 眞平王의 맏딸로서 本名은 金德曼이고, 善德은 諡號이며, 號는 聖祖皇姑다.
그 女는 智慧가 많아 세 가지 앞일을 豫測하여 的中시켰다.
그 첫 番째는 牡丹꽃에 關한 이야기다.
唐나라 太宗이 眞平王에게 紅色, 紫朱色, 白色의 牡丹꽃 그림과 그 씨앗 세 되를 보내 오자 王이 德曼에게 보이니 그 女가 말했다.
“이 꽃은 비록 아름다우나 틀림없이 香氣가 없을 것입니다.”
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王이 묻자 德曼이 對答했다.
“이 꽃 그림에 蜂蝶이 없음으로 미루어 알았나이다. 大抵 女子가 아름다우면 男子들이 따르고, 꽃에 香氣가 있으면 蜂蝶이 따르는 法 아닙니까? 그런데 이 꽃 그림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蜂蝶을 그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香氣가 없음이 分明하나이다.”
그래서 그 씨앗을 뜰에 심게 했더니 果然 꽃은 貪스럽게 피었으나 香氣가 없었다.
두 番째는 百濟 軍士를 물리친 이야기다.
날씨가 싸늘한 겨울에 靈廟寺 (善德女王 때 慶州에 創建한 절)아래의 玉門池에 난데없는 개구리 떼가 모여들어 울어댔다.
그러자 사람들이 駭怪한 일이라 생각하여 王에게 報告하였다. 善德女王은 急히 角干 閼川과 弼呑 等에게 軍士 2千 名을 뽑아 徐羅伐의 西南邊에 있는 玉門谷 (女子의 生殖器를 닮은 溪谷)을 찾아가서 潛伏해 있는 百濟의 兵士들을 殲滅하라고 命令했다. 두 角干이 王命대로 찾아가니 한 작은 山 溪谷에 果然 百濟의 將軍 于召가 軍士 五百 名을 거느리고 獨山城을 襲擊하려고 潛伏해 있어 一網打盡했다.
세 番째는 自己의 죽음을 豫言한 일이다.
女王이 臣下들에게 自身이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거든 狼山 男쪽 비탈의 忉利天 안에 묻어 달라고 當付했다. 그리고 그날이 되자 豫言대로 世上을 떠났다. 臣下들은 王의 當付에 따라 葬事를 지냈다.
그로부터 十如 年 後 文武大王은 善德女王의 陵 아래에다 寺刹 四天王寺 (須彌山의 四方의 世界 卽, 東의 勝身洲, 西의 牛貨洲, 南의 贍部洲, 北의 俱盧洲를 일컫는다)를 創建했다. 사람들은 佛經에서 四天王은 須彌山의 中턱에 있고, 그 위에 忉利天이 있다고 한 말을 想起하고, 그때서야 善德女王의 豫言이 맞아 떨어짐을 알았다.
善德女王이 살아 있을 때 臣下들이 개구리에 關한 豫言을 두고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 묻자 善德女王이 說明했다.
“개구리의 불거져 나온 눈으로 兵士를 意味하는 것을 알았고, 玉門은 女根. 이고, 女子는 陰과 陽 中에 陰에 屬하며, 그 빛깔은 흰 것인 바, 흰 빛은 西쪽을 象徵하는 것이므로 敵의 兵士가 西쪽에 있음을 알았고, 男根이 女根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法이니 그들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說明을 듣고 난 臣下들은 모두 感歎해마지 않았다.
善德女王은 芬皇寺를 創建하고, 瞻星臺와 皇龍寺 9層塔을 建立했다.
🍎 文金生員
(文 生員과 金 生員, 卽 平凡한 사람이란 뜻으로, 朝鮮 英祖 때 몸가짐과 집안管理를 잘했던 한 선비의 故事에서 由來했다. 自己 身分이 드러나지 않게 處身하거나 假名을 쓰는 境遇를 이른다)
● 大東奇聞에.
朝鮮 第21代 英祖(1694~1775) 때 自己의 姓, 文字에다 어머니의 姓, 金字를 넣어서 文金生員으로 行勢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容貌가 못생기고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는데, 그의 女조카는 容貌가 잘생겨서 內命婦 從四品의 淑媛 品階를 받았다. 그 바람에 家門 全體가 惠澤을 입어 벼락富者에 벼락감투를 쓰게 되었고, 淑媛의 아우 文聖國은 尙宮을 돌보는 小監이 되었다.
聖國은 無識한 데다가 사람이 狡猾하여 酒色과 奢侈를 좋아했다. 外出할 때는 華麗한 마차를 타고 다니며 權勢를 뽐내고, 집안에서는 下人을 數十 名씩 거느렸으며, 門前에 드나드는 사람이 저자를 이루고, 無賴한 食客들이 우글우글하였다.
그러나 淑媛의 伯父 文金生員은 淑媛이 벼슬자리를 만들어 주어도 決코 應하지 않았다. 特히 조카 聖國이 보내오는 돈이나 物件은 一切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아예 去來를 끊고 지냈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聖國은 집안을 亡칠 危險한 人物이니 操心하라고 注意를 주었다.
“聖國이란 놈이 저 貌樣인데 그 權勢가 얼마나 가겠소. 猝富貴不詳이란 말대로 벼락富貴는 얼마 못가는 法이오. 한 番 뒤집히는 날에는 滅門之禍를 當할 것이니 處身을 操心해서 하고, 나는 아예 1年에 한 차례씩만 집에 올 것이니 그리 아시오.”
이렇게 말하고는 대지팡이에 짚신을 신고 名山大刹을 찾아 定處 없이 떠나 버렸다. 그리고 本姓을 감추고 金氏로 行勢하며 섣달 그믐 캄캄한 밤에야 한 番씩 집에 들러 省墓를 하고, 妻子를 만났다.
몇 해 後, 아니나 다를까 淑媛 同生 聖國이 謀叛의 罪를 犯해 賜死를 當하고, 그에 따라 文氏 一門도 滅亡했다. 그러나 文金生員의 집안만은 禍를 免하게 되었다. 그가 일찍이 어머니의 姓까지 넣어서 行動을 操心한 것은 先見之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文德之略
(文德의 智略이라는 말로, 조그만 힘으로 엄청난 큰 힘을 깨뜨린 乙支文德의 故事에서 由來했다. 智略이 뛰어난 사람을 比喩하는 말이다)
● 三國史記 列傳 第4에.
乙支文德은 高句麗 嬰陽王 때 사람으로 그의 家系譜는 仔細한 內容이 傳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資質이 沈着하고 날쌔며 智略과 術數가 뛰어났고, 글을 잘 알고, 잘 지었다고 傳해지고 있다.
西紀 612年, 隋나라 煬帝가 宇文述과 于仲文에게 高句麗를 치게 했다. 그러자 乙支文德은 實態를 把握하기 爲하여 敵의 陣營에 들어가 거짓으로 降服했다.
宇文述과 宇仲文은 高句麗의 王이나 乙支文德이 찾아오거든 잡아두라는 皇帝의 密旨를 받고 乙支文德을 抑留시키려 했으나 尙書右丞(尙書都省에 屬한 官吏) 劉士龍이 降服하기 爲해 온 敵長을 抑留하는 것은 道理가 아니라고 굳이 말리므로 그냥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곧바로 後悔하고 사람을 보내 더 議論할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고 했으나 乙支文德은 속지 않았다.
乙支文德을 놓친 宇文述은 食糧이 떨어졌으므로 回軍하려 했으나 精銳部隊로 追擊하면 成果를 이룰 것이라는 宇仲文의 主張에 따라 鴨綠江을 건너 追擊했다.
乙支文德은 隋나라 軍士가 굶주리고 있음을 알고 그들을 지치게 하고자 싸움마다 敗하는 척하니, 宇文述은 하루 동안에 일곱 番을 싸워 모두 이겼다. 그러자 여러 番 이긴 것을 믿고 마침내 薩水(淸川江)를 건너 平壤城에서 30里 되는 地點에까지 좇아오니 乙支文德이 宇仲文에게 愚弄하는 詩를 지어 보냈다.
神策究天文 ~ 그대의 神妙한 計策은 天文을 꿰뚫었고
妙算窮地理 ~ 奇妙한 計算은 地理를 通達했도다.
戰勝功旣高 ~ 싸움마다 이겨 功이 높아졌으니
知足願云止 ~ 그것으로 滿足하고 그만 그침이 어떠한가?
乙支文德은 使者를 보내어 거짓으로 降服하며 말했다.
“軍士를 돌려 돌아가면 王을 모시고 行在所(皇帝나 王이 行次할 때 머무는 臨時居所)로 찾아가겠다.”
宇文述은 軍士들이 지쳐있어 더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고 乙支文德의 降服을 핑계 삼아 돌아가기 爲해 薩水를 半쯤 건넜을 때 乙支文德이 後尾를 攻擊하니 한꺼番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그들이 돌아가는데 걸린 時間은 하루 낮 하룻밤 동안이었고, 그 거리는 450里였다. 또 처음 遼河를 건넜을 때에는 아홉 개 部隊의 軍隊가 30萬 5000命이었는데, 遼東城으로 되돌아간 者는 겨우 2700名이었다. 高句麗가 그 많은 軍士를 거의 다 殲滅할 수 있었던 것은 乙支文德의 智略 때문이었다.
🍎 文宣衣民
(文氏가 百姓들에게 옷을 입히다. 卽 高麗 文益漸이 元나라에서 木花씨를 가져와 普給시킴으로써 百姓들이 따뜻하게 지내게 해준 것을 말한다. 여러 사람을 爲하여 最善을 다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 朝鮮古今名賢傳에.
高麗 末期의 學者 文益漸 (1329~1398)의 字는 日新이고, 號는 三憂堂이며, 諡號는 忠宣이다. 그가 書狀官(서장관)이 되어 使臣 李公遂를 따라 元나라에 갔을 때였다. 그곳에는 高麗의 王族 德興君이 있었는데 그는 元나라가 高麗를 쳐들어오자 崔濡와 더불어 元나라에 協助했다. 元나라의 王이 文益漸에게도 그 德興君을 따르라고 命했으나 듣지 아니하므로 交趾 (越南의 北部 하노이 地方)에 三年間 流配를 보냈다.
文益漸은 그 곳 流配地에서 사람들이 木花를 栽培하여 옷을 지어 입는 것을 보고, 그것을 本國에 가져가 國民의 衣生活에 도움을 주고자 했으나 搬出이 禁止된 탓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苦心 끝에 木花씨 세 개를 붓대롱(筆管) 속에 숨겨서 몰래 가져왔다.
그러고는 그의 丈人 鄭天益과 함께 故鄕 慶南 山淸郡 丹城面 培養里(沙月里)에서 밭에 심었으나 栽培法을 몰라 겨우 한 個만 싹을 틔울 수 있었다. 그래서 刻苦의 努力으로 繁殖을 거듭했다. 繼續해서 木花로 솜 타는 法과 실을 뽑는 方法, 그리고 베짜는 것까지 開發하니 마침내 온 나라 坊坊曲曲의 百姓들이 따뜻한 무명으로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게 되었다.
第7代 世祖 때 그의 祀堂이 세워졌으며, 萬人을 따뜻하게 입힌 功勞로 忠宣公 諡號도 받았다.
李滉, 宋時烈, 李珥 等 여러 사람이 그를 讚揚한 글을 지었다.
神農敎民耕 ~ 옛적에 神農이 百姓들에게 논밭 갈기를 가르쳤고
后稷敎民稼 ~ 后稷이 百姓들에게 모심기를 가르쳤는데
忠宣衣我民 ~ 文 忠宣公은 萬百姓들에게 무명옷을 입혀주었으니
豐功倍前昔 ~ 그 忠誠한 功은 옛적의 그것보다 갑절이나 되도다.
🍎 勿言我死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卽 어떤 事實이 相對에게 알려지면 自身이 不利해지므로 그 事實을 숨기고자 할 때에 쓴다)
● 先祖實錄, 古今淸談에.
民族의 聖雄 李舜臣은 本貫이 德水이고, 字는 汝諧이며, 諡號는 忠武이다. 그는 武科에 及第하여 國家의 文書와 帳簿를 擔當하고 말과 가마에 對한 일을 맡는 司僕寺主簿를 거쳐 從4品 造山堡萬戶와 井邑縣監 等을 두루 거쳤다. 西厓 柳成龍이 그의 勇敢함과 才能을 알고 朝廷에 薦擧하여 全羅左道 水軍節度使가 되었다.
當時 朝野에서는 倭亂에 對備하지 않았는데, 將軍만은 거북船을 만들고 軍費 擴充에 힘을 다했다. 마침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거북船으로 玉浦에서 敵船 30如 隻을 擊破한 것을 비롯하여, 泗川에서 13隻을, 唐浦에서20如 隻을, 唐項浦에서 100如 隻을, 閑山島에서 70如 隻을, 釜山 앞바다에서 100如 隻을 擊沈시키는 等 南海岸 一帶의 敵軍을 거의 掃蕩했다.
그의 能力을 높이 評價한 先祖는 李舜臣을 三道水軍統制使로 昇進시켰다. 그러자 上級者였던 元均이 그의 麾下에 들어가게 된 데 對하여 反感을 품고 그를 謀陷했다. 그로 因하여 서울로 押送되어 死刑宣告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多幸히 鄭琢의 辯護와 그 間의 戰功이 參作되어 赦免을 받고, 權慄의 麾下에서 白衣從軍하였다.
丁酉再亂이 일어나자 元均이 배를 몰고 나가 싸웠으나 慘敗하고 말았다. 그러자 李舜臣은 다시 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元均이 싸우다가 남긴 12隻의 배와 貧弱한 兵力으로 鳴梁海戰에서 敵船 133隻과 싸워 31隻을 擊破했다. 그의 戰略이 뛰어났음을 또다시 立證한 것이다. 또 明나라 援兵과 合勢하여, 露梁 앞바다에서 撤收하는 倭船 500如 隻과 싸워 200隻을 불 태웠다. 그때 不幸하게도 敵의 銃알에 가슴을 맞았다. 그러자 그는 兵士들의 士氣가 떨어질 것을 念慮하여 이렇게 말했다.
“只今은 싸움이 危急한 狀態다. 그러니 나의 죽음을 兵士들에게 말하지 말라.”
當付를 마치자마자 숨을 거두니 조카 李緩이 그의 遺言대로 將軍의 戰死 事實을 숨기고 如前히 勇猛하게 싸워 많은 戰果를 거두었다. 李舜臣 將軍은 4兄弟 中 셋째였는데 첫째가 羲臣, 둘째가 堯臣, 셋째가 舜臣, 넷째가 禹臣이었다. 이는 古代 中國 皇帝들의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또 將軍은 茶를 좋아하여 아들과 조카들 이름까지도 모두 초두艸邊을 붙여지었다.
文章에도 能하여 時調와 亂中日記 같은 좋은 글도 많이 남겼다.
🍎 勿謂母過
(어머니의 허물을 말하니 차마 듣지 못하겠다는 말로, 相對便이 自己의 意思와 맞지 않는 말을 할 때를 比喩)
● 大東奇聞에.
朝鮮 第11代 中宗 때 性理學者 趙憲 (1544~1592)은 白川 사람으로 號는 重峯, 諡號는 文烈이며, 栗谷 李珥의 學問을 이어받았다. 그는 孝誠이 至極하여 父母님을 모시고자 外職을 自請, 報恩縣監을 지냈다.
다섯 살 때 여러 아이들과 亭子에서 千字文을 읽고 있는데 벼슬아치들이 떠들썩하게 지나가자 모든 아이들이 冊을 덮고 구경하였으나 唯獨 趙憲만이 홀로 冊 읽기를 繼續했다. 이를 본 訓長이 奇特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묻자 그가 對答했다.
“冊을 읽을 때는 오로지 마음을 모아 冊 읽는 데에만 集中하라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한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父母님에 對한 恭敬이 남달랐다.
先祖 때 日本 使臣이 와 明나라를 치고자 길을 빌려 달라고, 卽 假途攻明을 要請했다. 沃川에서 이 消息을 들은 그는 日本 使臣을 遮斷할 것과, 倭亂에 對備하여야 한다고 上疏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自身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머리를 돌기둥에 쳤다.
이듬해에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沃川에서 義兵 1700名을 糾合하고, 僧將 靈圭가 이끄는 僧兵과 合勢하여 淸州를 收復했다. 또 錦山에서 全羅道로 向하는 倭敵을 맞아 靈圭와 아들 完基 等 義兵 700名과 함께 싸웠으나 衆寡不敵으로 모두 壯烈히 戰死하였다. 後世 사람들은 그들을 기리는 七百義塚을 만들어 崇仰하고 있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繼母에게서 자랐다.
한 番은 外家에 가서 外할머니를 뵈었더니 外할머니가 등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어린 네가 繼母에게서 虐待를 받는다 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그 말을 들은 趙憲은 한동안 外家에 가는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外家에 가니 外할머니가 물었다.
“그동안 어찌하여 나에게 오지 아니했느냐?”
“어머니의 잘못을 말씀하시니 차마 듣기 거북하여 그랬습니다.”
그 後 할머니는 다시는 그에게 繼母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繼母한테도 孝心이 이와 같았다.
그가 世上을 떠난 後 나라에서는 領議政을 追贈하고, 沃川에 表忠祠를 지어 祭祀를 지내게 했다
🍎 勿害孝子
三憂堂 文益漸(1331~1400) 先生이 淸道郡守로 補任하고 있던중 어머니喪을 當하여 廬幕을 지키다가 南海岸 一帶를 橫行하던 倭寇에게 잡혔으나 父母의 무덤앞에서 3年間 侍墓살이 하는 高麗의 아름다운 風俗에 感動한 倭將은 勿害孝子(孝子를 헤치지 말라)란 팻말을 세우고 撤收하니 이로서 文益漸과 이 一帶는 殘虐無道한 倭寇로부터 禍를 免했다.
禑王은 잦은 外侵 때문에 國法으로 定한 3年喪의 喪禮가 무너진 時節, 이를 本보기로 삼기爲해 文益漸이 태어난 洞里를 孝子里라 命名하고, 아울러 孝子碑가 내려져 保存되고 있다.
☆ 文益漸이 高麗 使臣의 一行으로 元나라에 갔다가 木花씨를 붓두껍에 몰래 가져와 故鄕인 丹城 培養마을 (慶南 山淸郡 丹城面 沙月里) 始培함으로써 高麗에 木花栽培普給과 衣類革命, 産業革命을 일으킴. 孫子 '文萊'는 씨뽑는 機械 '文萊'를 發明했고 (後에 '물레'로 바뀜) 孫子 '文英'이 베를 처음 짰다하여 '文英베'라 일컬음(後에 '무명베'로 바뀌었다한다)
🍎 美菊佳客
(아름다운 菊花가 좋은 손님이다. 卽 菊花의 아름다움을 손님에 比喩하여 譽讚하는 말이다)
● 大東奇聞에.
申用漑 (1463~1519)는 朝鮮 第11代 中宗 때 文臣으로 申叔舟의 孫子다 本貫은 高靈이고, 號는 二樂亭(이요정)으로 成宗 때 左議政을 지냈으며, 諡號는 文景公이다.
金宗直의 門下였던 그는 술을 무척 좋아해서 한 番 술을 미시기 始作하면 滿醉가 되어야 그만두었다.
그는 유난히 菊花꽃을 貪하여 해마다 여덟 개의 花盆에 菊花를 심어 길렀는데 가을이 되면 꽃이 滿開하여 아름다웠다.
하루는 그가 食口들에게 일렀다.
“오늘 아주 貴한 손님이 오실 터이니 술과 按酒를 장만해 놓도록 하여라.”
하여 온 집안이 搖亂스럽게 飮食을 차려 놓고 해가 저물도록 손님을 기다렸다. 그러나 손님은 오지 않았다. 夫人이 異常히 여겨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그가 말했다.
“달이 떠서 달빛이 집안까지 곱게 비추고, 菊花꽃 香氣가 가득하니 이것이 貴한 손님이 아니오.”
그러고는 여덟 花盆의 菊花꽃과 어우러져 술을 나누었다.
그가 成宗을 4年間이나 모셔 깊은 信任을 얻고, 戊午士禍 때 投獄되었다가 곧 釋放되어 直提學과 都承旨를 지낸 것도 그만큼 信任이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號가 二樂亭이었듯이 늘 두 가지의 즐거움을 안고 산 사람이었다.
🍎 美溢到去
(너무 아름다우면 쫓겨난다는 말, 宰相 李德馨이 그의 愛人이 罪가 없는데도 지나치게 怜悧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랑에 빠져 나라의 일을 그르칠까봐 쫓아낸 故事에서 由來했다)
● 海東野史에.
朝鮮 宣祖 때 文臣 李德馨 (1561~1613)은 本貫이 京畿道 廣州이고, 號는 漢陰이며, 諡號는 文翼이다.
그가 同知中樞府事라는 重任을 맡았을 때, 壬辰倭亂이 일어났다. 나라의 存亡이 너무 危急하여 暫時도 大闕을 떠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大闕 門밖에 小室을 두고, 거기에서 宿食을 했다.
몹시 무더운 어느 날, 그가 上監과 緊히 議論할 일이 있어서 밤늦게야 小室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목이 말라 물을 달라고 할 氣運도 없어 입만 벌리고 손을 내밀었다. 小室은 미리 醍醐湯 (더위를 풀어주고 목마른 것을 그치게 하는 湯藥)을 準備해 두었다가 그에게 건넸다. 그러나 그는 湯藥을 달게 받아 마시지 않고 小室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이제 그대와 헤어져야 하겠소. 그러니 나를 기다리지 말고 마음대로 살 곳을 찾아가시오.”
말을 마친 漢陰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門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小室은 갑자기 疎薄을 當한 까닭을 알지 못하고 밤새워 울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와 가장 親한 白沙 李恒福을 찾아가 自初至終을 이야기했다. 李恒福도 亦是 疑訝해하면서 漢陰을 쫓아가 물었다.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小室이 아무런 罪가 없는데도 차버린 까닭이 무엇인가?”
漢陰은 意味深長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이 罪가 있어서가 아니네. 내가 지난番 上監과 國事를 議論하고 늦게 돌아와 목이 몹시 말라 말도 못하고 손을 내민 적이 있었다네. 그때 그 사람이 미리 醍醐湯을 準備해 두었다가 내어 주었어. 처음 그 女子를 만났을 때 그 怜悧하고 聰明함이 나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했었거든. 그런데 그날 물砂鉢을 받고 보니 사랑스런 마음이 더욱 깊어지지 뭐야.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倭亂으로 온 나라가 混亂地境인데 小室에게만 빠져 있다면 나라의 重責을 맡고 있는 나로서 어디 可當찮은 일인가? 小室의 사랑스러움은 나를 迷惑에 빠지게 만들고 그러다보면 國事를 그르치게 될 것이 分明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國事에 專念하고자 取한 行動이라네.”
自初至從을 듣고 있던 李恒福이 말했다.
“公은 참으로 忠誠스러운 臣下요, 大丈夫라야 할 수 있는 일을 했군! 나로서는 到底히 미치지 못할 일이네.”
🍎 未八當三
(여덟이 아니라 셋으로도 充分하다. 卽 어떤 일을 解決하는 데에는 그 中心이 되는 部分만 解決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린다는 뜻이다)
● 大韓季年史에.
開花期의 政治家이자 先覺者였던 月南 李商在(1850~1927)는 本貫이 韓山이고, 羲宅의 아들이다. 1867年 科擧에 應試했으나 落榜하였는데 李長稙의 紹介로 朴定陽을 알게 되어 그 因緣으로 紳士遊覽團의 한 사람으로 日本에 다녀오면서 洪英植과 사귀었다. 洪英植이 郵政局總管이 되자 李商在는 郵政局 主事가 되었다. 그 後, 甲申政變의 失敗로 落鄕해 있다가 朴定陽이 駐美 大韓民國大使館 公使로 赴任하자 李商在는 一等書記官으로 同參하게 되었다.
그는 美國에 있는 동안 洋服을 一切 입지 않고 紗帽冠帶와 朝服을 通常服으로 입고 어디든지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다. 韓國의 固有한 風習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意圖에서였다.
어느 날, 그가 紗帽冠帶를 쓰고 朝服에 나막신을 신은 채 公園을 散策하노라니 어린아이들이 그를 에워싸고 道袍자락을 잡아끄는가 하면 돌팔매질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며 놀렸다. 그러나 그는 웃는 낯으로 그들을 對했다. 그런데 그 光景을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警察에 申告하여 아이들이 모두 붙들려가게 되었다.
그 事實을 新聞의 記事를 읽고 난 뒤에야 알게 된 李商在는 警察署長을 찾아가 天眞爛漫한 어린아이들이 生前 처음 보는 外國 風俗의 服裝을 보고 好嗜心으로 그랬을 뿐, 惡意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니 放免해 주라고 請했다. 이에 警察들도 그의 人格에 感動하여 아이들을 풀어주었다.
이처럼 月南의 高邁한 人品이 알려지자 韓國에 對한 認識이 美國의 上下議員 에서 두루 새롭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淸國 使臣들은 우리나라를 自己들의 屬國인 것처럼 對하여 오다가 韓國의 外交官들이 오히려 自己들보다 優待를 받는 것을 보고 猜忌하기 始作했다. 그리고 끝내 그것이 빌미가 되어 朴定陽과 李商在는 歸國을 해야 했다.
故國으로 돌아온 李商在는 學部의 學務局長을 거쳐 議政府 總務局長이 되었다.
當時 國內에서는 白銅錢을 濫發하여 經濟가 塗炭에 빠지고, 三南地方에서는 東學亂이 일어나 民心이 洶洶했다. 그런 가운데 朝廷에서는 이미 廢止했던 轉運司를 復舊하고자 高宗의 允許까지 받아냈다. 그러나 李商在는 그 일이 잘못된 것이라 判斷하고 執行하지 않았다. 이에 高宗은 처음에는 왜 바로 執行하지 않느냐고 大怒하였으나 이내 그 일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中止하게 했다.
한때 임금의 命을 拒逆하여 죽음을 覺悟해야 했던 李商在는 살아난 것을 기뻐하기보다는 뒤늦게나마 高宗이 賢明한 判斷을 내려준 데 對하여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日本에 倂呑을 當하는 恥辱스런 일이 일어났다.
그 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李完用, 宋秉畯 等이 合席한 한 晩餐자리에 工巧롭게 함께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李商在가 李完用과 宋秉畯을 보고 불쑥 말했다.
“大監들은 東京에 가서 사시지요.”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서 말을 받았다.
“令監, 瞥眼間 그게 무슨 말이요?”
李商在가 다시 싸늘하게 쏘아보며 말했다.
“大監들은 나라를 亡하게 하는 데는 天才들이 아니요? 그러나 當身들이 東京에 가 있게 되면 이番에는 日本이 亡하게 될 것이니 하는 말이외다.”
그러자 座中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며 모두들 死色이 되었다. 日本 總督 이토 히로부미도 있는 자리에서 月南이 아니고는 敢히 못할 소리였다. 이처럼 뼈 있는 말을 거침없이 내쏘는 李商在의 大膽性은 훗날 總理가 된 金弘集과 政事를 討議하는 자리에서도 餘地없이 나타났다.
八道監司 金弘集이 말했다.
“昨今 貪官汚吏가 우글우글해서 百姓들이 살 수가 없으니 여덟 놈만 목을 베면 될 텐데…….”
이에 李商在가 맞받아서 말했다.
“여덟 사람이 아니라 세 놈만 없애도 되겠지요.”
金弘集은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셈이었다. 이 말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뜻이었는데, 이런 李商在의 機智는 곳곳에서 드러났다.
한 番은 日本을 視察하고 돌아온 李商在에게 所感을 묻자 짧게 對答했다.
“東洋에서 第一 큰 兵器廠을 보니 大砲와 銃劍이 山처럼 쌓여 있어 日本이 强國인 것은 틀림없었소. 그런데 聖經 말씀에 칼로 일어서는 者는 칼로 亡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걱정이오.”
이는 日本이 亡할 것을 豫言한 말이기도 했다.
李商在는 1927年, 78歲로 解放을 보지 못한 채 日帝의 暗鬱한 비구름 속으로 사라져갔다.
🍎 民草之亂
(풀뿌리 百姓들의 亂離라는 말로, 朝鮮 末期에 洪景來가 主軸이 되어 平安道 地方에서 일어났던 民亂에서 由來했다.
힘없는 사람들이라도 뭉치면 무서운 威力을 發揮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 關西辛未錄에.
朝鮮의 마지막 王 第23代 純祖 때 民衆 反亂을 일으킨 洪景來(1771~1812)는 平安道 龍岡에서 태어났다. 그는 外叔 柳學權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聰明한데다가 言辯도 뛰어났다. 또 그는 열아홉 살에 司馬試에 應試했다가 落榜을 했다. 그리고 얼마 後 自己보다 實力이 모자라는 兩班집 子息들은 모두 及第했음을 알게 되어 憤怒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西北人은 文武를 莫論하고 高官에는 登用시키지 않는 地域差別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더욱 强하게 不滿을 품게 되었다.
이때부터 洪景來는 定處 없이 8道를 돌아다니며 民心을 살폈다. 그 結果 平安道 出身들은 安東 金氏들에게 排斥當하고 있어 나라에 不滿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博川의 靑龍寺에서 名門家의 庶子 禹君則과 意氣投合하여 叛亂을 일으키기로 謀議했다.
그는 滿州의 馬賊團 鄭始守와 嘉山郡에서 第一가는 富者이면서 武科에 及第한 李禧著, 兵法에 밝은 進士 金昌始, 泰川의 金士用과 价川의 所聞난 壯士 洪總角 等 30如 名의 同志들을 모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科擧 制度를 비롯 權門勢家의 腐敗와 洶洶한 民心을 吐露하고 있었다. 特히 南陽 洪氏가 朝廷에 들어오면서 그들에 對한 不平이 높았다.
洪景來는 金鑛 採掘을 구실로 流民 壯丁들을 끌어모은 後, 機會를 보다가 第一 먼저 嘉山郡을 襲擊, 郡守 鄭著와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엿새 만에 여덟 고을을 손에 넣었다.
叛亂이 成功的으로 이루어지자 洪景來는 스스로 平西大元師라 稱하고 金士用을 副元師로, 金昌始를 參謀로, 朴聖幹을 兵站將으로 任命하여 組織을 確固히 하는 한便, 占領地에서는 倉庫를 열어 百姓들에게 穀食을 나누어주는 等 民心 收拾에도 努力했다. 그리하여 嘉山, 郭山, 定州, 宣川, 龍川 等地까지 占領했다. 朝廷에서는 많은 懸賞金을 걸고 洪景來를 逮捕하라고 督勵했다.
洪景來는 南으로 내려가는 第一의 關門인 安州를 攻擊하기 爲하여 博川의 松林里로 集結하였다.
한便, 安州城을 지키던 李海愚와 趙鍾永은 洪景來의 亂 消息을 듣고 軍士를 둘로 나누어 洪景來가 있는 松林을 左右에서 襲擊했다.
그때 負傷을 當해 擧動이 不便했던 洪景來는 그들을 當해내지 못하고 定州城으로 逃亡가 城門을 굳게 닫고 洪總角 等 다른 將帥의 支援軍이 到着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겨울이 가고 봄이 오도록 그들은 오지 않고 城안에서는 食糧마저 동이 났다.
그때 官軍 李堯憲이 火藥으로 城壁을 爆破하고 물밀 듯이 들이닥쳤다.
끼니도 제대로 못하고 지칠 대로 지친 洪景來의 叛軍들은 進擊해 들어오는 官軍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最後가 닥쳤음을 안 洪景來는 官軍에게 외쳤다.
“여기 洪景來가 나간다. 나를 잡아 賞金을 타거라.”
官軍들은 그에게 활을 쏘아대 벌집을 만들어 버렸다.
洪景來의 亂은 腐敗한 朝鮮 末期의 混濁한 政治 狀況을 말해주는 事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