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진상조사조차 거부하나
남북관계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지난 7월 11일 갑자기 발생한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의 피격사건은 이명박 정부 들어 위태롭게 유지되어온 남북관계의 수명이 다했음을 알리는 조종 소리와 같았다. 박씨 피살사건은 남북관계에 정상적 채널이 존재했다면 충분히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서는 그마저도 불가능에 가깝다.
왜 그런가. 북한은 왜 정부의 합동진상조사 제의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가. 북한 초병의 정조준 사격에 애꿎은 남측 민간인이 사망했건만, 북이 취하는 태도는 아무리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 간에 불편했다 하더라도 너무 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만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북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 북한은 지난 3월 19일 김하중 통일부 장관이 "북핵 문제 해결이 없이는 개성공단 2단계 공사는 어렵다"는 발언을 한 이래, 김하중 장관이 있는 한 통일부와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통일부 측에서 나름의 채널로 옥수수 5만 톤 지원의사를 피력했을 때도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이번 총격사건 진상조사에 통일부가 나선다고 하자 아예 원천 봉쇄를 하고 나온 것이다. 대북 담당 주무부서인 통일부 장관이 바뀌지 않는 한 남과 북은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현실, 이것이 바로 남북관계의 현주소이다.
박왕자 씨의 비극적인 피격사건은 이명박 정부 들어 곪을 대로 곪은 남북관계가 이제 한계에 도달해 마치 썩은 고름이 터져나오듯, 지층을 뚫고 분출한 것이다. 새살이 돋게 될 것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환부가 모두 드러날 때까지 지각변동 같은 파열음을 계속 낼 것인지, 지금은 그 갈림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아직 새살이 돋아나기에는 이르다. 계속해서 파열음이 들릴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의 구조물이 모두 무너져내리는 파국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북한 군부와 개성공단 폐쇄 시나리오
박왕자 씨 피격의 진상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면 지난 4월 북한 군부에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지난 4월 경부터 북한을 왕래하는 대북 사업자나 NGO 관계자들 사이에 매우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남북관계가 이런 식으로 계속 될 경우, 북한이 개성공단을 순차적으로 폐쇄하는 시나리오를 가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북한 군부 강경파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즉 군부 강경파가 개성공단 폐쇄를 위해 모종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얘기다.
왜 이들은 개성공단을 노리게 되었을까. 군부 강경파가 개성공단과 관련한 모종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 3월 말에 터진 두 가지 사건에 기인한 것이다. 하나는, 3월 26일 김태영 합참의장 내정자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한 선제 타격 발언이 화근이었다. 당시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김 내정자는 "북한이 소형 핵무기를 개발해 남한을 공격할 경우 어떻게 대처하겠느냐"는 한나라당 김학송 의원의 질문에 "제일 중요한 것은 적(북한군)이 핵(무기)을 가지고 있을 만한 장소를 확인해 타격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 기사에는 익명의 군관계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김 내정자 발언이 사실상 '예방적 차원의 선제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합참의장 내정자의 이 발언은 그야말로 북한 군부를 벌집 쑤시듯 쑤셔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해 11월 남북 군사회담에서 김장수 국방장관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사진을 가리키며 "저것 떼라"고 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북한 군부의 감정이 무척 상해 있던 터였다. 그 뒤로도 이명박 정부 들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들이 남쪽에서 계속 튀어나와도 꾹꾹 눌러 참아왔는데, 남쪽의 군 최고 책임자의 입에서 선제 타격 발언까지 나오는 데에 이르자 북한 군내 강경파들이 '우리도 본때를 보이자'며 결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군부 강경파의 분노가 공교롭게도 개성공단을 향하게 된 것은 거의 비슷한 무렵에 터진 또 다른 사건이 원인이 되었다. 지난해 10월부터 북한 내부에서는 지난 10년간 대남 사업을 담당해왔던 민경련, 민화협, 통일전선부 등에 대해 당 차원의 감찰이 심도 있게 진행되어왔다. 그 감찰 보고서가 3월 말경 나왔는데, 이는 북한 군부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개성공단을 관리해온 민경련이나 아태평화위원회 등 대남부서 요원들 중에 남쪽으로부터 돈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다시피 했고, 그 액수도 하위직은 몇 만 달러, 고위직은 몇 백만 달러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개성공단 지역은 원래 북한군 관할의 군사 요충 지역이었다. 6·15 공동선언 이후 김정일 위원장의 결심에 따라 군부가 눈물을 머금고 대남부서에 관할권을 넘겼던 것인데, 그 뒤로도 궂은 일은 군부가 떠맡고 내심 기대했던 떡고물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군 내부에서는 2단계 공사가 시작되면 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3월 19일 김하중 통일부 장관이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개성공단 2단계 공사는 불가능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이 같은 기대마저 접어야 했다. 김하중 장관이 북 내부에 대화 불가능 인사로 찍히게 된 것은 바로 이 발언 때문이었다.
이런 와중에 민경련 등 대남 기관 종사자들이 남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흥청망청 살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군 내에서 차라리 이럴 바에야 우리 땅 다시 내놔라 하는 여론이 비등할 것은 상식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도 지난 4월 말 공단 폐쇄까지 상정한 모종의 시나리오가 대북 사업가들이나 NGO 관계자들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성공단이 최고 실권자인 김정일 위원장의 결심 사업이라는 점, 그리고 그 외 몇 가지 우여곡절이 겹치면서 북한 군부는 개성공단 폐쇄를 일단 유보한 채, 불만을 터뜨릴 또 다른 장소를 물색하게 된다.
금강산 피격사건의 진상과 남북관계의 파국
이제 박왕자 씨 피격사건의 진상에 접근해보자. 피격사건이 터진 후 북한 군부의 계획적 도발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했다. 그러나 이 사건 발생 이전의 여러 정황을 고려하면 그 진상은, 계획적 도발과 우발적 사건의 중간 지점에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우선 사건 발생 직전, 그동안의 북한 군부 내 누적된 불만 외에 군부를 초긴장 상황으로 몰아가는 일이 또 발생했다.
바로 8월 18일부터 22일까지 한미 간 전개될 을지-프리덤가디언 합동군사훈련이다. 통상적으로 남쪽에서 한미합동훈련을 하면 북한은 몇 배의 기간 동안 초긴장 상황에서 대응훈련을 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최근 식량난 여파로 군인들조차 굶주림을 겪고 있는 등 정신적 육체적으로 짜증이 날대로 난 상황이다. 피격사건 하루 전인 지난 7월 10일 북측의 요청에 의해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북미 대령(대좌)급 회담'이 열렸는데 여기서 험악한 말싸움이 벌어진 것도 최근 북측이 얼마나 신경질적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금강산 외곽을 경비하는 북한군 초병에게 군상층부에서 '원칙 대응' 지시가 떨어진 것은 바로 이런 정황 속에서였다. 대략 피격사건 발생 1주일 전쯤이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관광객이 군경계지역을 침범할 경우 과거처럼 일시 억류 후 방면하는 식이 아니라, 초병 근무 수칙을 원칙대로 적용해 대응하라는 지시였던 셈이다.
즉 박왕자 씨는, 3월 말부터 시작된 북한 군부 내 강경파의 분노, 그 분노가 개성공단을 향해 폭발하려다 주춤한 채 다른 적당한 곳을 물색하던 중 또다시 8월의 한미합동군사훈련을앞두고 드디어 폭발 일보 직전으로 팽창된 상황에서, 남측 관광객이 붐비는 금강산 지역의 군사경계지역 초병에게 "초병 근무 수칙에 따라 원칙 대응하라"는 지시 형태로 떨어지고, 그 일주일만에 비운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크게는 이명박 정부 들어 악화된 남북관계의 억울한 희생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왕자 씨 피격사건은 사태의 시작일 뿐 끝이 아니다. 여전히 북한 군부의 원칙 대응 자세가 풀리지 않았고 여기에 정부의 강경책이 겹쳐진다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난 7월 18일 새정부 들어 처음으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북한이 피격 사건에 대해 "남북한 공동조사와 재발방지책 등의 약속을 하지 않을 경우 개성관광도 중단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키로 했다"고 결정한 바 있는데, 북한 군부가 남측의 이 같은 결정을 계기로 상황 악화의 길로 치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NSC 결정이 나오기 전에도, 북한 내에서는 남측에서 먼저 금강산관광을 중단했으니 앞으로 적당한 시점에 개성관광은 우리가 먼저 중단시키겠다는 분위기가 이미 존재하던 터였다. 그런데 남측 정부가 먼저 개성관광 중단 검토를 언명했으니 북한 군부로서는 더욱 쉽게 받아칠 명분이 생겼다. 즉 북한이 개성관광 중단으로 맞대응하면서, 그 다음 수순은 군부 강경파의 원 시나리오대로 갈 가능성이다. 이렇게 될 경우 바로 개성공단 폐쇄 수순으로 가게 된다.
개성공단을 폐쇄한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아버리는 식으로는 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남측이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 조건을 내걸고 하나씩 명분을 쌓아가면서 폐쇄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개성공단 근로자 임금을 중국이나 베트남 수준으로 올리라고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태업, 파업 등 단계적 수순을 밟는다는 시나리오가 이미 만들어진 상태라고 한다. 금강산관광에 이어 개성까지 무너지면, 남과 북의 분단 대치선에는 완충지대가 모두 없어진다. 이명박 정권 등장 후 단 5개월 만에 남북관계는 파국 일보 직전에까지 몰리게 된 것이다.
대남관계를 둘러싼 북의 고민
돌이켜 보면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이명박 정권이 조금만 주의력을 보였다면 제대로 된 남북관계를 시도해볼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적어도 지난해 말, 이명박 정권 출범 전 북한 내부에서 진행된 일련의 흐름들을 보면 충분히 그런 기대를 가질 만했다. 김대중·노무현정부에서 나름대로 남북관계의 물꼬를 텄다고 할 수 있지만, 여전히 피상적인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는데, 이명박 정부에서는 충분히 심화된 관계, 그리하여 남과 북의 본질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도 가능했다.
먼저, 지난해 말 북한 내부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 북한 내부에서 지난 10년간 남북관계를 주도해온 민경련, 민화협, 통일전선부 등 대남 기구 관계자들에 대한 당 차원의 감찰이 있었다는 얘기를 한 바 있다. 바로 이 당 차원에서 진행된 감찰이 어떤 의미와 목적을 가진 것이었는지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당 조직 지도부가 주체가 되어 진행된 대남 기구에 대한 감찰은 직접적으로는 이들 기관의 수뢰와 부패 등이 원인이었다. 10여 년 남북경협 현장에 있으면서 남쪽의 기업인들이나 정부기관들과 접촉하면서 뇌물을 챙기지 않은 북측 관계자들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북측이 기존의 라인을 새로운 라인으로 교체하기 위한 빌미에 지나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남북관계를 둘러싼 북한 내부의 대남전문기구들과 실세그룹 간의 몇 년에 걸친 노선 다툼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 노선 다툼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북의 실세그룹이 남쪽에 새로운 대통령의 등장에 맞춰 새로운 대남채널을 개척하기 위한 과정에서 기존 라인을 청산하기 위해 칼을 빼어든 것이 바로 당 조직 지도부의 감찰사건이었던 것이다.
대남전문기관과 실세그룹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지난해의 경우 국내 언론에 통일전선부 부부장인 최승철을 북한의 실세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그는 대남기관의 실세일지는 모르나 북한의 실세는 아니다.
북한은 당과 군의 국가이다. 당이 북한 사회주의의 정신적 가치를 대변한다면 군은 물리력을 대변한다. 따라서 북의 실세란 당과 군의 실세를 우선 꼽을 수 있다. 당은 당중앙위가 최고권력기관이다. 통전부는 그 산하의 실무부서에 지나지 않는다. 군은 보위사령부를 비롯한 김정일 위원장 직할 조직, 그리고 당정군을 통할하는 국방위원회 등의 기관이 실세다. 여기에 김정일 위원장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서기실 등 측근 그룹이 있고, 보위부 등 감찰을 담당하는 부서 역시 소위 힘 있는 부서에 해당한다. 적어도 이들이야말로 북한이라는 주식회사의 실질적 대주주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난 10년의 남북관계에서 이들 북한의 실질적인 대주주들이 '대남관계는 (통일전선부와 민경련 등) 전문부서가 담당한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 때문에 남쪽과 접촉을 하고 싶어도 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어렵게 시도를 해도 통전부가 이미 쌓아놓은 국정원 및 통일부와의 관계 때문에 뚫고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또한 당과 군 등 실세그룹의 내부 분열도 이들이 대남관계에서 역할을 하기 힘들게 했다.
일본 간사이 대학의 이영화 교수가 지난해 11월호 월간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지난 1999년 김정일 위원장이 선군정치를 표방한 이래 북한 내 소위 당과 군의 실세그룹은 군사 경제를 중심으로 한 선군파와 민생을 우선시 해온 개혁파로 나뉘어 엎치락뒤치락 해왔다. 지난 2004년 개혁파가 일시적으로 승기를 잡아 실세 총리인 박봉주 총리를 전면에 내세워 내각 책임하에 경제개혁과 대남경협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국제정세 악화로 선군파에게 주도권을 다시 빼앗긴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 뒤 선군파가 주도하면서 2006년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으로 이어진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기 한 달 전쯤인 2006년 6월경, 북 내부의 김 위원장 측근 그룹들(이영화 교수의 용어로는 '개혁파'이나 북 내부 용어로는 '경제부흥파') 내에서 주목할 만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즉 "지금은 미국과의 정세가 좋지 않지만, 내년(2007년) 4월경이면 풀릴 것이다. 그때부터 선군정치를 뒤로 물리고 실리주의에 입각한 경제개발에 전념할 것이다"는 얘기였다.
당시 이들 경제부흥파(개혁파) 인사들의 머릿속에는 2004년에 한 번 시도했다가 좌절한 내각의 위상 강화를 통한 경제개발 구상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이런 얘기가 흘러나온 한 달 후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했고, 핵실험까지 나아가게 됐다. 그리고 나서 북한 내부에서는 "강성대국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며 군사적 강성대국은 이뤘으니 경제적 강성대국의 길만이 남아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선군파와 개혁파(경제부흥파)가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서 서로 손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즉 2004년에는 군의 방해로 내각 주도의 경제개발이 실패했지만, 이제는 군의 적극 동참하에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가 가능해졌다는 얘기다.
이처럼 서로 손을 잡기 시작한 실세그룹들이 외부의 협력 대상으로 주목한 게 바로 남쪽이었다. 문제는 그 남쪽으로의 창구를 민경련과 당 통일전선부 등의 전문기관들이 장악하고 있고, 이들은 좀처럼 기득권을 내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06년 10월 이들에게 기회가 왔다. 당시는 김정일 위원장이 핵실험 이후의 경색된 상황을 타개하려고 중국 방문을 시도하다 포기하고 남쪽과의 채널을 모색하던 시점이었다. 남쪽과의 당국간 채널인 당 통일전선부(당시는 아태평화위)는 2006년 상반기 DJ 방북 무산, 열차 시험 운행 불발 사건, 그리고 미사일 발사 직후 열린 장관급 회담 결렬 등으로 기능 부전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기존의 당국간 채널 이외의 다른 라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 과정에서 2006년 10월 측근 그룹이 전진배치돼 남쪽과 대화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또다시 남과 북 전문기관의 연대, 즉 국정원과 통일전선부의 채널에 의해 차단되었다.
2007년에 들어서자 실세그룹들은 방향을 바꿨다. 당 통일전선부 등의 대남전문기관들을 저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들이 택한 방법은 합법적 수단을 동원해 대남전문기관들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묶어놓고,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는 새로운 대남 창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미 이런 움직임이 2007년 3월부터 본격화되고 있었지만 남쪽에서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다.
지난해 초 움직임에서 가장 주목할 사실이 바로 국방위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우선 3월 중순경 국방위원회 참사였던 김양건이 통일전선부부장으로 취임했다. 이는 국방위가 당 통전부를 장악해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원래 이들의 계획은 4월부터 대남기구의 전면적 개편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 9월로 D-데이가 미뤄졌다. 9월이 D-데이가 된 것은 10월의 남북정상회담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정상회담 후속 절차를 그 전처럼 통일부(국정원)-통일전선부에 맡기지 않고 곧바로 내각을 총괄하는 총리급 회담으로 하자고 북측이 먼저 제안하고 나선 데서도 알 수 있다. 당시 남쪽에서는 북쪽의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했다가 적지 않게 당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점에서 볼 때도 북 내부적으로는 9월 중에 대남 창구 개편에 대한 '액션'이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뒤 당 조직 지도부에 의한 민경련, 통일전선부 등에 대한 감찰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감찰 결과 민경련은 해체되다시피 했고 아태평화위는 현대의 대북사업관리로 사업영역을 축소했다. 통일전선부 역시 위상이 대폭 축소됐다. 이런 식으로 지난 10년의 남북체제는 이미 북한 내부에서부터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제 새로운 시대의 남북대화체제의 등장이 필요한 셈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북한은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남쪽 방문이 성사될 경우 남쪽의 상대 채널이 등장하는 데 따라 정해나갈 계획이었다.
김영남 상임위원장 방한 좌절과 표류하기 시작한 남북관계
사실 이명박 정부 초기 남북 간에 보이지 않게 전개된 빅이벤트가 바로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방한 문제였다. 원래 이 문제는 지난해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합의된 사안으로 원래는 노무현 대통령 임기 중인 금년 1월 그의 방문이 이뤄질 예정이었으나 북측에서 입장을 바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인 2월 25일이나 아니면 정권 출범 직후로 미루었다. 그리하여 그 메시지가 여러 경로로 이명박 당선자 쪽과 인수위 등에 전달되었고 한때 내부에서 검토가 이뤄지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난 2월 초 알려진 검토 결과는 북한이 낙담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즉 "한미관계 복원에 밀려 남북관계는 4월 이전에는 어렵다"는 입장만이 전달된 것이다. 즉 정권 초기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방한은 좌절된 셈이고, 그와 함께 대남관계의 전면에 등장했던 당 조직 지도부 등 북한 내 실세그룹들 역시 모두 원위치로 복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 몇 년에 걸쳐 남북 간 본질적 협력관계 구축을 통해 북한 경제 회생 전략을 짜고자 했던 북한 내부 실세그룹의 오랜 기다림과 열망은 사실 이명박 정권 초기에 좌절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대북관계에 대한 이명박 당선자 측의 입장은 많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해왔다. 지난해 7월 한나라당의 신대북정책은 일부 내용에서 햇볕정책보다 적극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신대북정책을 추진했던 정형근 의원이 이명박 정권과 내부적인 인연이 멀어지면서 인적인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비핵개방3000'이니 '300만 불 수출 기업 100개 육성'이니 하는 장밋빛 구호들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각론도 실행의지도 확인된 바 없다. 그대신 북에 대해서는 그동안 을의 처지이면서도 갑처럼 행세해왔다느니 남북관계의 물길을 바꿔야 한다느니 하는 식의 고압적 자세를 유지해왔다. 지난 2월 초까지 남측에 기대를 갖고 접촉선을 유지하던 북측은 서서히 자세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지난 3월 초 청와대 외교안보팀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발생했다. 북한이 올해에는 남쪽 정부에게 식량과 비료 지원을 요청하지 않기로 했다는 정보가 입수됐던 것이다. 인수위 외교안보팀 시절부터 새 정부 대북정책은 북한이 현재 심각한 식량난에 봉착해 있어 결국은 남쪽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는 것을 대전제로 해왔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남북관계의 물길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데에 정권 내부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인수위 외교안보팀이 작성했다는 '대북정책 로드맵'에는 '남북관계 물길 바로 잡기'니 '갑의 위치에서 주도권 장악', '대북지원의 경우 북의 성의가 담긴 상호주의'가 필요하다는 등의 결의에 찬 용어가 가득 담겨있다. 심지어는 '북한이 남한 길들이기를 시도할 경우 남한도 북한 길들이기로 맞대응', '대남 경제의존도가 증대된 상황을 최대한 활용, 경제적 수단을 통한 북한의 행동 변화 유인' 등의 문구도 들어 있다.
청와대 외교안보팀이 각 부처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대북 인도적 지원에 대한 방안 역시 북이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그 내용은 △ 쌀 50만 톤, 비료 40만 톤을 차관으로 주던 것을 무상으로 주는 대신 양을 대폭 줄이고 △ 예년에 비해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산가족 상봉과 납북자 및 국군포로 문제와 상호 연계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북이 받기 싫어하는 모니터링과 납북자 국군포로 문제 등과 겹겹이 연계하면서 나름대로 '창조적이고 차별화된' 방안이라고 짜놓았지만 북측이 남쪽 정부에게는 요구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 되어버렸다. 관계 소식통은 "북의 입장이 알려지면서 모두 없었던 일로 하는 등 한바탕 해프닝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북한 내부에서도 대남관계를 담당해온 조직과 인맥이 전면에서 철수하거나 사라지는 일들이 발생했다. 대남관계에서 주목할 것은 당 조직 지도부의 원대 복귀다. 북한 노동당 내 대표적 '초당파'(김일성 주석의 가계에만 충성을 바친다는 의미에서 초당파라고 하며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인물인 리제강 제1부부장이 이끄는 당 조직 지도부가 지난해 10월 중순부터 민경련-민화협-통일전선부를 검열한 것은 바로 남한의 새정부 출범에 맞춰 새로운 고위급 라인으로 대남 라인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남쪽의 새정부 팀이 지난 2월 초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방한을 거부해버림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당 조직 지도부가 남북관계에 관여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성과가 없어 손을 떼고 원대 복귀해버린 것이다.
3월 말이 되면서 남북관계는 결정적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바로 3월 19일 김하중 통일부 장관이 "북핵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개성공단 확대는 어렵다"고 한 데 이어, 3월 26일 이명박 대통령이 통일부 업무보고 현장에서 "남북 지도자들이 통일을 늘 부르짖었는데, 그것이 가슴에서 우러난 것인지…… 지도자들의 전략적 의미에서의 구호로 해석해야할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만 언급하고 6·15와 10·4 합의는 건너 뛰어버린 것과 김태영 합참의장 내정자의 선제 타격 발언이 이날 동시에 터져나온 것이다. 사실 북한은 이미 지난 3월 중순께부터 남쪽과의 관계를 사실상 포기하고 내부적으로 유사시 대응 시나리오를 짜놓는 등 서서히 험악한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직접 발언을 들어보고자 했던 것인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못을 박아버린 것이나 진배없었다. 사실 남북 간에 언제 어떤 식이든 사고가 터질 가능성은 이미 이때부터 예고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대남관계에서 대중 및 대미관계로의 전환
남쪽과 기대했던 성과가 일어나지 않자 북한은 다시 중국 및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대중국 관계와 관련해 북한은 지난해 10월 초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성, 중앙검찰소, 중앙재판소 등을 총괄하는 당 행정부를 부활시키면서 자신의 매제이자 친중파인 장성택을 책임자로 임명해 힘을 실어놓은 바 있다. 그리고는 2월 초 남측이 김영남 방문을 거부하면서 관계 개선이 좌절되자, 곧바로 대중국 채널 가동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2월 말에서 3월 초 장성택에게서 낭보가 전해졌다. 바로 중국이 상당한 양의 식량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3월 1일 평양주재 중국대사관을 갑작스럽게 찾았던 것은, 중국의 식량 지원 약속에 대한 답례의 의미뿐 아니라 그동안 남한과의 관계를 통해 경제 재건을 해보고자 했던 노선을 이제 중국과의 협조 노선으로 바꾸겠다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곧바로 대미관계 개선에 착수하게 된다. 원래 북한과 미국은 지난 3월 13일 제네바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시종 냉랭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심지어 당시 김계관 외교부부상이 힐 차관보에게 "라이스가 평양에 오든 안 오든 우리는 상관하지 않겠다. 그대신 테러지원국 해제와 에너지 지원 등 핵 불능화와 신고에 상응해 주기로 한 것들이나 제대로 하라"며 쌀쌀맞게 굴기도 했다. 북한이 라이스의 평양 방문에 대해 이처럼 막 나가는 듯한 발언을 했던 것은 원래 2월 26일 평양에서 있었던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 때 라이스의 참가를 둘러싸고 북미 간에 전개됐던 비공개 회담이 불발로 끝나게 된 것에 대한 분노의 표시였다.
3월 중순까지만 해도 전망이 불투명했던 북미관계가 다시 개선된 배경은 역시 남북관계의 좌절 때문이었다. 이제 남한이 없는 시대를 상정하고 살 수밖에 없게 된 북한으로서는 미국에 대해 언제까지나 뻣뻣하게 굴 수만은 없게 된 터였다. 따라서 대남관계가 경색되면서 북의 대미입장이 다시 완화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4월 8일 싱가포르 회담 성사로 이어지게 된다. 이 싱가포르 회담에서는 북한의 핵신고 문제를 비롯해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 및 북미관계의 굵직굵직한 미래 청사진들이 윤곽을 그리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즉, 남한 정부가 북한과의 관계를 뒤로 미뤄놓고 주변국 관계를 먼저 다지겠다고 나름대로 입장을 세우긴 했지만, 실제로 주변국과 입지를 다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북한이 한 발 빨랐던 것이다. 남한이 4월 이명박 대통령 방미와 방일, 그리고 5월 방중 등의 중요 외교일정을 소화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모두 문제투성이 결과만 양산한 데 비해, 북한은 대미관계와 대중관계에서 거둔 자신감을 발판으로 얼마 전에는 6자 회담까지 성공리에 마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금강산에서 불의의 민간인 피격사건이 벌어졌다. 우리 정부는 북에 대한 국제공조를 통한 압박과 개성관광 중단을 검토하겠다는 등 강수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지난 몇 달, 남과 북이 대화를 끊고 주변국 관계 정비 등 자신의 진지를 쌓아온 성적표를 돌이켜 보면 과연 그것이 북에 대한 압박이 될지 회의스럽다. 북한이 바로 이 시점을 택한 것을 처음부터 주도면밀하게 계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북으로서는 주변관계에 대한 자신감이 어느 정도 형성됐고 상대적으로 남측은 그동안 뭐 하나 되는 일이 없는 최근의 시점이야말로 지난 3월 말에 남한의 대통령과 군 최고지휘관 예정자에게 당했던 수모를 돌려줄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