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제 33,7-9; 로마 13,8-10; 마태 18,15-20
+ 찬미 예수님
주님 은총 안에서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교황님께서 역사상 처음으로 몽골을 방문하시고 무사히 로마로 귀국하셨습니다. 몽골에는 두 명의 몽골인 사제가 있는데요, 그중 한 분인 산자 베드로 신부님이 교황님께 몽골에서의 사목활동 상황을 전해드렸다는 기사를 읽으며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두 신부님 모두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각각 몽골의 김대건과 최양업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는데 정말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였습니다. 신학교와 신학생, 성소를 후원하여 주시는 교우들의 은혜도 되새겼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지난 8월 16일 평일 미사 때 복음 말씀으로 봉독되었는데요,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우선 단둘이 만나 타이르고,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고,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예. 순서를 거꾸로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분이 상하면 제일 먼저 눈길을 외면하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이것저것 다해 보다가 제일 마지막에 둘이 직접 만나 대화합니다. 순서를 잘 지키면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순서를 거꾸로 하면서 커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단둘이 만나 타이르라고 하시는데요, 그래야 하는 이유는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그렇습니다. 우리는 형제이고 가족입니다. 서로 남남인 사람들이었는데 모여서 미사 내내 사제는 “형제 여러분”이라고 하고, 서로 ‘형제님, 자매님’이라 부르고, 함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노래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하느님은 너희 아버지시고 너희는 서로 형제다.”
안타깝게도 형제자매라는 말이 립 서비스 즉 입술 봉사가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의 빚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빚을 내놓으라고, 내가 너를 용서해 준 대가를 갚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내가 너에게 베푼 것을 너도 형제들에게 베풀라’ 하십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지난주 성 샤스탕 신부님에 이어 오늘은 성 앵베르 주교님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1796년 프랑스에서 태어나신 앵베르 성인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싱가포르와 중국에서 사목하시면서 여러 차례 조선 선교를 자원하셨습니다. 1837년 주교품을 받으시고 제2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시어, 그해 12월, 넉 달간의 여정 끝에 조선에 입국하셨습니다. 이 1837년이란 연도가 매우 무겁게 다가오는데요, 왜냐하면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입국하신 지 불과 1년여 만에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배교자의 밀고로 당신의 거처가 알려지자 자수하셨고, 교우들의 피해를 막고자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도 자수를 명하셨습니다. 네 차례에 걸친 심문 동안, 모진 고문에도 교우들을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교우들의 이름을 대지 않으셨고, 1839년 9월 21일, 마흔셋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모방, 샤스탕 신부님과 함께 순교하셨습니다.
순교하시기 6개월 전, 마카오에 있던 르그레즈아 신부에게 보내신 편지를 소개해 드립니다.
“나는 매일 새벽 2시 반에 일어나야 합니다. 3시에 교우들과 함께 아침기도를 바치고, 3시 반에 세례와 견진성사를 집전하고 미사를 봉헌합니다. 성사를 받은 열다섯에서 스무 명가량의 교우들은 날이 새기 전에 집으로 돌아갑니다. 낮에는 또 다른 교우들이 한 분씩 와서 고해를 하고, 이튿날 새벽 미사에 참례한 다음 돌아갑니다. 나는 한 집에 이틀 머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집으로 가서 똑같은 일과를 계속합니다.
배가 고파 많이 힘듭니다. 새벽 2시 반에 일어나서 정오가 되어야 거칠고 영양가 없는 음식으로 약간의 요기를 하는데, 춥고 건조한 날씨 탓에 더욱 쉽지 않습니다. 식사를 하고 잠깐 쉬었다가 두 신학생[성 정하상 바오로와 이재의 토마스]에게 신학 수업을 하고, 밤이 될 때까지 교우들의 고해성사를 더 듣습니다. 밤 9시가 되면 돗자리에 눕습니다. 여기는 침대도 요도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픈 삶!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자신들의 가난을 거룩하게 하면 좋으련만….
너무나 고통스런 삶이기에, 이를 끝나게 해줄 칼날이 우리에게는 별로 두렵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지요…. 새벽에 내가 봉헌하는 미사가 전 세계에서 봉헌되는 첫 번째 미사로서, 연혹 영혼들에게 은총과 휴식의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는 생각에 기쁩니다. ‘해 뜨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깨끗하지 못한 우리 마음이 정화되어 봉헌되는 이 미사에서) 깨끗한 제물이 희생되고 봉헌되리라.(말라 1,11)’
친애하는 신부님과 이 거룩한 미사 안에서 일치하게 되는 것 또한 나에게 큰 기쁨입니다.
사랑을 담아, 신부님의 충실한 종.
조선 대목구장 로랑 조제프 마리 앵베르.”
저는 이 편지를 신학교에서 훈화 시간에 모든 신학생에게 읽어 주며 함께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당신이 그토록 자원했던 조선에서 선교사로서의 삶이 너무 힘들다고 옛 동료에게 솔직히 털어놓으시며, 거칠고 영양가 없는 음식으로 하루에 딱 한 끼의 식사를 하신다는 말씀, 그리고 지금 너무 힘들기에 이 삶을 끝나게 해줄 순교의 칼날이 별로 두렵지 않다는 말씀이 너무나 애절하게 다가옵니다.
그러시면서도 당신이 봉헌하는 미사가 전 세계에서 봉헌되는 첫 번째 미사이기에 기쁘다는 말씀 또한 뭉클합니다. 당시 일본에는 사제가 아무도 없었고, 조선에 세 분만 계셨기에, 앵베르 주교님의 미사는 정말 전 세계에서 봉헌되는 첫 번째 미사였습니다. 미사 때 연옥 영혼들이 은총과 휴식을 얻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것이 기쁘다고 하십니다.
앵베르 주교님과 모방, 샤스탕 신부님의 유해는 함께 모시는 것이 관례인데요, 대전가톨릭대학교에도 세 분의 유해가 대성당 감실 밑에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와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새벽에 성당에 들어가 예수님과 성인들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었습니다.
앵베르 주교님은 고향의 가족들을 떠나 생면부지의 조선 교우들을 당신의 형제로 삼아 끝까지 보호하셨고, 연옥 영혼들이 당신의 형제자매라 여기셨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는 누구이며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요?
* 성 앵베르 주교님의 편지는 불어 원본을 구글 번역기로 영어로 변환한 후, 김유정 신부가 번역한 것입니다.
첫댓글 교중미사에 소개된, 성 앵베르 주교님의 편지에 눈물이 왈칵 했습니다. 옆에 앉은 소피아 언니도 훌쩍.
성 앵베르 주교님의 한글이름 '성 범(세형) 라우렌시오', 이제 성인호칭기도를 할 때면 그 이름에 가슴이 먹먹해질 것 같습니다.
아멘. 맞습니다. 저도 몇 해 전 앵베르 주교님과 샤스탕 신부님 편지 밤에 번역하다가 여러 번 울었네요~ 이 편지를 읽으면 사제로 어떻게 살고 있나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