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이유로 그토록 큰 고난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원인만 생각하고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그 궁극적인 대답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당혹스러운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메시지가 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선(善)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작정
이스라엘의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그(그리스도)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이라고 말했습니다(이사야서 53장 10절). 그런가 하면 기독교의 신약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하나님)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로마서 8장 32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로마서 3장 25절).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발생한 이 사건이 예수를 죽인 사람들의 끔찍한 죄와는 어떻게 연관됩니까?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기도를 통해서 그 대답을 제시합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예루살렘)에 모였나이다”(사도행전 4장 27,28절).
헤아릴 수 없이 깊고도 넓은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우리는 숨이 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주권이 동시에 우리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작정하셨고, 악한 사람들을 쓰셔서 인류 역사에 유일무이한 선(善)이, 세상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토라(모세오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구절을 풀어 설명하자면, 사람들이 예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신 것입니다(창세기 50장 20절).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선을 베풀기로 작정하셨다면, 우리는 인간적인 원인을 찾아 맴돌기를 그치고 하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사건의 핵심은 ‘원인’(cause)이 아닌 ‘목적’(purpose), 곧 ‘의미’에 있습니다.
인간이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에 복을 주실 목적으로 예수의 죽음을 작정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 세상에 이루고자 하신 뜻은 사실상 그 깊이를 재려고 해도 다 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 얄팍한 책에서 그 뜻을 50가지로 제시하는 것도 실은 표면을 조금 긁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의 목표는 성경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 성경입니다. 지금까지 짚어본 몇 가지 점을 토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죽음으로 이루려 하신 큰 뜻을 끊임없이 배우고 깨달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수난’(受難)이라는 말의 의미
‘수난’에 해당하는 영어 ‘passion’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적어도 네 가지를 연상하게 됩니다. 성적(性的)인 욕구, 일에 대한 열정,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오라토리오 「마태수난곡」,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그것입니다. 이 단어는 ‘고통’(suffering)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책에서 사용되는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다른 종류의 욕구와 열정, 고통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을 깊게 만들고, 마음에 선율이 흐르게 하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대의(大義)를 품고 나아가게 합니다.
예수의 수난은 얼마나 독특한 것이었는가?
로마의 권좌를 노린 죄목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의 수난과 죽음이 이후 3세기 동안 로마제국을 바꿔놓았고,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고난을 감내해가며 서로 사랑하게 하여 세계를 형성해나가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첫째로, 예수의 수난이 인류 역사에서 절대적으로 독특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둘째로,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한 사건이 하나님께서 예수의 죽음으로 성취된 바를 옳다 인정하신 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수난이 인류 역사에서 독특한 사건이었던 이유는 그분이 단순한 인간을 넘어서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그랬습니다. 니케아 신조(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교회 회의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 이단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작성한 신조 - 역자 주)의 진술로 알 수 있듯이 그분은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은 그분을 알았던 사람들, 그분에게 배웠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내놓은 증거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부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장 1-3절, 14절).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한 죄뿐 아니라 모든 죄에 대해 무죄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 중 한 사람은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詭詐)도 없으시며”라고 말했습니다(베드로전서 2장 22절).
이렇게 죄 없이 고난을 당하신 사실에 또 한 가지 사실이 더해지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절대 권위를 발휘하여 죽음을 자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남기신 굉음과 같은 진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한복음 10장 17,18절). 과연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하는 논쟁은 이 말씀 앞에서 옆으로 밀려납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 같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의 수난은 부활로써 그 고귀한 뜻이 입증됨
예수의 수난은 인류 역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이 일은 그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발생했습니다. 주일 새벽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습니다(사도행전 1장 3절).
제자들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선뜻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든 쉽게 믿는 미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에서 잔뼈가 굵은 장사꾼들이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자신이 유령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달라 하여 드시기까지 했습니다(누가복음 24장 39-43절). 가사(假死) 상태에서 소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신인(神人, the God-Man)이 영원히 멸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주(主)이심을 깨닫고 믿었습니다. 그분이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믿고 전하게 되었습니다(히브리서 1장 3절).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완수하셨으며,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가 수행한 일에 만족하셨다는 증거였습니다. 이 책은 예수의 수난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성취했는가 하는 점을 상고한 책입니다.
기독교는 반유대주의?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가 유대인들을 겨냥한 반유대주의와 모슬렘들을 겨냥한 십자군 원정에 촉매 역할을 한 것은 가슴 아픈 비극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합당하게 처신하지 못한 많은 조상들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이러한 몹쓸 역병의 잔재가 우리 자신의 영혼에도 어딘가에 분명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 서양 문화와 근본적으로 다르고, 많은 기독교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 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교세를 확장하려는 생각을 아예 마음에 담아두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요한복음 18장 36절).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라’고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라 (자신이) ‘죽으라’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시는지 세상 앞에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는 이 사랑이야말로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모든 민족 앞에 유일한 구원의 길로 천거하게 해줍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 그러나 미리 분명히 밝혀둘 게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거만한 차별이나 학살이나 십자군 원정이나 유대인 강제 수용소 같은 방법으로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모욕하거나 경멸하거나 박해하는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노골적이고도 두려운 불순종입니다. 예수께서는 후대의 많은 추종자들과 다르게 십자가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장 34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21세기 들어 가장 폭발적인 정치적, 개인적 화두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을 부정하는 것은 지난 세기의 유대인 대학살 사건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십자가 사건이 너무나 처참하기 때문에 수긍하지 못합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종교적 동정을 유발하기 위한 치밀한 음모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떠나 역사적 공상의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신 뒤에 죽으셨습니다. 강제 수용소의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아우슈비츠의 비극
갈보리와 유대인 강제 수용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유대 민족의 고통을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이 내가 처음은 아닙니다.
엘리 위젤(Elie Wiesel, 아우슈비츠 학살에서 생존했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유대인 작가, 보스턴 대학교 교수 역임 - 역자 주)은 마음을 쥐어짜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마저 산산이 부숴놓은 채 입도 열지 못하게 만드는 「밤」(Night)이라는 소설에서, 자신이 청소년 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아우슈비츠, 부나, 부켄발트 같은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서 겪은 체험을 이야기합니다(이 소설은 헝가리의 시게트라는 마을에 살던 열여섯 살 소년이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후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 역자 주).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별’의 공포가 유대인들을 짓눌렀습니다.
약한 사람들을 가려내 처형하고 화장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한 시점에서, 위젤은 딱 한 번 갈보리와 수용소를 연관짓습니다. 그는 노인 랍비 아키바 두머에 관해서 말합니다.
아키바 두머가 ‘선별’의 희생자가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랍비는 얼마 전부터 우리들 사이를 하염없이 배회하고 다니면서 눈빛으로 “난 더 버틸 수 없어요 … 이젠 끝입니다”라며 자신의 약함을 모든 이들에게 알렸다. 용기를 북돋워줄 방법이 없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았다. 자신은 이제 끝났고, 더 이상 투쟁을 지속할 수 없으며, 힘도 믿음도 남아 있지 않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말하는 동안 문득문득 넋이 나간 듯 눈의 초점이 흐려졌는데, 두 동공이 마치 벌어진 상처 같았고, 공포의 수렁 같았다.1)
그런 다음 위젤은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발언을 합니다. “가엾은 아키바 두머, 만약 그 분이 하나님을 끝까지 믿을 수 있었다면, 만약 이 갈보리에서 하나님이 계신 증거를 볼 수 있었다면 ‘선별’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2) 나로서는 엘리 위젤의 말을 넘겨 짐작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는지 솔직히 나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갈보리와 강제 수용소가 어떤 점에서 연관이 되는가 하는 의문은 지울 길이 없습니다.
내가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은 원인이나 책임을 따지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의미와 희망에 관해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이 당한 고통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안에서 원인이 아닌 최종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아우슈비츠를 이해하는 데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을 이해하는 데로 이어지는 아우슈비츠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갈보리와 유대인 강제 수용소를 잇는 고리가 깊고 깊은 공감의 고리일까요? 아마 종국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유대 민족이 공포로 가위눌리던 ‘어느 기나긴 밤’3)에 발생했던 일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대(先代)에 미증유의 고초를 당한 유대 민족의 어떤 세대는 갈보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압니다. 유대인 강제 수용소를 세운 가짜 ‘그리스도인들’(나치 독일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갈보리로 향하도록 움직인 사랑을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제3제국(히틀러 치하의 독일)의 아리안족 문화를 살리기 위해 인명을 살상했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수난에 마음이 상하고 겸손해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유대 민족이 당한 고통을 이해하고 적어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반유대주의를 표방하여왔다는 게 얼마나 큰 아이러니입니까!
예수님과 그분의 초기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모든 계층 사람들(유대인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방인들까지)이 예수의 십자가형에 연루되었으며, 모든 계층 사람들(유대인들을 포함하여)이 십자가형에 반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아들의 죽음에 주역을 맡으셨으며, 따라서 주된 질문은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죽였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하는 것이 됩니다. 그 인류에는 유대인들과 이슬람교 신자들, 불교 신자들과 힌두교 신자들, 종교가 없는 현세주의자들이 다 포함됩니다.
이런 점들을 두루 살피고 나면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왜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을까요?
‘원인’을 묻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당한 수난으로 무엇을 성취하셨을까요?
왜 그토록 큰 고통을 견뎌야만 하셨을까요?
세상을 위해 발생한 갈보리 사건이 도대체 얼마나 큰 사건이었을까요?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이 질문들을 다루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 50가지 이유를 신약성경에서 추려보았습니다. 50가지 원인이 아니라 50가지 목적입니다. “어떤 자들이 예수를 죽였는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성취하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멜 깁슨이 제작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그리스도의 수난)’의 국내개봉(4월 2일)에 맞춰 같은 주제를 다룬 미국 목사 존 파이퍼가 지은 ‘더 패션 오브 지저스 크라이스트-예수가 못 박힌 50가지 이유’가 발간된다. 기독교 관련 전문 출판사인 규장은 다음주 초 ‘더 패션 오브…’를 발간한다. 이 책은 미국에서 지난 1월 출간된 후 영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160만부가 판매됐다고 한다.
영화가 예수의 고난에 사실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면 이 책은 예수가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지를 신학적 관점에서 들려준다. 즉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 대신 예수 죽음의 ‘목적’에 초점을 맞춘 것. 책이 소개하는 50가지 ‘목적’은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시기 위해’ ‘순종을 배워 온전케 되시기 위해’ ‘몸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기 위해’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등이다.
(조선일보)
[연합뉴스 서평 - (2004년 3월 22일)]
예수가 못 박힌 50가지 이유>
(서울=연합뉴스) 서한기기자= 예수 그리스도는 무슨 이유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토록 큰 고난을 받았을까.
반유대주의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화제를 뿌리고 있는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의 국내 개봉에 맞춰 같은 이름의 책 「더 패션 오브 지저스 크라이스트」(이길상 옮김)가 출간됐다.
미국 미네아폴리스 베들레헴 교회의 존 파이퍼 목사가 쓴 이 책은 영화가 예수의 고난 자체를 그리고 있는데 반해 예수가 왜 고난과 죽음을 당했는지 그 수난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죽였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가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반유대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가 유대인들을 겨냥한 반유대주의와 모슬렘들을 겨냥한 십자군 원정에 촉매역할을 한 것을 가슴 아픈 비극으로 규정하며, 참된 기독교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교세를 확장하려는 생각을 아예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21세기들어 가장 폭발적인 정치적, 개인적 화두라고 주장하며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가 고통당하고 죽으신 50가지 `목적'을 추려내 싣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시기 위해',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제물이 되시기 위해',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민족간의 적대감을 무너뜨리시기 위해' 등 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규장 刊. 222쪽. 8천원.
존 파이퍼
존 파이퍼(John Piper)는 미국 미네아폴리스의 베들레헴교회의 목사이자 탁월한 영성작가이기도 하다. 자신의 비좁은 경험세계만을 손쉽게 파고들면서 독자들의 마음에 얄팍한 위로를 남발하는 일부 영성작가들과는 궤를 달리하며, 타협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간직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복음에서 떠나기를 호리는 현대 문화의 유혹을 직시하면서 어떻게 하면 현대인들을 하나님의 영광에 무릎 꿇게 하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회심케 할 것인가에 집중하는 말씀사역과 저술사역을 하고 있다.
휘튼 칼리지(Wheaton College)와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를 거쳐 뮤니히 대학(University of Munich)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베델 대학(Bethel College)에서 6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노엘 파이퍼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그는 베스트셀러가 된 여러 저서들을 집필했는데, 대표작으로 고전으로 평가받는 「하나님을 사모함」(Desiring God), ECPA(미국 복음주의출판협의회) 금메달 수상작으로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연구서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God`s Passion for His Glory) 등이 있다.
'기독교 희락주의자'라는 그의 별명답게 「하나님의 기쁨」 (은성), 「여호와를 기뻐하라 」(생명의 말씀사), 「지상에서 가장 큰 기쁨」 (좋은씨앗) 등 기쁨에 관한 탁월한 저서들이 번역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묵상 1, 2, 3, 4 」(좋은씨앗), 「금식기도」 (생명의 말씀사), 「하나님의 방법대로 설교하십니까」(엠마오) 등의 번역서가 있다.
이 외에 잘 알려진 「Let the Nation be Glad(열방이 기뻐하게 하라)」는 선교를 주제로 한 탁월한 책이다. 신학자와 목회자의 경험을 두루 가지고 신앙의 한 부분에 편중되지 않고 여러 부분에 균형되고 깊이 있는 관심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그의 진정한 장처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난
인터넷에서 떠들썩하기전에 벌써 제마음은 이 영화에대한 기다림에 들떠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불법을 행하며 영화를 다운받아서 새벽에 봤겠습니까?
출근의 부담으로 자기전에 다운받아 놓구서는 새벽이른 시간에 일어나 새벽기도는 안가도 영화를 봤습니다.....
2시간정도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몇일동안을 영화의 잔상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피범벅이되신 그분의 모습이 아른거려서 부끄러움과 부담스러움으로 지내게되었습니다..... 십자가에대한 책 여러권이 주지못했던 시각적인 묘사는 참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영향력있는 기독교 사이트와 모임에서는 벌써 영화에 대한 얘기들로 떠들썩하더군요.... 미국에서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유대인이 없지만야 교회출석인구가 워낙 많은 조국사회에서 곧 개봉될 영화는 큰 화두거리가 되리라 봅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이 영화를 통해 십자가를 통한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게 온전히 전해지길 기도합니다.... 식어진 가슴에 불붓고 잃어버린 형제들이 돌아오며 침체된 영적분위기가 소생케되는 일들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이 영화를 통해 살아나는 영혼이 하나만이라도 있다면 그것처럼 기뻐 춤출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요즘 저는 이 영화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 한편이 무겁습니다.....
너무나 리얼한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진정한 고통을 어느 일정 부분만 묘사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생각이 계속적으로 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십자가형을 감당하는 인간적인 고통과 인간의 죄책을 감당하는 신적고통이 함께 아우러져있습니다.
분명 영화는 다른 예수님의 영화에서는 묘사할 수 없었던 예수님의 고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채찍소리가 날 때마다 저절로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그 고통이 크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로 인한 아버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찌끼까지 들이키셨습니다. 태초이전부터 한번도 단절되신적이 없으시던 성부와 성령의 관계가 단정되시는 아픔을 감당하셨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크셨던지 심장이 찢어지셔서 죽으실 정도였다고 로이드 존스 박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염려는 어쩌면 섣부른 예측일 수도 있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몸된 교회를 우리에게 주시기위해 육체적 고통을 압도하는 영적인 두려움과 좌절을 겪으시는, 감히 우리는 상상도할 수 없이 아버지의 사랑에게서 단절되어 영적으로 지옥을 겪으시는 그 고통으로 죽으셨다고 믿습니다. 너무나 리얼함으로 자칫 너무나 부분적일 수 있기에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저는 부산에서 몸된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길 기도하며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손발로 주님을 섬기길 노력하는 직장인입니다..... 영화를 펌하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저의 고민과 염려에 반응해주시길 바랄뿐입니다.....
첫댓글 헉....길다...오빠 보고싶으세요?
한번쯤 보는것도 좋을듯 싶네요.. 그런데 시간이..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