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동성당, 인천수녀원, 홍예문 등 화교벽돌공들 솜씨
인천의 답동성당 등은 인천을 대표하는 근대건축물들이다.
1890년대 후반부터 지어진 이 벽돌 건축물은 조선인, 일본인, 그리고 화교벽돌공들이 참여해 건설했다. 그중 가장 최고의 기술과 경쟁력은 화교벽돌공들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은 근대건축물로 고풍스럽고 멋진 모습에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명소지만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당시 인천에 온 화교벽돌공들의 기술이 녹아 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주로 목재로 집이나 건축물을 지었기에 벽돌시공 기술이 널리 발전하지 못한 이유도 한 몫 했다.
▲답동성당 전경
서울 명동성당, 약현성당, 대구 성모당 등 화교벽돌공들이 공사
인천에서는 답동성당과 지금은 사라진 인천수녀원이 화교들이 참여해 건축한 대표적인 건물로 알려져 있다. 답동성당 이외에도 서울의 명동성당, 약현성당, 대구 성모당 등이 화교벽돌 기술자들이 지은 대표적인 건물이다. 1940년대 이전에 지어진 서울과 대구의 종교건물의 상당수를 화교들이 건축했다.
답동성당은 특히 화교들과의 인연이 깊다. 화교들이 참여해 붉은 벽돌을 정성스레 한 장 한 장씩 쌓아올려 아름다운 성당건축물을 지었고 성당에 남아있는 3개의 종은 개항기 인천에 살았던 중국인 부자 오례당이 기부로 제조됐다. 종에는 오례당과 그의 부인의 이름이 선명이 새겨져 있다.
▲벽돌로 지어진 답동성당
인천최초의 성당인 답동성당은 1897년 프랑스 외방선교회에서 온 마라발(Maraval) 신부의 설계와 주도로 건축됐다. 건물은 벽돌로 지어진 단층건물로서 서울의 약현성당과 흡사한 고딕적 양식이며 규모나 세부적인 면도 비슷하다. 성당은 1937년 증축을 거치면서 건축양식이 혼합된다. 1937년 성당증축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적용됐다. 지사원(池士元, 프랑스명 Chizallet) 신부가 설계하고 화교 벽돌공들이 참여하여 시공했다. 건물의 재료에는 벽돌, 화강석, 철근콘크리트가 들어갔다.
성당시공에 참여한 화교 벽돌직공은 조선에 정주하지 않는 계절노동자였다. 그들은 대체로 11월 말 경 짐을 싸서 중국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이듬해 4월경 봄이 되면 다시 돌아와서 작업을 했다. 즉 4~11월의 약 8개월간 공사를 하고 번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5개월을 고향에서 생활하고 다시 돌아오는 형태였다. 이들의 이러한 현상은 일제강점기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1896년 건축된 인천수녀원은 서구식 벽돌집 구조
인천수녀원도 화교들이 지은 건물로 알려져 있다. 수녀원은 1893년 건축을 시작하여 1896년 7월 3층 벽돌집으로 지었고 20명 정도가 살만한 충분한 건물로 완공하였으나 6.25 전쟁 중 폭격을 맞고 소실됐다.
▲인천수녀원 모습. 이 건물도 화교들이 건축에 참여했다.
인천수녀원은 사라졌으나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이 남아있다. 120여 년 전 수녀원 건물을 배경으로 찍은 수녀들의 단체사진이다. 사진에서 보여지는 수녀원의 건물모습은 서구풍의 벽돌식 건물이다. 이 건물도 화교 벽돌공들이 참여해 시공했다. 화교들이 참여했다는 내용이 1982년에 출판된 ‘답동본당 85년사’ 책자에도 나와 있다.
“1893년 수녀원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년동안 모든 일을 주도했고 일꾼들과 함께 일을 했지만 청·일(淸·日)전쟁이 발발하여 공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공사의 기술진 대부분이 중국인과 일본인들이었는데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인천대 이정희 교수가 발표한 ‘조선화교의 성당건축 시공활동(1880년대~1930년대)’논문에 따르면 국내에서 화교 건축기술회사가 종교 건축을 비롯한 공사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유지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화교 건축회사는 대표와 직원간의 서열이 명확하고 가족적인 경영이 이뤄지고 있고, 둘째 화교 건축업자와 직원의 작업 태도가 매우 성실하고 충실하다는 점 셋째 직원들은 공사 감독자의 지시에 순종하고 공기를 빨리 마무리 한다는 점 넷째 화교 직원들의 임금이 조선인과 일본인에 비해 저렴하여 공사 수주 가격이 싸다는 점을 들었다.
이정희 교수의 논문에 수록된 1930년 조선총독부 ‘조선국세조사보고 결과표’를 보면 서울과 인천 등에 화교 건축업자들이 몰려있었다. 서울 13개, 인천 5개의 건축업주가 있었고 벽돌조적공은 서울 27명, 인천 9명의 기술자가 있었다. 그만큼 서울과 인천에 종교건축 뿐 만 아니라 학교, 병원 등의 건축 수요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화교 토목 건축 종사자는 총 1만1천285명이었다. 조선 전체의 토목건축 종사의 13.2%를 차지했다. 당시 화교 인구는 9만 1천783명으로 조선 전체 인구의 0.4%에 불과한 것을 고려한다면 그들이 얼마나 노동시장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화교 토목건축 노동자 가운데 숙련 기술자라 할 수 있는 목수, 미장이, 벽돌조적 직공은 화교 토목건축 노동자의 약 3할을 차지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벽돌조적공은 화교 119명, 조선인 114명, 일본인 86명으로 화교가 가장 많았다.
▲홍예문
한편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을 지나 인천항과 전동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돌문인 홍예문 건축에도 중국인 벽돌공들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예문은 인천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공병대에 의해 착공되어 1908년 완공되었다. 화강암을 쪼아서 약 10m 높이로 쌓았는데 설계와 감독은 일본인이 맡고 조선인과 중국 노동자들이 공사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천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차이나타운을 형성하고 있는 도시다. 그 만큼 화교들의 역사가 많이 깃든 도시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개항기를 함께 했던 화교들의 이야기와 역사는 인천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답동성당과 인천수녀원도 그 역사의 한 부분이다. 종교적 명소로 인천의 대표적 관광지로 알려진 답동성당. 성당의 웅장한 건물을 쌓아올린 벽돌 한 장 한 장에 화교장인들의 수고와 땀의 결실이다. 벽돌 한 장 한 장에 인천의 역사가 다시금 오롯이 새겨진 듯 보인다.
글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사진 서은미 자유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