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군의 진산(鎭山) 남산(南山) 산행과 청도군(淸道郡) 한시(漢詩)>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경북 청도군 화양읍과 청도읍 경계에 위치한 남산(南山·870m)은 옛날, 성읍국가 이서국(伊西國)의 도읍지였던 청도의 진산(鎭山)이자 주산(主山)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남산계곡과 기암절벽, 낙대폭포가 유명하다. 신둔사(薪芚寺)에서 오르는 최단 코스가 인기 있으며, 정상부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이 뛰어나 등산객과 피서객이 자주 찾는 명소다. 우리 산행팀(6명)은 2026년 3월 15일 일요일 오전 9시에 대구스타디움(월드컵경기장)에 모여 차량 한 대로 함께 이동하여, 청도군 화양읍 낙대폭포 주차장에 9시 40분에 도착한 후, 곧장 여기서 산행을 시작했다.
○ 산행경로 : 주차장-낙대폭포-804봉-봉수대-삼면봉-남산-장군샘-신둔사-은왕봉고개-낙대폭포-주차장(안내도 기준 11.0km)
○ 산행시간 : 6시간 20분 걸림 (09:40~16:00)
○ 식사 : 청도시장 ‘오경 통닭 옹치기’(~17:00), 귀가(집 도착시간) : 오후 5시 35분.
*오늘은 완연한 봄날인지라, 날씨나 기온이 꽤나 적당히 상쾌하였고, 또한 일요일 오전인데도 낙대폭포 쪽에서 등산하는 인원이 전체 약15명 정도뿐이라, 여유롭고 넉넉한 산행을 할 수 있었다. 우리 팀 6명은 산행 도중에 서너번 씩이나 쉬면서, 간식을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며 등산을 이어갔다. 물론 간식 시간이 제법 소요되긴 했다. 오후 1시까지는 그런대로 힘들지 않았으나, 오후 2시 30분 즈음부터 신둔사에서 낙대폭포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고단한 지친 몸과 마음에 더할 수 없는 지난한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결국 우리끼리 다짐한 등산 6시간(한계 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하지만 한번은 오고 싶었던 청도의 남산인지라, 통쾌한 성취감은 맛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남산의 등산로는 자연 그대로의 활엽수 숲과 산새 소리, 그리고 너덜 바위와 졸졸 흐르는 계곡물이 어우러져 마음의 평화가 절로 찾아오게 만들었다.
남산 정상 산줄기에 올라서는 순간부터 탁 트인 시야가 확보되어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남쪽(산줄기 뒤편)은 청도한재 미나리로 유명한 청도읍 상리의 빽빽하게 늘어선 비닐하우스를 볼 수 있었고, 화악산 너머 경남 밀양시 청도면의 윗쪽 지역을 살짝 엿볼 수가 있었다. 산줄기 북쪽 아래(앞쪽)에는 청도군 화양읍과 청도천이 흐르는 각남면과 풍각면이 펼쳐져 있었고 저 너머 팔조령, 남성현과 대구시 가창면과 경산시까지 희미하게 보였다. 이후 돌아오는 길에 이번 청도 남산의 등산을 생각하니, 문득 중국 춘추시대 진립부(陳立夫)라는 95세의 노인이 “신체를 단련하는 것은 <움직임動>에 있고, 마음을 닦는 데는 <고요함靜>에 있다.(養身在動 養心在靜)”는 말이 떠올랐다. 물론 진립부가 자신의 장수(長壽)의 비결이라고 했던 말이다. 나이 들어, 커피 한 통과 간식 몇 조각을 등산 가방에 넣고 여기에 온다면 틀림없이 ‘양신재동 양심재정(養身在動 養心在靜)’하기 그만임을 알 것이다.
○[청도읍성] 청도읍성은 청도군의 중앙부에 있는 화양읍 동상리에 축성된 남고 북저의 석축성이다. 지방에 읍민을 보호할 목적으로 쌓은 성곽으로, 고려 때부터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규모는 둘레가 약 2km, 높이가 1.7m이다. 산성과 평지성과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평산성으로 평면 형태는 네모꼴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해 쌓은 협축벽이다. 임진왜란 때 동, 서, 북문이 소실되고 성벽이 파괴되었다가 1669년경 다시 축조를 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읍성 철거 정책으로 인해 성벽이 다시 헐리고 문루도 제거되었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기저만이 남아 있어 성터 하부의 축조 형태도 알 수 없다.
○[청도군 연혁] 경북 청도군은 신라에 통합되기 이전에는 청도군 일대에 ‘이서국(伊西國)’이라는 정치적 집단이 있었다. 이서국은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소국의 하나였다. 일부 학자들은 삼한시대 부족국가 중의 한 소국이었던 우유국(優由國)이 이서국(伊西國)의 모체였을 것으로 추측했다. 이후 197년경 이서국은 신라에 편입되었고 운문 일대에 화랑들의 수련장을 만들어 삼국통일을 이루는 발판이 되었다.
고려 초기 태조 23년(940년)에 3현(소산현, 형산현, 오악현)을 합하여 처음으로 ‘청도현(淸道縣)’이라 하였다. 성종 2년(983년)에 경주목에 속하였다가 영동도에 속한 청도현이 되었다가 현종 1년(1010년)에 도주(道州)로 주치(州治)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1012년 지방 행정제편의 개정에 따라 경주 도호부속(慶主都護府速) 도주(道州)라 하였다가 1013년에 밀양군속(密陽郡屬) 청도현, 풍각현으로 분리 격하되었다. 1343년에는 다시 청도군이 되었고 1366년에 밀양부 속현이 되었다. 1366년(공민왕 15년)에 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이래로 경상좌도 청도군으로 독립된 행정구역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조선시대 청도군은 1413년 대구도호부, 20년 후에는 다시 밀양도호부로 환원되었다가 1458년에 대구진에 속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번 변경되었다. 1896년 경상북도에 속하였고 1906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대구에 속했던 각북, 풍각, 각초면이 편입되어 17면이 되었다.
1911년 외서면 및 청도면이 밀양군으로 이관되었으며 밀양군이었던 사촌 등이 청도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10개 면이 되었다가 1919년 9개 면이 되었다. 1949년 청도, 1979년에 화양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어 2읍 7개면 212리로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화양읍 동상리 였으나, 1916년 청도읍 고수리로 옮겼다가 1961년에 화양읍 범곡 2리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청도 신둔사(薪芚寺)]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 남산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통일신라 애장왕 때 보조 스님이 최초로 창건하여 봉림사(鳳林寺)라고 불렀다. 이어 1173년(고려 명종 3)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재창건하였다.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하는 바가 없어 절의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1667년(조선 현종 8)에 상견(尙堅)이 중창하였고, 1878년(고종 15)에 중건하면서 절 이름을 지금의 신둔사로 바꾸었다. 옛 문헌에는 신둔사(薪芚寺)와 신둔사(新芚寺)가 함께 나오는데, 지금은 앞의 이름만 사용한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칠성각, 독성전·산령각·요사채 등이 전하고 특별한 문화재는 없다.
● 다음 ‘麻’ 운의 칠언절구 「청도 가는 도중에(淸道途中)」는 조선초기 관각문학을 계승한 시인이자, 1493년 경상도관찰사, 대제학을 엮임한 문신이었던 용재(慵齋) 성현(成俔 1439~1504)의 작품이다. 경상도 관찰사 시절, 벼를 수확하고 백일홍과 목화솜이 예쁘게 피어있는 완연한 가을철에 경상도 內 순력 차 길을 나섰다. 경북 선산에서 대구, 청도, 밀양을 거쳐 동래로 향하던 중에 마침 비가 쏟아지는 청도를 지나가면서 지은 평기식 한시로, 한가한 가을철 청도의 전원 풍경을 읊었다. 그의 문집 허백당집(虛白堂集) 권6(卷六)에 수록되어 있다.
1) 「청도 가는 도중에(淸道途中)」 성현(成俔 1439∼1504)
午鷄聲裏雨聲多 낮닭이 우는 가운데 빗소리도 요란한데
穫稻原頭笑語譁 벼 수확하는 들판엔 담소 소리 들리네
滿谷人家依綠竹 골짝 가득 인가들은 대숲에 의지하고
紫薇花映木綿花 백일홍이랑 목면화가 서로를 비추고나.
● 다음 ‘先’ 운의 칠언율시 「서투른 솜씨를 무릅쓰고 '천연정(天然亭)' 세 글자를 쓰다(强拙寫天然亭三字)」는 조선후기 홍주목사, 경상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목곡(牧谷) 이기진(李箕鎭 1787~1755)의 작품이다. 저자 이기진(李箕鎭)이 당숙(宗叔)인 청도 군수(淸道守) 이대방(大防)이 새로 지은 연정(蓮亭)에 ‘천연정(天然亭)’이라는 편액을 써주고, 그 기쁨을 기념하며 지은 평기식 한시다. 이기진은 당숙의 요청으로 정자의 이름을 ‘천연정’이라 짓고 글씨를 썼으며, 시를 통해 그 정자가 단순한 휴식처를 넘어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군자의 마음을 상징하는 공간임을 찬양하였다.
내용인즉 청도 지역의 아름다운 연꽃 풍경과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당숙을 신선에 비유하며 축하하였고, 또 정자의 위치와 주변에 가득한 연꽃의 모습을 묘사했다. 이어 달밤의 향기 후각과 아침 햇살 머금은 꽃 빛깔의 시각을 통해 연꽃의 고결함과 아름다움을 극찬하였다. 정자의 이름인 ‘천연(天然)’의 의미를 되새기며, 연꽃의 정결함을 통해 수령으로서 지녀야 할 맑고 깨끗한 마음가짐을 강조하며 마무리했다.
2) 「청도 군수(淸道守)이신 당숙(大防)께서 연꽃 정자(蓮亭)를 새로 지으시고 편액(현판)을 써달라 청하였다. 서투른 솜씨를 무릅쓰고 '천연정(天然亭)' 세 글자를 쓰고, 이어 시 한 수를 지어 그 뜻을 더한다.(淸道守大防宗叔 新構蓮亭 求扁額 强拙寫天然亭三字 旣又拈一律以副之)」 / 이기진(李箕鎭 1787~1755)
鰲山聞有萬枝蓮 오산(鰲山)에 만 가지 연꽃 피었다 소문 듣고
太乙眞遊屬吏仙 태을신(太乙眞)이 노니는 듯한 즐거움, 신선 같은 관리(당숙)라네.
新起亭臺臨沼上 연못 위에는 정자가 새로이 우뚝 솟고
故敎菡萏繞欄邊 난간 주변엔 연꽃들이 둘러싸였어라.
香凝夜月隨風遠 달밤의 향기는 바람 타고 멀리까지 번져가고
色媚朝暉浥露鮮 아침 햇살 머금은 꽃 빛깔은 이슬 젖어 선명하네.
塵穢此時無一點 세상의 먼지 한 점 이 순간엔 보이지 않으니
定知心賞在天然 마음으로 즐기는 참뜻은 '자연 그대로(天然)'에 있음을 알겠네.
[주1] 오산(鰲山) : 경상북도 청도(淸道)의 옛 이름.
[주2] 태을신(太乙眞) : 천신 가운데 가장 높으신 북극 신(신선)
● 다음 ‘刪’ 운의 칠언율시 「창산(昌山, 창녕) 수령 신명인(申明寅)과 함께 새벽에 청도 오산(鰲山)으로 향하며(同昌山倅申明寅 曙 向鰲山 淸道)」는 조선후기 동지의금부사, 대사헌,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석문(石門) 윤봉오(尹鳳五 1688~1769)의 작품이다.
이 시는 조선 후기의 문신 윤봉오(尹鳳五)가 친구인 창녕 원님 신명인(申明寅)과 함께 청도(淸道)의 오산(鰲山)으로 향하며 육유(방옹, 陸游)의 시운을 빌려 지은 평기식 한시다. 관직이나 세상사에서 벗어나 친구와 함께 산속 고개를 넘어 걸어가는 홀가분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몸을 술에 맡기고(付之酒), 세상일을 던져버린(謝事) 호방한 두 사람의 모습에서 노년의 여유와 풍류가 느껴진다. 또한 가마를 마다하고 직접 말을 타보며 "아직 다리 힘이 살아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마지막 구절은 시인의 활기찬 면모가 보인다.
3) 「창산(昌山, 창녕) 수령 신명인(申明寅)과 함께 새벽에 청도(鰲山)로 향하며, 방옹(육유)의 운을 빌려 함께 짓다.(同昌山倅申明寅 曙 向鰲山 淸道 拈放翁韻 共賦)」 / 윤봉오(尹鳳五 1688~1769)
飄然携得好朋還 표연(飄然)히 좋은 벗 이끌고 돌아와
東入淸泉白石間 동쪽으로 맑은 샘과 흰 돌 사이로 들어가네.
我已將身付之酒 나는 이미 이 몸을 술에 맡겼는데
君能謝事大於山 그대는 세상일 사양함이 산보다도 크구려.
欲從雲嶺雙眸騁 구름 낀 고개 따라 두 눈 시원하게 달리고 싶으니
定不天公一霽慳 하늘님(天公)도 날 개는 데 인색하지 않으리라.
卸却肩輿聊試馬 가마에서 내려 애오라지 말에 올라 보니
脚腰雖老未全頑 다리와 허리 비록 늙었어도 아주 무뎌지진 않았네.
[주1] 방옹(放翁) : 육유(陸游 1125~1210)의 호(號). 중국 남송의 시인이자 우국시인(憂國詩人)
[주2] 표연(飄然) : 바람에 가볍게 팔랑 나부끼거나, 훌쩍 나타나거나 떠나가는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