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
오도송(悟道頌)
若人靜坐一須臾 약인정좌일수유 仄平仄仄仄平平
勝造恒沙七寶塔 승조항사칠보탑 仄仄平平仄仄仄
寶塔畢竟碎微塵 보탑필경쇄미진 仄仄仄仄仄平平
一念淨心成正覺 일념정심성정각 仄仄仄平平平仄
문희선사<文喜禪師>
누구나 잠깐 동안 고요히 앉으면
모래알 같이 많은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수승하다.
보탑은 결국 무너져 티끌이 되거니와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부처를 이루도다.
이 게송(偈頌)은 문희선사(文喜禪師의 칠언절구(七言絶句) 평기식(平起式) 오도송(悟道頌)이다. 압운자(押韻字)는 유(臾)는 상성(上聲) 우통(虞統) 운족(韻族)이고, 탑(塔)은 입성(入聲) 합통(合統), 운족(韻族)이고, 각(覺)은 거성(去聲) 효통(效統) 운족(韻族)이다. 기승전결(起承轉結) 평측(平仄)을 맞추어 보니, 근체시(近體詩) 작법(作法)에는 맞지않다. 당승(唐僧)이라 근체시(近體詩) 게송(偈頌)을 작법(作法)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아니다. 문희선사(文喜禪師는 법호(法號) 무착(無着)이다. 7세에 출가(出家)했다. 교학(敎學)과 계율(戒律)을 공부하고 오대산(五臺山)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親見)하려고 가다가 소를 끌고 가는 어떤 노인을 만났다. 노인이 문희 선사를 절로 안내하고 절 안으로 들어간 노인이 균제(均提)! 하고 부르자 동자가 나와 노인 소를 받아 갔다. 노인은 문희선사를 법당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선상(禪床)에 앉은 노인이 무희(無喜)에게 묻는다. 요즘 어디에 있다 오셨소? 남방에서 왔습니다. 남방에는 불법을 어떻게 수행하느냐? 말법시대(末法時代)는 비구(比丘)들이 겨우 계율(戒律)이나 지키고 지냅니다. 대중이 얼마나 되는가? 삼백명도 되기도 하고 또는 오백명도 되었다 합니다. 이번에는 무착이 노인에게 물었다. 여기서는 어떻게 수행을 합니까? 범부(凡夫)와 성인(聖人)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네. 대중이 얼마나 됩니까? 앞도 삼삼(三三)이고 뒤도 삼삼(三三) 이지. 말을 마친 노인이 동자에게 차(茶)와 를 가져오게 하였는데 수락(酥酪)으로 만든 먹을 것을 가져오게 했는데, 문희선사가 맛을 보니, 가슴속이 뻥 뚫리고 마음이 맑아졌다. 노인이 유리잔을 들고 물었다. 남쪽에도 이런 것이 있소? 없습니다. 노인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엇으로 차를 마시는가?
문희선사가 대답을 못했다. 해가 저물자 문희선사가 하룻밤 묵을 수 있습니까? 그대가 집착(執着)하는 마음이 남아 있으면 묵을 수가 없소. 제게는 집착(執著)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대는 이전에 계(戒)를 받지 않았소? 계(戒)를 받는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대가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하여 계(戒)를 받았소? 문희선사는 그 말을 듣고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노인이 동자를 문희선사를 불러 배웅하게 했다. 절문 밖에 나서면서 문희선사가 동자에게 물었다.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란 숫자가 얼마를 말하는가? 동자가 갑자기 소리를 쳤다. 대덕(大德)! 문희선사가 엉겁결에 대답을 하면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얼나나 됩니까? 애석하게도 문희선사는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또 물었다. 이곳이 어디오? 이곳은 금강굴(金剛窟) 반야사(般若寺)입니다. 그 말을 듣고 문희선사는 깨닫는 것이 있었다. 아까 그노인(老人)이 바로 문수보살(文殊菩薩)이었다. 고개를 돌려 나온 곳을 보니 노인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문희선사가 동자 앞에 무릎을 끓고 엎드려 말했다. 한 마디 가르침을 부탁 합니다. 동자가 게송을 읊었다. 얼굴에 성냄이 없으니 그것이 공양구요, 입안에 화가 없으니 미묘한 향기로다. 마음속에 성냄이 없으니 바로 이것이 귀한 보배요, 때도 타지 않고 물들지 않으니 참된 도로다.<面上無嗔供養具 口裏無嗔吐妙香 心裏無嗔是珍寶 無垢無染是眞常> 게송을 읊고 동자는 홀연이 사라졌다. 그 뒤로 문희선사가 동짓날 공양간에서 팥죽을 끓이고 있는데 팥죽속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솟아 올라왔다. 그렇게 애타게 찾았던 문수보살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문희 선사는 주걱을 들어서 문수보살을 뺨을 내리치면서 말했다. 문수는 문수이고<文殊自文殊> 무착은 무착이다. <無著自無著> 단호하게 말했다. 위의 게송은 노인(文殊菩薩)에게서 들은 게송(偈頌)이 오도송(悟道頌)이다. 임제삼구(臨濟三句)에 보면 묘희(妙喜)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어찌 무착의 질문을 용납하겠으며, 방편(漚和)이 어찌 번뇌를 끊(截流)은 근기(機)를 저버리겠는가? <妙喜豈容無著問 漚和爭截流機>라 했다. 오늘은 문희선사(文喜禪師) 오도송을 반추 해보았다. 여여법당 화옹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