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1] 윤준식(尹俊植) - 만세 반석 열린 곳에 4. 72가정 축복을 받고
1 그런데 어느 날 협회에서 특별수련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나이도 어리지만 도저히 하늘의 축복을 받기에 송구스러운 입장이어서 연락을 받고도 상경하지 않았다.
2 그러나 유효원 협회장님으로부터 수차의 전보 연락이 왔기 때문에 선생님께 인사만이라도 드리고 내려오는 것이 제자 된 도리가 아니겠느냐 생각하고 협회 본부에 올라가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수련생 속에 앉았다.
3 앉자마자 ‘윤준식’ 하고 선생님께서 부르셨다. 순간 긴장해졌다. 사도 바울 선생의 말씀처럼 몸 밖에 있는지 안에 있는지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께서 부르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4 “이 여자 어때? 성화 학생 출신인데 나오거든 잘 봐둬!” 선생님께서는 앨범 속에 있는 생면부지의 여자를 가리키며 내 의사를 물으셨다. 올라갈 때부터 ‘축복받으라 하시면 못한다고 해야지’ 몇 번이고 마음을 먹었던 것인데 이 말은 간 곳 없고 “선생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말이 나오고 만 것이다.
5 사실 축복을 받는다면 선생님 뜻대로 대상을 택하고 싶었다. 선생님이 정해 주신 분이라면 내가 이상하는 여자일 것이 틀림없으리라 생각했다. 대상은 이인자 씨로서 서울 태생이며 공적 활동을 통해 잘 알려진 분이었으나 내겐 생소한 분이었다.
6 우리는 약혼식 축도가 끝난 뒤 효창공원으로 나갔다. 그러나 대상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색하여 그냥 각자의 집으로 헤어져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집에 돌아왔으나 약혼했다는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7 왜냐하면 바로 위 형님이 미혼이었기 때문이다. 궁리 끝에 나는 형을 붙들고 약혼하고 내려온 경위와 사정을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했다. 형은 어색한 표정을 하였으나 내 마음을 알고 이해해 주었으며 내 결혼을 한동안 비밀에 부치기로 약속하였다.
8 부대에 돌아왔는데 3일도 되지 않아 각 교회에서 수십 통의 약혼 축하 편지가 날아왔으므로 부대에서는 약혼한 줄 알고 한턱내라고 야단이 벌어졌다. 6월 4일 드디어 72쌍의 합동결혼식이 거행되었다.
9 나는 누님 한분 만을 모시고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선생님 양위분의 축도를 받으며 하얗게 단장한 백포 위를 걸었다. 천군천사들이 화답하는 양 성스러운 합창이 울려 퍼지고, 전도를 빌어 주는 식구들의 뜨거운 박수소리가 만장을 울려주는 가운데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 것이다.
10 기쁘다기보다는 황공하고 두려운 길을 무거운 사명감을 짊어지고 출발한 것이다. “평화와 행복이 있다면 아버님 당신을 위해 드리겠사오니 저희로 하여금 승리자의 영광을 갖추게 하여 주옵소서!” 식이 끝나고 양가의 친척끼리 모여 피로연이 열렸다.
11 신부 편에서는 많은 친척들이 왔지만 내 편에서는 누님 한 분만이 참석했다. 그래서 그런지 처가에 들렸더니 쑥덕 쑥덕 하는 눈치가 보였다. “인자는 부모형제가 없는 가정으로 시집갔네” 장모님은 사위가 큰절을 하여도 받지 않고 돌아앉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장가들면 장모가 좋다는데 내 경우는 정반대의 입장이 되고 말았다.
12 그러자 아내는 부모님을 설득시키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하는 것이다. 내게 정말 부모나 형제가 없어 그런 수모를 당한다면 참기 어렵지 않겠지만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참고 견디면서 내 가정 사정을 설명해 드렸다. 그 결과 아침에는 태도가 일변하여 따뜻이 대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집에 가서 어떻게 부모님을 설득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다.
13 우리는 마을에서 약 1km쯤 떨어진 곳에 짐을 내려놓고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만일 집에서 소동이 벌어지더라도 밤에 치르자는 결심이었다. 막내아들의 결혼은 꼭 보고 눈을 감아야겠다고 하시던 양친의 꿈을 깨고 몰래 결혼을 하고 내려왔으니 얼마나 노여워하실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14 그러나 뜻밖에도 집에 들어서니 가족은 물론 친척들까지 반겨주는 것이었다. 3일 전부터 모여 성혼을 축복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 눈물은 앞을 가렸다. 너무도 감사해서 방으로 뛰어 들어가 울어버리고 말았다.
15 하늘은 우리 가정을 뜻 앞에 세우고 일을 맡기시기 위해 한량없는 은사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3일 후 우리는 신혼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여행 목적지는 관광지가 아니라 전도 임지인 경남 남해군이었다.
16 가방 두 개에 이불 보따리 하나를 들고 남해에 도착, 방 하나를 얻고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두 사람은 일심동체가 되어 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63년 12월 1일에는 하동 지역장으로 발령을 받고 임지를 옮겼으며, 1966년 3월 1일 다시 울산 지역으로 발령을 받고 도착했으나 막상 단칸방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