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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신년주일 예배설교.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 (요한복음 4장 23-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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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대림절 마지막 주일설교 말씀 중에, 마태복음 2장 2절에서 동방 박사들이 헤롯을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라고 말한 장면에서, ‘경배’(헬, 프로스퀴네사이)라는 단어를 설명 드린 적이 있습니다. 개가 주인을 보고 기뻐서 꼬리치며 손등을 혓바닥으로 마구 핥는 것에서 유래 된 단어로, 페르시아에서는 어떤 신적 존재 앞에서 최대한의 존경과 예의를 갖추어 땅에 이마를 대고 예배하는 자세를 일컫는 단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기억나시죠?
오늘 말씀 드리려는 핵심 단어인 ‘예배’(헬, 프로스퀴네오)라는 단어가 바로, 동방 박사들이 ‘경배’라고 표현한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기피하던 지역인 사마리아에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물을 깃는 여인을 만나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눕니다. 22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예배드리던 사람들의 모습을 크게 두 부류(집단)로 나누어서 말씀 하십니다.
하나의 부류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들”인데, 이 것은 사마리아인들이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알지 못한다는 뜻은, “보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한다, 인지하지 못한다, 확신하지 못한다, 주목하여 집중하지 못한다”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 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인들은 예배라는 형태를 취하기는 했어도, 예배의 대상에 대해서는 확실성이 결여 되어 있었습니다. 일찍이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벧엘’과 ‘단’에 송아지 모양의 우상을 세우고, 아무렇지도 않게 우상에게 절했습니다. 그러한 나쁜 전통이 사마라아인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적으로는 다른 이방신들과 상당히 혼합적인 형태의 다신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여럿 잡신들 중의 하나로 취급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우상숭배입니다. 사마라이인들은 이러한 예배를 너무나도 보편적이고, 일상처럼 드렸습니다. 그리고 사마라인들은 모세 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했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내 미래를 준비케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 차단했습니다. 그러니, 현재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경우를 오늘날 예배의 모습에서 찾아보면, 예배 시간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럿 우상 신들에게 절하는 사마리아인들처럼, 이 생각, 저 생각에 사로잡혀 예배하는 내내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합니다. 집중하지 못해 예배 시간만 되면 졸기도 많이 합니다. 정서적으로 불안해져서 자꾸 다른 물건을 만지작거립니다. 초조해서 시계를 자주 들여다봅니다. 경직되어서 얼굴은 들고 눈은 뜨고 있지만, 머릿속은 온통 딴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예배의 시간이 엄청난 영적 전쟁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성령님께 의지하여, 예배를 방해하는 생각을 물리치고, 또 물리쳐야 집중하며 예배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부류는, “아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들” 인데, 이것은 유대인들이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예배의 대상이 명확하고 불변합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에게만 예배를 드립니다. 대상만 명확하다면 다 성공한 예배가 되느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배의 대상에 대한 초점은 바꾸지 않고 잘 지켜 왔지만, 예배의 본질, 즉, 죄와 구원에 대한 해답, 그리고 천국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시간과 장소를 지켜가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진정한 예배에는 실패 했습니다. 예배를 드렸다는 자기만족과 율법 준수의 만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예배는 완벽하고, 흠이 없고, 바꿀 필요가 전혀 없는 예배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찾아가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는 분을 만나, 그 물을 마시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 참 된 예배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예배는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아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경우를 오늘날 예배의 모습에서 찾아보면, 하나님이 계신 보좌 앞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예배당 뜰만 배회하다 돌아오는 사람들입니다. 예배의 주 목적은, 우리의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반복되는 예배형식에 너무나도 무감각해져 버렸습니다. 내가 예배를 드리는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참여자, 혹은 관람자의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왔으면서도, 한 주간 범사에 형통하게 하신 것에 대해 감사가 없습니다. 십자가 피 흘리심의 구원의 감격이 없습니다. 더러운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없습니다. 믿고 구하는 담대한 기도의 아룀이 없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도, 뒤돌아서면 본문 말씀과 설교제목이 자동 지우개처럼 다 지워져버립니다. 예배로부터 한 주간 살아가는 동력을 얻기는커녕, 피곤이 더 쌓이기만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배 잘 드렸다”라는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이 시대의 또 다른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들”, “아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들”,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측면에서 예배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날에도, 이 두 가지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스스로가 거짓 예배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모범적인 예배를 드렸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 내가 단지 예배의 자리에 참석했다는 것만으로 예배에 성공했다고 자만감에 빠지게 만드는 것, 나아가서 내가 예배에 성공했는지, 실패 했는지 조차 판단하는 것을 귀찮게 만드는 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사탄의 전술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거짓에 결코 속아서도 안 됩니다. 예배에 대한 냉정한 자기 점검이 필요합니다.
2019년 신년 예배의 주제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입니다. 예배에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의 인생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단언적으로, 예배의 성공은 인생의 성공이요, 예배의 실패는 인생의 실패입니다. 예배가 모든 시간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소망하며 송구영신 예배들 드렸습니다. 새해에는 모든 00교회의 성도들이 무엇보다도 예배의 성공자가 되기를 꿈꾸며, 최선을 다하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왜 드리십니까? 예배를 드리는 목표 의식이 뚜렷해야 합니다. 예배에 나왔으면, 예배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들을 때 긴장감을 가지고 집중하다보면 마음에 감동과 깨달음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순간들이 하나님이 우리와 접촉하시고, 만나주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만남의 감동이 있는 예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집으로, 그리고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예배가 진정으로 성공한 예배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예배의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하나, 단 하나만 준비되면 됩니다. 그 단 하나의 조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예배의 성공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의 매개체로 이용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배자의 머리, 마음, 입술에 예수님이 가득 차 있으면 예배에 성공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지하여, 감사하고, 감동 받고, 회개하고,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단단히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다 예배의 자리에서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다 예배의 성공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단, 한사람도 그냥 왔다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3절에서 예배를 잘 준비하라는 두 단어를 주셨는데, “영(신령)과 진리(진정)”(가로는 개역한글)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유대인들은 예배를 “영”으로 드리지 않고, 몸과 머리와, 형식과 절차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반면에 사마라인들은 예배를 “진리”로 드리지 않고, 절차와 법도를 무시하고, 예의와 공경의 마음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면서, “영과 진리”, 이 두 단어를 항상 상기해야 합니다.
먼저, ‘영’이라는 단어를 자세히 알아봅니다. ‘영’은 곧 성령을 말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말이 처음 나온 것은, 마태복음 1장 18절에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 되셨다”라고 했을 때 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예배 하여아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24절) 영적인 존재와 만나려면, 영으로 다가설 때에만 소통이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배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과 소통 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상담하고 나의 문제와 소원들을 아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도움을 바라고 의지하며, 성령이 나의 영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게 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예배드리기 위해서, 예배 전이나 예배 중간 중간에, 마음속으로 이렇게 반복적인 기도를 하십시오. “성령 하나님!, 제가 예배드릴 때, 성령으로 찬양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배를 방해하는 악한 영을 물리칠 수 있게 하시고, 성령으로 하나님과 교통, 교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연약한 저의 영혼을 붙들어 주옵소서.” 아멘. 성령을 찾고, 구하면, 우리의 예배는 이미 성공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 다음은 진리로 예배한 다는 것인데, 성령 하나님을 ‘진리의 성령’이라고 호칭 하는 것에서 보는 것 같이, 진리 안에서 예배 하는 것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 ‘진리’는 사마리아인들 부족했던 부분, 즉 예배의 태도와 자세를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나는 52주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예배 참석 했어!” 라고 말하는 사람과, “나 이번 주에는 진짜로 예배 드렸어!”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 누가 예배에 성공한 사람입니까?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과 말씀을 듣고 무장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엄청난 영적 전쟁으로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리가 ‘진리’로 예배드리지 못하도록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삶의 능력이 되는 말씀을 받지 못하도록 딴 생각을 집어넣어 예배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단단히 준비하고, 방어하지 못하면, 사탄의 전술, 전략에 빠져 예배에 실패하게 됩니다.
진리로 예배드리기 위해서, 예배 전이나 예배 중간 중간에, 마음속으로 이렇게 반복적인 기도를 하십시오. “성령 하나님! 제가 예배드릴 때, 세상의 근심, 염려를 내려놓을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기대하고, 말씀을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더럽고 추한 일들이 있었다면 진실로 회개하도록 입을 열어 주옵소서. 예배의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요소들을 분리시켜 주옵소서.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도록, 딴 생각을 집어넣는 사탄의 무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쳐 주옵소서. 말씀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마음 밭을 만들어 주옵소서. 진리의 영이 나의 예배를 온전히 보호하여 주옵소서” 아멘. 몸과 마음이 흔들릴 때 마다, 그 때 그 때 계속 기도하셔야 성공한 예배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영과 진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참 된 예배자”라고 하셨고, 하나님은, 이러한 “참 된 예배자”를 찾으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참(헬, 알레데이아)’이라는 말은 진리라는 말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진정으로, 진실로, 참으로)로 예배하는, 진리(진정한, 진실한, 참 된)의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진리를 중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헬라어(원어)로 직역해 보면,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은 아버지께 영으로(안에서) 그리고 진리로(안에서)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기를 이렇게(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영과 진리로 예배하게 될 것이다”라는 앞의 문장은 미래 시제로, 아직 그러한 예배의 때는 아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여야 그 시대가 오게 될 것임을 예언 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참 된 예배자를 찾고 계시는 상황은 현재시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 드려지는 모든 예배를 살펴보시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다 아신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만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찾으 신다”는 말씀은 ’요구한다‘라는 말도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우리가 드리는 신년예배를 바라보시고,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을 감찰하셔서, 누가 참된 예배 자인가, 누가 거짓 예배자인가 마음 중심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보고 계시고, 찾고 계시고, 요구 하신다는 말씀을 거룩한 부담감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52주간 주일예배, 기타 모든 공적인 예배를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말씀을 매우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52주 동안 예배의 자리에 나왔는데도, 어떠한 감동도, 깨달음도, 변화도 이루어 가지 못한다면, 열심에 비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왕에 예배의 시간을 투자하신다면, 무언가 얻어가고, 채워가려는 의욕이 있어야 합니다.
2019년은 ‘예배’를 화두로 새해 첫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의 성공자가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내가 예배의 주인공이요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내 자신이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 영혼도 맑아지고, 내 가정도 화목함을 누리고, 내 일터에서도 기쁨 속에 맡겨진 노동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예배의 시간에 참된 예배자를 주목하여 보신다는 것도 잘 알았습니다.
2019년 한 해, 00교회 모든 성도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데 온 힘을 다하여서, 모든 예배에 성공하시는 기쁨을 누리시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로 당당하게 이름이 불려 질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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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이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있도록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 주옵소서. 2019년 한 해 동안,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데 최선을 다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 된 예배자”로서, 예배의 성공자, 인생의 성공자의 길을 걸어가도록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수가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