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약 4:1~10
제목: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 기독교는 믿음으로 칭의를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약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
성경에는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것∙두 마음을 품는 것을 비난하고, 한 입으로 하나의 말을 정직하게 하고 두 마음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기를 권면하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신앙을 숫자로 보면 둘이 아닌 하나를 강조하고, 신앙의 태도나 정도로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계3: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
태도나 정도로 볼 때 ‘미지근한’ 것은 숫자로 보면 ‘두 마음’입니다. ‘찬 것’ 하나에 ‘뜨거운 것’ 하나를 합치니 두 개의 속성이 혼합되어 ‘미지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가까이 하시지 않고 미지근한 것을 토해내 버리십니다.
● 성숙한 기독교는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약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
모든 기독교 신자는 믿습니다. 어느 정도는 믿으니까 신자로 행세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은 목사, 장로, 집사라고 해서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만들어 주십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며 교리를 많이 아는 것은 신앙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하고 더 좋은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지혜입니다. 옛날 드라마 ‘파랑새는 있다’를 보면 참으로 웃기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무술을 오래 연마하고 차력도 휘두르는 고수들이 실제 싸움에서는 배운 무술동작을 하나도 활용하지 못하고 멱살잡이를 하고 개처럼 물어뜯으며 아웅다웅 어설픈 싸움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체육관이나 관중들 앞에서 멋있고 현란하게 시범은 보이지만 실전에서는 무용지물인 그런 무술처럼, 우리의 신앙이 안 믿는 자 못지않게 의심하며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칭의를 받았다면 그 결과로 성화가 일어나는데, 성화는 믿음으로 죄악과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 영적이고 거룩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두 마음을 품지 말고 회개하며 마음을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이 싸움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고 지속되기 때문에, 칭의는 순간적 변화이지만 성화는 점진적 과정이라고 합니다.
● 두 마음을 품은 것을 현대인의 성경은 이중인격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중인격에는 두 마음을 품고 잔머리를 굴리는 교활한 측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나약함도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약1:8 그는 이중인격자이며 언제나 자기가 하는 일에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사람입니다. |
이중인격은 유식한 말로하면, 해리성 정체성 장애(解離性正體性障碍)인데요. 정체성 결여 문제로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하고 때로는 자신이 복수의 인격으로 행동하는 장애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자로서의 정체성이 결여되어 자신이 신자인지 혼란스러워하고 때로는 아예 불신자와 같은 마음으로 행동하는 교인들이 꽤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 정체성의 장애는 신앙의 시작점에 진정하고 깊은 회심(回心)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믿으려면 제대로 믿고 아니면 안 믿는 정체성이 명확해야 합니다. 안 믿어지는데 괜히 믿는 척 어거지를 쓰며 위선을 할 필요는 없는데요. 묵상자는 그런 위선을 안 한 정직한 분이 성경에서 떠오릅니다. 베드로입니다.
눅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
현대의 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에 대해 체면과 위선이 많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솔직하고 정확했습니다(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솔직함과 정확함을 겸비한 것이 정직함이라고 묵상자는 생각합니다. 정직하면 정확하고 거짓말을 하면 정확하지 못하고 왜곡을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정직하게 불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종교적인 위선으로 뱀처럼 두 갈래 혀로 신앙고백을 낼름거리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합니다. 이렇게 정직한 불신앙을 고백을 하면 오히려 주님이 받아주시고 키워주시며 성장시키십니다.
눅5:10.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
믿지 아니할 때 정직하게 불신앙 고백을 했던 베드로는 훗날 유명한 참 신앙고백을 합니다(마16:16).
마16:15.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
맨 위로부터 두 번째 문단에서 야고보서는
약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
고 말씀했습니다. 약1:5의 참 지혜는 마16:17이 말씀하는 지혜입니다.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
베드로가 복을 받았기 때문에 안 지혜는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참 지혜가 알게 하시는 내용은
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되, 참되고 성숙한 믿음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인 자들이 손을 깨끗이 하고 두 마음을 품지 않으며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이, 거듭나고 회심한 자들이, 그 믿음의 결과로서 열매로서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마음을 성결하게 하고 성화의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의 본문인 약4:1∼10 중 4:1∼4는 세상의 불신자가 아닌 신자들에게 신자답게 살기를 권면하는 것인데요. 신자답게 사는 성화가 가능한 것은 참 신자의 속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을 성령이 시기하실 만큼 사랑하십니다.
약4: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의 내주와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화하는데요. 칭의의 결과로 성화하는 자들은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를 공급받습니다. 교만한 자들은 받지 못하는 은혜입니다.
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
이 은혜는 어찌나 강한지 마귀를 대적하고 마귀는 그 은혜 받은 성도를 피해야 할 정도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약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
신자에게 죄악이 불신자 때처럼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하나님께 복종하면 마귀의 지배와 영향력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확실히 복종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최고의 중심에 모시고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약4:8.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는 회개합니다(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그 회개를 하는 이유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의 태도로 본다면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시고 나는 그 하나님 밑에 낮아지는 위치 설정을 정확히 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약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
입에 발린 종교적 멘트가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면 주님은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 손을 깨끗이 하고 두 마음을 품지 않으며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축복이 이 묵상을 읽은 모든 분들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톰슨3 성경주석>, 야고보서 4장
4:4 간음한 여인들아) 이 말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도 가능하나 여기서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영적 불충실성과 배교에 대한 상징적인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렘31:32; 호 2:2-5;3:1-5;9:1;마12:39).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성도에게는 세상과 하나님이라는 두 가지 관심의 대상이 있으며 참된 믿음의 가치는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표준에 따라 천상적인 것을 선택하는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5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이 말씀은 구약 속에 나타난 질투하시는 하나님과 일치한다(출 20:5). 여기에서 성령이 시기하는 대상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인 정욕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거룩한 생활에 전력해야 한다(고전3:16,17)
4:6-10 참된 겸손) 인생의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치료법이 상술되어 있다. 그것은 ① 겸손해지는 것 ② 마귀를 대적하는 것 ③ 회개를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앞에서 언급된 지혜로운 자가 취하는 행동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은 인간적인 지혜의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지혜의 부족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본문을 읽고 위 내용을 추가로 읽으니 더 이해가 잘 되네요. 감사합니다 ㅎㅎ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한 마음으로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네, 좋은 댓글과 공감에 감사합니다.
<IVP 성경주석: 서신서>, 약4:7-10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회개의 핵심은 행하던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귀를 대적하라. 마귀는 시험 혹은 유혹의 궁극적인 근원이다(마 4:1-11; 막 8:28-34; 눅 22:31; 요13:2, 27). 그래서 소욕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은 마귀에게 저항하는 것이다. 저항을 받으면, 마귀는 도망친다. 마귀가 재앙을 가져다 주겠다고 위협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전부 거짓말이다. 오직 마귀의 말을 믿을 때만 마귀는 힘을 갖는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이 말씀은 말라기 3:7과 스가랴 1:3처럼 들린다. 이 묘사는 성전에 희생 제물을 바치려고 와서 제사 의식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에 대한모습이다.
'손을 깨끗이 하라.' 이것은 죄악된 행습을 제거하는 것을 보여 주는 구약적인 또 하나의 그림이다(출 30:19-21).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정화(淨化)는 구약에 언급되어 있다(출 19:10). 그러나 여기서의 정화는 마음을 순전하게 만드는 일이다.
'두 마음을 품은 자'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고자 하는 사람이다(1:8을 보라
마음을 순전하게 정화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헌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에는 자기의 죄악된 상태에 대한 애도가 수반되어야 한다. 회개는 죄에 대한 슬픔과 죄로부터 돌아섬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기 죄 때문에 일어난 피해에 대한 변상으로 구성된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회개하라는 자신의 요청에 약속들을 포함시킨다.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주께서높이시리라.‘ 하나님은 겸비하게 낮음이 애통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 회개를 받아들이시고 사랑으로 응답해 주사, 그 사람을 애통하는 자 분리에서 일으켜 그분의 사랑의 따스한 가운데 올려 주실 것이다.
잘 읽고 공부가 됩니다.
@장코뱅 종합적으로 잘 설명이 되어 있어서 추가적 도움을 얻습니다.
<베이커 성경: 신약편>, 약4:4-10
회개하라는 명령(4:4~10), 야고보는 놀랍게 어조를 바꾸어, 자신이 관례적으로 쓰던“나의 형제자매들"이라는 말을 버리고, 독자들을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부른다. 이 변화는 초점이 바뀐다는 표시다. 야고보는 지금까지 시기의 죄와 그 결과로 생긴 다툼에 대해 분석했다. 이제 야고보는 그 죄에서 철저히 떠날 것을 요구한다. 헬라어에서, “간음한 백성"(개역개정에는 “간음한 여인" -옮긴이)은 여성형이다. 야고보는 구약의 전통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자신의 택하신 사랑을 통해 생겨나게 하신 친밀한 영적 연합 가운데 있는 "여호와의 신부'로 묘사된다(사 54:1~6; 렘 2:2; 그리고 특히 호 1:1~3:5를 보라). 그렇다면 세상과 시시덕거리는 것은 여호와께 대해 영적 간음의 죄를짓는 것이다(4:4). 5절 해석에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이런 배경이다. 많은 역본들(NIV 1984, HCSB, NET, NLT)은 성경의 인용문을 시기하기 좋아하는 인간 정신의 경향에 대한 경고로 본다.
이런 해석에 대해서는 상당히 타당한 이유가 있다. 야고보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시기' 또는 '질투'라는 말은 다른 곳에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다. 하지만 전후 문맥을 보면, 야고보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에 관한 구약의 가르침을 언급하고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NIV, ESV, NRSV를 보라).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참고, 출 20:5; 34:14; 슥 8:2)는 것이다.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는 우리의 경향(4:4)은 너무 심각하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이다(4:5).
하지만 하나님의 요구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인 반면, 하나님의 은혜는 그 필요를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다. 잠언 3장 34절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약속한다(4:6).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4:7) 해야 하며 “주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4:10)어야 한다. 이 명령들은 7~9절에 나오는 세 쌍의 명령을 형성한다. 첫째,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각각에는 약속이 수반된다. 마귀는 피할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하실 것이다
(또한 벧전 5:5~9를 보라. 이것은 약 4:6~10과 유사한 점이 매우 많다). 둘째, 구약 제사장들처럼, 우리는 “손을 깨끗이”해야 한다. 외적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그런 죄를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적 태도 역시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 즉 우리 마음이 순결하게 되어야 한다. 셋째, 구약 선지자들의 말을 사용해(욜 2:12를 보라), 야고보는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죄에 대해 깊고 진지하게 애통하라고 명한다(4:9). 참된 기독교적 기쁨은 죄를 무시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경험하는 것에서 온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죄에서 참으로 돌아서고 용서를 찾으려면, 우리 죄의 심각한 결과들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도 비슷하게 “애통하는 자"(5:4)에게 복을 선포하셨으며,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라고 경고하셨다.
@장코뱅 회개를 강조하는 것이 위 묵상의 내용과 큰 그림의 중심이 깉은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부족함과 아쉬움이 많은 인생들은 주님을 바라며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받을 줄 믿고 감사함으로 구하는 자들이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믿고 의심하거나,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거나, 회개하지 않은 채 더럽게 살면서 응답을 받을 줄 안다면 오산이라는 것을 야고보서가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를 야고보서가 계속 지적하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용기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이랬다 저랬다, 이럴까 저럴까 하며 망설이거나 눈치 보며 어중간하게 처신하는 것은 인정을 못받고 오히려 악하다고 판결하시는 것 같습니다.
믿음의 결단을 요청하는 좋은 묵상입니다. 감사합니다.
길고 풍성한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좋은 댓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깊은묵상의 글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
정직하고 겸손하게 하소서.. 늘 나를 돌아보아 회개하게 하소서.
아멘 🙏. 공감과 댓글 감사합니다. 힘찬 한주의 시작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