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놀드 쇤베르크(1874~1951)는 스트라빈스키와 더불어 20세기 음악에 새로운 지평을 연 20세기 최대의 작곡가다. 르네상스 이후 수백년 동안 서양음악을 지배해온 조성 체계를 부정하고 '12음 기법'이라는 새로운 작곡법을 창시해 전후 음악의 전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음악이 처음 연주됐을 때 언론들은 '그것도 음악이냐'며 조롱 섞인 비판과 냉대를 보냈다. 또 과거의 음악에 익숙해 있던 청중들이 거칠게 반발해 연주회장에 경찰까지 출동하는 대소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작곡가로서의 그의 인생은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것이었고 그의 나이 70세가 넘어서야 국제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1950년대에 들어서는 다른 작곡가들이 다투어 그의 12음 기법을 사용할 정도로 그의 음악은 한동안 서양음악사의 지배적인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빈의 가난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쇤베르크는 8세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9세 때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위한 습작을 작곡할 만큼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보였다. 그러나 15세 되던 해 부친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생계를 위해 은행원으로 일해야 했다. 우연히 알게 된 작곡가 겸 지휘자 폰 쳄린스키에게 불과 몇 달 동안 대위법을 배운 것이 그가 받은 유일한 정식 음악교육이었다. 그는 나머지 기간 동안 독학으로 작곡을 마스터했다.
쇤 베르크의 창작 활동은 후기 낭만파 어법의 시기, 무조 음악의 시기(1906~1920), 12음 기법 시기로 나뉜다.
젊은 시절 후기 낭만파의 거장 바그네 심취했던 쇤베르크는 25세 때 작곡한 바그너 풍의 '정화된 밤'을 끝으로 조성과 결별한다. 꽉 짜여진 틀의 조성 음악이 주관적인 내면세계를 표출하려는 그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 유럽은 독일을 중심으로 작가의 내면에 담겨 있는 것을 중시하고 이를 표현하려는 표현주의 예술사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 표현주의의 거장 칸딘스키와 절친한 사이였고 자신 또한 화가로 활동했던 쇤베르크는 표현주의를 자신의 음악에 도입하고 싶어했다.
이때부터 그는 이른바 '무조 음악'을 향한 발걸음을 시작했고 현악 4중주 2번(1908), 인성과 관현악을 위한 모노드라마 '기대'(1909)에 이어 '달에 홀린 피에로'(1912) 등 그의 대표작을 내놓았다. 감정을 이완시키는 요소 없이 긴장을 강요하는 불협화음이 연속되거나, 노래하는 것도 아니고 말하는 것도 아닌 외치는 듯한 독특한 창법으로 곡이 청중들의 냉대를 받은 것은 물론이다.
무조 음악이란 말 그대로 '조가 없는 음악'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C장조라고 할 때 이는 곡이 C음으로 시작해 D음으로 끝나고 C음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무조 음악은 조가 없기 때문에 중심음이 없고 모든 음들이 평등한 중요성을 갖게 되며 따라서 기존의 화음 체계에 묶여 제약을 받던 불협화음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2음 기법이란 무조에서 효과적인 통일을 위해 그가 창안해낸 것으로 종래의 7음 체계에서 벗어나 한 옥타브 안의 12개 반음(피아노 건반 위에서 보자면 도레미파솔라시 등 7개의 흰건반과 5개의 검은 건반)에 모두 똑같은 중요성을 두고 이를 재배열시켜 음열을 만든 뒤 이를 토대로 음악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작곡가 베베른 베르크가 그의 12음 기법을 따랐고 후세의 음악학자들은 이들을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으로 이어진 빈악파의 전통에 비유해 '제2 빈악파'로 불렀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쇤베르크는 작곡 활동과 함께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남은 생애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다 1951년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미완성 오페라 '모세와 아론'이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전보를 전보를 받고 11일 뒤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