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24-35 |
그때에 24 군중은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3 절을 보면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온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을 카파르나움으로 배를 태워 보내셨고, 당신은 혼자 산으로 가셨고(15 절), 그 사이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고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합류하기 위해서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간다.
이런 사건들이 있은 후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 노력한다. 티베리아스에서 사람들이 온 것으로 보아 그곳으로 예수님이 가시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것이라고 짐작하고서 배들을 타고 카파르나움으로 향한다.
군중은 빵의 기적 후에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었다.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예수님을 찾아간 것은 아직도 그런 의도가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호수 건너편’은 카파르나움이다.
군중은 카파르나눔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놀라서 묻는다. 그들은 제자들만 배를 타고 떠난 것을 알고 있었고, 아마도 예수님은 걸어서 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카파르나움에 이미 도착해 있음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라는 질문은 ‘어떻게’ 오셨느냐고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가셨다는 것을 그들이 모르고 있음을 나타낸다.
‘라삐’는 스승으로 번역되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뭔가를 듣고 배우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이 호칭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던 태도와는 맞지 않는다. 그것은 앞으로 나올 예수님의 가르침을 암시하는 호칭일 것이다.
어쨌든 사람들은 빵을 먹이신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메시아 이심을 깨닫기 보다 물질적인 빵에 흥미를 더 가졌다. 인간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만족을 위하는 때가 많다. 그것은 우리가 영원한 것을 추구하지 않고 세상적이고 지나가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그런 것들은 우리를 진정한 믿음으로 이끌어 주지 못한다. |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진실로, 진실로’는 이제부터 하려는 말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원문으로는 ‘아멘, 아멘’이다. ‘아멘’이라는 말은 기도의 끝에 붙일 때에는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이 되고,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의 앞에 붙이면 그 말의 참됨을 강조하는 뜻이 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기적의 뜻을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기적에서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적은 빵의 기적이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제자들만 본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못 보았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기적의 뜻을 깨닫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아직도 빵의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동시에 그 기적을 행하신 분에 대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빵의 기적이 분명히 놀라운 기적이라는 것은 인정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적의 외적인 현상만 체험했을 뿐 기적의 참뜻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빵의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빵도 사실은 썩어 없어질 빵이다. 예수님은 썩어 없어질 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빵을 추구하라고 권고하신다. 여기서 ‘힘쓰다’ 라는 말은 ‘일함으로써 얻다’, 즉 추구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썩어 없어질 양식’은 현세적인, 지상적인 양식이다.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천상의 양식이고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 양식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양식은 생명의 양식으로 지속적인 효과를 내기에 더 이상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는 양식이다.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주시는 양식이다.
‘사람의 아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은 성체성사를 뜻하기도 하고, 예수님 자신을 뜻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신원보증을 하셨다는 뜻이다. ‘인정하다’ 라는 말의 원어는 ‘봉인하다, 날인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신원을 보증하는 확인 도장을 찍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은 ‘사람의 아들’이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구절의 말은 사람의 아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곧 하느님 아버지께서 신원보증을 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실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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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사람들은 ‘힘써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어떤 일들을 하라는 것으로 이해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의 대가로 많은 인간적 업적을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 자신의 행위이고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즉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알아듣고 찬미하고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하느님의 일이란 믿음의 생활, 신앙생활, 그리스도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노동을 통해서 노력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믿음에 의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물론 인간의 노력이 완전히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일 하나뿐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인간의 행동이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는 예수님이다.
하느님을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은 1) 하느님을 신앙하는 믿음이기에 하느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불신임하는 큰 죄가 된다.
2)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인간과 깊은 관계를 원하시며 하느님의 최고의 사랑을 보여 준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자이다.
3) 하느님을 자신의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것과 같이 믿음 생활을 하는 것 즉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하느님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이런 말들이 있다. ‘만일 전적으로 신앙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세상의 역사는 변화될 것이다.’, ‘ 작은 믿음은 영혼을 하늘로 가져가고, 큰 믿음은 하늘을 영혼에게 가져온다’ 라는 말이 있다. |
30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이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이 될 수 있는 기적을 요구한다. 여기서 ‘표징’이라는 말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놀라운 기적을 뜻하는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생각하고 요구하는 대로 신기한 기적이 있어야 믿겠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들은 이미 빵의 기적을 체험했고 그것을 기적으로 인정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기적만으로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그들은 예수님께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라는 확실한 근거, 눈으로 볼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이런 요구에 응하지 않으시고 거절하셨다. 그리고 늘 이미 보여준 표징을 보고 깨달으라고 하신다.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을 나타내는 말이다. 28 절에서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반대로 예수님께 무슨 일을 하겠느냐고 묻고 있다. 즉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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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이 먹은 ‘만나’와 같은 증거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인용된 구약성경은 시편 78장 24절. 느헤미야 9장 15절 등에서 인용한 것인데, 본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재해석을 하여 인용한 것이다.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이 먹는 기적도 그들이 눈에는 별로 놀라운 기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지금 그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 즉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하는 기적을 요구하고 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 시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31 절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을 새롭게 해석하여 설명하신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이집트에서 백성들을 해방시킨 해방자, 또 굶주리는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준 구원자로 여겼다. 그리고 자기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도 모세처럼 ‘만나’를 먹게 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가 ‘만나’를 주신다고 하심으로써 자신이 모세를 능가하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셨다.’ 라는 과거형이 아니라 ‘주신다.’ 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메시아 시대가 지금 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주시는 빵은 ‘참된 빵’이다. ‘참된 빵’ 이란 하느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진정한 빵이라는 뜻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 ‘참된 빵’ 인 이유는 ‘세상에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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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이 구절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 이 왜 ‘참된 빵’ 인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빵’ 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이다. 즉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온 세상, 즉 인류 전체를 위해 내주신다. 그래서 그 빵은 하느님의 참된 빵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이 말씀을 어떤 사물을 나타내는 말로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구절에서 ‘빵’ 을 가리켜 ‘영성’ 과 ‘영원성’과 ‘생명성’ 과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강조한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기에 지역적인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이 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여기서 ‘선생님’ 으로 번역된 말의 원문 단어는 ‘주님’ 이다. 그러나 이 말은 4 장 15 절에서처럼 그냥 단순한 존칭이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참된 빵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떤 기적적인 빵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자들’임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32-33 절에서 말했던 ‘ 하느님의 빵, 참된 빵이 바로 당신 자신임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이 말씀 안에는 신앙행위는 실질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믿음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다. 우리가 음식을 먹음으로써 우리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처럼, 믿음으로 우리의 영적인 굶주림이 해결된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믿음으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게 해야 한다.
예수님에 대한 이론만 알고 그분을 모시지 않으면 큰 곡식 창고 문 앞에서 굶어 죽는 것과 같다. 그리고 우리가 음식을 계속 먹듯이, 예수님을 믿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작년에 먹은 음식이 올해까지 나의 굶주림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시며 동시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주님은 주시는 자이시며, 또 주시는 선물 자체도 되신다. 당신이 대제사장인 동시에, 자신이 제물이 되신 분이시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그분의 속죄 제의 효과를 받아 누리며 그분과 일치될 수 있도록 밀접하게 연결된다.
‘나에게 오는 사람’ 과 ‘나를 믿는 사람’ 은 같은 말이다.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은’ 것은 구원을 뜻하는 구약성경의 표현이다.
35 절의 뜻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께로 와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